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34)

6

레드캡

푸확!

똑바로 쏘아진 화살은 고블린의 다리에 박혔다.

키아악!

고블린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놈의 손에서 빠져나간 풀피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토벌대는 그제야 고블린의 존재를 깨달았다.

“무슨 소리…… 고블린?”

“척후다!”

심장을 노리고 날렸는데 조금 빗나갔다.

균형을 잃은 고블린이 바닥으로 낙하했다.

퍽!

바닥에 떨어진 고블린이 아가리를 벌렸다.

소리를 질러 적습을 알리려는 것이다.

커맨더에게 훈련받은 놈이었다.

“저거 막아!”

근처에 있던 용병 하나가 잽싸게 고블린을 덮쳤다.

손으로 아가리를 틀어막고, 단검으로 목을 베었다.

고블린은 그대로 절명했다.

깔끔한 처리였다.

토벌대는 각자 무기를 뽑아 들고 전투태세를 취했다.

지금의 소란으로 위치가 발각됐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선두, 단 쪽으로 시선이 모였다.

단이 침을 삼키고 부락을 살폈다.

수풀 너머를 확인한 단이 신호를 보냈다.

들키지 않았다.

토벌대는 숨죽여 무기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시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고블린의 사체를 처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 *

고블린 부락에서 충분히 거리를 둔 후.

단의 신호가 떨어지고 나서야, 토벌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위험했다.”

“설마 척후가 있을 줄이야.”

“그 화살! 기막힌 타이밍이었어.”

용병들은 한 남자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내가 화살을 빌렸던 용병이었다.

그들은 용병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친한 척했다.

“폴! 너 이 자식. 좀 멋지다?”

“신출내기라 걱정했는데. 기우였어.”

“어이어이! 믿고 있었다고! 젠장!”

“어, 어?”

용병, 폴은 당황한 듯 용병들을 둘러보았다.

용병들은 으스대고 있었다.

척후를 발견하고 막은 것이 전부 용병 측의 활약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폴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때마침 폴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검지를 입술에 올렸다.

폴은 그런 나를 보고 입을 닫았다.

용병들이 폴에게 의문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사실 뭐?”

“사실…… 어, 음.”

그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말했다.

“사실 난, 힘을 숨기고 있던 멍청이였어.”

“뭐야? 푸하하하!”

“그럴싸하네! 평소에는 코앞에 있는 표적도 긴장해서 빗맞히기 일쑤잖아!”

“하. 하하하…….”

덕분에 기가 산 용병들은 긴장을 풀었다.

내심 용병들을 무시하는 눈치였던 기사들의 시선도 달라져 있었다.

“뭐. 아주 못 쓸 정도는 아닌가 본데.”

“실전 경험은 무시할 게 못 되지.”

“원거리는 우리가 커버하기 힘드니까 말이야.”

기사들은 용병들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용병들은 자신감을 얻고,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에는 용병과 기사들이 따로 분리된 느낌이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하나의 토벌대로 합쳐진 것 같았다.

‘이걸 노린 건 아니지만.’

폴에게 공을 돌린 이유는 이 때문이 아니었다.

전투 인원 취급받기 싫었을 뿐이다.

이런 조잡한 전투에 참여할 생각은 없었다.

내 입장은 어디까지나 토벌을 구경하러 온 귀족의 자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나는 귀찮은 일 없어서 좋고.

토벌대는 어쩌다 보니 단합력이 좋아져서 좋고.

폴은 계속 내 눈치를 봤지만, 난 무시로 일관했다.

“인상적인 솜씨였습니다.”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윌리엄이 말했다.

윌리엄은 묘한 눈으로 폴을 바라보았다.

나를 수행한다는 명목으로 토벌대까지 따라온 그다.

주변을 경계하느라 나를 살필 겨를이 없었던 이들과는 달랐다.

내가 화살을 던지는 것을 봤을 수도 있었다.

윌리엄이 빙긋 웃으며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지요?”

“정말 그러네. 그 위에 고블린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

“판단력과 순발력이 매우 좋으시군요.”

나는 윌리엄을 올려다보았다.

다 알면서 이러는 거지? 그지?

눈으로 그렇게 물었지만, 그는 인자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아주 능구렁이 같은 노인네다.

“잡담은 그만들 하고. 잠깐 모여 주시겠습니까.”

단이 사람들을 모았다.

그는 간단하게 현 상황에 대해 브리핑했다.

선공권은 우리 쪽에 있으니, 최대한 이를 활용해야 한다는 것.

논점은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였다.

“원래 고블린 사냥을 할 때는 화공이 정석인데. 어떻습니까?”

한 용병이 의견을 제시했다.

고블린들은 일반적으로 동굴에 산다.

출입구가 하나인 동굴의 구조상 화공은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입구에 불을 지피고, 튀어나오는 고블린을 사냥하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단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기각.”

커맨더의 지휘 아래, 고블린들은 숲 한가운데에 부락을 만들었다.

동굴이 아니었다.

용병들도 납득했다.

숲을 전부 태워 버릴 생각이 아니라면, 화공은 불가능했다.

용병 하나가 머리를 기울였다.

“그나저나 이상하네. 고블린이 이렇게 부락을 만든 건 처음 보는데.”

“척후도 있었지. 꼭 전략을 쓰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블린의 아종, 커맨더입니다.”

그에 단이 근엄하게 알은척했다.

용병들은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는 얼굴이 됐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커맨더라뇨?”

“챔피언을 잘못 안 거 아닌가?”

단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나에게 들어서 알고 있을 뿐.

고블린 커맨더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진 못했으니까.

호기심과 기대 어린 시선이 단에게 모였다.

“혹시 극비 사항 뭐 그런 겁니까?”

“아니라면 좀 알려 주십쇼. 그래도 같은 팀인데.”

단이 땀을 삐질 삐질 흘리며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나서기 싫은데.

그래도 시간 낭비하는 것보단 나았다.

“내가 설명하지. 고블린 커맨더는…….”

용병들은 내가 나서는 걸 탐탁지 않게 보았다.

그러나 설명을 듣자, 커맨더에 대한 건 쉽게 수긍했다.

어렴풋이나마 고블린들이 지휘 체계가 잡혀 있다는 것을 눈치챈 듯했다.

“전략을 쓰는 고블린이라. 신기하군.”

“그러고 보니 목책 같은 것도 세워져 있었지. 함정이 있을지도 몰라.”

“기습만으로는 그리 큰 피해를 주지 못하겠는데.”

“오히려 이쪽 사상자가 나올 확률이 커. 척후가 있으니 진입도 힘들고.”

여러 의견이 나왔다.

그럴싸하게 들리긴 했지만, 현실적으로 힘든 것들이 많았다.

의견들은 전부 보류되거나 기각됐다.

“윌리엄.”

“네. 도련님.”

“물 좀.”

“여기 있습니다.”

나는 윌리엄이 준 수통을 기울였다.

목이 막혔다.

‘답답하군.’

간단한 해결책이 있는데, 이상한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마땅한 방법이 나오지 않자 토의가 점점 과열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들키기 전에 기습하는 게 낫다는 겁니다.”

“커맨더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데.”

“고작 고블린이야, 뭘 그렇게 쫄아?”

“닥쳐. 사상자가 생기는 것보단 신중을 기하는 게 나으니까.”

라스 마이어가 있었더라면 이러지 않았을 거다.

확실한 지휘관이 있으니까.

아쉽게도 단은 이런 분위기를 휘어잡을 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이러다간 끝이 없겠어.’

효율적인 공략은커녕, 기습하기 전에 들킬 것이다.

조금은 토벌대의 구색을 갖췄나 했더니.

오합지졸이 따로 없었다.

뒤에서 구경만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애들 뒤처리나 해 주는 신세가 됐는지 모르겠다.

“주목.”

기사들이 입을 닫았다.

내가 기사를 받침대로 쓴 이후로, 기강이 어느 정도 잡힌 그들이었다.

자기들끼리 의견을 주고받던 용병들도 분위기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간단하게 의견을 제시했다.

“머리부터 친다.”

“……하아.”

“그러니까, 그게 불가능하다는 거지 않습니까.”

용병들이 반발했다.

나를 대놓고 무시하는 놈들도 몇 있었다.

“아무리 고블린이라고 해도, 수가 너무 많습니다. 잠입은 힙듭니다.”

“결국 경계를 서는 고블린들을 뚫고 들어가야 하는데, 그 시간이면 커맨더가 움직이겠죠.”

“요점은 고블린이 너무 많다는 거지?”

용병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럼 수를 줄이면 되지 않나.”

“당연히 들통날 겁니다. 한두 마리라면 모를까. 무리 단위로 죽이면 고블린이라고 한들 모를 리 없습니다.”

“수를 죽이는 법이 꼭 죽이는 것만 있는 건 아니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했다.

이 돌머리를 구원해 주소서.

내가 말하긴 뭐 해서 힌트를 던져 줬는데.

끝끝내 알아듣지 못했다.

결국 입에 정답을 떠먹여 줘야 했다.

“너. 이리 와.”

나는 용병 하나를 지목했다.

척후 고블린의 목을 벤, 단검을 쓰는 용병이었다.

그는 주춤주춤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놔.”

“예?”

“내놓으라고. 네가 몰래 챙기는 거 다 봤으니까.”

“무슨…….”

“뒈질래?”

“……!”

내 뒤로 단과 윌리엄이 다가왔다.

“큿.”

용병은 마지못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 손바닥에 얹었다.

그 물건을 본 용병과 기사들의 눈이 커졌다.

“이건……!”

* * *

토벌대는 고블린 부락 앞으로 숨죽여 나아갔다.

영 엉성하긴 하지만, 고블린들은 무장하고 있었다.

나무를 깎아 만든 창이나, 몽둥이가 대부분이었다.

때때로 제대로 된 무기를 가지고 있는 놈들도 있었다.

아마 사람을 죽이고 얻은 전리품일 것이다.

“혹시 들키면 어떡하지?”

“제발 재수 없는 소리 좀 하지 마.”

사박. 사박.

풀 밟는 소리가 가까워지자, 용병들이 속닥이는 걸 멈췄다.

수풀 사이로 발소리의 주인이 보였다.

열 마리로 구성된 고블린 무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정찰이었다.

단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괜찮습니다. 들키지 않을 겁니다.”

별로 들킬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블린은 기본적으로 감각이 인간보다 몇 배는 떨어진다.

작은 소리는 잘 듣지 못한다.

단도 그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역시 불안한 것 같았다.

여기서 들키면 계획이 전부 수포로 돌아간다.

책임은 전부 들킨 사람이 뒤집어쓸 테니, 불안할 수도 있다.

케륵. 케륵.

커맨더에게 훈련을 받았다지만, 저것들은 그냥 평범한 고블린이다.

정찰이라고 해 봤자 지정된 곳을 빙빙 돌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어디에나 변수는 있었다.

딸꾹.

‘젠장.’

활을 든 용병, 폴이 갑자기 딸꾹질을 시작한 것이다.

신입이라더니.

기겁한 용병들이 폴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이미 고블린 중 한 마리가 소리를 들은 후였다.

케륵.

고블린은 우리가 숨은 수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단은 허리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여차하면 암살을 시도할 작정인 것 같았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고블린이 수풀을 향해 녹색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삐익-!

풀피리 소리가 숲에 울려 퍼졌다.

케륵?

고블린이 손을 멈췄다.

고개를 돌리더니, 이윽고 피리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다른 고블린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수풀에서 나왔다.

“식겁했네.”

“폴, 왜 거기서 딸꾹질을 하고 난리야?”

“생리 현상이라고!”

용병들이 투덕거렸다.

폴이 화제를 돌렸다.

“그래도 작전이 유효했네요. 다행입니다.”

“확실히 그렇군요.”

척후가 가지고 있던 풀피리를 이용한 유인책.

고블린이 분산된 틈을 타서, 커맨더를 처치한다.

간단하고 직관적인 계획이었다.

단은 새삼스럽다는 듯 말했다.

“요즘 도련님을 볼 때면, 가주님이 떠오릅니다.”

“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라스 마이어보다야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지.

나는 옷에 묻은 나뭇잎을 털었다.

뒤에서 구경하려고 했는데.

윌리엄이 무언의 압박을 보내는 바람에, 결국 본대에서 떨어져 나오게 됐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최대한 빠르게 토벌을 끝낼 생각이었다.

“가자. 시간 없다.”

고블린들이 돌아오기 전에 커맨더를 처리해야 한다.

단과 용병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른 이들이 시선을 끄는 동안, 커맨더를 처치하는 것.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쾅!

멀리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시선 분산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움직이죠.”

“잠깐. 저, 지그문트 도련님.”

단은 나를 붙잡았다.

“뭐?”

“그, 혹시 커맨더가 어디 있을지 짐작이 가시는 바가 있으십니까?”

“응. 그걸 모르겠냐? 바보도 아니고.”

“그게 정말입니까? 어디죠?”

“딱 봐도 저기 있을 것 같잖아.”

나는 척 봐도 유난히 화려한 움집을 가리켰다.

중심에 있었고, 새의 깃털이나 해골 따위로 장식되어 있었다.

경비도 둘씩이나 서 있었다.

“확실히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혹시 함정일 수도.”

“아닐걸.”

단언할 수 있었다.

저건 분명 커맨더의 거처였다.

“결국 윗대가리라는 것들이 부릴 수 있는 사치는 이런 거란 말이야.”

나는 내 옷을 장식하고 있는 브로치를 두드렸다.

이런 작은 부락에서, 권력을 얻은 이가 부릴 수 있는 몇 없는 사치.

본능적으로 자신을 과시하기 마련이다.

“후딱 끝내자. 이렇게 시간 오래 끌 일 아니니까.”

“따르겠습니다.”

* * *

우리는 고블린 부락으로 들어섰다.

잠입이라고 하기도 뭐 했다.

부락 내에 있는 고블린도 별로 없었을뿐더러, 있더라고 해도, 비무장 상태의 고블린 몇 마리.

케엑!

단과 용병들이 보이는 족족 베어 버렸다.

폴이 화살을 쏘며 말했다.

“왜 이렇게 쉽죠? 멀리서 볼 때는 장난 아니었는데.”

“반절은 피리 소리를 확인하러 갔고, 다른 반절은 토벌대를 상대하고 있을 테니까. 여기 있다는 건 원래부터 전력이 안 되는 놈들이라는 얘기겠지.”

“어중이떠중이라는 거군요.”

“그래. 너처럼.”

“예?”

폴의 등 뒤에서 고블린 한 마리가 뛰어올랐다.

사체 틈바구니에서 기회를 엿보던 놈이었다.

고블린이 폴의 등에 단검을 박아 넣기 직전.

“누가 누굴 지키는 건지.”

나는 고블린의 안면을 걷어찼다.

고블린의 얼굴이 뭉개졌다.

께아아악!

고블린은 볼썽사나운 소리를 지르며 뒤로 날아갔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의 폴이 등 뒤를 확인했다.

나는 쯧 혀를 찼다.

저놈, 용병 일을 하다간 얼마 못 가서 죽을 거다.

“너는 용병 하지 마라. 던전에서 객사할 팔자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신발을 땅에 비볐다.

목덜미를 문지르던 폴의 눈이 커졌다.

“어, 어! 저거!”

그는 커맨더의 움집을 가리켰다.

움집에서 화려한 복장의 고블린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단도 그것을 봤는지, 고블린을 향해 달려갔다.

“흡!”

오러를 담은 검이 정확히 놈의 목을 잘랐다.

놈은 단말마조차 지르지 못했다.

툭.

잘린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단이 검을 가볍게 휘둘러 피를 털어 냈다.

“생각보다 싱겁군요.”

“이놈이 커맨던가. 고블린들이랑 뭔가 다르네. 좀 큰가?”

“됐어. 바로 본대에 합류하죠.”

용병들은 주위를 살피며 본대의 위치를 가늠했다.

나는 고블린의 머리를 툭 찼다.

“개소리 그만들 하고, 따라 들어와.”

나는 천막을 들추고 움집 안으로 들어갔다.

곧 단과 용병들이 따라 들어왔다.

움집을 둘러본 용병들이 감탄했다.

“……있을 건 다 있군요.”

“고블린 집 주제에. 우리 숙소보다 좋은 것 같은데?”

부드러운 풀을 엮어 만든 침대.

나무로 된 책상과 의자도 있었다.

선반에는 인간의 것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보란 듯이 전시되어 있었다.

폴이 질문했다.

“그런데 여긴 왜 들어온 겁니까? 커맨더는 잡았잖아요.”

“고블린 커맨더는 머리 쪽이 발달된 아종이야.”

나는 벽에 세워져 있던 창을 집어 들었다.

“진화라고 볼 수도 있지. 하지만 우리는 놈들을 진화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아종이라고 부르잖아.”

양손으로 창을 쥐었다.

창대 부분이 손에 딱 들어맞았다.

“왜 그런지 알고 있나?”

대답한 것은 단이었다.

“아종은 하나가 발달한 만큼, 다른 쪽이 퇴화하니까요. 고블린 챔피언이 대표적이죠.”

정답이었다.

신체가 발달한 고블린 챔피언의 경우, 지능 쪽이 퇴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블린 챔피언은 힘을 가졌음에도 다른 고블린들의 고기 방패가 되기 일쑤였다.

“그럼 머리가 발달한 커맨더는 어디가 퇴화했을까?”

“신체 쪽이 퇴화했겠군요.”

“그렇지. 그런데 단, 네가 잡은 놈은 오히려 신체가 발달한 편에 속했단 말이지.”

“그렇다는 건…….”

나는 서재에서 본 창술을 토대로 자세를 잡았다.

창대를 꼬나 쥐고, 무릎을 살짝 굽혔다.

꽤 그럴싸한 찌르기 준비 동작이었다.

숨을 들이쉬었다.

창끝에 오러를 실었다.

푹!

키아아악!

침대에 창을 찔러 넣자,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대로 창을 들어 올렸다.

꼬치 신세가 된 고블린 한 마리가 드러났다.

“이게, 고블린 커맨더?”

“……겉보기에는 고블린 새끼 같은데요.”

평범한 고블린보다 몸집이 두 배는 작았다.

성체가 아니라고 착각할 수도 있는 크기였다.

“이거 맞아.”

나는 창을 뽑았다.

고블린 커맨더는 지능이 발달한 대신, 몬스터 특유의 질긴 생명력을 가지지 못했다.

어깨에 창이 찔렸을 뿐인데, 숨통이 끊겨 있었다.

이제 본대에 합류해 남은 고블린들만 정리하면 된다.

* * *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단은 검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싱겁게 끝났군요.”

커맨더가 없는 고블린들을 처리하는 건 손쉬운 일이었다.

전략 따윈 없었고, 그냥 무작정 달려들 뿐이었으니.

토벌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잔당을 처리하고, 저택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피해는?”

“용병 몇 명이 다치긴 했지만 치명적인 정도는 아닙니다.”

“그럭저럭이군. 다른 몬스터가 모여들진 않았나?”

이 정도 소란이면 몬스터가 더 나올 만도 하다.

단은 어깨를 으쓱였다.

“없더군요. 이 일대는 고블린 놈들의 영역이었던 모양입니다.”

“음, 고블린 사체는?”

“말씀하신 대로, 일단 모아 뒀습니다.”

“안내해.”

나는 단을 따라갔다.

기사들이 고블린의 사체를 한데 모아 쌓고 있었다.

죽은 고블린으로 이루어진 작은 언덕이 생겼다.

일을 돕던 용병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저, 도련님. 저 사체는 어떻게 할 겁니까? 역시 팔 건가요?”

그의 눈에는 금전욕이 번들거렸다.

몬스터의 사체는 돈이 된다.

헐값에 팔리는 고블린이라도, 이 양이면 꽤 챙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불태울 거야.”

“무, 뭐? 왜! 저것들이 다 얼만데!”

“왜라니. 무슨 멍청한 질문인가?”

사체 무더기에 가까이 갔다.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대충 수를 파악했다.

“이 정도의 사체가 모이면 레드캡이 나타날 수도 있어. 태우는 게 당연하지.”

“……레드캡? 설마, 피가 흐른 곳에 출몰한다는 고블린?”

용병이 픽 웃었다.

“그걸 믿었습니까? 도련님, 생각보다 순진하십니다.”

“뭐?”

“레드캡은 전부 허구입니다. 이 짓만 30년을 했는데. 그것도 모를까 봐요?”

레드캡.

고블린의 피를 대량으로 흡수하면 만들어지는 언데드의 일종이다.

특정한 조건을 갖춰야 하는 데다가, 아주 드물게 나타난다.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몬스터였다.

“레드캡이 나타나면, 불필요한 전투를 한 번 더 해야 해.”

더군다나, 레드캡은 강하다.

수백 마리 분량의 고블린 피를 머금은 언데드.

겉보기에는 고블린과 비슷하지만, 그 능력은 천지 차이였다.

70년 전쯤.

레드캡 한 마리가 마을에 숨어든 사건이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스무 명이 넘는 사람의 목이 잘려 나갔다.

‘몬스터 주제에 암살자 행세를 하는 놈. 숨으면 곤란한데.’

몹시 재빠르기 때문에, 한 번 숨어 버리면 찾기도 힘들다.

나타나기 전에 고블린의 사체를 통째로 소각해 버리는 게 최선이었다.

“무슨 일이야?”

“도련님이 고블린 사체를 불태운다고 하시네.”

“태운다고? 왜?”

“레드캡 때문에.”

“레드캡? 그거 전부 미신이잖아.”

용병들이 합류했다.

그들은 고블린의 사체 더미 앞에 섰다.

꼭 나와 사체 더미를 분리하는 것처럼.

가만히 지켜보던 단이 인상을 썼다.

“비켜라. 도련님 명이 우선이다. 너희들은 보수를 받았지 않았나?”

“이런 추가 소득은 별개 아닙니까?”

“어차피 처리할 생각이 없으신 것 같은데, 저희에게 전부 넘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나는 단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칼 뽑아.”

스릉.

단은 군말 없이 검을 뽑았다.

용병들이 당황했다.

“어, 어?”

“기사님, 미쳤어?”

마지막으로 한번 경고했다.

“바로 태워 버렸어야 하는데, 시간을 너무 끌었어. 이제 나온다.”

“그놈의 레드캡. 아이고, 안 나온다니까요.”

“왜 그렇게 사람 말을 못 믿으셔.”

사람 말을 못 믿는 건 너희들이고.

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무지는 죄가 아니다.

다만 무지해서 뒈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단이 가만히 있자, 용병들은 고블린 사체의 수를 세기 시작했다.

“서른, 서른 하나, 이게 다 얼마야?”

“얼추 300마리는 넘을 것 같은데?”

“이거…… 어?”

폴은 말을 잇지 못했다.

사체 더미 속에서 튀어나온 긴 손톱이 폴의 배를 관통했기 때문이다.

폴은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배 위로 튀어나온 손톱을 내려다보았다.

푸확!

손톱이 뽑혔다.

피가 터져 나왔다.

폴의 눈동자가 뒤집어졌다.

그는 실 끊긴 인형처럼 바닥에 엎어졌다.

고블린의 사체가 무너졌다.

그 틈을 파헤치고, 손톱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체적으로는 고블린과 비슷했다.

피를 뒤집어쓴 것처럼 붉은 머리와 눈동자.

매의 발톱처럼 휜 손톱은 길고 날카로웠다.

“지, 진짜야……?”

“폴!”

그제야 사태의 심각함을 파악한 이들이 질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나는 검을 뽑았다.

레드캡은 무리에서 가장 약해 보이는 놈부터 공격하는 습성이 있었다.

궁수인 폴이 죽은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남은 건 중무장한 기사들과 덩치가 있는 용병들.

필연적으로 레드캡이 다음으로 노릴 상대는, 나였다.

“어딜!”

단이 나를 노리고 달려든 레드캡을 막아섰다.

오러를 실은 검이 레드캡의 살갗을 스쳤다.

카아아악!

레드캡은 단의 갑옷에 붙어 손톱을 세웠다.

투구 덮개 사이로 손톱을 찔러 넣으려는 것이었다.

“큭!”

단이 급한 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레드캡은 단을 발로 밀며 뒤로 물러섰다.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걸 깨달은 걸까.

단이 소리쳤다.

“도련님! 물러나십쇼!”

나는 검 자루를 톡톡 두드렸다.

외관적으로 내가 약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겉보기에는 얼굴만 번드르르한 청년이었으니까.

그렇다고는 하나.

나를 가장 약한 객체라고 판단하고, 제거하려고 들었다.

‘어? 생각해 보니까 열받네?’

루이스나 기사들.

하나같이 나를 무시했지만, 참을 수 있었다.

그들은 나를 지그문트 마이어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과거의 지그문트 마이어가 어떤 얼간이인지 알았으니까.

하지만.

‘고작 몬스터, 레드캡 따위가.’

기분이 몹시 더러워졌다.

나는 검을 뽑아 들었다.

‘서클 하나면 충분하다.’

고작 레드캡 한 마리다.

레드 드래곤도, 이프리트도 아닌 레드캡 한 마리.

마나 서클을 회전시켰다.

1서클 마법은 많지 않다.

사용할 수 있는 마나의 총량이 적었기 때문이다.

철괴 하나로 대검을 만들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1서클 마법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쓸모 있는 건…… 별로 없군.’

실용적인 공격 마법은 3서클부터 있었다.

1서클 공격 마법이라고 해 봤자, 마나 애로 정도다.

그것도 몇 번 쏘면 끝인 데다가, 그냥 활보다 효율도 낮다.

레드캡의 속도라면 피하고도 남을 것이다.

놈과의 전투에서 쓸 수 있는 마법은 전무했다.

‘그렇다면 급한 대로, 고쳐 쓰면 되지.’

나는 지금 내게 있어서 가장 효율적인 마법을 찾았다.

원래 있던 술식을 뜯어, 축소판을 만든다.

1서클 마나만으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암산은 순식간에 끝났다.

저택에서부터 쓸만 할 거라고 생각했던 마법이었다.

마차에서 어느 정도 작업을 끝내 놓은 상태였다.

심장 위에 손을 얹었다.

레서 마나 번(Lesser Mana Burn).

화악.

심장에서 마나의 불길이 타오르는 게 느껴졌다.

인정하긴 싫지만, 지금은 마나보다 오러가 더 효율적인 공격 수단이었다.

낮은 서클의 공격 마법은 레드캡에게 통하지 않을 테니까.

‘여기선 마나를 보조로 쓰고, 오러로 한 방을 노린다.’

마나 번(Mana Burn)은 4서클에 해당되는 고대 마법이다.

고대 마법이라곤 하나, 마법사에게는 계륵과 같았다.

몸속의 마나를 태워, 신체 능력을 전반적으로 강화하는 마법.

‘하지만 내게는 최적의 마법이지.’

의도하진 않았지만, 오러와 마나를 동시에 쓰게 된 나다.

마나를 직접 공격 수단으로 쓸 수 없는 지금.

마나 번은 가장 효율적인 마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후우…….”

숨을 뱉으니, 푸른 안개가 새어 나왔다.

타고 남은 마나의 잔재였다.

세계의 색이 선명해졌다.

단과 레드캡의 공방이 뚜렷하게 보였다.

단은 저래 보여도 소드 익스퍼트 초급.

레드캡에게 밀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큭!”

이런 빠른 몬스터를 상대해 본 경험이 없는 걸까.

단은 수세에 몰려 있었다.

레드캡이 일방적으로 공격하고, 단은 공격을 방어하기 바빴다.

불과 몇 초 사이, 갑옷에는 수많은 생채기가 생겨 있었다.

레드캡은 집요하게 갑옷 관절 부분에 난 틈을 노렸다.

“어, 어떡하지?”

“난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데.”

“이건 가 봤자…….”

용병들은 섣불리 끼어들지 못하고 있었다.

심히 짜증 났지만, 저들로서는 저게 최선이었다.

저런 놈들이 껴 봐야 걸림돌이 될 뿐이었다.

나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줬다.

1서클에 맞게 조절했지만,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마나가 전부 타고나면 마나 탈진에 걸릴 것이다.

그 전에 레드캡을 처치해야만 했다.

일대일로 맞붙었다면 이 마나 소모는 큰 디메리트로 작용했겠지만.

“스읍.”

이건 사냥이다.

단이 레드캡을 막는 동안, 나는 오롯이 공격에 집중할 수 있었다.

즉, 마나를 의도적으로 더 빨리 태워 효과를 강화할 수 있다.

심장의 불길이 거세졌다.

속전속결.

나는 땅을 박차고 레드캡에게 돌진했다.

당황한 단의 시선이 돌아갔다.

“도련님?”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좋은 수였다.

단에게 빈틈이 생긴 것이다.

레드캡이 손톱을 깊숙이 찔러 넣기 위해 팔을 뻗었다.

여기서 단을 끝장내겠다는 의지가 담긴, 큰 공격이었다.

승부수.

그것은 곧 또 다른 틈이라는 뜻이었다.

레드캡은 나를 약체로 인식하고, 간과하고 있었다.

나는 검날에 오러를 실어 레드캡의 팔을 베었다.

서걱!

캬아아아아악!

오른팔이 잘려 나간 레드캡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그 덕분에 단도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단은 나를 보며 쩔쩔맸다.

“도련님께서 어, 어떻게?”

“내가 좀 의외성이 있어. 그리고 집중해. 그러다 죽는다.”

단은 세세한 걸 따질 상황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듯, 다시 자세를 잡았다.

절단면을 붙잡고 발광하던 레드캡이 나를 노려봤다.

뭘 꼬나봐. 잡몹이.

나는 숨을 토해 냈다.

‘젠장. 1서클, 마나량 더럽게 부족하네.’

아무리 조금 더 끌어다 썼다지만.

고작 한 번의 공격으로 반절이 넘는 마나를 태웠다.

급하게 고친 술식이라 그런가, 효율이 떨어졌다.

“단, 방어.”

“……나중에 설명해 주셔야 합니다!”

단이 자세를 바꿨다.

완전히 수비 태세로 전환한 것이다.

짧은 순간 나와 역할을 분담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센스 좋네.’

나는 레드캡을 주시했다.

향상된 동체 시력이 작은 움직임까지 포착했다.

“후우.”

마나 잔재를 뱉었을 때, 레드캡이 움직였다.

순식간에 달려든 레드캡은 단의 아래로 파고들었다.

투구와 갑옷 사이 목 부분을 노린 찌르기.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크흡!”

무거운 검을 들어 막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단은 과감하게도 그 공격을 팔뚝으로 막아 냈다.

레드캡의 손톱은 갑옷을 뚫고 박혀 들어갔다.

놈의 손톱 위로 붉은 피가 주륵 흘러나왔다.

‘지금!’

단의 등 뒤에 숨어 있던 내가 앞으로 나섰다.

놈을 양분할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레드캡과 눈이 마주쳤다.

그것은 희미하게나마 웃고 있었다.

키키킥.

챙!

레드캡은 내 검을 예측했다는 것처럼, 검을 쳐 냈다.

단이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어?”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간 검이 옆으로 날아갔다.

레드캡이 단을 제치고 내게 달려들었다.

단은 놈을 막으려 했지만, 놈은 너무 빨랐다.

“도련님!”

레드캡이 순식간에 내 눈앞으로 쇄도해 왔다.

찰나의 순간.

다시 한번, 레드캡과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내가 웃어 줬다.

케륵?

레드캡이 조금이지만 당황한 듯 목 긁는 소리를 냈다.

‘예측 당할 건 예측했다.’

나는 마나 번을 해제하고, 남은 마나를 쥐어짜 냈다.

우웅.

레드캡과 내 사이의 공간에 푸른빛의 화살이 생겼다.

마나 애로(Mana Arrow).

래드 캡의 눈이 커졌다.

숙련된 암살자와 비슷한 속도의 레드캡이라고 해도, 코앞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피할 수는 없었다.

“뒈져.”

레드캡이 반응할 틈은 주지 않았다.

그런 멍청한 짓을 할 정도로 경험이 부족하진 않다.

그대로 쏘아져 나간 마나의 화살이 놈의 미간을 꿰뚫었다.

푸확!

칵…… 카가각……!

화살에 꿰뚫린 레드캡은 한동안 신경만 남은 곤충처럼 꿈틀거렸다.

그러다가 일순간 앞으로 고꾸라졌다.

혹시 몰라서 확인해 봤지만, 생명 반응은 없었다.

죽였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허억. 켁. 퉤.”

미처 뱉어 내지 못한 마나의 잔재를 뱉어 냈다.

머리가 쪼개질 것처럼 아팠다.

마나 탈진 초기 증세였다.

‘조절한다고 조절했는데……!’

1서클의 마나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부족했다.

단이 내게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덩치도 큰 놈이 울상이 돼서 달려오는 거 보니까 좀 그랬다.

“도련님!”

“흔들지 마. 골 울리니까.”

다행히 마나를 전부 쓴 건 아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복될 것이다.

숙취와 비슷한 두통이 있었지만, 참을 만했다.

용병들이 주춤주춤 다가왔다.

“그, 저…… 괜찮으십니까?”

“너희가 보기에는 괜찮아 보이냐?”

피할 수 있었던 전투였다.

그런데 저놈들의 탐욕 때문에, 결과적으로 내가 움직여야 했다.

무려 전 대마법사라는 고급 인력을 말이다.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선 고블린 사체 사이에 묻어 버리고 싶은데.

시몬 밀러가 보낸 거라 그럴 수도 없었다.

“너희는 영지에 돌아가서 나랑 따로 좀 보자.”

“……옙!”

* * *

토벌대는 영지로 귀환했다.

시몬 밀러가 토벌대를 환대해 주었다.

똑똑.

방에서 쉬고 있는데, 누군가 노크를 했다.

“누구야?”

마리나가 대답했다.

“단 록벨런 기사님이십니다.”

단?

기사들에게는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상여금도 받았기에 당연히 거리로 나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긴 또 왜 온 거지.

“들여보내.”

문이 열리고, 단이 방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도련님, 묻고 싶은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뭔데.”

“도대체 정체가 뭡니까?”

“전직 대마법사. 델 로안의 환생.”

“장난치지 마시고, 제대로 대답해 주십쇼.”

단은 진지한 얼굴로 내 대답을 묵살했다.

장난 아닌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안 믿으니 어쩌겠는가.

“내가 말해서 뭐 해. 직접 봤잖아. 마법 쓰는 거.”

“제가 헛것을 본 게 아니었군요.”

“레드캡이 헛것에 찔려 죽었겠냐.”

나는 너스레를 떨었다.

레드캡의 사체는 내가 따로 챙겼다.

희귀한 소재다.

아공간 주머니 자리를 차지할 가치가 있었다.

단은 말을 고르듯이 우물거렸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저는 도련님과 함께 싸우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알았겠는가.

100년이 넘도록 마법만 쓰던 내가 검을 잡을 줄은.

단이 말을 이었다.

“오러를 배우시겠다고 저를 찾아온 날, 그때부터 뭔가 달라지셨던 것 같습니다.”

“그때 환생했거든.”

단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얘가 징그럽게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더 이상 숨기실 필요 없습니다.”

“뭘?”

환생하고 날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낸 적이 없구먼.

뭘 숨긴단 말인가.

“도련님께서는 이미 저를 충분히 사로잡으니까요.”

사로잡아?

내가 언제?

영문을 모르겠다.

일단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지 들어나 보자.

내가 턱을 괴자, 단은 자세를 바로 했다.

무슨 의식이라도 하는 것처럼, 발로 바닥을 쿵쿵 두드렸다.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기사, 단 록벨런. 도련님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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