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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하트의 수호자
“요르문간드는 굳이 콕 집어서 탄생을 찾으라고 했단 말이지.”
탄생은 좋은 완드다.
어떤 마법사라도 탐을 낼 만한 최고급 재료로 만들어진 완드.
그러나 나는 단언할 수 있었다.
내 아티팩트 중, 탄생은 굉장히 평범한 축에 속한다.
“왜 하필 탄생이었을까.”
다른 아티팩트도 있었다.
하지만 요르문간드는 탄생을 지목했다.
“요르문간드 아저씨가 이유는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르문간드는 자세한 이야기를 피했다.
하지만 요르문간드가 말한 것이니, 뭔가 이유가 있을 텐데.
“어쩌면 네가 탄생을 태워 먹을 걸 예견했을 수도 있겠다.”
“큼, 그건 아닐 거예요. 탄생은 스승님께서 요르문간드 아저씨를 만나기도 전에 태워 먹었는걸요.”
“자랑이다. 이 화상아.”
탄생이 있었다면 전력에 꽤 도움이 됐을 거다.
단기간 안에 쉽고 빠르게 강해지는 데에는 아티팩트가 최고였으니까.
발레리아가 작은 목소리로 우물거리며 변명했다.
“그래서 검도 드렸잖아요.”
“그건 수업료지.”
“무슨 수업료가 그렇게 비싸요?”
“내 수업료가 그렇게 비싸다.”
발레리아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내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 저택 한 채를 바친 귀족도 있었으니까.
내가 발레리아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수업료로 뜯어내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게 제자 할인까지 들어간 가격이야.”
“수업 몇 번 더 하시면 저희 아카데미 파산하겠네요.”
나는 화분을 툭툭 쳤다.
“아무튼. 요르문간드는 이것 때문에 탄생을 찾으라고 했던 것 같단 말이지.”
탄생의 잔해에서 발견된 정체불명의 ‘씨앗’.
어쩌면 요르문간드는 탄생을 찾으라 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탄생 안에 숨겨진 씨앗을 찾으라고 한 것일 수도 있었다.
발레리아는 침음을 흘렸다.
“무슨 씨앗인지 아시겠어요?”
“모르겠어.”
“스승님이 모르는 것도 있어요?”
“거의 없다만, 있긴 하지.”
마법과 일절 관련 없는 것은 확실했다.
영약이나 연금술의 재료도 아니었다.
“짐작 가는 게 없는 건 아닌데.”
만약 내 짐작이 맞다면.
이 씨앗은 내가 가지고 있어선 안 되는 물건이었다.
“확실하진 않으니, 태초의 숲으로 가서 물어볼 생각이다.”
‘탄생’은 내가 만든 아티팩트가 아니었다.
태초의 숲에 사는 오랜 벗에게 선물로 받은 것이었다.
직접 만든 것이라고 했으니, 아마 씨앗의 정체도 알고 있겠지.
“그거 확인하러 가시는 건가요?”
“아니. 겸사겸사 볼일도 있어.”
가는 길에 기연을 몇 가지 회수할 예정이었다.
자이언트 골드에게 전부 꼬라박는 바람에, 자금도 부족했다.
기연 회수는 필수 불가결한 사항이었다.
“가급적이면 빨리 출발하려고.”
“언제요?”
“네르갈의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팔베르크 제국의 서대륙 통일 계획.
나는 놈들의 계획을 전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아는 게 다가 아니었다.
“제국이 가짜 유언장이나 광전사 같은 변수를 준비했을 줄은 몰랐거든.”
지금의 제국에는 나, 델 로안이 없다.
어찌 보면 계획이 수정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황제의 성격대로라면 끊임없이 승부수를 던질 거고.
“나는 약해.”
두 개의 마나 서클과 소드 러너급의 오러.
나는 아직 약했다.
왕성에서 광전사를 상대할 때,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발레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만약 얘가 전력으로 나를 죽이려고 든다면, 몇 분도 못 버티고 죽겠지.’
내 상대는 제국이었다.
발레리아와 같은 강자를 여럿 보유하고 있는, 서대륙 최강의 국가.
언제까지 이런 애매한 힘으로 상대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힘을 끌어 올려야겠어.”
내 근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와 눈이 마주친 발레리아는 헤실헤실 웃었다.
* * *
“도련님! 괜찮으신가요?”
마리나는 호들갑을 떨며 나를 살폈다.
왕성 파티가 시작한 후로, 줄곧 바쁘게 뛰어다녔던 나다.
가문의 사람들에게 얼굴을 비출 겨를이 없었다.
왕성의 사건 때문인지, 마리나는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괜찮아.”
“정말 다친 곳은 없으신 거죠?”
“멀쩡해. 내 몸 하나 지킬 힘 정도는 있거든.”
내가 너스레를 떨자, 마리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태껏 어디 계셨던 거예요?”
“간단한 조사 좀 받다가 왔지.”
갑자기 발생한 집단 광폭화.
왕가는 왕성 파티에 있었던 인물들을 모조리 조사하고 있었다.
밤사이에 보호를 명목으로 조사를 받은 귀족은 적지 않았다.
‘제국이 꼬투리를 잡히진 않겠지만.’
증거를 남겼을 리도 없다.
이번 일에 연루된 제국의 인물은 전부 죽었다.
벨기안 네이스마저 사망했으니.
도리어 제국 측에서 이것을 빌미로 왕국을 압박할 수도 있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내가 감이 좀 좋잖아. 낌새가 이상해서 냅다 도망쳤지.”
“그렇군요.”
단은 내 말을 별로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부하라는 놈이 이렇게 신뢰가 없어서야.
나는 단에게 물었다.
“지금 몇 시냐?”
“약속이라도 있으십니까?”
“그건 아니고, 곧 왕가에서 공식 성명을 발표한다길래.”
이번 사건은 어물쩍 넘어갈 만한 규모의 일이 아니었다.
왕국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네르갈.
가장 안전해야 할 왕성에서 사건이 터진 것이다.
사상자도 꽤 발생했고, 국왕까지 죽을 위기를 겪었다.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라도, 공식 성명은 필요했다.
“따르겠습니다.”
“저도 따라갈게요!”
마리나와 단은 나를 수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어차피 멀찌감치 국왕의 대처만 지켜볼 생각이었다.
직접 나설 일은 없을 것 같으니, 상관없겠지.
“그래.”
나는 마리나와 단과 함께 왕성으로 향했다.
왕성 앞은 성명을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굳이 가까이 가지 않아도, 증폭 마법을 쓸 테니 전부 들을 수 있을 텐데.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끼익.
곧 국왕 파서벌 레온하트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로 왕비와 왕자들이 보였다.
다행히 모두 멀쩡했다.
그럼 국왕의 위기 대처 능력 좀 볼까.
기껏 살려 놨는데, 이것도 수습 못 한다면 크게 실망할 것이다.
파서벌 레온하트가 입을 열었다.
“흠.”
온갖 미사여구로 말을 꾸미는 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일목요연했다.
왕성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했다.
현재 사건의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사건의 주동자는 절대 용서치 않을 것이다.
사상자에게는 유감을 표한다.
‘나쁘지 않네.’
마지막으로, 국왕은 참사를 막은 영웅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한 무리의 귀족들이 국왕 앞에 서서 예의를 표했다.
어젯밤, 홀에서 고군분투하던 사람들이었다.
개중에는 방패 근위기사와 파울 레드라인도 있었다.
공훈 표창은 심각한 분위기를 전환하기 좋은 수였다.
“……그리고, 파울 레드라인.”
파울의 이름이 호명되었을 때.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저 망나니가……?”
“검은 잘 다루잖아.”
“하긴.”
파울은 영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렇게 파울을 마지막으로 표창도 끝나는가 싶었는데.
“마지막으로.”
국왕은 왕성 앞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짐의 목숨을 구한 레온하트의 수호자에게 감사를 표하겠네.”
민간인들뿐만 아니라, 귀족들까지 놀란 눈치였다.
마리나가 중얼거렸다.
“레온하트의 수호자? 동화 속에 나오는 그거요?”
“저도 들었습니다. 왕성에 하얀 가면을 쓴 수호자가 나타났다고.”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눌렀다.
‘……가면은 더 이상 제 역할을 못 할 것 같군.’
머리가 지끈거렸다.
빨리 서클을 올려서 일루전(Illusion)을 쓰든가 해야지.
“와아아아아!”
사람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나는 대부분의 귀족이 홀에서 빠져나간 후에야 사건에 개입했다.
몸 크기가 커 눈에 띄기 쉬운 자이언트 골드라면 모를까.
직접 나를 본 사람은 매우 적었다.
국왕과 근위대, 그리고 파울을 비롯한 몇몇 귀족들 뿐.
그렇기에 내 존재는 신기루나 허상처럼 희미하고 불확실했다.
‘가만. 이것도 나쁘지 않은데.’
레온하트의 국왕이 직접 나서서, 수호자가 존재한다고 공인했다.
국왕의 목숨을 구한 구국 영웅.
전설 속에서 익히 듣던 인물이 실제로 등장한 것이었다.
민심을 사로잡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재였다.
‘제국 견제에도 도움이 되겠어.’
발레리아에게 제국의 계획을 어느 정도 일러둔 상태다.
하지만 불안한 감이 있었다.
발레리아는 워낙 치밀함과 거리가 먼 성격이었으니까.
‘정확한 무력도, 정체도 밝혀지지 않은 신기루 같은 인물.’
제국 입장에서 볼 때, 레온하트의 수호자는 신원이 불분명한 변수다.
존재의 유무조차 정확히 알 수 없다.
적어도 지금보단 소극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묘수로군.’
나는 조만간 레온하트를 떠날 예정이었다.
하지만 레온하트의 수호자는 여기에 남을 것이다.
일종의 허수아비였다.
실제로는 없지만, 제국이 그것을 확인할 수 없을 테니까.
“정말 레온하트의 수호자가 있을까?”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격자도 여럿 있으니까요.”
“음, 모르겠어요. 제가 어렸을 때 들었던 레온하트의 수호자는 하얀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거든요.”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없다고 믿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가 딱 좋았다.
나는 국왕에 대한 평가를 한 단계 올렸다.
‘마음 놓고 움직여도 되겠어.’
자리를 벗어나려는 순간.
나는 목덜미의 털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온몸이 저릿했다.
양어깨에 무거운 바위를 올려놓은 듯한 압박감이었다.
“……이건.”
살기.
누군가 나를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숨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왜 그러세요?”
“누구 찾으시는 분이라도 있으십니까?”
마리나와 단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했다.
말인즉슨, 상당히 정제된 살기라는 것.
파울 레드라인에게서 느꼈던 어리숙한 그것이 아니었다.
‘누구지?’
암살자라면 살기를 감췄을 것이다.
내게 살기를 쏘아내고 있다고 보는 게 맞았다.
‘제국? 다른 세력?’
살기의 근원지는 찾을 수 없었다.
사람이 너무 많았다.
살기의 밀도가 점점 짙어졌다.
웬만한 사람은 정신을 놓았을 것이다.
‘자칫하면 죽겠군.’
머리가 내린 판단은 냉정했다.
살기의 주인이 나를 마음먹고 죽이려고 든다면, 나는 죽는다.
내가 아무리 발악해 봤자 소용없었다.
지금의 나와 살기의 주인 사이에는 그 정도의 격차가 존재했다.
‘뜬금없이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살기만 드러내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마리나와 단에게 말했다.
“먼저 돌아가라.”
“예?”
“나를 찾는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잠깐 얼굴 좀 보고 오려고.”
왕성의 사건 때문에 묻힌 감이 있었지만, 지그문트 마이어는 주목받고 있었다.
파울 레드라인과의 결투에서 승리를 거머쥔 청년.
망나니 파울 레드라인은 검의 귀재다.
성격이 개차반이긴 했지만, 그 재능만큼은 진짜였다.
차기 소드 마스터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니 말 다 했다.
그런데 돌연 나타난 동년배의 귀족 자제가 파울 레드라인을 꺾은 것이다.
검을 다룬다는 사람은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승리를 거머쥔 방식이 몹시 인상적이었다.
‘검을 부수는 검을 부쉈다.’
파울 레드라인을, 레드라인의 방식으로 꺾은 것이다.
그저 운이 좋았다는 소문도 돌았다.
헛소리였다.
파울 레드라인은 운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요하네스 레드라인 후작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흠.”
집무실.
요하네스 레드라인 후작은 다리를 꼬았다.
파울은 1천 년에 한 번 나올 법한 재능을 타고났다.
그러나 수련을 게을리 하고, 술과 도박에 빠져 살았다.
오만했으며, 검만 들면 흥분하는 경향이 있었다.
“파울의 패배는 예정되어 있었다.”
나태와 오만함은 도태로 이어진다.
요하네스 레드라인은 파울의 패배를 예상했고,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파울은 패배를 계기로 성장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실제로 지그문트에게 패배한 파울은 바뀌었다.
술뿐만 아니라, 도박과 약에도 일절 손을 대지 않았다.
종종 이를 갈며 수련을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상대가 예상 밖이로군.”
지그문트 마이어.
얼간이라고 불리던, 마이어 남작가의 장남이었다.
“그 녀석이 레드라인의 검술을 사용했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확실합니다.”
‘처형식’에서 입회인을 섰던 가신 기사의 증언이 있었다.
마지막 합에서, 지그문트 마이어는 레드라인가의 검술을 사용했다.
“만약 결투 한 번으로 검술을 훔쳐 낸 것이 사실이라면.”
지그문트의 오러 수준은 소드 러너.
동년배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정도였다.
힘 또한 파울에게 압도적으로 밀린다고 했다.
“약점을 전부 상쇄할 만한 재능이겠군.”
단순히 검을 부딪친 것만으로도 그 검을 훔쳐 낸다.
적어도 요하네스 레드라인의 상식 안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검술은 동작의 연속이 아니다.
보고 따라 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어설픈 흉내에 불과했다.
지그문트 마이어는 파울의 검을 부쉈다.
레드라인의 검술을 흉내 낸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다룬 것이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레드라인 후작이 눈을 돌렸다.
시선의 끝에는, 라스 마이어 남작이 앉아 있었다.
* * *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은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다.
절망을 견디지 못하고 삶을 포기하거나, 생존을 위해서 이기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요하네스 레드라인 후작은 사람을 시험할 때, 살기를 흘렸다.
죽음을 목전에 들이미는 것이다.
‘보통 놈은 아니야.’
왕성 앞.
지그문트 마이어는 평소와 같이 행동했다.
살기의 근원을 찾는 듯 주위를 둘러보긴 했다.
그것 이외에는 일말의 동요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움직임은 여유로웠으며, 목소리 또한 떨리지 않았다.
‘어떻게 저럴 수 있는지.’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을 알기에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모르기에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지그문트 마이어의 눈에서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죽음을 경험해 본 적 있는 사람 같군.’
지그문트는 시녀와 기사들 돌려보냈다.
그리고 태연하게 인파 속을 빠져나갔다.
공포에 질려 정신을 놓은 사람의 반응은 절대 아니었다.
요하네스는 조용히 지그문트를 따라갔다.
“후.”
지그문트는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에서 멈췄다.
살기의 주인을 특정하려는 듯했다.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하에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살기의 방향을 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살기를 수없이 느낀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
스무 살짜리 애송이가 그런 경험을 했을 리 없었다.
“당신이 저를 죽이고자 한다면, 언제든지 죽일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도, 지그문트는 요하네스가 숨은 곳을 직시했다.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지그문트는 대범하게 말까지 걸어왔다.
모른 척하는 것도 방법이었을 텐데.
“하지만 지금까지 죽이지 않은 걸 보면, 살기를 흘린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거겠지요.”
정확히 짚었다.
요하네스는 작게 감탄했다.
지그문트는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요하네스 레드라인 후작님.”
* * *
골목 어귀에서 요하네스 레드라인 후작이 걸어 나왔다.
“어떻게 알았나?”
“제가 감이 좀 좋습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소거법이었다.
네르갈에서 이 정도 살기를 흘릴 수 있는 인물은 많지 않다.
나를 죽이지 않았으니 제국은 배제하고.
다른 세력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나는 아직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지 않았다.
내게 살기를 흘릴 만한 접점을 가진 강자는 극소수.
그중에서도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요하네스 레드라인 후작이었다.
“인상적이군.”
“칭찬 감사합니다.”
나는 신중히 말을 골랐다.
레드라인 후작의 심기를 거스를 필요는 없었다.
“그래. 내 망나니 아들놈을 이겼다지?”
“운이 좋았습니다.”
역시, 파울 레드라인과의 결투에서 승리한 것이 문제였다.
제국의 계획을 막을 때 필요한 부분이었다.
처형식 때문에 주목을 사 버렸으니.
운이 좋다는 걸로 얼버무리는 건 한계가 있었다.
“검을 부수는 검이 부서졌다.”
레드라인 후작은 자신의 검을 매만졌다.
식은땀이 흘렀다.
시험하러 온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죽이지는 않겠지?
레드라인 후작의 속내는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었다.
“자네.”
레드라인 후작은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레드라인의 검술을 훔쳤나?”
“…….”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파울 레드라인의 성격상, 후작에게 일러바친 건 아닐 테고.
레드라인 후작이 결투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입회인이군.’
생각보다 입회인의 눈이 좋았던 모양이다.
검을 다루는 사람이라는 건 눈치챘지만.
레드라인 후작의 측근이었나.
“어설프게 따라했을 뿐입니다.”
“어설픈 검으로 레드라인의 검을 부쉈다는 뜻인가?”
“그건 아닙니다.”
파울과의 결투에서, 레드라인의 검술을 훔칠 생각은 없었다.
관객이라는 변수가 생기는 바람에 마법을 쓸 수 없게 됐다.
마법을 쓰지 않고 파울을 이길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을 뿐이다.
‘빌어먹을.’
요하네스 레드라인씩이나 되는 인물을 속이기도 힘들 거다.
설사 속인다고 해도, 그다음이 문제였다.
그가 적으로 돌아서는 것은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여기서 승부를 봐야 했다.
“……익혔습니다.”
요하네스 레드라인은 노련했다.
순순히 인정하는 것 말고는 수가 없었다.
그래도 요하네스는 파울처럼 막 나가는 인물이 아니었다.
신중하며, 애국심이 강했다.
왕성의 전력이 될 수도 있는 나를 죽일 확률은 낮았다.
“그렇군.”
레드라인 후작은 의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릉.
그가 허리에 매고 있던 검을 뽑았다.
살기가 터져 나왔다.
왕성 앞에서 느꼈던 것의 몇 배는 되는 것 같았다.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고양이 앞의 쥐가 딱 이런 기분일 것이다.
죽일 확률은 낮을 뿐.
결코 없는 건 아니었다.
‘지금 요하네스 레드라인이 나를 죽이려 든다면.’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죽는다.
발악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1분도 채 되지 않았다.
쿠구구구…….
불구대천의 원수를 앞에 둔 듯한 살기였다.
보이지 않는 힘이 온몸을 짓눌렀다.
저게, 진짜 ‘검을 부수는 검’.
어떤 검으로 공격해도, 모두 부서질 것만 같았다.
지금의 나는 레드라인 후작을 절대 이길 수 없다.
‘도망쳐야 한다.’
도망쳐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발레리아는 내 명령으로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
도움을 청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쓸 수 있는 수를 모두 사용한다고 해도, 이길 가능성은 0에 수렴했다.
‘과연, 레온하트 왕국의 최고 전력 중 하나다.’
레드라인 후작의 이마에 주름이 생겼다.
진득한 살기는 이제 눈에 보일 정도로 강해졌다.
평범한 사람이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일반인이라면 두려움에 미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정신을 바로잡고, 레드라인 후작을 마주 보았다.
‘고작. 레온하트 왕국의 최고 전력 중 하나다.’
나는 델 로안.
수백 년을 살며, 인간의 몸으로 9서클 마스터에 오른 대마법사.
비록 내가 지금 약하다고는 하나.
한낱 소드 마스터 따위에게 도망칠 수는 없었다.
아공간 주머니에서 검을 뽑았다.
“내게 맞서겠다는 겐가?”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입니다.”
머릿속으로 계산하는 것은 그만뒀다.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마나 서클을 회전시켰다.
검에 오러를 씌운 순간.
살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레드라인 후작은 양손을 살짝 들고 있었다.
마치 항복이라도 했다는 듯이.
“무섭군. 항복하겠네.”
“무서워 보이는 표정은 전혀 아니십니다만.”
레드라인 후작은 살짝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사실이라네. 여태껏 나를 물려고 달려드는 쥐는 없었거든.”
그가 검을 집어넣으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자네가 참 마음에 들어.”
“그렇군요. 저는 후작님이 저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젊은 사람이 뒤끝 있군. 잊게나.”
어디 가서 젊다는 소리를 들을 나이는 아닌데.
레드라인 후작은 내 전신을 훑어보았다.
“젊었을 적의 라스 마이어 놈과 똑 닮았단 말이야.”
“아버지를 아십니까?”
“잘 알지.”
의외였다.
라스 마이어는 변방에 영지를 둔 남작.
그리 영향력 있는 귀족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레온하트 왕국의 주요 귀족인 레드라인 후작과 아는 사이일 줄은 몰랐다.
“같이 검을 배운 동기라네.”
레드라인 후작은 그립다는 듯 검을 쓰다듬었다.
아무래도 단순한 동기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왜 저를 시험하신 겁니까? 그것도 이런 방법으로요.”
“그 싸가지 없는 성격까지 닮을 필요는 없는데 말이야.”
후작은 작게 투덜거리며 말을 이었다.
“레드라인의 검술을 쓰는 걸 허락해 주겠네.”
나는 뭔가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렇게 순순히 가문의 비전을 허락할 리가 없다.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흘렀다.
“대신, 내 밑에서 검을 배우게나.”
“그 말씀은…….”
“그래. 내 제자가 되라는 뜻이라네.”
많은 기사가 그에게 가르침을 청했지만, 거절당했다.
레드라인 후작은 혈육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 검술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내게 직접 검술을 가르쳐 주겠다고 한 것이다.
오래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대답했다.
“싫습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네. 그러면 바로 저택으로…… 음?”
요하네스 레드라인은 눈을 깜빡였다.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싫다고 했습니다.”
레드라인 후작의 제안은 매력적이었다.
지금의 나는 오러 수준을 끌어올릴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내가 준비한 모든 기연은 오러와 크게 관련 없는 것들이 대부분.
영초 중에는 신체 능력을 상승시키는 것도 더러 있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혹 라스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네. 이미 말을 해 놓았으니.”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그럼 뭐가 문제지?”
“제 육체 능력 때문입니다.”
“육체 능력?”
“보시다시피, 제 육체 능력은 형편없습니다.”
한 달에 걸친 신체 단련.
적절한 영약 복용.
그러나 지그문트의 나태한 20년을 메우기에는 부족했다.
마나 번을 이용해 강화하지 않은 내 육체 능력은 일반인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다.
단이나 파울과 검을 부딪칠 때, 힘에서 밀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검술을 가르침 받는다고 한들 몸이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레드라인의 검술, 검을 부수는 검은 상당한 육체 능력이 요구되는 검술이다.
지금의 내가 쓸 수 있는 건 파울이 휘두르는 기초적인 검술 정도.
그마저도 완전하지 않다.
“흠, 그렇겠지.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네.”
레드라인 후작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라스의 아들이라 그런지 골격이 좋아. 단련을 거친다면 충분히 좋아질 걸세.”
“그 단련은 얼마나 걸립니까?”
“5년이면 될 걸세. 내 밑에서 단련한다면 4년까지 줄일 수 있지.”
“너무 깁니다.”
꾸준한 운동과 단련으로 신체 능력을 상승시킨다.
지극히 정석적인 방법이었다.
‘4년이면 제국이 서대륙을 집어삼키고도 남는다.’
다른 사람도 아닌 소드 마스터, 레드라인 후작이 4년이라고 했다.
정석적인 방법으로 신체 능력을 단련하면 아무리 빨라야 4년이라는 거다.
‘정석을 따르기엔 내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부족해.’
단련과는 다른 방법으로 신체 능력을 상승시켜야 했다.
내가 걸어야 하는 길은 외도였다.
레드라인 후작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욕심을 부리는군. 급하게 쌓은 탑은 무너지는 법일세.”
“새겨듣겠습니다.”
후작의 제안은 아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서대륙을 돌아다니며 할 일이 많았다.
네르갈에 발을 묶일 수는 없다.
“한데 이상하군. 자네, 분명 소드 러너라고 했지?”
“예.”
“그렇다면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검을 잡았을 터. 어째서 육체 능력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레드라인 후작의 의문은 당연했다.
기사 가문의 자제들은 일찍 검을 잡는다.
루이스 마이어만 해도 다섯 살 때 검을 익히기 시작했다고 들었다.
그것이 일반적이었다.
“음.”
지그문트 마이어는 다른 기사 가문의 자제와 달랐다.
어렸을 때 검을 잡긴 했다.
그러나 소드 비기너의 극초입, 느껴지지도 않을 오러를 쌓은 뒤 검을 놓았다.
그 이후로는 수련은커녕 운동조차 한 번 안 했다.
신체 능력이 이 모양 이 꼴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레드라인 후작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잡아 보게.”
나는 손을 맞잡았다.
아마 굳은살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눈에 이채가 스쳤다.
“자네, 검을 잡은 지 얼마나 됐나?”
“한 달쯤 됐습니다.”
“허.”
후작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천재라고 생각했건만.”
그는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터무니없는 괴물이었군그래.”
레드라인 후작은 눈을 떴다.
단념한 눈은 아니었다.
오히려 흥미를 보였다.
“자네, 식사는 했나?”
나는 본능적으로 일이 귀찮아질 거라는 걸 직감했다.
“했습니다.”
“그러면 차를 마셔야겠군?”
“차도 마셨습니다.”
“한 잔 더 마시게.”
“…….”
* * *
레드라인가의 저택.
나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레드라인 후작은 시종일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신기한 동물을 구경하는 것 같았다.
“자네, 이제 보니 상당히 기품이 있군.”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나는 빈 찻잔을 내려놓았다.
레드라인 후작의 차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후작이 입을 열었다.
“고작 긴 단련 기간 때문에 내 가르침을 거절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네.”
“그렇습니다.”
“이유가 뭔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사실 단련하기도 싫은 것도 있었다.
“자네 말고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인가?”
“그렇습니다.”
“소드 마스터의 제자 자리를 걷어찰 만큼 중요하고?”
“……그렇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던 레드라인 후작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군. 존중해 주겠네.”
“감사합니다.”
“언제든지 생각이 바뀌면 나를 찾게.”
드디어 바라던 대답이 나왔다.
레드라인 후작은 파울 레드라인을 가르치는 데 집중하는 게 좋았다.
나는 내 방식대로 성장해야 했다.
“받게나.”
후작이 식탁에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나는 그것을 유심히 살폈다.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이게…… 뭡니까?”
“내단이라네. 동대륙의 영약이라고 하더군.”
“처음 듣는군요.”
동대륙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서책이나 물건 따위가 간간이 흘러들어오긴 하지만, 이런 건 처음이었다.
“동대륙의 검사에게 선물 받은 것일세.”
“이토록 귀한 걸 제게 주셔도 괜찮으십니까?”
“내 멋대로 자네를 시험한 것도 있고 해서, 미안한 마음에 주는 걸세. 그렇다고 너무 기대하진 말게나.”
레드라인 후작은 자신의 가슴을 툭툭 쳤다.
“내 하나 먹어 봤는데, 기껏해야 육체 능력 향상에 조금 도움이 되는 정도니.”
“……뭐 이런 걸 다.”
나는 넙죽 내단을 챙겼다.
두 번 사양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이런 거라도 줘야지 내 체면이 서지 않겠는가.”
“체면 말씀이십니까?”
“그래. 라스 놈이 나를 뭐라고 생각하겠나.”
레드라인 후작은 창밖을 보았다.
“그리고 망할 아들놈이 자네에게 가르침을 받기도 했으니.”
“저는 기억에 없는 일이군요.”
“아니. 자네 덕에 파울은 바뀌었다네.”
나는 레드라인 후작의 시선을 따라 창 너머를 보았다.
파울은 목검으로 연습용 허수아비를 두들겨 패고 있었다.
“죽어!”
어찌나 기합이 큰지, 창문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다.
파울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눈에는 광기가 가득했다.
쾅! 쾅!
이윽고 파울이 검을 멈췄을 때.
허수아비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누굴 생각하길래 저렇게 격하게 훈련을 할 수 있는 걸까? 적어도 나는 아니겠지.
“저놈 때문에 항상 골머리를 앓았는데, 요즘은 흐뭇해. 단련도 열심히 하고 말이야.”
저 광기를 보고 흐뭇함을 느낀다니.
상당히 거친 집안이었다.
제자 안 하길 잘한 것 같다.
“이제 끝난 모양이군. 이렇게 왔는데, 얼굴은 보고 갈 생각이겠지?”
“물론입니다.”
나는 씩 웃었다.
망나니 놀리러 갈 시간이다.
* * *
“후우…… 후우…….”
훈련을 마친 파울 레드라인은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이미 제 기능을 잃은 허수아비를 내려다보았다.
지그문트 마이어의 형상이 허수아비와 겹쳤다.
쿵!
파울은 목검으로 허수아비의 얼굴을 내리찍었다.
‘지그문트 마이어……!’
난생 처음 겪은 패배의 굴욕감.
그리고 금주로 인한 스트레스가 맞물렸다.
파울은 그 모든 감정을 지그문트에게 돌렸다.
모든 건 지그문트 마이어의 탓이다.
이름만 생각해도 이가 갈렸다.
지금도 놈의 얼굴이 멀리서 아른거릴 정도였다.
“어이.”
환상이 뻔뻔하게 말까지 걸어왔다.
파울은 눈을 비볐다.
진짜 지그문트 마이어였다.
파울의 얼굴이 도깨비처럼 일그러졌다.
“어이? 어이가 없군.”
파울은 검을 들었다.
“여긴 왜 왔지? 결투 신청인가?”
“내가 너랑 왜 싸우냐. 질 게 뻔한데.”
지그문트는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파울은 하늘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운 좋게 한 번 이긴 다음, 재결투를 피하다니!
다시 한번 결투를 한다면 이길 자신이 있었는데!
억울했다.
얄미웠다.
“정말…… 죽여 버리고 싶군.”
“근데 왜 안 죽이냐?”
지그문트는 파울을 살살 긁었다.
파울은 알아차렸다.
지그문트는 결투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네놈.”
파울은 숨겨 둔 수를 쓰기로 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 아닌가?”
왕성에서, 파울은 레온하트의 수호자를 목격했다.
하얀 가면을 쓴 백발의 남자.
다른 사람들은 그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파울은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지그문트 마이어라는 것을.
지그문트 마이어의 눈이 커졌다.
파울은 속으로 지그문트를 비웃었다.
“설마 발뺌할 셈인가?”
“아…….”
“소용없다. 나는 만천하에 네 정체를 밝힐 생각이니까 말이야.”
가면을 쓰고 머리색까지 바꾸며 정체를 감췄다.
뭔가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지그문트는 허를 찔렸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파울은 장갑을 던졌다.
“정체가 드러나기 싫다면, 나와 결투해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파울은 그렇게 생각했다.
장갑을 보던 지그문트는 대답했다.
“싫은데?”
* * *
파울의 짧은 여유가 깨졌다.
굳은 얼굴을 보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체가 들통났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파울이 내 정체를 빌미로 결투를 제안할 것이라는 것도 예상했다.
어려서 그런지, 사고가 단순한 건지.
할 행동이 참 뻔했다.
파울은 짐짓 험악한 얼굴로 나를 협박했다.
“정체가 드러나도 상관없나?”
“아니. 정체 드러나면 큰일 나는데.”
지금쯤 팔베르크 제국은 레온하트의 수호자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을 것이다.
“아마 죽지 않을까?”
“죽는 것보다는 결투 한 번이 나을 텐데.”
“결투는 어떻게 할 건데?”
“당연히 진검 결투다.”
“아, 너무 무섭다.”
나는 손을 모으고 어색하게 벌벌 떨었다.
내 연기에, 검을 쥔 파울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가증스러운 놈.”
“그래. 가증스러운 나는 결투 못 하겠다. 그냥 퍼트려라.”
“내 말이 빈말처럼 들리나?”
“빈말 맞지. 어차피 물증도 없잖아.”
물증은 없었다.
발레리아를 시켜 확인했으니, 확실할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너를 죽일 수도 있다.”
“너, 나 안 죽일 거잖아.”
파울 레드라인은 나를 결코 죽일 수 없다.
그가 원하는 것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나와 결투해 승리하는 것이었으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죽은 사람은 결투를 못 한다.
“영원한 패배자로 남을 생각이라면, 말리지 않을게.”
나는 보란 듯이 목을 내밀었다.
파울의 온몸이 분노로 떨리기 시작했다.
정말 나를 죽일 기세였다.
성질을 건드리려고 놀린 건데.
너무 얄미웠나?
좀 더 놀리고 싶었지만, 멈출 때였다.
“제안 하나 하지.”
“제안?”
나를 패고 싶어서 안달 난 파울에게, 미끼를 던졌다.
“이것만 받아들인다면, 결투. 까짓거 못 해 줄 것도 없고.”
“……뭐냐.”
안 물기에는 너무 맛있어 보이는 미끼였을 것이다.
파울은 최대한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
“간단한 일이야.”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흰색 가면을 꺼냈다.
“너, 레온하트의 수호자 해라.”
* * *
“나는 레온하트의 수호자다!”
“아니거든! 내가 레온하트의 수호자거든!”
하얀 가면을 쓴 아이들이 거리를 뛰어다녔다.
“아저씨! 가면 주세요!”
“저는 두 개요!”
아이들이 잔뜩 몰린 가판.
그 앞으로 등이 굽은 노인이 주춤주춤 다가왔다.
노인은 가판에 하얀 가면을 유심히 보더니 물었다.
“저, 이건 얼마나 합니까?”
나무로 만든 가면에 하얀 칠을 했을 뿐이지만, 꽤 품질이 괜찮았다.
함부로 사치품 같은 걸 살 형편이 안 되는 평민들은 조심스러워지기 마련이었다.
“우리 손주들이 꼭 사 달랬는디. 이걸로 살 수 있으려나 모르겄네…….”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동화를 한 움큼 내밀었다.
밀러 상단의 판매원이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많이 필요 없습니다. 동화 열 닢이면 됩니다.”
“하이고, 그것밖에 안 해요?”
동화 열 닢은 조금 비싼 빵 하나 가격이었다.
평민들에게도 크게 부담될 정도는 아니었다.
“예. 왕성 참사를 추모하는 마음에서, 건국제 기간에는 마진 없이 팔고 있습니다.”
“좋으신 분들이구먼. 좋으신 분들이야.”
노인은 가면을 두 개 사서 돌아갔다.
시몬 밀러는 노인의 등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설마, 이런 걸 생각해 낼 줄은 몰랐네.”
“하하…….”
밀러 상단은 신상품을 출시했다.
이른바 ‘레온하트의 수호자 가면’이었다.
나는 시몬의 도움을 받아 가면을 상품화시켰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사람들은 정체불명의 영웅에 열광했다.
“자네 덕분에 밀러 상단의 평판이 정말 좋아졌어.”
시몬은 기분이 좋다는 티를 팍팍 내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어색한 미소로 답했다.
“내 자네 지분은 꼭 챙겨 주겠네.”
“괜찮습니다. 계약은 계약이니까요.”
가면의 판매권은 완전히 밀러 상단에게 넘겼다.
대신, ‘건국제 기간에는 마진 없이 원가에 팔아 달라’고 했다.
평판도 좋아질 거라고 하자, 시몬 밀러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보상을 원하지 않는다니. 자네라는 사람은, 정말.”
시몬은 감격한 눈치였다.
내가 정말 레온하트를 위해서 이러는 줄 아는 것 같았다.
당연히 아니었다.
보상은 이미 받았다.
금전이 아닌 다른 형태로.
곧 제국의 공작원은 레온하트의 수호자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서 네르갈을 찾을 것이다.
‘그때쯤이면 네르갈에 사는 왕국민 절반이 이 가면 하나쯤은 가지고 있겠지.’
내 정체를 확실히 감추기 위한 수였다.
파울이 내 생각대로만 움직여 준다면, 나를 찾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나중에 있을 파울과의 재결투가 조금 걸리긴 했지만.
나는 하얀 가면을 쓰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씩 웃었다.
네르갈의 왕국민 대다수가 내 미끼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제국의 공작원이라도 수가 없을 것이다.
“흐흐.”
“음?”
“왜 그러십니까?”
“아니. 이상하군. 어쩐지 자네가 사악해 보여서 말이야.”
“기분 탓이겠지요.”
“하하! 그, 그렇지? 자네만큼 순수하게 나라를 걱정하는 귀족이 어딨겠나!”
시몬은 분위기를 누그러트리려는 듯 크게 웃었다.
나도 시몬을 따라 웃었다.
내가 생각해도 좀 사악한 것 같았다.
* * *
지정된 방에 돌아온 나는 새까만 고무공처럼 생긴 내단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먹을 수 있는 것과는 거리가 먼 생김새였다.
독이나 저주가 없다는 건 이미 확인을 마쳤다.
“효과가 신체 능력 상승이라니까.”
용의 눈물은 지금 당장 복용하긴 힘들었다.
저주를 해주해야 했는데, 그 재료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발레리아에게 부탁해 놓았지만 여간해서는 찾기 힘들 것이다.
당장 기대할 수 있는 건 이 내단뿐이었다.
‘레드라인 후작은 기대하지 말라고 했지만.’
요하네스 레드라인은 소드 마스터다.
과거에 내단을 받았다고 가정해도, 지금의 나보단 한참 높은 경지였을 것이다.
효과를 체감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조금 기대가 되는 건 어쩔 수 없군.’
나는 고민했다.
영약도 어쨌든 약의 일종이었다.
그냥 날름 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복용하는 순서나 방법이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레드라인 후작에게 내단의 복용법을 물었다.
후작은 이렇게 말했다.
-선물해 준 이가 말하길, 먹은 후 오러를 운용하라고 하더군. 하나 그럴 필요는 없을 걸세.
-왜죠?
-오러에 영향을 끼치는 종류의 영약이 아닌 것 같거든. 아마 그냥 먹고 쉬면 될 거야.
레드라인 후작의 말은 틀렸다.
먹은 후 오러를 운용하라고 했으면,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조용한 방.
나는 손바닥에 올려놓았던 내단을 입에 쏙 넣었다.
“윽.”
말로는 형용하기 힘든 맛이었다.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쓰다는 말도 있지만, 이건 좀 아니었다.
영약은 대체로 맛이 이상했다.
적어도 전생에 내가 먹어 본 것 중에 정상적인 맛이 났던 영약은 용의 눈물밖에 없었다.
나는 내단을 씹었다.
차가운 신맛과 뜨겁고 담백한 맛이 섞였다.
적절한 비유가 떠올랐다.
‘이건, 그래. 파인애플을 올린 피자가 있다면 이런 맛이겠군.’
물론 이 세상에 그런 끔찍한 음식이 있을 리 없지만 말이다.
가까스로 내단을 삼켰다.
목구멍을 타고 뜨거운 것이 넘어갔다.
눈을 감았다.
“후우.”
기묘하게도, 내단이 흡수되는 것이 느껴졌다.
몸이 차분해지고 피로가 사라지는 기분 좋은 감각이었다.
흡수된 내단은 단전을 향해 내려갔다.
이윽고 내단과 단전의 오러가 만났을 때, 나는 왜 오러를 운용하라고 말했는지 깨달았다.
‘이건……?’
내단의 기운이 단전에 축적된 오러에 흡수되고 있었다.
신체 능력의 상승은 부수적인 효과에 불과했다.
나는 다급히 오러를 끌어 올렸다.
‘운용해야 한다.’
내단의 효과는 생각 이상이었다.
단순히 오러의 크기가 커지는 것이 아니었다.
밀도가 높아진다고 표현하는 쪽이 맞을 것이다.
단전이 부글부글 끓어 터질 것 같았다.
오러를 온몸에 퍼트렸다.
내단의 기운을 머금은 오러가 혈관을 따라 퍼졌다.
“크윽!”
예상외의 고통이 동반됐다.
온몸의 근육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오러가 지나가는 길목에 내단의 기운이 스며들고 있었다.
나는 통증을 참으며 계속해서 오러를 운용했다.
오러를 움직이지 않으면, 몸속에서 터질 것 같았다.
‘최대한 심장을 피해서……!’
마나가 자리 잡고 있는 심장은 피해야 했다.
맞닿았다간 내 몸이 폭발하는 참사가 일어날 테니까.
얼마나 오러를 운용했을까.
나는 오러 수준이 조금씩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드 러너에서, 소드 유저급으로.
‘내단의 효과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전혀 예정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내단의 효과는 생각보다 뛰어났고, 오러는 순식간에 강해졌다.
최대한 빨리 오러와 마나의 균형을 맞춰야 했다.
‘돌겠군!’
정신을 집중했다.
내단 때문에 오러 운용을 멈출 수도 없다.
오러 운용을 하는 동시에, 마나 서클을 만들어야 했다.
심장 주위로 오러가 모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가다간 마나가 오러에게 잡아먹힐 판국이었다.
즉시 세 번째 서클을 만들기 시작했다.
식은땀이 흘렀다.
‘몸이 버텨 줄까?’
소드 유저급의 오러와 세 개의 서클을 담아내기엔, 아직 준비가 부족했다.
용의 눈물을 마셔 신체 능력을 대폭 상승시키고 천천히 올라갈 생각이었는데.
내단이 강제로 오러의 수준을 끌어올려 버릴 줄은 몰랐다.
일단 해 보는 수밖에 없다.
잠시 후.
“쿨럭.”
기침을 하자 죽은피가 섞여 나왔다.
나는 심장과 단전에 손을 얹었다.
심장을 둘러싼 세 개의 마나 서클.
그리고 전보다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 오러.
“성공했다.”
오러와 마나가 부딪쳐 온몸이 폭발하는 대형 참사로 이어질 뻔했다.
죽을 각오로 오러와 마나를 제어한 끝에, 성공했다.
3서클과 소드 유저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레드라인 후작에게는 대단치 않은 영약으로 느껴졌다고 했지.’
내단의 기운은 단전에서부터 퍼지기 시작했다.
단전에 오러를 쌓는 동대륙 사람들과 달리, 서대륙의 기사들은 심장에 오러를 쌓는다.
거기서 어긋난 모양이었다.
아마 내단을 먹은 서대륙의 기사들은 전부 레드라인 후작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냥 조금 차분해지고, 몸이 좋아졌다는 느낌 정도.
오러가 심장에 있기에, 내단의 효과를 일 할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 오러는 동대륙 사람들처럼 단전에 있었다.
그 덕분에 내단을 완전히 흡수할 수 있었다.
‘기연이군.’
내가 준비한 기연이 아닌, 진짜 기연이었다.
* * *
“가거라.”
“괜찮겠습니까?”
태초의 숲으로 떠나기 전, 나는 라스 마이어를 찾았다.
라스는 의외로 간단하게 허락을 해 주었다.
너무 간단해서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아들이 서대륙을 돌아다닌다는데, 걱정되지도 않는 걸까.
라스는 내 의문을 단 한마디로 해소해 주었다.
“나는 방임주의다.”
하긴.
얼간이 짓을 하며 놀기만 하는 지그문트 마이어를 방치했다.
루이스가 가식을 떠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개입하지 않았다.
아들을 믿어서 저러는 건지.
아니면 관심이 없는 건지 잘 모르겠다.
속을 꿰뚫어 보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요하네스의 제안을 거절할 정도라면, 내가 말린다고 듣지 않을 것 아니더냐.”
정확히 짚었다.
합리적 의심이었군.
“마차는 준비해 주마.”
“감사합니다.”
“수행할 인원은 얼마나 필요하지?”
“적을수록 좋습니다.”
태초의 숲은 애초에 인간이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이다.
나야 방법이 있다지만, 너무 많으면 어렵다.
“단과 마리나만 데리고 가겠습니다.”
“네 뜻이 그렇다면 그리하거라.”
“감사합니다.”
곧 라스가 축객령을 내렸다.
나는 바로 물러났다.
로안 아카데미로 발걸음을 옮겼다.
원장실에 간 나는 여느 때와 같은 발레리아를 만날 수 있었다.
“스승님? 떠날 채비가 끝나셨나 봐요.”
“그래. 근데 너, 이건 뭐냐?”
“아, 아공간에 자리가 부족해서요.”
발레리아는 콧바람을 내뿜으며 책상 옆의 가방을 두드렸다.
사람 두세 명은 들어갈 듯한 짐 가방.
무언가로 가득 차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너, 혹시 따라올 생각은 아니지?”
“네? 당연히 따라갈 건데요?”
“넌 당연히 네르갈에 남아야지.”
“…….”
발레리아는 간식을 뺏긴 강아지 같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애처로운 척하지 마라. 징그러우니까.”
“징그럽다뇨! 너무해! 저 데리러 오신 거 아니었어요?”
“아니. 이거 가지러 왔는데?”
나는 원장실에 뒀던 화분을 가리켰다.
탄생의 씨앗이 담긴 화분이었다.
“제국이 헛짓거리하려고 하면 네가 대처를 해야 할 거 아니냐.”
“하지만, 제가 지켜 주지 않으면 스승님이 또 돌아가실지도 모르잖아요.”
“쯧. 아주 죽으라고 고사를 지어라. 이놈아.”
발레리아는 네르갈에 남아야 했다.
레온하트 왕국의 최고 전력이 왕국을 벗어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툭.
“으음?”
그때, 화분이 스스로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