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
2018년 3월 초, 정부세종청사.
유리로 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실의 문이 열렸다.
“벌써 왔어?!”
집무 책상에 앉아 있던 안순익이 벌떡 일어났다.
윤수혁이 들어오고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장관님.”
“으하하하, 그러지 말고 일단 앉지. 자, 이거 한 잔 어떤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안순익의 손에 샴페인이 들려나왔다.
“윤 실장하고 먹으려고 아껴뒀던 거야. 한 잔만 들어!”
“반 잔만 마시겠습니다.”
“그래, 반 잔도 좋지. 자!”
어느새 잔까지 꺼낸 안순익이 샴페인을 따라 건넸다.
그의 얼굴이 웃음으로 환했다.
20년 만에 문체부의 장관이 됐다. 그것도 윤수혁 덕분이었다.
그가 아니라면 이루지 못할 일이었다.
설령 운 좋게 정당의 주요 직책을 맡을 수도 있겠지만, 자신은 일회용으로 쓰이고 버려질 게 뻔했다.
안순익의 나이가 벌써 여든다섯이었다.
사람들이 쓰기 꺼려했다.
고집이나 일처리 방식에서 트러블이 있기도 했고, 혹여나 노환으로 쓰러지면 사후처리가 껄끄럽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년 만에 또 다시 장관직을 맡게 되었다.
헌정 사상 최초였다.
윤수혁의 나이가 깨지지 않을 최연소 기록으로 남은 것처럼, 안순익의 나이도 기록에 남았다.
그렇게 윤수혁이 잔에 입을 댄 후.
“첫 업무 알려드리려고 왔습니다.”
윤수혁이 평소처럼 말하자, 안순익이 엷게 웃었다.
“사람 참, 일하는 스타일은 한결 같네. 처음이나 지금이나······, 그래서 할 일이 뭔가?”
“여론 환기입니다.”
“으허허, 내 욕이 많아서 그런가?”
윤수혁의 나이가 너무 어려서 임명 때 논란이 되었듯이, 여든다섯이나 된 안순익의 나이도 여전히 말이 많았다.
“따지자면 장관님 욕보다는 정부하고 대통령 욕이 있었죠.”
“흐흐, 그럼 내가 할일은······. 평창올림픽 정리인가?”
안순익이 눈치껏 묻자, 윤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문체부, 한체대, 대한체육회, 빙상연맹까지 싹 다 털어주시면 됩니다.”
“어휴, 첫 임무가 어렵네.”
“챙겨주실 사람 많으십니까?”
“내가 누굴 챙겨, 윤 실장만 있으면 되지.”
말하면서 안순익이 시원하게 웃었다.
윤수혁의 후원을 받았었다.
그 덕에 어디 가서 아쉬운 소리 할 필요가 없으니, 기관장이나 후원기업에게도 져줄 필요도 없었다.
“대신에 인맥 넓힌다고 얼굴을 팔고 다녀서 말이야. 젊을 때 후배도 몇 있고.”
“어려우십니까?”
그 말에 안순익이 집무책상에 놓인 까만 자개명패를 바라봤다.
시선을 피하는 게 아니었다.
윤수혁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었다.
“이 자리가 내 정치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네. 아니, 인생의 마지막이겠지.”
그런 안순익이 다시금 윤수혁을 바라보면서 샴페인 잔을 들었다.
“죽기 전에 이름 석 자 근사하게 남기겠네. 내가 훌륭한 장관 뽑았다고, 칭찬 듣게 해줌세.”
그 말에 윤수혁이 미소지었다.
그래서 안순익을 후보자로 추천했었다.
다른 후보자에 비해서 유독 길었던 인사청문회 기간을 버티고, 고령의 나이와 과거 전적과 관련된 여러 비난을 견뎠었다.
8년 전 안순익이 보여주었던 정치에 대한 욕망과 지난 8년 동안 해온 일을 알기에 밀어붙인 것이었다.
샴페인 잔을 든 윤수혁이 짤막하게 말했다.
“수고해주세요, 장관님.”
* * *
며칠 뒤.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바쁘실 텐데······.”
마주하고 앉은 손기택 검찰총장의 말이었다.
그가 내 옆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 친구만 보내도 괜찮은데 말입니다.”
전직 검사이자, 현 공직기강비서관인 진도환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제가 와야 검찰의 위신이 서지 않겠습니까? 비서관 혼자 보내면 군소리도 나올 텐데요.”
내 말에 손 총장이 푸근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덕분에 체면이 섭니다.”
그 말에 진 비서관이 씩 웃었다.
“총장님 되시더니 부드러워 지셨습니다.”
“자네도 비서관 되니 얼굴이 폈어.”
“회사 다닐 때보다 낫습니다. 맨날 위에서 쪼인트 까이다가······. 아, 일 얘기를 하셔야죠. 저희 실장님 바쁘십니다.”
진 비서관의 말에 손 총장이 어이없다는 듯 웃고는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여기, 기강 해이 명단입니다.”
나는 서류 뭉치를 받아서 곧장 진 비서관에게 건넸다.
여기서부터는 진 비서관의 일이었다.
진 비서관도 자연스레 서류를 받아 내용물을 훑어 나갔다.
“나갈 사람은 다 나간 거 맞습니까?”
“내가 총장 후보자로 내정되자마자 다들 그만뒀지. 무슨 염치가 있다고 버텨? 연수원에서 대검으로 돌아오는데 말이야.”
“그럼 남아 있는 사람들은 뭡니까? 같은 라인인데?”
“동아줄 찾는 놈들이지.”
“아······.”
진 비서관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쉽게 이해했다.
국회에서도 같은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전당대회에서 예상치 못한 사람이 당권을 잡게 되면, 아랫사람들은 도망가거나 새로운 사람을 찾곤 했었다.
그리고 정계에서는 대부분 버텼다.
그만둬도 변호사를 할 수 있는 건 판검사뿐이었으니까.
“그럼 이 명단만 정리하면 되는 겁니까?”
내가 묻자, 손 총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머지는 싹 정리했습니다. 연수원에서 이갈면서 준비했지요.”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저보다 실장님께서 더 고생하셨는데······.”
그의 대답이 들려오던 중에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비서실이었다.
- 산자부 차관 전화입니다.
“바꾸세요.”
그러자 짧은 신호음이 지나고, 익숙한 목소리가 건너왔다.
- 실장님, 산자부 오준범 차관입니다. 갑자기 연락드려서 죄송스럽지만······.
“괜찮습니다, 말씀 하세요.”
- 한국CM에서 비공식적으로 공장을 철수시키겠다는 의사를 전달해왔습니다.
국내에 몇 없는 자동차 공장을 말하는 것이었다.
“군산 공장입니까?”
- 아, 네. 알고 계셨습니까?
이 또한 과거의 일이었다.
시기를 따지자면 지금 생이 좀 늦은 편이었는데, 정권 교체의 타이밍을 기다린 것으로 보였다.
정부 인선이 마무리 된 게 며칠 전이었으니까.
“일단 먼저 말씀 하시죠.”
- 네, CM에서 빠른 시일 내에 정부 지원금 합의를 하지 않는다면, 공장 폐쇄를 공식 발표하겠다는 스탠스를 취하고 있습니다. 비공식 라인으로 알린 거라서 우선 실장님께 연락드렸는데, 대응을 어떻게 할지······.
“정석대로 가시죠.”
- 실장님의 정석을 말씀하시는 거지요?
그가 안다는 듯 물어왔다.
“네, 굳이 혈세 낭비할 필요 있겠습니까? 오 차관님은 정석대로 업무 계획 준비해주세요. 회계 준비, 지원 규모까지 전부 다.”
- 알겠습니다, 실장님. 보고는 정식 접촉 올라오면 새로 하겠습니다.
“그럼 수고해주세요.”
전화를 끊자, 손 총장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바쁘신 모양입니다, 실장님.”
“예, 일이 생겨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회사까지 와주신 것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쁘신 분이 아니십니까?”
그 말에 서류를 보던 진 비서관도 고개를 들었다.
“벌써 가십니까?”
“예, 먼저 가볼 테니 두 분께서 같이 수고 좀 해주세요. 괜히 배웅하러 나오진 않으셔도 됩니다.”
“아, 네. 여기 남아서 마무리 짓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손 총장이 꾸벅 고개 숙였고, 따라 일어선 진 비서관의 허리도 숙어졌다.
둘의 인사를 받으며 총장실을 나오자, 경호원의 인사도 이어졌다.
청와대 경호처에서 특채로 뽑은 김백현 팀장이었다.
“예정보다 이른 시각입니다. 어디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집무실로 돌아가죠.”
"알겠습니다, 집무실로 모시겠습니다."
그가 무전을 하는 사이, 나도 이동하면서 스마트폰을 꺼내 연락처를 뒤졌다.
그렇게 전화를 걸자마자, 곧장 상대방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 박민표 국장입니다.
“한국CM 군산 공장 회생 관련해서 미래자동차나 케이모터스 책임자들하고 접촉 좀 해주세요.”
- 혹시 군산 공장 적자와 관련한 사항입니까?
갑작스런 질문에도 그가 금방 알아들었다는 듯 대답했다.
그러나 요점은 빗나갔다.
“적자는 끝났고, 폐쇄의 건입니다.”
- 그럼······ 미래자동차하고 케이모터스 책임자하고 나눌 대화는······.
“공장 매입 계획 논의할 겁니다. 산자부 오 차관님하고 협의해서 지원금 규모하고 공장 내부 사정 파악하세요.”
- 아! 알겠습니다. 저 실장님, 지원금이라고 하시면, 실장님 사유재산까지 고려해도 되겠습니까? 군산 공장 분석 자료가 있긴 한데, 규모가 적은 편이 아니라서 기업이 강매하기에는······.
그의 길어지는 이유를 끊고 대답했다.
“그렇게 하세요.”
아직 내 돈은 많았다.
재단에 출연시킨 게 수천억이긴 했지만, 축소가 어려운 자산을 주로 기부했기에 실질적으로 갖고 있는 재산은 여전했다.
한국 제일은 아니더라도, 열 손가락 안에는 들어갈 것이었다.
- 네, 알겠습니다! 바로 집무실로 돌아오십니까?
“지금 가고 있습니다.”
- 그럼 도착 전에 대관팀 전부 대기시켜놓겠습니다. 천천히 오십시오.
이윽고 대기 중인 차량이 보였다.
열린 뒷문에 오르고, 좌석에 몸을 묻자 긴장이 조금 풀어졌다.
이제야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났다.
정부 인선이 모두 마무리 됐고, 검찰도 손아귀에 들어올 예정이었다.
그런 것에 비하면 공장 하나 정리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대통령 비서실장이 괜히 2인자겠는가?
정치권에 있을 때는 한두 다리 건너서 압박해야 했지만, 여기서는 지시하면 그만이었다.
물론 어려운 게 있긴 했다.
바로 국경 바깥의 일.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쓴웃음이 절로 났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자마자, 낯설지 않은 중국어가 들렸다.
대꾸를 못하는 사이, 알아 들을 수 있는 한국어가 건너왔다.
- 왕뱌오 상무위원님의 통역관 장윈입니다.
“그 때 중국에서 뵀던 분인가요?
- 맞습니다. 상무위원님의 통역을 그대로 전달할 예정이니 편하게 대답해주십시오.
“아, 반갑습니다, 어쩐 일로 연락을 주셨습니까?”
그러자 곧장 낭랑한 통역이 날아들었다.
- 이번에 미국으로 첫 해외 시찰을 나간다고 들었습니다.
“예?”
- 아닙니까?
“해외 시찰이 아니고, 이달 월차 쓴 겁니다. 근데 그게 어떻게 중국까지······.”
- 중국으로 먼저 오십시오.
단호한 대답에 고개를 저었다.
“무슨 용무 때문에 그러십니까? 제 개인 휴가입니다만.”
- 전 미 대사나 대통령 보좌역과 미팅하는 게 휴가라면 더더욱 중국에 먼저 오셔야 할 겁니다.
얼떨떨해서 대답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거절로 알아들었는지 다시금 중국 특유의 성조가 담긴 말이 이어졌다.
- 지금이 당신의 추를 올려놓을 때입니다. 나와의 약속을 잊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 뜨끔했다.
사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에 건너갔을 때, 약속을 하나 했었다.
작은 별실에서 협의하면서 나온 사적인 약속이었다.
국익과 관계없는 것에 한해서, 개인적인 영역에서 중국을 우선하겠다고 했었다.
그것도 단 한 번.
그걸 지금 언급할 줄이야.
통역의 말처럼 월차를 구실로 미국에서 요인들과 미팅을 갖기로 했었다.
대통령의 미국 방문 일정이 5월로 내정된 탓이었다.
그런데 중국이라니.
목소리가 다시금 건너왔다.
- 대접은 후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잠깐을 고민했지만,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알겠습니다.”
중국 국가서열 8위의 거물과 척을 질 순 없었다.
국가적인 규모에서도, 개인적으로도 나는 그의 상대가 되질 못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약속을 수락했으니 할 만한 변명도 모자랐다.
그 때, 목소리가 다시 건너왔다.
- 원한다면 북측 인사도 소개시켜줄 용의가 있습니다.
“······!”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국내 기반을 확실하게 만들어두느라 대북 문제를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 마무리도 됐다.
이 시점에 북한이라는 외교 카드만큼 좋은 게 더 있을까?
총탄을 돈주고 사는 게 아니라면, 정권 유지에 요긴하게 써먹을 수도 있었다.
좋은 기회였다.
다만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만, 또 사적인 약속을 하기는 부담이 됩니다.”
- 이건 우리나라의 외교를 위한 겁니다.
추상적인 말이었지만, 충분히 알아들었다.
나와의 교류가 중국의 외교에 도움이 된다는 뜻이겠지.
아마도 중미 간의 관계도 상관이 있을 터.
그러나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내가 지는 입장이고, 이용가치가 있을 때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국익에 해가 되지 않는다면, 주신 기회를 감사히 쓰겠습니다.”
- 좋습니다, 그럼 중국에서 봅시다.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연락처를 뒤져서 얼른 통화버튼을 눌렀다.
얼른 이 사실을 논의해야 했다.
- 박민표 국ㅈ······.
“외교부하고 통일부장관님 일정 확인하고 자리 잡아주세요.”
전화 받자마자 말했는데, 박 국장이 눈치 빠르게 대답해왔다.
- 당장 말씀이십니까? CM 공장 건은 어떻게······.
“대관팀이야 어차피 사장급 미만일 테니 국장님이 오 차관님하고 협의해서 처리하세요. 장관님들 지금 청사에 계십니까?
- 확인해보겠습니다, 전화 끊지 말고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음······, 네. 두 분 모두 청사에 계십니다.
“내가 들렀다 갈 테니까 장관실로 미리 연락 해두세요.”
-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화를 끊자, 보조석에서 김 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행선지를 서울 청사로 변경하시겠습니까?”
역시나 눈치가 빨랐다.
“예, 외교부 먼저 가시죠.”
그러자 이번에는 운전석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그럼 외교부 청사 별관으로 가겠습니다.”
국회 등원 전부터 함께 했던 영석이였다.
“그래, 가자.”
좀 더 편해진 말로 대답하고, 긴장을 풀면서 기대어 앉았다.
몇 번의 연속된 통화에 신경이 곤두섰던 모양이었다. 차창 너머의 풍경도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언제 한남대교를 탄 것인지, 한강 전경이 보였다.
날씨가 제법 청량한 모양이었다.
한강의 결마다 햇빛이 튕겨나가 반짝거리는 모습이 선명했다.
눈이 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