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12/134)

3

뱀들의 싸움

“환영 인사가 거칠군. 내가 뭐 잘못이라도 했나?”

“그런 화려한 옷을 입고, 빈민가에 발을 들인 것이 잘못 아니겠습니까.”

날붙이를 든 사람들이 내게 다가왔다.

나는 저항의 의사가 없다는 표시로 양손을 들었다.

“나는 싸우러 온 게 아니야. 그림자를 밟으러 온 거지.”

“호오.”

작게 탄성을 흘린 노인이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그 말의 뜻은, 제대로 알고 오신 겁니까?”

“정보를 사러 왔다는 뜻이지. 너희들, 정보 암상인들에게.”

노인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내 얼굴을 살폈다.

“재미있군요.”

노인은 전과 달리 유창하게 말을 이었다.

“지그문트 마이어. 스무 살. 마이어 남작가의 장남. 어린 나이에 검을 잡았으나, 금방 흥미를 잃었다.”

“음. 내 전성기였지.”

“검을 놓은 뒤로는 여자에 빠져 얼간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었으며.”

“잘 아는구먼.”

“겁도 많고, 소심하며,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여자에게 허세 부리는 것밖에 없는 무능이다.”

“당사자가 여기 있는데 말이 좀 심한 거 아닌가?”

노인은 뭔가를 곱씹듯이 입을 우물거렸다.

“무능일 텐데, 무능이어야 하는데. 이상한 일이로고. 이상한 일이야.”

“거참.”

나는 귀를 후벼 팠다.

“너희 암국 놈들은 원래 그렇게 말이 많나?”

노인이 동작을 멈췄다.

그 순간.

스릉.

수십 개가 넘는 칼날이 내 목을 둘러쌌다.

노인의 부하들이 일제히 내게 날붙이를 겨눈 것이다.

반응하기도 힘든 속도였다.

시종일관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던 노인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누구냐?”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것처럼 굴더니. 이제 와서 그런 걸 물어보고 그러나.”

끼기긱.

머리 위에서 시위 당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느껴졌다.

빈민가의 어둠 속에서 수많은 인기척이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한둘이 아니었다.

나는 내 목에 들어온 칼날을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일단 이것들 좀 치우고 얘기하지. 무서워서 말이 안 나오네.”

노인이 턱을 까딱였다.

노인의 부하들이 내 목을 겨누고 있던 날붙이를 순식간에 회수했다.

나는 목을 매만졌다.

“여기서 얘기할까? 나는 상관없는데.”

“흐음…….”

노인이 침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한 부하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부하가 내 뒤로 다가와 안대를 씌웠다.

방향 감각이 사라졌다.

무슨 조치를 취했겠지.

나는 시야가 가려진 채로 어디론가 인도받았다.

몇 분 후.

“내려가십시오.”

발로 한걸음 앞을 짚어 보았다.

땅이 느껴지지 않았다.

계단인 듯싶었다.

나는 계단을 내려갔다.

끼익, 쿵.

문 닫히는 소리.

부하가 내 안대를 벗겼다.

어둡고 허름한 지하실이었다.

가운데에는 조잡한 탁자가 있었다.

그 위에 올려진 작은 랜턴만이 홀로 빛을 발했다.

노인은 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앉으시지요.”

나는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노인은 생각을 정리하듯 눈을 감았다.

“그럼, 거래를 시작해 볼까.”

“그러지요.”

이럴 때는 본론부터 말해야 한다.

정보상과 사담을 나눠 봤자, 정보만 뺏길 뿐이니까.

“먼저, 나는 ‘정보 암상인’이 아닌 ‘암국’의 고객이 되길 원한다.”

“허허.”

노인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암국에 대해 알고 있으니, 첫 번째 조건은 충족된 거 아닌가?”

암국.

암살자와 정보상, 암상인 등으로 이루어진 비밀 집단.

그 영향력은 한 국가와 비견될 정도라고 한다.

그렇기에 땅이 없는 나라이라고도 칭한다.

“지그문트 님께서 저희의 고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될 자신이 있으니, 내가 암국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걸 밝힌 거지.”

서대륙 각지에 지부를 두고 있음에도, 그들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암국에 대해 알게 된 사람은 모두 암국에게 암살당하기 때문이다.

암국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도 살아남는 방법은 단 하나 뿐.

바로 암국의 고객이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조건이 있습니다.”

“암국의 정체에 준하는 약점을 넘기라는 거잖아?”

자신의 약점을 가진 사람을 고객으로 두고, 살려 준다.

그 대가로, 암국은 그 사람의 약점을 받아 간다.

일종의 담보다.

“잘 아시는군요. 여기, 계약서입니다.”

노인은 품속에서 계약서를 꺼내 넘겼다.

이 계약서에는 저주가 걸려 있다.

대상이 진실만을 말하도록 강제하는 마법, 터치 오브 트루스(Touch of Truth)와 비슷한 저주다.

“계약서에 손을 얹고, 내용을 읽으시면 됩니다.”

“알아.”

나는 계약서에 손을 올렸다.

노인 또한 계약서에 손을 얹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나였다.

첫 번째 조항.

“나는 이 계약서에 손을 얹었을 때, 거짓을 말할 수 없다.”

그리고 두 번째 조항을 읽었다.

“나는 ‘암국의 정체’에 준하는 내 약점을 말한다.”

이번에는 노인이 계약서를 읽었다.

“나는 이 계약서에 손을 얹었을 때, 거짓을 말할 수 없다.”

첫 번째 조항은 나와 같았다.

“계약이 성립할 시, 암국은 계약자를 고객으로 받아들인다.”

노인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계약자가 암국의 정체를 발설하지 않을 시, 나는 계약자의 약점을 기억하지 못한다.”

이 조항 때문에 암국은 먼저 배신할 일은 없었다.

이제 계약서에는 마지막 조항만이 남아 있었다.

내가 내 약점을 밝히는 것이다.

그것으로 계약은 끝난다.

“마지막 조항입니다. 신중하게 답변하시지요.”

이 계약에는 한 가지 트릭이 숨어 있다.

바로 내 약점이 ‘암국의 정체’에 준해야 한다는 대목이다.

암국은 정체가 드러나는 것만으로 서대륙이 준동할 정도로 거대한 집단이었다.

즉, 나는 약점인 동시에 최상급의 정보를 말해야만 했다.

‘암국의 고객이 된 사람은 극소수 중에서도 극소수.’

약점이 드러나는 것만으로 서대륙이 들썩일 만한 인물만이, 암국의 고객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암국이 여태껏 정체를 숨길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여기서 잘못 말하면 죽겠지.’

만약 ‘암국의 정체’에 준하는 정보가 아닌, 그저 자신의 약점에 불과한 정보를 넘긴다면?

두 번째 조항을 위반한 것이 되기에 계약은 성립하지 않는다.

계약에 실패한 사람의 말로는 정해져 있다.

고객이 되는 대신 암살 대상이 돼서, 소리 소문 없이 죽을 뿐이다.

“내 약점은.”

물론 나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나만큼 고객이 될 자격이 차고 넘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나는 노인과 눈을 마주치고 씩 웃었다.

“내 약점은, 내가 대마법사 델 로안이라는 것이다.”

“……무슨!”

노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계약서를 짚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노인이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웅.

계약서가 점멸하더니, 노인이 천천히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마치 방금 내비친 감정이 거짓말이라는 것처럼.

저주가 발동한 것이다.

내 약점에 대한 기억을 통째로 잃어버렸을 것이다.

노인은 계약서에서 손을 떼고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대단한 분이셨군요.”

“과찬이군. 남작가의 얼간이라고,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저희의 정보가 잘못됐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요.”

노인은 자신의 심장에 손을 얹고, 크게 숨을 내뱉었다.

“저를 이렇게까지 고양시킬 만한 정보를 약점으로 두고 있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암국의 고객이 된 건가?”

“예. 계약은 성립했습니다.”

노인이 정중하게 인사했다.

“암국의 고객이 되신 걸 축하합니다. 지그문트 마이어 님.”

“그래. 잘 부탁해.”

“저는 네르갈의 지부장, 밤말을 듣는 쥐라고 합니다.”

“재밌는 별명이군. 낮말을 듣는 새도 있나?”

“있을지도 모르지요.”

노인, 밤말을 듣는 쥐가 히죽 웃었다.

유난히 도드라진 누런색의 앞니가 보였다.

그것도 정보 취급하는 건가.

암국의 정보상다웠다.

“사담은 여기까지 하지.”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 있던 금화를 쏟아 냈다.

“이제 본격적인 거래를 시작할까?”

* * *

거래가 끝나고, 지그문트 마이어는 빈민가를 떠났다.

밤말을 듣는 쥐는 식은땀을 닦았다.

문을 열고 그의 최측근인 부하가 지하실에 들어섰다.

“계약은 어떻게 됐습니까?”

“성립했다. 암국 전체에 알리도록.”

부하는 조금 놀란 듯 멈칫했다가, 물러났다.

홀로 지하실에 남은 쥐는 책상을 보았다.

서류가 올려져 있었다.

눈치 빠른 부하가 두고 간 것이었다.

서류 한쪽에는 지그문트 마이어라고 쓰여 있었다.

“……지그문트 마이어.”

암국에서는 이런 사람을 두고 한 장이라고 불렀다.

인생이 서류 한 장에 요약되는 놈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보 등급도 최하급이었다.

‘소심하다. 여자를 밝힌다. 저택 밖으로 잘 나가지 않는다.’

악평 일색이었다.

그가 느낀 것과는 정반대였다.

배짱도 있고, 과감했다.

스무 살의 풋내기에서 나올 법한 여유가 아니었다.

치기 어린 귀족가의 자제가 아니라, 연륜이 쌓인 노인을 상대하는 것 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랬다.

‘내 얼굴을 보고도 일말의 동요조차 없었지.’

밤말을 듣는 쥐는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화상으로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

이 얼굴을 보고도 동요하지 않은 인물은 별로 없었다.

잘 훈련된 암살자나,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이들 정도였다.

그런데 지그문트 마이어는 눈도 까딱 안 했다.

‘거기에 계약마저 성립시켰다. 저 나이에. 이런 인물이 있었나?’

네르갈의 지부장인 만큼, 밤말을 듣는 쥐는 암국과 계약한 인물을 모두 알고 있다.

머릿속으로 그들의 이름을 되짚어 보았다.

개인 정보 하나하나가 최상급 정보로 취급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만이 암국과 계약에서 살아남아, 고객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대뜸 인생이 최하급 정보로 취급되던 얼간이가 계약에 성공한 것이다.

암국의 전 역사를 통틀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계약에 성공했을 때.

밤말을 듣는 쥐는 계약서에 오류가 있나 의심했다.

하지만 계약서는 멀쩡했다.

계약은 성립했고, 지그문트의 약점을 잊어버렸다.

‘단순히 겁 없는 풋내기라고 생각했건만.’

지그문트 마이어의 깊은 눈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밤말을 듣는 쥐는 지그문트 마이어의 서류를 죽 찢어 버렸다.

이 정보는 틀렸다.

그것도 완전히.

‘숨어도 아주 꼭꼭 숨어 있었군.’

힘을 숨기고 있는 인물은 많다.

그러나 암국의 정보망을 이렇게 완전히 피해 간 사람은 없었다.

고객의 정보는 사고팔지 않는다.

암국의 철칙이었다.

‘조사해 봐야겠어.’

조사만 하는 정도라면 철칙에 어긋나지 않는다.

서류를 새로 작성할 필요도 있었으니.

부하를 부르려다가, 멈췄다.

쥐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떨고 있다. 내가?’

레드라인 후작, 국왕, 적탑주까지.

네르갈에서 수많은 강자의 뒤를 캤다.

그 과정에서 죽을 위기도 수없이 겪었다.

하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그는 암국의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두렵다.’

쥐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직감이 강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지그문트 마이어는 건드리지 말라고.

‘그때와 같아.’

오래전, 암국의 은신처가 불탔을 때.

쥐는 타고난 직감으로 재빨리 은신처를 빠져나갔다.

직감에 따른 결과, 그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큰 화상을 입긴 했으나, 직감에 따르지 않았다면 온몸이 불에 타 죽었을 것이다.

그렇게 아득바득 살아남은 쥐는 지부장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직감은 여러 번 쥐의 목숨을 구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직감을 전적으로 믿었다.

화상 자국을 어루만졌다.

‘빌어먹을.’

결국 밤말을 듣는 쥐는 지그문트 마이어의 뒤를 캐는 것을 포기했다.

* * *

용의 눈물은 쉽게 구할 수 있는 영약이 아니었다.

영약의 재료는 대체로 비싼 편에 속하지만, 용의 눈물은 그 궤가 다르다.

이름 그대로 드래곤의 눈물을 재료로 만든 영약.

조금 고생하는 걸 감수해서라도 회수할 가치가 있었다.

‘어차피 암국과는 연을 터놓을 생각이었으니.’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면, 암국 놈들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지금 계약을 해 놓는 것이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암국은 고객에게 여러 특혜를 제공한다.

그중 하나가 고객의 정보를 사고팔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암국은 내 정보를 철저히 통제하려 들겠지.

‘이제 용의 눈물을 회수할 차례군.’

벨기안은 예상대로 왕성의 별관에 머무르지 않았다.

암국에게 벨기안의 거처에 대한 정보는 얻은 상태였다.

그 비싼 용의 눈물을 들고 다니진 않을 테니, 훔치기만 하면 된다.

“흠.”

나는 하얀 건물 앞에 섰다.

암국에 의하면, 벨기안은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서풍.

내가 파울 레드라인과 만났던 최고급 여관이었다.

대충 서풍을 둘러보았다.

외부 경계는 삼엄했다.

경비가 교대로 근무를 섰다.

창문은 사람 하나 드나들기 힘들 정도로 작았다.

환풍구와 배수구도 마찬가지였다.

‘뭔 놈의 여관 보안이 이래.’

외부에서 잠입을 못 하도록 설계가 되어 있었다.

마이어 남작가의 저택보다 몇 배 나은 것 같았다.

밤말을 듣는 쥐가 보여 줬던 서풍의 단면도를 떠올렸다.

서풍은 총 네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카운터, 식당, 작은 공연장이 있는 일 층.

일반실로 이루어진 이 층과 삼 층.

그리고 호화스러운 특실이 있는 사 층이다.

벨기안 네이스는 사 층, 특실을 쓰고 있었다.

‘벽을 때려 부수지 않는 한, 외부에서 사 층으로 침입하는 건 불가능.’

단면도에 의하면 사 층으로 가는 길은 하나였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투명화, 인비지빌리티(Invisibility)는 사용할 수 없다.

서클이 부족했다.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인식 방해 (Disturb Cognition).

마나가 얼굴을 감쌌다.

오래전 만든 환상 마법이었다.

이 마법을 씌운 부분은 모호하게 보이게 된다.

왜 그럴 때 있지 않은가.

분명 얼굴을 봤는데, 그 얼굴이 정확히 떠오르진 않을 때.

인식 방해는 그것을 강화하여, 소위 말하는 안면 인식 장애를 일으키는 마법이었다.

이제 누군가 나를 봤다고 해도 얼굴을 기억하진 못할 것이다.

기억하려고 하면 모호하고 흐릿한 인상만이 머릿속에 맴돌 테니까.

‘됐군.’

나는 마법의 발동을 확인한 뒤, 서풍의 정문으로 향했다.

뒷짐을 지고, 보폭을 늘린다.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과시하듯 턱을 살짝 들었다.

경비는 나를 손님이라고 생각했는지 꾸벅 인사했다.

딸랑.

“어서 오십시오.”

파울 레드라인을 만났을 때와는 다른 직원이었다.

나는 카운터 앞에 섰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1박. 방을 빌리고 싶은데.”

“일행은 없으십니까?”

“혼자라네.”

직원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표를 내밀었다.

“현재 일반실밖에 비어 있지 않습니다만, 괜찮으십니까?”

“흠. 특실은 다 찬 모양이지?”

내가 거드름을 피우며 묻자, 직원은 가소롭다는 듯 나를 훑어보았다.

“죄송합니다만 건국제 기간인지라, 특실은 예약 손님만 받고 있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군. 일반실로 주게.”

“예. 알겠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막시밀리안일세.”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이름을 지껄였다.

직원은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옛날 친구 이름이다.

한 100년 전쯤에 죽었지만.

좀 유명하던 놈이라, 직원도 들어 본 적 있는 듯했다.

나는 직원을 재촉했다.

“뭐 하나?”

“실례했습니다. 몇 박이십니까?”

“하루라네.”

직원은 내 말을 듣고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금화 다섯 닢입니다.”

특실도 아닌 일반실이 하룻밤에 금화 다섯 닢이라.

일반실 가격은 제대로 모르지만, 확실했다.

‘바가지군.’

축제 기간이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너무 비쌌다.

시세도 모르는 도련님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여기서 분쟁을 일으키긴 싫었다.

“여기 있네.”

나는 순순히 금화를 건넸다.

직원은 누가 볼세라 재빨리 금화를 가져갔다.

오른쪽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은근슬쩍 금화 한 닢을 따로 챙겼다.

정가는 네 닢인가.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시죠.”

직원은 뻔뻔하게 미소를 지으며 나를 3층으로 안내했다.

계단과 가장 가까운 방, 그러니까 제일 시끄러운 방이었다.

직원이 열쇠로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갔다.

“여깁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그래도 최고급 여관이라고, 시설이 꽤 괜찮았다.

이 정도가 아니라면 하루 묵는 데 금화 네 닢이나 할 리가 없지.

나는 방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군.”

“그럼,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 주십시오.”

직원은 은근슬쩍 도망치려고 했다.

나는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

직원이 걸음을 멈췄다.

찔리는 게 있어서 그런지, 명백히 어색하게 뒤를 돌아본다.

“무슨 일이십니까?”

“팁은 받아 가야지 않겠나.”

내 말에, 직원이 헤벌쭉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아주 나를 호구로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주머니를 뒤졌다.

직원의 시선이 내 주머니에 고정됐다.

“여기 있네.”

나는 주먹을 꺼냈다.

“팁, 안 받아 갈 건가?”

“주셔야 받지 않겠습니까.”

“그래. 이게 내 팁이라네. 잘 받게나.”

직원은 내가 주먹을 펴길 기다렸다.

그러다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시선을 들었다.

퍽!

나는 직원의 턱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쿵.

직원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팁이 마음에 드나 보군. 눈까지 뒤집고 기뻐하는 걸 보면.”

나는 손을 탁탁 털었다.

감히 대마법사에게 사기를 치다니.

건방진 놈.

옷을 직원의 것으로 갈아입었다.

“나쁘지 않군.”

조금 꼈지만, 어색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 옷은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다.

속옷 차림이 된 직원은 침대에 묶었다.

주머니에 있던 것들을 챙겼다.

등쳐 먹은 손님이 한둘이 아닌지, 금화 다섯 닢이 추가로 나왔다.

“그러게 착하게 살았어야지.”

그랬다면 좀 더 신사적으로 기절시켰을 텐데.

나는 직원 행세를 하며 방을 나갔다.

4층으로 올라갔다.

벨기안 네이스의 방은 복도를 돌아 맨 구석에 있었다.

“누구냐.”

나는 의외의 복병과 마주쳤다.

제국의 문양이 새겨진 옷을 입은 남자가 문을 지키고 있던 것이다.

치밀한 놈 같으니.

빈방을 지키기 위해서 호위를 뒀을 줄은 몰랐다.

나는 태연한 얼굴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나리.”

“……뭐야, 직원인가.”

나는 빠르게 호위의 무장 상태를 확인했다.

갑옷은 입지 않았지만, 검을 가지고 있다.

“무슨 일이지?”

“음유시인의 공연이 곧 1층에서 열릴 예정이기에, 알려 드리러 왔습니다.”

호위는 손을 내저었다.

“돌아가라. 이 방은 비어 있다.”

“비어 있다고요? 어째서 빈방을 지키고 계십니까?”

나는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다면 1층에 잠시 내려오셔서 공연을 즐기시지요.”

“안 된다. 나는 이 방을 지켜야 한다.”

“귀중품 때문입니까?”

“그래.”

“저희 여관, 서풍은 최고의 보안을 자랑합니다.”

나는 짐짓 자존심이 상했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서풍이 운영된 이래로 단 한 번의 절도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지 않나.”

“만약 도난당한 물건이 있다면, 제가 사비로 전액 보상해 드리죠.”

나는 자신만만한 투로 말했다.

호위는 조금 혹한 기색이었다.

축제 기간이다.

그것도 레온하트 왕국에서 가장 큰 축제, 건국제.

딱딱한 성격의 기사라고 하더라도, 조금은 쉬고 싶겠지.

더군다나 그가 지키고 있는 것은 벨기안 네이스가 있는 방이 아니라, 빈 방.

죄책감이 조금 덜할 것이다.

“흠.”

호위는 자신의 임무와 잠깐의 일탈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 같았다.

이 시점에서, 저울은 내 쪽으로 기울었다.

욕망의 불씨에 살살 부채질을 할 일만 남았다.

“술과 음식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모두 서풍의 특실 손님께만 제공되는 최고급입니다만…….”

나는 방문을 흘긋 보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드시지 않는다면, 다른 손님께 돌리는 수밖에요.”

“크흠. 그건 좀 아깝군.”

빙고.

호위는 내 감언이설에 넘어가고 말았다.

처음부터 식욕 쪽을 자극할 걸 그랬다.

“전액 보상하겠다는 말, 책임질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제 이름을 걸고, 책임져 드리죠.”

호위는 내 가슴팍에 있는 이름표를 확인했다.

당연히 이 이름표의 주인은, 나를 등쳐 먹었던 직원 놈이었다.

뭐. 알아서 하겠지.

“자네는 안 내려가나?”

“다른 고객님들께도 알려 드려야 해서요.”

적당히 둘러대며, 다른 객실로 가는 척했다.

그제야 호위는 계단 쪽으로 갔다.

나는 호위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행동을 개시했다.

직원의 주머니에서 찾은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성신 리에이트여. 부디 정의로운 도둑이 되는 걸 허락해 주시길.’

나는 열쇠를 구멍에 끼워 맞추고, 돌렸다.

철컥.

몇 번의 시도 끝에, 방문이 열렸다.

나는 살며시 벨기안 네이스 방으로 들어섰다.

호화스러운 최고급 가구들이 눈에 띄는 방이었다.

호위의 말대로 벨기안 네이스는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자. 그럼, 이 치밀한 놈이 용의 눈물을 어디에다가 숨겨 놨을까.’

* * *

벨기안 네이스는 걸음을 재촉했다.

파울 레드라인에게 저주를 거는 것은 완전히 실패했다.

하지만, 발레리아 로안을 회유하는 건 아직 실패하지 않았다.

‘델 로안 대공과 사이가 어그러졌을 줄이야.’

파티에서 적탑주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생전의 델 로안 대공과 적탑주 사이에 마찰이 있었을 것이다.

벨기안 네이스는 그렇게 유추했다.

그는 똑똑히 기억했다.

발레리아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음을.

가능성은 있다.

‘잠깐이지만 눈동자가 흔들렸었다.’

델 로안 대공은 신화나 다름없는 업적을 이룩한 마법사다.

마법사라면, 그의 유산이 탐날 수밖에 없었다.

벨기안 네이스는 왕립 로안 아카데미 앞에서 멈췄다.

한가운데에 있는 델 로안 대공의 조각상이 눈에 들어왔다.

델 로안을 그렇게 싫어하는 것 같더니.

대마법사의 제자라는 걸 대외적으로 선전하고 있는 건가.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

“벨기안 네이스 님이십니까?”

“그러네.”

경비로 보이는 남자가 벨기안 네이스를 안내했다.

벨기안 네이스는 그를 따라 원장실로 향했다.

“학원장님, 벨기안 네이스 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들여보내렴.”

문을 열어 준 남자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떠나갔다.

책상에 앉은 발레리아가 벨기안을 맞이했다.

벨기안 네이스는 눈을 굴리며 원장실에 들어왔다.

“벨기안 네이스 백작님, 금방 보고 또 보는군요.”

“아카데미로 찾아오라고 한 건 적탑주님이십니다.”

“그랬죠.”

자리에서 일어난 발레리아는 손으로 창틀을 쓸었다.

창문 너머로 달빛이 들어왔다.

벨기안 네이스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생각은 해 보셨습니까?”

“조금 고민되긴 했지만, 결론을 내렸습니다.”

발레리아는 돌아서서 벨기안 네이스를 똑바로 마주했다.

“팔베르크 제국으로 가겠습니다.”

* * *

‘혹시, 여기에 없나?’

용의 눈물은 방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침대 밑, 장롱 안, 책상 아래.

숨길만 한 곳은 전부 다 뒤져 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호위에게 방을 지키게 한 걸 생각하면 들고 나가진 않았을 텐데.

시간이 얼마 없었다.

호위는 곧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것이다.

‘내가 벨기안 네이스라면. 그 능구렁이 같은 놈이라면…….’

어디에 숨겨 놨을까.

벨기안 네이스는 의심이 많고 치밀한 성격이다.

귀찮고 번거롭더라도, 뻔한 장소에는 숨겨 놓지 않았겠지.

나는 문득 내가 방의 아래만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시선을 위로 향하니, 아니나 다를까.

문의 틀 윗부분에 단단히 고정된 자루가 보였다.

‘이 정도면 강박증 환자 수준인데.’

방에 막 들어온 사람이, 웬만해서는 살피지 않는 곳.

방문 위였다.

나는 혀를 내두르며 자루를 끌어 내렸다.

자루 안에는 검은색의 술병이 들어 있었다.

용의 눈물이 확실했다.

회수 완료다.

탁탁탁…….

‘벌써?’

문 너머에서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벨기안 네이스의 호위가 분명했다.

그새 눈치를 챈 건가.

내 예상보다 빨랐다.

‘곤란하군.’

제국 백작가의 호위다.

얼핏 봐도 꽤 실력 있는 사람이었다.

단과 호각이거나, 그 이상.

‘마나를 너무 많이 잡아먹었어.’

정면 돌파는 불가능하다.

레서 마나 번을 쓸 만한 마나가 남지 않았다.

인식 방해 마법이 생각보다 마나를 많이 잡아먹은 탓이었다.

기껏해야, 2서클 마법 한 번이 한계다.

‘도망이 최선인데.’

하지만, 어디로?

퇴로는 없다.

문 앞에는 이미 호위가 온 것 같았고.

창문은 너무 비좁다.

쾅!

호위가 방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나와 눈이 마주친 호위는 허리에서 검을 빼 들었다.

“이 도둑놈이!”

“움직이지 마!”

호위가 내게 달려들기 직전.

나는 용의 눈물의 주둥이를 잡고 거꾸로 들었다.

놀란 호위가 정지했다.

“네놈…….”

“움직이면 이 술의 목숨은 없다!”

호위는 내게 검을 겨눴다.

“그, 그게 얼마짜린지나 알고 건드리는 거냐?”

“알지.”

내가 만든 건데 내가 어떻게 이 영약의 가치를 모르겠는가.

호위는 유일한 퇴로인 문을 등진 채, 아주 천천히 내게 접근했다.

독 안에 든 쥐 꼴이었다.

“움직이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그 술병을 깰 배짱은 있나?”

“가질 수 없다면 부숴 버리겠어.”

호위의 임무는 이 술을 지키는 것.

부서지는 걸 원하진 않을 거다.

호위는 내게 검을 겨누고 주춤거렸다.

아주 잠깐의 틈.

나는 마나 서클을 회전시켰다.

손끝에 마법진이 떠올랐다.

“마법사였나!”

호위가 달려들었다.

짧은 순간 내가 술병을 깰 생각이 없다는 걸 간파한 듯했다.

나는 손끝을 놈의 발밑에 겨눴다.

“디그(Dig).”

망아의 숲에서 쓰지 못해서 한이 된 마법, 디그.

한순간에 땅을 파내는 마법이었다.

호위는 내 영창을 듣자마자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3층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디그는 기초적인 마법이니,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그 효과를 알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일부러 영창을 입 밖으로 꺼낸 것이다.

공중에 뜬 호위의 눈이 커졌다.

나는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힝, 속았지?”

내가 디그를 사용한 곳은 호위의 발밑이 아니었다.

단순한 속임수.

발밑이 허전해지는 느낌과 함께, 내 주변의 바닥이 허물어졌다.

쿵.

나는 3층 복도로 떨어졌다.

“씁. 아파라.”

발바닥이 저릿했다.

머리 위에서 호위가 소리쳤다.

“놓치지 않는다!”

나는 재빨리 얼굴에 걸려 있던 마법, 인식 방해를 해제했다.

용의 눈물은 아공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남은 마나를 쥐어짜, 이름표에 적힌 이름을 뒤틀었다.

쿵.

아슬아슬하게, 내가 파낸 구멍에서 호위가 내려왔다.

호위는 곧장 내게 달려왔다.

들킨 건가?

“너!”

“무슨 일이십니까?”

내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하자, 호위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얼굴을 뚫어져라 봤자, 기억 안 날 거다.

호위는 바뀐 내 이름표를 확인하고, 물었다.

“여기, 구멍을 통해서 수상한 놈이 내려오지 않았나?”

“아까 어떤 남자가 계단으로 달려가긴 했는데…… 이 구멍은 도대체…….”

호위는 내 어깨를 잡았다.

“고맙군.”

들키지 않은 모양이었다.

호위는 헐레벌떡 계단을 향해 뛰어갔다.

고맙긴.

내가 고맙지.

* * *

“……아, 그러고 보니 황제 폐하와 연이 있으시다지요?”

“어렸을 적 이야기예요. 아마 폐하께선 기억도 못 하실 겁니다.”

“아닙니다. 제게 적탑주님을 잘 모시라고 신신당부하셨을 정도인데요.”

“그래요? 의외군요.”

벨기안 네이스는 발레리아가 까다롭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시종일관 팔베르크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럴 거면 왜 팔베르크로 가겠다고 한 건지 모를 정도였다.

단편적인 정보가 떠올랐다.

‘과거에, 발레리아 로안은 델 로안과 함께 팔베르크 제국에 살았다.’

벨기안 네이스는 상상했다.

아마 델 로안, 그 노인네가 진절머리 나게 혹사를 시켰을 것이라고.

발레리아 로안은 20대 후반이라는 나이에 7서클 스타터에 도달했다.

이토록 단기간에 성장한 마법사는 여태껏 없었다.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철저하게 훈련만 한 게 아니라면, 불가능한 수치였다.

그러니 팔베르크 제국에 좋은 감정을 가지기 힘들 것이다.

“아,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조건요?”

벨기안 네이스는 되물었다.

발레리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왕성에서, 용의 눈물을 레드라인가의 자제에게 선물로 주려 하셨죠.”

“……그렇습니다.”

벨기안은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설마 저주를 간파한 건가?

발레리아는 의외의 요구를 했다.

“그 용의 눈물, 오늘 내로 제게 넘기세요. 그러면 팔베르크로 가겠습니다.”

“용의 눈물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용의 눈물은 마법사를 위한 영약이 아니었다.

신체의 잠재력을 끌어 올려 주고, 신체 능력을 전반적으로 상승시켜 준다.

굳이 말하자면 기사를 위한 영약이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용의 눈물을 어디에 쓰실 건지 물어도 괜찮겠습니까?”

“전부 제가 마실 생각이에요. 실험해 볼 게 있거든요.”

벨기안 네이스는 고민했다.

그 용의 눈물에는 저주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발레리아 로안의 혈연은 없다.’

같은 성을 쓰고 있지만, 델 로안과도 혈연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설사 혈연이라고 할지라도 델 로안은 이미 죽고 없었다.

델 로안 이외에는 혈연으로 의심 가는 사람조차 없었다.

즉, 혈연을 증오하게 되는 저주는 발레리아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뜻.

목적이 거래나 소장이 아니라 복용이라면, 넘겨도 무방하다.

“고작 레드라인 후작의 자제에게 주려던 선물을, 제게 못 준다는 건 아니겠지요?”

“잠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벨기안 네이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멍청한 년.’

용의 눈물은 확실히 비싸고 값진 영약이며, 명주다.

하지만 발레리아 로안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7서클 스타터, 마탑주, 대마법사의 제자.

발레리아를 제국에 끌어들임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상상을 초월했다.

벨기안 네이스는 표정을 지우고 고개를 들었다.

“좋습니다. 그 정도야 당연히 넘겨드려야지요.”

“만약 용의 눈물을 받지 못한다면, 오늘 일은 없던 거로 하겠습니다.”

“그럼요. 저는 약속은 지킵니다.”

벨기안 네이스가 슥 손을 내밀었다.

발레리아는 그 손을 내려다보다가, 맞잡았다.

거래 성립이었다.

‘회유마저 실패하면 어쩌나 했는데.’

벨기안 네이스는 속으로 발레리아를 비웃었다.

발레리아를 회유하기 위해서라면 그깟 용의 눈물, 기꺼이 넘겨줄 수 있다.

애초에 여기서 소모할 예정이었던 물품이었으니까.

“그럼. 조만간 다시 뵙겠습니다.”

벨기안 네이스는 품격 있게 인사를 한 뒤, 원장실을 나갔다.

* * *

“갔냐?”

“간 것 같아요.”

발레리아는 손수건으로 벨기안과 맞잡았던 손을 슥슥 닦았다.

나는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피곤하다. 내가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됐는지.”

“설마 실패하신 건 아니죠? 제가 시간까지 끌었는데.”

나는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너무 재능이 넘치는 것 같아.”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세요?”

“아마 내가 마법 대신 도둑질을 했으면, 전설의 대도둑이 됐을 거다.”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용의 눈물을 꺼내 보였다.

발레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어휴.”

“뭐냐. 스승에 대한 존경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구나.”

“와! 역시 스승님! 완전 여관을 뒤집어 놓으셨다! 진짜 최고의 스승님! 이럴까요?”

“에잉. 됐다. 내가 말을 말지.”

국어책을 읽는 듯한 반응에 손을 내저었다.

발레리아는 눈을 빛내며 용의 눈물을 살폈다.

“스승님 말씀대로라면 여기 저주가 걸려 있다는 건데……. 신기하네요.”

“안 느껴지냐?”

“네. 시간을 들여서 연구한다면 모를까, 보는 것만으로는 구별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정상이야. 마지막 마녀가 직접 건 저주니까.”

나는 용의 눈물을 도로 집어넣었다.

“제국의 작업은 전부 막은 건가요?”

“글쎄다.”

제국의 계획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황제 놈의 성격을 생각하면, 아닐 확률이 높았다.

내게 숨긴 계획이 추가로 있을 것이다.

가령 발레리아를 회유하려고 했던 것처럼.

‘불안하긴 한데.’

벨기안 네이스를 24시간 동안 감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제국 놈들의 밑 작업을 거는 목적은 하나였다.

레온하트 왕국의 전력 약화.

그 때문에 왕국 내의 최고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레드라인 후작과 발레리아를 노렸다.

그 외에 노릴 만한 사람이 있을까 되짚어 보았다.

‘왕가? 왕자들은 아닐 테고.’

첫째 왕자와 둘째 왕자는 대립하고 있다.

두 왕자의 다툼은 왕국의 전력 분산으로 이어진다.

굳이 제국에서 건드릴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잠깐.”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레리아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왕성 파티, 아직 안 끝났지?”

“그야 스승님도 저도 중간에 빠져나온 거니까……. 아직 안 끝났겠죠?”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안일했다.

황제는 나를 암살할 계획을 짤 만큼 대담한 부분이 있는 놈이다.

밑 작업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소극적으로 움직일 리 없었다.

내 생각대로라면 지금까지 친 밑 작업은 모두 설계다.

“왕성으로 가자.”

“왕성요? 더 이상 왕성에는 볼일이 없다고…….”

간과하고 있었다.

상대는 벨기안 네이스가 아니라, 황제였다.

저 멀리, 팔베르크 제국의 황성에 앉아 있을 황제와의 수 싸움이었다.

그리고 놈이 진정으로 노리는 것은 발레리아도, 레드라인 후작도 아니었다.

“국왕.”

“네?”

“레온하트 왕국의 국왕이 위험하다.”

* * *

파울 레드라인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지나다니던 시종 중 하나가 움찔 몸을 떨었다.

파울이 퀭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사과했다.

파울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힉.”

시종은 지레 겁을 먹었다.

그러나 파울은 시종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파울이 보고 있던 것은 시종이 아니었다.

그가 들고 있던 술병이었다.

“술…….”

금주를 시작한 지 고작 하루째.

처음에는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서풍에서 나온 뒤로, 술 생각은 일절 나지 않았으니까.

오산이었다.

‘어지럽다.’

왕성 파티에 온 것이 실수였다.

대부분의 귀족이 담소를 나누며 술을 즐기는 자리.

고급 와인의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금단 증세까지 겹치니, 파울로서는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나가고 싶은데.’

파울의 아버지, 레드라인 후작은 잠시 저택으로 간 상태였다.

그는 파울에게 당부했다.

국왕 폐하를 두고 완전히 자리를 비우지 마라.

파울은 심드렁하게 왕족들의 자리를 보았다.

“허허.”

레온하트의 국왕, 파서벌 레온하트는 태평하게 이 자리를 즐기고 있었다.

파울은 아버지가 괜한 걱정을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보다 뛰어난 근위기사가 한둘이 아니었다.

저들이 지키고 있는 한, 웬만해선 국왕을 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왕자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어디서 귀족의 영애라도 꼬드기고 있겠지.

“……참자.”

파울은 한쪽 다리를 떨며 중얼거렸다.

파티고 뭐고 전부 다 엎어 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지그문트 마이어.

이게 전부 그놈 탓이었다.

‘결투에서 이기고 내린다는 명령이, 금주라니.’

별거 아닌 줄 알았다.

그리고 파울은 거짓말처럼 팔베르크의 귀족에게 ‘용의 눈물’을 선물 받았다.

명령을 지키라고 멀리서 입을 뻐끔거리던 지그문트의 얼굴이 떠올랐다.

까드득.

사람이 어떻게 그토록 얄미울 수가 있을까.

하지만 놈은 분명 명령을 내릴 때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술을 마시지도 말고, 모으지도 마라. 선물을 받아도 거부해라.’

마치 용의 눈물을 선물 받을 걸 예견이라도 한 것 같았다.

파울 레드라인은 다시 한번 복수를 다짐했다.

반드시 되갚아 줄 것이다.

저번의 결투에서는 방심했지만, 다음에는 이길 자신이 있었다.

열심히 이를 갈고 있던 파울은 이상한 것을 목격했다.

꿈틀.

“……음?”

시종이 나르던 술병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린 것이다.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볐다.

“어이.”

파울에게 지목당한 시종이 흠칫 멈춰 섰다.

파울에게 사과했던 예의 그 시종이었다.

“저, 저 말씀이십니까?”

“그래. 너, 이리 와 봐.”

“딸꾹.”

시종은 세상의 멸망을 목격한 표정이 됐다.

애써 딸꾹질을 억누르며 주춤주춤 파울에게 다가왔다.

파울은 쟁반 위의 술병을 낚아채고 축객령을 내렸다.

“됐어. 이제 가 봐.”

“네, 네!”

파울은 술병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한쪽 눈을 감고, 술병 안을 살폈다.

반쯤 남은 와인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이상하다.’

혹시나 해 와인을 가볍게 흔들어 보았다.

마찬가지였다.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금단 증세로 환각이라도 본 걸까.

파울은 술병을 내려놓으려 했다.

“저, 저, 저 봐라. 저. 망나니 놈. 내가 저럴 줄 알았다니까.”

“끊었다더니. 결국 마시려나 보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명의 귀족 자제들이 파울을 흘겨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파울이 으르렁거렸다.

“와인 대신 네놈들 머리를 갈아 마셔 줄까?”

“…….”

귀족 자제들이 언제 험담을 했냐는 듯 입을 닫았다.

파울은 혀를 찼다.

“내가 진심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고 싶으면, 계속 아가리 털어 봐.”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 있다.

망나니, 파울 레드라인은 취했을 때보다 맨 정신일 때 더욱 포악하다는 것이다.

형형한 살기에, 귀족 자제들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자, 자리를 옮기지.”

“크흠. 그게 좋겠군.”

귀족 자제들은 엉거주춤 자리를 떴다.

그 이후로 파울 레드라인에게 다가오는 이는 없었다.

파울은 지금 이 상황이 영 마음에 안 들었다.

어느새 홀을 빠져나갔는지, 지그문트 마이어도 보이지 않았고.

레드라인 후작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다.

따분하게 홀을 둘러보는 도중.

이변이 일어났다.

“커헉!”

돌연 술을 마시던 귀족 자제가 경련하며 쓰러진 것이다.

눈은 흰자를 드러내고 있었고, 입에는 게거품을 물었다.

“그륵, 그르르…….”

이윽고 그의 온몸이 붉게 달아올랐다.

놀란 귀족들이 소란을 떨었다.

“뭐, 뭐야!”

“왜 이래?”

그의 손이 돌연 가까이 있던 귀족의 발목을 잡았다.

“끄아아아아악!”

귀족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잡힌 발목이 으스러지고 있었다.

악력만으로 사람의 신체를 뭉갠 것이다.

파울 레드라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이 돌아가는 게 심상치 않았다.

“우어어어!”

놈이 귀족을 휘둘렀다.

엄청난 괴력에, 귀족이 그대로 공중에 떴다.

귀족의 몸이 바닥과 충돌했다.

쾅!

“꺄아아아악!”

“미친!”

바닥에 머리를 박은 귀족은 움직이지 않았다.

터져 나온 피가 바닥을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순식간에 사람 하나가 죽었다.

놈은 눈을 희번득 뜬 채 두리번거렸다.

다음으로 죽일 상대를 찾는 것처럼.

홀은 공포와 혼란으로 물들었다.

“도망쳐!”

“으아아아아아!”

“괴물이다!”

귀족들은 우르르 도망치기 시작했다.

놈은 도망치는 귀족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르르르……!”

쿵. 쿵. 쿵.

놈은 짐승처럼 네 발로 귀족들에게 달려들었다.

놈이 끝자락에 있던 귀족 영애의 뒤통수를 붙잡기 직전.

도망치는 귀족들 사이에서 누군가 튀어나왔다.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거꾸로 놈에게 달려온 귀족이 하나.

퍽!

그는 그대로 놈의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커흑!”

갑작스러운 일격에, 놈이 뒤로 고꾸라졌다.

상반신을 일으킨 놈이 자신의 적을 확인했다.

식사용 나이프를 한 손에 쥔 파울이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필 칼 부서졌을 때 지랄이야.”

* * *

“레드라인 후작은?”

“홀에서 나가기 전에, 벨기안 백작과 얘기를 나누던 걸 봤어요.”

“왕성 밖으로 유인한 거로군.”

나는 혀를 찼다.

벨기안 네이스는 유인책이었다.

그와 함께 온 떨거지 제국 귀족들.

아마 그것들이 무슨 수작질을 할 것이다.

다행인 점은 아카데미가 왕성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왕성을 둘러싼 벽이 보였다.

“스승님! 정문을 돌아가야 있어요!”

“알아!”

언제 사건이 터질지 알 수 없었다.

여기서 정문까지 돌아가는 건 시간 낭비였다.

왕성의 외벽이 보였다.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가면을 꺼내 쓰며 소리쳤다.

“저기 위로!”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발레리아의 손 위로 마법진이 나타났다.

나는 발레리아의 손을 잡았다.

시야가 흐려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나는 발레리아와 함께 왕성의 테라스 위로 올라와 있었다.

단거리 공간 이동이었다.

창문 너머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왕성의 아티팩트 때문에 마나 방해가 있을 거예요. 제가 간섭해 볼게요.”

왕성 내에서는 마법을 쓸 수 없다.

왕가의 아티팩트가 마나를 흩트려 놓기 때문이다.

“한계치는?”

“2서클요.”

“지금 내 전력이네.”

나는 테라스 문을 열고 왕성으로 들어갔다.

“아아아악!”

아비규환이었다.

눈이 붉게 충혈된 사람들이 귀족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나는 침음을 흘렸다.

‘광폭화? 마법이나 저주는 아닐 텐데. 네크로맨시인가?’

지금 중요한 건 광폭화하게 된 경위가 아니었다.

광전사가 된 사람들을 막는 게 먼저였다.

다행히 파울 레드라인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광전사를 상대하고 있었다.

“이제 좀 뒈져라!”

푸확!

파울이 광전사의 목덜미에 나이프를 꽂아 넣었다.

그러나.

“그라아아아!”

광전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먹을 휘둘렀다.

파울이 나이프를 뽑았다.

광전사의 몸을 차, 그 반동을 이용해 뒤로 물러났다.

광폭화에 걸린 사람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경동맥을 찌른 정도로는 죽지도 않는다.

파괴 본능만이 남은 괴물.

저것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그래도 제법 잘 버티고 있었네.’

광폭화는 일시적으로 신체 능력을 대폭 상승시킨다.

뛰어난 기사라도 힘 싸움에서는 밀릴 것이다.

대신, 그만큼 동작이 크고 단순해진다.

파울은 그것을 잘 이용하고 있었다.

무기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어이!”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적당한 검을 꺼내 파울에게 던졌다.

파울은 재주 좋게도 공중에서 검을 잡아챘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가면을 쓰고 있으니,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쩐지 정체를 들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울은 인사 한마디 없이 검을 뽑아 들고, 광전사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국왕은…….’

2층, 왕족의 자리로 눈을 돌렸다.

국왕, 파서벌 레온하트는 근위기사의 보호 아래에 몸을 피하고 있었다.

다행히 광전사들은 2층에 다다르지 못한 것 같았다.

파울 레드라인의 선전 덕분이었다.

‘왕국의 근위기사들이라면, 적어도 지금의 나보다는 낫겠군.’

파울 쪽을 돕기 위해 움직이려던 나는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국왕에게 닿지도 못할 광전사들을 풀어놓는다고?

이런 불확실한 수를 썼을 리가 없다.

상대는 황제다.

모든 수를 가정해야 했다.

여기서 광폭화한다면, 레온하트의 국왕을 해하기 가장 쉬운 인물은?

당연히 그를 보호하고 있는 근위기사였다.

“그르르륵……!”

아니나 다를까, 국왕을 모시던 근위기사가 거품을 물었다.

광폭화였다.

국왕과 다른 근위기사들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제길.’

홀의 광전사들은 시선끌기용.

저게 황제의 진짜 승부수였다.

나는 테라스 쪽을 확인했다.

양손에 마법진을 띄운 발레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 방해를 어느 정도 풀어낸 것이다.

나는 곧바로 마나 서클을 회전시켰다.

레서 마나 번(Lesser Mana Burn).

두 개의 마나 서클이 타오르며, 정신이 고양됐다.

난간을 넘어 국왕이 있는 곳으로 뛰어내렸다.

바닥에 착지한 내게 시선이 몰렸다.

“저거 뭐야! 막아!”

국왕과 조금 떨어진 채 광전사를 상대하던 근위기사들이 내게 검을 겨눴다.

여기서 막히면 곤란하다.

나는 마법을 하나 더 추가로 사용했다.

라이트(Light) 변환 마법.

플래시 뱅(Flash Bang).

펑!

낮은 폭음.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어버린 근위 기사들이 멈칫했다.

나는 몸을 낮추고 근위 기사들의 사이를 파고들었다.

“폐하!”

한 근위 기사가 소리쳤다.

국왕, 파서벌 레온하트의 눈이 커졌다.

그 뒤로 광전사화를 마친 근위 기사가 보였다.

가장 가까이에서 국왕을 모시던 기사였다.

왕을 지켜야 할 방패가, 왕의 목을 겨눈 검으로 바뀐 것이다.

“크아아아!”

놈이 국왕에게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검을 뽑았다.

이대로는 늦는다.

나는 순간적으로 마나 태우는 속도를 높였다.

땅을 박찬 순간, 몸이 쏘아져 나갔다.

캉!

가까스로 광전사의 검을 막는 데 성공했다.

손을 타고 전해지는 묵직한 감각.

마나로 신체를 강화했는데도 이 정도다.

파울 레드라인을 아득히 넘어서는 힘이었다.

카각……!

오러를 씌운 상태임에도, 밀렸다.

근위기사들이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빨리 좀 와라.

이런 괴물을 상대로 오래 버티는 건 무리니까.

‘이거 진짜 큰일 났군.’

홀의 광전사들은, 마나를 사용한다면 나도 상대할 만한 수준이었다.

대체로 싸움 한번 해 본 적 없는 귀족들이 광전사로 변한 것이니까.

그러나 이놈은 아니었다.

국왕의 근위기사였던 이가 광전사로 바뀐 것이다.

기본적인 신체 능력부터 큰 차이가 났다.

검을 쓰는 거로 보아 본능도 어느 정도 살아 있는 것 같았다.

놈의 목에 핏줄이 올라왔다.

불길했다.

“우어어어!”

놈이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벤다기보다는, 찍어 누른다는 표현이 알맞을 법한 공격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건 못 막는다.

그렇다고 국왕을 두고 내 몸만 피할 수도 없었다.

그때였다.

캉!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지원이 들어왔다.

한 근위기사가 치고 나와, 방패로 광전사의 검을 막은 것이다.

그런데 소리가 이상했다.

우득!

“크윽!”

오러도 씌우지 않은 검에, 카이트 실드가 우그러졌다.

광전사가 오러를 쓰지 못해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랬더라면 나도 진즉에 죽었을 거다.

“아군인가?”

방패 근위기사가 나를 흘겨보았다.

내가 국왕을 보호하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나마 깨달은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패 근위기사는 홀에 대고 악을 썼다.

“폐하를 안전한 곳으로 모셔라!”

홀의 광전사를 제압하고 있던 젊은 근위기사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국왕, 파서벌 레온하트가 내게 나지막이 말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고맙네.”

나는 대충 손짓했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도와주는 거였다.

국왕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곧장 근위기사를 따라 움직였다.

‘문제는 저 광전산데.’

전 근위기사에, 중무장까지 한 광전사라니.

괴물이 따로 없었다.

방패 근위기사가 혀를 찼다.

“가면. 아무래도 협공하는 게…….”

하여튼 기사 놈들, 끝까지 자존심 세우는 것 좀 봐라.

나는 테라스 쪽을 보았다.

발레리아가 합류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하겠지만.

불가능하겠지.

마나 방해를 해제하는 동시에 전투는 무리였다.

간간이 서포트하는 정도면 몰라도.

“협공은 힘들 것 같군요.”

“뭐?”

방패 근위기사의 표정이 구겨졌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협공해 봤자 저거 못 이깁니다.”

저런 괴물을 사냥하려면 레드라인 후작 정도는 와야 한다.

레드라인 후작 저택과 왕성 사이에는 꽤 거리가 있다.

지금 온다고 해도, 나와 방패 근위기사가 광전사에게 당한 후겠지.

“그럼 뭐 어쩌자는 거냐!”

“시간을 끌어 주십시오.”

밖으로 유인해, 발레리아가 나서는 것이 최상의 시나리오.

하지만 아직 왕성에는 사람이 남아 있었다.

저 괴물을 밖으로 유도하는 과정에서, 사상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귀족 몇 명 죽는다고 해도 내 알 바 아니지만.

중요한 인물이 섞여 있을 수도 있다.

피해는 가급적이면 최소화해야 했다.

“우어어어어!”

쾅!

방패 근위기사가 놈을 막았다.

그는 방패의 끝, 날카로운 부분으로 놈의 발등을 찍어 반격했다.

하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광전사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니까.

“우어어!”

“빌어먹으으을!”

홀의 광전사는 대부분 죽거나 제압당한 상태였다.

남은 건 근위기사였던 놈 하나뿐.

근위기사들이 합류했다.

“레온하트를 위하여!”

그들이 고군분투하는 동안, 나는 아공간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를 거꾸로 들었다.

금화가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내 행동을 얼핏 봤는지, 방패 근위기사가 소리쳤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매수하고 있습니다.”

“매수? 지금 이놈이 돈을 받고 물러나기라도 한단 말이냐!”

당연히 아니다.

광전사는 이지를 잃은 존재.

금화는 돌멩이와 같은 취급할 것이다.

내가 매수할 것은 광전사가 아니었다.

“야, 저것 좀 어떻게 해 봐라.”

…….

“공간도 충분하잖아.”

…….

“에라이, 양아치 같은 놈. 그래. 더 줄게. 됐냐?”

스슷.

그제야 승낙의 표시가 나타났다.

나는 근위기사들에게 소리쳤다.

“뒤로!”

근위기사들은 나를 흘긋 보았다.

방패 근위기사가 너덜너덜해진 방패를 광전사에게 던지며 소리쳤다.

“뒤로!”

어차피 버티는 것도 힘들었을 것이다.

근위기사들이 뒤로 물러났다.

나는 바닥을 굴러다니던 접시를 광전사에게 던졌다.

“그어어어!”

쿵. 쿵. 쿵.

접시에 맞은 광전사가 내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멧돼지가 돌진해 오는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한 달 전, 망아의 숲.

요르문간드가 내게 말했다.

-내 그대와 함께 움직이는 건 어려울 것 같다.

-대신, 이놈을 빌려주지.

-대가는 조금 필요하겠지만, 꽤 도움이 될 거야.

나는 내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잡아 뜯었다.

금으로 만들어진 뱀 장식이 달린 목걸이.

목걸이를 공중에 던졌다.

광전사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방패 근위기사가 믿기 힘들다는 듯 중얼거렸다.

“……뱀?”

금색 목걸이는 어느새 금색 뱀으로 바뀌어 있었다.

뱀의 몸 크기가 순식간에 불어났다.

그냥 뱀이 아니었다.

몸길이만 총 10미터에 육박하는 괴물 뱀이었다.

뱀의 몸뚱이가 홀에 내려앉았다.

쿠우웅!

작은 지진이라도 난 것 같은 땅울림.

머리 위에서 돌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스슷.

뱀, 자이언트 골드가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괴물에는 괴물이다.

“우어어!”

광전사는 자이언트 골드를 보고도 멈추지 않았다.

두려움이 없는 괴물다운 패기였다.

자이언트 골드는 하찮다는 듯, 혀를 내밀며 꼬리를 휘둘렀다.

쩌억!

쾅!

꼬리에 맞고 날아간 광전사가 저 멀리 벽에 처박혔다.

근위기사들의 입을 벌어졌다.

방패 근위기사가 나지막이 물었다.

“혹시 저거…… 당신이 부리는 겁니까?”

돈을 주고 잠깐 힘을 빌릴 뿐이니, 굳이 말하자면 고용에 가까웠다.

어쨌든 부리고 있는 건 맞다.

내가 고개를 주억거리자, 방패 근위기사가 꿀꺽 침을 삼켰다.

“아군이라 다행이군.”

쾅! 쾅! 쾅!

자이언트 골드는 두꺼운 꼬리로 광전사를 계속해서 내리쳤다.

꼬리를 위로 들어 올렸을 때, 붉은색의 갑옷 조각이 보였다.

광전사였다.

아니, 광전사였던 것이었다.

“우어…….”

쾅!

전 재산이 털리긴 했지만.

자이언트 골드는 돈값을 톡톡히 했다.

* * *

왕성의 어딘가.

벨기안 네이스는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레드라인 후작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발레리아 로안을 회유하는 것도.

국왕을 살해하는 것마저도 실패했다.

참혹한 결과였다.

누군가 계획을 방해하기라도 했다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벨기안이 움찔 몸을 떨었다.

어디선가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 뒤의 솜털이 곤두섰다.

“전부 다 실패했단 말이지.”

“그, 그, 그렇긴 하지만! 들키진 않았을 겁니다!”

벨기안은 떨리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저희 측 귀족도 저 이외에는 광전사화 되거나 죽었으니…….”

“피해자인 척 넘어갈 수 있다?”

“예, 예. 그렇습니다. 아무도 의심하지 못할 겁니다!”

애초에 실패하더라도, 제국을 의심하기 힘들도록 짜인 계획들이었다.

제국 귀족들이 몇 명 죽었지만 그 이외에는 별 손실이 없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패해도 상관없는 작전이었다. 이 말인가?”

“그, 그런 뜻이 아녔습니다!”

벨기안 네이스는 허공을 향해 넙죽 엎드렸다.

목소리에서 노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증거도 증인도 없다면 확실히 들킬 일은 없겠지.”

“그, 그렇습니다! 연루된 인물은 전부 죽였습니다!”

“아니지. 아직 한 명이 살아 있지 않나.”

“……예?”

벨기안은 머리를 굴렸다.

이번 일이 새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자신의 호위까지 죽였다.

그런데 아직도 한 명이 남았다고?

누구지? 벨기안은 곧 그 답을 깨달았다.

“서, 설마…….”

“그래. 벨기안 네이스.”

목소리는 무심하게 선고했다.

“네가 남지 않았느냐.”

펑!

벨기안 네이스는 살려 달라고 애원조차 하지 못했다.

그대로 머리가 터져 죽었기 때문이었다.

“일이 재밌게 돌아가는군.”

* * *

로안 아카데미의 원장실.

“벨기안 네이스가 죽었다고?”

“네. 발견했을 때는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머리가 터진 상태였대요.”

“광전사에게 당했을 리는 없고, 제국이 꼬리를 잘라 버린 모양이군.”

벨기안 네이스 백작은 꽤 유능한 인물이었다.

살려 뒀다면 여러 곳에 써먹을 수 있을 텐데.

실패했다고 죽여 버리다니.

황제다운 뒤처리였다.

제국의 백작이 죽은 것이다.

광전사에게 당한 척.

은근슬쩍 용의선상에서 빠져나갈 생각인 것 같았다.

“아, 그리고 스승님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어요.”

“뭐라는데.”

“어…… 레온하트 왕국의 수호자라나.”

이건 또 무슨 개소리지?

내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쳐다보자, 발레리아가 설명했다.

“전설이 있거든요. 왕국이 위험에 처했을 때, 레온하트의 수호자가 나타나서 도와줄 거라는…….”

“그딴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믿는다고?”

“그런 것 말고는 스승님을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까요.”

거대한 금색 뱀을 부리는, 흰색 가면을 쓴 정체불명의 인물.

확실히 왕국의 수호자였다고 선전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영웅의 등장은 혼란에 빠진 민심을 잡기 좋은 방법이니까.

“나를 그렇게 써먹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다만…….”

차라리 이쪽이 나을 수도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가면도 함부로 못 쓰게 됐다.

“아카데미 학생들은?”

나는 로안 아카데미에서 한 차례 같은 가면을 쓰고 수업을 한 적이 있다.

아카데미 학생 중에는 귀족도 더러 있었으니 눈치챘을 법한데.

발레리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몇 명은 눈치챈 것 같은데, 떠들고 다니진 않네요.”

“입단속시킨 거냐?”

“음, 제가 말씀은 안 드렸는데요.”

발레리아는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처럼 걱정을 쏟아 냈다.

“사실 스승님의 수업 이후로, 게네들이 좀 이상해졌어요.”

“이상해졌다고?”

“자기들끼리 비슷한 가면을 만들어 쓰고 다니기도 하고…… 무슨 광신도처럼 정기적으로 모여 숭배하기도…….”

“…….”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나는 모르는 일이다.

애초에 수업을 맡아 달라고 한 것도 발레리아다.

“앞으로의 동선에 대해서 말인데.”

“말 돌리셨다.”

아공간 주머니에서 작은 화분을 꺼냈다.

발레리아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화분을 보았다.

아티팩트 ‘탄생’에서 나온 씨앗을 심어 놓은 화분이었다.

“아무래도 ‘태초의 숲’에 가야 할 것 같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