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181화 (181/191)

# 181

일본 나가타초.

자민당 중의원 고토 요시히로가 국회의사당에 들어서던 참이었다.

띠리리-

전화 벨소리에 스마트폰을 꺼낸 그가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다.

동시에 상체가 살짝 기울어졌다.

화면에 상관의 이름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바로 일본 총리.

“전화 받았습니다, 총리님.”

- 자네 뭘 하고 다니는 거야?

“무슨 말씀이신지······.”

느닷없이 나온 꾸중에 고토 요시히로가 당황하며 뒷말을 삼켰다.

자신이 하고 다니는 일은 많았다.

일본 내의 정세에 개입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본의 이름을 빌려서 다른 나라에도 간섭하며 온갖 국책사업까지 진행했었다.

한마디로 국정과 외교를 다 해먹는다는 뜻.

원래였다면 일본 정부가 할 일이었으나 크게 상관없었다.

국회도, 정부도 모두 자신이 실세로 있는 자민당이 차지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자신의 상관이자, 현 총리의 파벌이 지배한 상황.

거칠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다.

오로지 총리만 제외하고.

- 몰라서 묻나?

스마트폰 너머의 물음에 고토 요시히로가 움찔했다.

순조로웠던 많은 일들 중에 유일하게 해결되지 않았던 게 하나 있었다.

바로 윤수혁.

대선 후보인 조성현을 주무르기 위해 접근했는데, 윤수혁이 대화를 거부했었다.

정확히 말하면 요구를 거절했고, 보복 차원에서 전방위적으로 윤수혁에게 압박을 넣은 것이었다.

재단의 국제 업무를 방해하거나 일본의 언론으로 대선 캠프를 비난하는 일 등을 했었다.

그러나 이는 당연한 조치로, 총리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잘나봤자 윤수혁의 배경은 한국에 불과했으니까.

더욱이 이런 일도 종종 있었다.

분수를 모르는 이에게 주제를 알려주는 건 이미 숱하게 해왔던 것이었다.

한국 자체가 다룰 만한 나라기도 했고.

그래서 김정환과도 접촉했고, 윤수혁을 다루려던 것이었다.

둘 다 틀어지긴 했었지만.

이내 고토 요시히로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총리대신. 한국에서의 일이 있긴 하지만, 크게 걱정하실 정도는······.”

- 마무리 지어.

“네?”

- 한국에서 하는 거, 마무리 짓고 손 떼라고 했다.

“크게 문제될 것도 없습니다. 이 정도 일은 충분히 제 선에서······.”

- 너한테 무리다.

총리의 단호한 말에 고토 요시히로가 이으려던 뒷말을 날려 보냈다.

총리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 미 대사한테 전화가 왔다.

“아······.”

고토 요시히로의 입이 벌어졌다.

미국이라니.

총리에게는 굴욕이나 마찬가지인 일이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스마트폰을 양손으로 붙들고 있던 고토 요시히로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윽고 전화가 끊어졌다.

* * *

밀레니엄 서울 힐튼, 레스토랑 겐지.

“미국을 움직이다니······.”

안순익 문화특보가 말끝을 흐리길래 웃어줬다.

“움직인 건 아닙니다. 제재도 아니고 중재 요청한 게 고작인데요.”

“중재도 대단하지. 일본이 눈치 볼 나라가 몇 개나 있다고?”

맞는 말이었다.

경제 대국인 일본이 눈치 보는 나라가 몇 개 있었는데, 그 중에 가장 센 나라가 바로 미국이었다.

경제, 국방 할 것 없이 수치화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최고인 나라.

한마디로 세계 최강국.

그리고 일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는 국가도 바로 미국이었다.

일본이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약소국이 열강 앞에서 작아지듯, 일본도 미국 앞에서는 위축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곧장 존 패터슨 미 대사에게 전화를 했었다. 따지자면 임기 몇 개월 남지 않은 공무원이지만, 그가 어디 보통 사람인가?

국무부 고위 공무원 출신의 미 대사였다.

나와의 관계가 돈독하기도 했고.

그사이, 안 특보의 물음이 이어졌다.

“그래서 일본에서 사과 전화는 왔나?”

“설마요.”

“그렇지? 드럽게 가오 잡는 것들이 숙이고 들어올 리가 없지. 그럼 미국은 뭐라던가?”

“미국 입장에선 우방국끼리 싸우는 게 보기 좋은 그림은 아니니까, 조금 강경하게 부탁했답니다.”

“그래서 일본이 얌전해졌구만?”

“그것도 잠깐일 겁니다. 18대 대선 때 잠수 탔다가 다시 연락해온 것처럼 나중에 접근하겠죠.”

“총본이야 괜찮지만, 조 후보한테 연락하면 어쩌고?”

“그건 괜찮습니다.”

내가 조 후보를 꽉 틀어쥐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후보자 개인의 실수를 막기 위해서 모든 일을 계획하고 통제했다.

대면하거나 전화, 이메일로 접촉하는 모든 것을 확인하고 있었다.

조 후보의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4촌 이내의 친척까지.

그들이 이미 저지른 일과 저지를만한 것도 전부 정리했다.

일반 국민들도 쉽게 저지르는 위장전입이나 부동산 다운계약서 작성, 세금 신고 누락 등등 흠이 될 만한 모든 것들을.

그래서 고토 요시히로를 만나기가 더 어려웠다.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데 계획이나 준비도 없이 주요 인물을 만나기가 벅차기 때문이었다.

물론 18대 대선을 말아 먹은 요인이라는 점이 가장 컸지만.

어쨌든 뭔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무슨 용건인지를 물었고, 절차를 밟아 증거 남기기를 원했으며, 김정환 의원과 통화했던 것이었다.

결과는 금방 나왔다.

미국의 전화 한 통에 고토 요시히로가 입을 다문 것.

아쉽게도 그에게 징벌을 가하거나 조금의 압박도 주지 못한 채 중재한 것으로 끝났지만, 이걸로 만족했다.

아니, 만족해야만 했다.

내가 서 있는 나라가 그 정도 밖에 안 되기 때문이었다.

한국은 강대국이 아니었다.

한강의 기적을 이뤄내고 날로 발전하고 있지만, 인접국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약소국이었다.

그게 두고 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내가 정계를 휘어잡는데 6년이 걸렸고, 행정부까지 통째로 손아귀에 넣는 건 앞으로 6개월이면 가능하지만, 국가 단위로 보자면 그것도 별 거 아니었다.

어쨌든 한국 내에서 지지고 볶는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대화하는 사이, 기다리던 사람들이 들어왔다.

배우와 가수였다.

그것도 국내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인들로 나잇대도 30대부터 50대로 구성된 연예인들.

“반갑습니다.”

일어나서 악수를 건네자, 그들의 허리가 굽어졌다.

“영광입니다, 윤수혁 의원님.”

그렇게 총 다섯 명과 악수를 나누고, 직사각형 모양의 테이블에 자리했다.

앞에 일식 코스가 깔려 있었는데, 연예인들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대선 운동을 위한 사전 미팅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임무는 대선 캠프에서 마스코트로 활동하며 지지율을 바짝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애초에 정계에서 연예인들을 쓰는 주된 목적이 홍보이기도 했고.

나는 굳어있는 그들에게 음식을 권했다.

“일단 편하게 드시면서 말씀 나누시죠.”

“아, 네. 잘 먹겠습니다.”

그렇게 일식 코스 요리를 먹으면서 근황 얘기를 나눴다.

내게 연예계는 일종의 가십거리에 불과했으므로, 대화 주제는 자연스럽게 대선이 됐다.

어차피 이 자리에 모인 배우와 가수도 정치 활동을 할 예정이었고.

이건 낯선 일이 아니었다.

원래부터 전당대회나 총선, 지방선거, 대선 등 선거 때마다 연예인들이 종종 지지 선언을 해왔었다.

자의도 많았지만, 사전 모임을 갖는 경우도 적잖았다.

기본적으로 정치 신념이 뚜렷한 이들이 캐스팅됐는데, 그 중에서도 정치에 관심을 뒀거나 정치권의 힘이 필요한 사람이 자주 이 바닥에 발을 들여놓곤 했었다.

가장 많은 경우는 정치질을 하고 싶은, 명예욕과 정치욕에 목이 빳빳한 50대 이상의 남성들.

당연히 그 사람들은 전부 제외됐다.

내가 바라는 건 목에 힘주는 사람이 아니라, 홍보용으로 적합한 모델이었으니까.

그래서 안 특보가 고르고 골라서 이 자리까지 데려왔다.

전과 여부와 평소 생활, 가족 관계, 지인까지 모두 확인한 것이었다.

이윽고 행복당이 나아가야 할 점을 당부하며 식사를 마칠 무렵.

번뜩 떠오른 게 있어서 입을 열었다.

“가장 중요한 걸 잊을 뻔 했네요.”

“······?”

훈계 듣는 아랫사람처럼 가만히 있던 그들의 눈이 내게 확 몰렸다.

“대선 전후로 일본 일정은 잡지 마세요.”

“······일본이요?”

국민적 인기를 얻는 여성 가수가 되묻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행복당 지지 활동하시면 일본에서 일하시기 힘들 겁니다. 아니, 어쩌면 일본 일정이 먼저 취소될 수도 있겠지만······, 제가 봤을 때는 그냥 안 하시는 게 낫겠습니다.”

“그 말씀은 일본측에서 저희를 거부한다는 말씀이신지······?”

“내부 사정이 좀 있어서요.”

“아······.”

그들이 차마 묻지 못하고 탄식만 남길 때, 당근을 던져줬다.

“그래도 여러분들께서 잘 해주신다면, 일본 없이도 더 잘 벌게 해드리겠습니다. 정부 행사는 입금 확실한 거 아시죠?”

“아하하하.”

“하하, 잘 압니다, 의원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와중에 안 특보가 말을 덧붙였다.

“일본 안 가도 여기 총본이 여러분들 다 먹여 살리니까 걱정들 말어.”

* * *

8월 중순.

행복한국당과 희망민주당에 이어서 새정치당과 진성애국당, 무소속의 대선후보까지 출마 선언을 했다.

행복한국당이나 희망민주당에 비하면 늦은 발표였으나, 전례를 보자면 상당히 이른 편이었다.

보통 출마 선언은 대선일 기준으로 4개월 전에 이뤄지기 때문이었다.

당내 의견 불일치부터 국가 정세와 사회적 분위기 등 고려해야 할 게 많아서 어쩔 수 없었다.

선거운동도 11월 28일부터 시작이라서 그보다 빠르면 빠를수록 시간과 비용면에서 손해도 컸고.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행복한국당 때문에 모든 게 빨라진 탓이었다.

경선 일정부터 대선 후보 확정까지, 행복한국당이 초단기간 내에 모든 걸 처리하고 말았다.

아주 이례적인 경우.

다른 정당은 발등에 불씨가 떨어진 듯 뒤따라 허겁지겁 움직였다.

후보 출마 선언이 하루 늦어지면, 조성현은 하루 더 후보로서 입지를 넓혀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정계가 대선 열기에 휩싸일 무렵.

상암동 MBS 방송국.

예능1부장부터 5부장까지 모인 회의실.

부장별로 예능 프로그램 상황을 보고 받던 예능본부장이 스마트폰 진동에 액정을 확인했다.

[이찬국 대표이사님]

화면을 보자마자, 예능본부장이 손을 휙 내뻗었다.

“조용!”

좌중에 침묵이 가라앉는 순간, 그가 급하게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부장들은 당황스러워 하다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사장이 전화했나?’

다들 같은 생각을 할 때.

본부장은 신호가 두 번을 넘기기 전에 얼른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네, 사장님! 예능본부장입니다.”

- 우리 예능 프로에 박준하 씨 나오지? 노래 경연인가?

갑작스런 물음에 본부장이 주춤하다가 얼른 대답했다.

꽃중년, 국민가수 등의 호칭으로 불리는 중년 남성 가수를 찾는 말이었다.

“네? 네! 맞습니다.”

- 그러면 박준하 씨 계약이 언제까지······, 아니다. 본부장, 아침 회의 끝났나?

“아, 아직······. 무슨 일이십니까?”

- 회의 끝나는 대로 박준하 씨 일정이랑 계약서 들고 내 방으로 올라와.

“네?”

- 드라마본부장하고 기획편성본부장도 같이.

“아, 알겠습니다.”

예능본부장이 영문도 모른 채 눈치껏 대답했다.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민영방송국과 영화 제작사 등등 여러 곳에서 같은 상황이 일어나고 있었다.

대선캠프 홍보모델로 내정된 다섯 명에 대한 러브콜이 시작된 것이었다.

물론 일부는 잠잠하긴 했지만, 다수의 업체가 가만있질 못했다.

다른 방법이 없던 탓이었다.

차기 정부와 가까운 대선캠프에 줄을 대려는데 접근이 아주 까다로웠다.

독불장군으로 유명했던 대선 후보 조성현은 철통처럼 보호 받았고, 캠프 총괄본부장인 윤수혁은 감히 방송사나 영화계 등에서 다가가는 것조차 어려운 사람이었다.

벌써 대기업과 중견기업 11곳을 검경에 넘긴 상황.

까딱 실수해서 눈 밖에 났다가는 그대로 검찰로 출두해야 할 수도 있기에 절절 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알아서 기는 것도 어렵다는 뜻이었다.

업계가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비록 전부는 아니었지만, 소속사 사장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기에 충분한 규모였다.

박준하의 소속사 사장은 취소된 일본 일정에도 싱긋 웃었다.

전화가 계속 걸려오고 있었다.

“전성기가 또 오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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