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
2017년 9월 중순.
[혁신정부 문화예술계 화이트리스트 제작해(속보)]
[화이트리스트에 오른 전현직 문화예술인 61명, 22억 정부 지원받아]
[검경, 화이트리스트 조사 착수···허위사실 가능성 있으나, 관련자 권한남용 여부 파악할 것]
안순익 문화특보가 민간혁신위원회에 있을 때 찾아냈던 자료를 드디어 써먹었다.
정부 신뢰도는 새정치당의 지지율과 함께 동반 하락했다.
그러자 의석 몇 개 없던 새정치당의 대선 후보가 현 대통령 이민수의 사퇴를 종용했다.
그럴 줄 알았다.
종종 있는 일이었고, 과거에도 많았던 일이었다.
여당의 대선 후보가 흠 많은 대통령을 물고 늘어지는 건 이미 보수와 진보 가릴 것 없이 반복됐던 역사였다.
임기 몇 개월 안 남은 대통령보다, 앞으로 5년 남은 대통령의 임기가 더 중요하니까.
그래서 현 정부를 공격해서라도 가는 길을 달리하고, 지지율을 높이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새정치당에 가망이 있는 건 아니었다.
조성현 대선 후보가 4자구도에서 40%라는 지지율을 획득했다.
나머지 후보가 45% 정도.
그 나머지 중에 희망민주당의 황택근 후보가 36%를 기록하는 바람에 새정치당이나 진성애국당의 대선 후보는 군소후보처럼 취급됐다.
주로 언급되는 지지율 조사도 조 후보와 황 후보의 양강구도였고.
그럼에도 새정치당에서 대통령을 탈당시키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살 길을 찾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내년 6월에 있는 지방선거와 재보궐선거를 위한 밑작업이었다.
기존 이미지 탈피, 지지율 반등 같은 효과를 내는 과정이기도 했고.
이는 모든 정당이 바라보는 목적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당장 후보자들과 접촉하고 계획을 짜는 건 아니었지만, 미리 준비할 수 밖에 없었다.
대선의 기회는 5년에 한 번 뿐이니까.
그래서 나 또한 최선을 다했다.
물론 내게 대선은 단순한 쇼의 기회가 아닌, 정권 탈환의 순간이겠지만.
“의원님, 문화예술인 지지성명서 왔습니다.”
박민표 보좌관의 보고에 상념이 깨졌다.
“성명서는 조 본부장님한테 넘기고, 문화예술인 식사 스케줄 잡으세요.”
조금 이른 시기였지만, 지지 성명서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천만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 감독을 필두로 모인 수십 명의 문화예술인부터 올림픽 메달리스트인 원로 체육인을 중심으로 모인 체육계 수백 명까지.
당연히 그들 모두 내게 후원 받은 이들이었다.
직접적인 후원이 아니더라도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단체를 통해서 우회적으로 지원을 했었다.
물론 가시적 성과가 필요한 경우에는 개인적으로 장학금을 내기도 했고.
그리고 다른 종류의 지지자들도 있었다.
바로 폴리페서(Polifessor)라고 불리는 정치 참여 교수들.
이미 그들 일부를 대선캠프 자문으로 대거 임명한 상황이었다.
사회적 위치도 있고, 그간 연구한 능력도 있는 이들이라서 데려다 쓰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건 다루기가 쉽다는 점이었다.
많은 교수들이 학생시절부터 학원재단의 서열화를 뼛속깊이 배운 사람들인데다가, 정치에 대한 욕망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없는 걸 내가 갖고 있었다.
바로 연구를 지원하며 발전시켜줄 정치권력과 자금.
그래서 인력 수급도 쉬웠다.
애초에 대선캠프 경력을 바라는 이들이 꽤 많은데다가, 조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높은 덕분이었다.
캠프 휘하 민간자문기구의 자리가 꽉 찰 수밖에 없었다.
비상임 구성원까지 더하면 약 500명이 넘는 숫자가 차고 넘쳤다.
그들 전부가 교수는 아니었지만, 폴리페서를 자처하는 웬만한 석박사들 대다수가 자문기구에 발을 담그게 됐다.
그들이 들어올 자리도 많았다.
예컨대 민생사업정책위원회, 일자리창출위원회, 교육혁신위원회 등등.
이런 기구만 서른 개가 넘었기 때문이었다.
위원회별 전문화를 통해 심도 깊은 대책 마련이 대외적인 주목적이지만, 나는 그 외의 목적 달성을 위해 위원회를 세분화했다.
더 많은 위원장과 부위원장, 간사 등의 직책을 만들고, 교수들의 성향을 고려하여 파벌을 분리하기 위함이었다.
캠프 구성원에는 정치교수도 많지만, 신념 있는 학자도 적잖은 탓이었다.
그렇게 대선 캠프 진행을 살피는 사이, 물러갔던 박 보좌관이 다시 나타났다.
“의원님, 오늘 국토위 전체회의 참석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불참하기로 하지 않았어요?”
중요하거나 급한 일이 있을 때는 위원회 일정은 참여하지 않는 경우가 꽤 많았다.
각 당의 대선 후보들이나 당대표들이 그랬다.
직책이 직책이다보니, 국회 업무보다 대외적인 일이 많아서 국회 참석률 저조한 것이었다.
법안 발의나 민원 해결도 당연히 아주 적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들보다 국회 업무를 좀 더 보긴 했지만, 나도 대표 발의한 법안이 열 개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통과되기 힘든 선심성 법안을 더한 숫자였다.
여태 통과된 건 단 두 개.
그것도 16년도에 처리된 게 대부분이었고, 올해 초에는 하나의 법안만 다뤘었다.
당연히 대선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박 보좌관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의원님. 방금 전화가 왔는데, 의결정족수 모자란다고 국토위원장님께서 꼭 좀 참여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가야겠네요.”
어쩔 수 없었다.
각종 의사 결정에 필요한 최소 참석 인원을 뜻하는 게 의결정족수였다.
한 단어로 머릿수.
그게 부족하면 회의 진행부터 법안 심사와 의결도 불가능했다.
다들 대선에 국감이 겹쳐 빠진 모양이었다.
내가 그랬듯이.
그러나 이렇게 되면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전체회의에서 진행할 법안 중에 내 이름이 공동 발의자로 올라간 게 수십 개는 되기 때문이었다.
“제 이름 팔아서 의결정족수 맞추시고, 회의 계획서하고 질의서 챙겨 주세요. 참, 법안은 몇 개나 상정한대요?”
“다해서 171개입니다.”
“딴 건 없고요?”
“네, 국감하고 대선을 고려한 거라서 그 외에 다른 일정은 없습니다.”
“점심 전에 끝나겠네요.”
무려 171개나 되는 법안이지만, 국회에선 많은 숫자가 아니었다.
이미 소위원회에서 심사를 마친 뒤고, 전체회의에서는 결과만 논하기 때문이었다.
법안 하나에 떠드는 시간은 1분도 되질 않는다.
10시에 개회 예정이니, 늦어도 오후 1시에는 끝나리라.
시계 확인을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개회 전에 오늘 전체회의 특강 좀 듣죠, 오 비서관님 회의실로 오라고 하세요.”
“30분 밖에 안 남았는데, 잠깐이라도 쉬시는 게 어떠실지······.”
박 보좌관이 나를 걱정하듯 말했다.
안 그래도 하루 16시간 이상을 일에 치여 살고 있었다.
지방 출장 잠깐 다녀와도 하루 절반이 가고, 대선 캠프 계획서를 읽고 검토하는데도 하루가 꼬박 흘러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잠깐 쉬는 것보다 이미지를 유지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상임위 전체회의는 상시 녹화되고 국회TV로 방송되기도 했고.
그런 자리에서 실수할 여지를 만들어둘 생각은 없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 때의 실수가 차후에 구설수에 오르게 만들 가능성도 있었다.
이 자리를 차지하기까지, 내가 바친 시간과 인생이 얼마인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목숨까지 내놓고 사방팔방 뛰어다녔었지.
그것도 여러 번.
나는 아직 서 있는 박 보좌관을 향해 말했다.
“전체회의 들어가는데 알고는 들어가야죠.”
“······그럼 바로 회의 잡겠습니다.”
“좋습니다.”
“너무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의원님 쓰러지시면 대선 캠프 올스탑 될 겁니다.”
“그런 생각 예전에도 했었는데, 아니더라고요.”
“네?”
“있었습니다, 그런 시절이.”
장세룡 밑에 있던 그 때가 어렴풋하게 지나갔다.
내가 필요할 거라고 믿었던 시절.
그러나 희미한 과거는 금세 지워졌다.
당장의 일처리만 해도 바빴다.
나는 대선 캠프의 총괄본부장실에 앉아 있었다.
아직 기다리고 있던 박 보좌관을 보면서 일어났다.
“자, 갑시다.”
* * *
희망민주당 대선캠프.
공보본부 팀장 한 명이 여론조사 결과를 브리핑했다.
행복한국당 조성현이 앞서고 희망민주당의 황택근이 뒤따르는 모습.
그래프와 숫자가 입력된 도표를 보여주던 팀장이 PPT 화면을 바꾸면서 입을 열었다.
의석을 가진 정당의 대선 후보들이 나타났다.
새정치당과 진성애국당까지 포함된 4인의 조사 자료였다.
“현재는 다자구도에서도 4.6%p의 차이를 보입니다.”
“그게 평균입니까?
“최소 수치입니다.”
“3개 기관 중에 말하는 겁니까?”
“네, 한국리서치가 4.6%로 나왔습니다.”
“그럼 최대는 몇인데요?”
잘 대답하던 팀장이 살짝 머뭇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8.3%p입니다.”
큰 격차였다.
유동층을 고려해도 8%의 비율은 참고 넘어가기 힘든 수치였다.
웬만한 사건이 아니라면 뒤집기 어렵다는 뜻.
그사이, 다른 간부 하나가 물었다.
“부동층 비율은요?”
“행복당의 경우 약 83%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못해도 17% 정도는 움직일 수도 있겠군요. 표로 환산하면 어느 정도 승산이······.”
그 사이, 묵묵히 듣고 있던 종합상황실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상황이 너무 좋지 못했다.
간부가 하는 말은 오로지 희망과 가능성뿐이었다.
실제로는 어렵다는 뜻.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다만 함부로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서 빙빙 돌리는 것이었다.
종합상황실장이 한숨을 뱉었다.
다른 수를 내야만 했다.
이대로 간다면, 정권 탈환은 앞으로 5년이나 더 멀어지게 될 터.
이미 MB정부와 혁신정부의 집권으로 인해 진보 정당은 10년이나 넘게 여당이 되질 못했었다.
만약 올해 대선까지 놓치게 된다면 앞으로 5년을 더 기다려야 할 터.
그 5년의 사이에는 제7회 지방선거와 21대 총선,8회 지방선거가 있었다. 매해마다 있는 재보궐선거는 말할 것도 없었고.
지방 선거가 무려 두 번이나 있었다.
야당 입장에서는 더 불리해질 게 뻔했다.
여당 후보자로서 정부 지원을 약속하는 것만큼 표심 움직이기 쉬운 공약이 없었다.
그게 새정치당이 분열했음에도 의석을 확보하고 있는 이유기도 했고.
종합상황실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명색이 수권정당인데, 이게 무슨 꼴인지······.’
그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아무리 정권 심판론을 외치며 진보를 주장한다 한들 그것도 효과를 보긴 어려웠다.
이민수처럼 못하거나, 그도 아니면 윤수혁 같은 위인이 나타나는 게 아니라면 상황은 유지되기 마련이었다.
대선이 아닌, 총선이나 지방선거에서는 유권자의 지역을 우선해줄 사람을 원하기 때문이었다.
설령 그 사람이 약간의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돈 타오겠다고 하면 지역 유지와 원로들은 좋아라하면서 표를 주곤 했다.
현실적인 지원에 비하면 구설수나 사적인 부정 정도는 별 것 아닌 걸로 치부되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종합상황실장의 눈이 번뜩거렸다.
‘가벼운 부정이 아니라면?’
그가 입맛을 다셨다.
‘센 거 한 방이면 격차 뒤엎는 것도 가능할 텐데······.’
물론 그 부정이 의혹에 그쳐선 안 됐다.
물증도 없이 주장하기만 한다면, 단순한 네거티브전이 될 게 뻔했다.
매 선거 때마다 지속되어온 힐난에 불과할 터.
완전하게 선거 판도를 뒤집기 위해서는 확실한 물증이 있어야 했다.
또한 국민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싫어하는 비리가 터져야 했고.
이윽고 종합상황실장의 미간에 고민이 한 겹, 한 겹 더해지듯 주름이 잡혔다.
그의 입술이 작게 중얼거렸다.
‘비리는 하나만 있으면 되겠고, 보자······. 뒤탈 없는 놈을 데려다가 음성 녹음이나 문자를 하나 만들면······.’
종합상황실장이 차곡차곡 계산했다.
회의실에서 여론조사 결과 분석 브리핑이 거의 끝나갈 무렵까지.
그는 한참을 집중했다.
이윽고 회의실 전등이 들어오고, 빔프로젝트 영상이 파랗게 변할 때야 종합상황실장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이 떨리고 있었다.
‘······일단은 준비만 해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