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180화 (180/191)

# 180

일본 외무성의 외교관인 오자와 요시로가 돌아간 뒤.

확인하고 싶어졌다.

만나서 할 말이 뭐길래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그것도 자존심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서.

전화를 들었다.

당연하게도 통화 상대는 일본이 아니었다.

조금만 잘못하면 헛소문이 날 상대이고, 굳이 한 수 접어줄 이유가 없는 나라이기도 했으니까.

수신자는 따로 있었다.

바로 김정환 의원.

- 윤 의원, 오랜만이네.

"요양은 잘 하십니까?"

그가 한국보다 미국에 더 많이 체류하고 있기에 꺼낸 안부 인사였다.

국회 업무를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

원로 의원들이 그러듯 으레 출석하지 않거나, 지각을 일삼으며 업무에서 손을 떼는 것이었다.

정치 인생을 마무리 짓듯이.

이윽고 웃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 암, 돈이 있는데 못할 게 뭔가?

"다행이네요. 큰 돈 쥐고 있다 망하는 사람 여럿인데 말입니다."

- 나도 큰 돈 많이 만져봤네, 자네가 준만큼은 아니지만. 그래서······, 전화 건 용건은 뭔가? 이제 볼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그냥 뭐 좀 여쭤보려고 전화한 겁니다."

- 내가 아직도 해줄 말이 있나?

"예, 궁금해서요."

- 뭐가?

"일본이 뭐라고 했었습니까?"

그러자 짧은 침묵이 퍼졌다.

2012년도를 회상하는 건지, 입맛다시는 소리가 더디게 들려왔다.

- 왜? 만나자고 하던?

역시나 눈치는 빨랐다.

정치질 수십 년에 대선 후보까지 했던 사람이니, 갑작스러운 질문 하나 꿰뚫어보는 건 일도 아니겠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러자 조금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넘어왔다.

- 사진 공개한 사람이 그걸 몰라?

"다 아는 것 말고, 대화말입니다."

사진이나 문서, 언론 공개된 것 외에 가장 중요한 건 구두 합의였다.

당시에 일본이 정부 입장이나 대통령의 가치관까지 간섭한 정황이 있었다는 건 잘 알았다.

죽기 전에 언론에서 떠들었고, 그 결과 대통령직을 사임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료가 없는 건 알지 못했다.

예를 들어 밀담.

그것만큼 중요한 건 없었다.

국회의원들도 가장 중요한 건 입으로 떠들고, 귀로 듣기만 했다.

자료로 남긴다는 건 그만큼 신경을 덜 써도 되는 일들이었다.

공식석상이면 정 반대겠지만,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김 의원의 목소리가 금방 건너왔다.

- 일본하고 국책사업해서 남겨 먹으려고 했어.

이미 이룰 수 없는 일이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내가 대충은 알고 있기에 그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 술술 나왔다.

마치 별 거 아니라는 듯.

- 자네가 준 것보다 '0'이 두 개는 많았지.

"······!"

'0'자가 두 개면 수조 원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내가 지난 6년간 뼈 빠지게 모은 전재산 이상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죽기 전에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잠깐동안 생각에 빠진 사이, 김 의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더 물을 거 있나? 이제 저녁 시간이 돼서 말이야.

그가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 하는 순간, 다른 게 떠올랐다.

김 의원은 대선후보 이전에도 유력한 정치인이었다.

"그럼 그 전에는······?"

그러자 김 의원의 목소리가 더 없이 딱딱하게 변했다.

단절을 알리는 말투였다.

- 저녁 먹어야겠네, 이만 끊지.

뚝.

통화가 끊어지자 헛웃음이 나왔다.

대선 공약에 정치 개입, 국부 유출까지 고루고루 해먹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일본은 그걸 내게 반복하려는 것이었다.

그것도 사전 교섭 없이.

그럴만한 이유는 명확했다.

이미 한 번 해보기도 했고, 근본적으로 우리나라보다 강력한 국가니까.

그걸 증명하듯 이후 몇 시간 동안 전화 십수 통이 걸려왔다.

일본이 아닌, 우리나라 주요 인사들의 전화였다.

외교부 장관, 진성애국당과 새정치당의 비상대책위원장과 당대표들.

물론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일본이 강대국이라면, 우리나라에서 강자는 나였다.

외교부장관은 레임덕을 맞은 행정부에서 경력 한 줄 채우는 허수아비였고, 여당인 새정치당은 분당으로 의석 몇 개 안 남았으며, 진성애국당은 색깔론만 들먹일 줄 아는 모자란 집단이었다.

한마디로 전부 별 볼 일 없는 이들.

그 중에 내가 신경 써야 하는 전화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국회사무총장인 외삼촌의 전화였다.

사실 전화로 나눈 얘기는 짧았고, 대면한다는 게 정확했다.

외삼촌이 전화를 걸어 내 위치를 확인하자마자 부리나케 뛰어왔기 때문이었다.

"수, 수혁아."

벌컥 문을 연 외삼촌의 낯빛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일단 앉으세요, 커피 드릴게요."

외삼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차분하게 대꾸한 뒤, 커피를 하나 주문했다.

외삼촌도 곧 정신을 수습하는 듯 응대용 소파에 앉았고, 나도 커피가 나오기 전에 맞은편 자리로 옮겨 앉았다.

"무슨 일이신데요?"

"그게······ 일본 쪽에서 단단히 열 받은 모양이다."

"알아요, 그걸로 전화 꽤 받았습니다."

"일본에서도?"

"아뇨, 오자와한테 전화하지 말라는 식으로 말해선지, 아직 연락이 없네요."

"······그래서 나한테 대신 전화한 모양이다."

외삼촌의 목소리가 씁쓸했다.

"우리나라 대선에 개입할 것처럼 말하더라."

이미 예상한 바였다.

애초에 만나는 목적도 같았을 터.

"녹음될 거 아니까 돌려 말하긴 하던데······. 정말 열이 오른 모양이야. 대선 끝난 다음에도 가만 두질 않겠다고 난리를 치더라."

그 말에 고개가 기울어졌다.

남의 나라 대선에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고, 차기 정권을 어떤 식으로 압박할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김정환 친일 논란 이후로 행복한국당과 교류가 거의 없다시피 한 곳이 바로 일본이었다.

친일 논란으로 일본이 입을 닫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인터뷰와 보도를 거부하고, 한국에서의 끓는 물이 식어가기만을 기다렸었다.

그일서 당과의 교류도 없어졌던 것이었고.

물론 이슈가 사라진 뒤에 국회의 한일의원연맹을 통해 교류를 하긴 했지만, 그건 국가대 국가의 업무였다.

그렇다면 지금은 뭘 어떻게 할까?

여태 사과도, 접촉도 없던 자민당의 고토 요시히로가 과연 뭘, 어떻게 할지.

나는 외삼촌에게 되물었다.

"어떻게 한답니까?"

"글쎄다, 그것까진······."

외삼촌이 불안한 듯 말꼬리를 흐렸지만,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이미 할만한 짓을 알았다.

그리고 개입한다고 해도, 나름대로의 수가 있었고.

* * *

7월 말.

[황택근, 희망민주당 대선후보로 선출]

[19대 대통령 선거 황택근VS조성현 양강구도로 확정]

[대선후보 황택근 "보수와 중도 자처한 정권들은 결국 퇴보, 진보 정권만이 대한민국을 살릴 것"]

희망민주당의 황택근 상임 고문이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보좌관의 뇌물수수로 곤혹을 치른 염상수는 큰 격차로 패배했고 잠수하듯 언론에서 얼굴을 감추었다.

당연한 것이었다.

보좌관의 부정이 언급될수록 해당(害黨) 행위가 될 테니까.

그래서 염상수는 경선 직후에 짧은 소감만 남기고 숨어버렸다.

황택근이 조금이라도 당선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이후 자신이 희망민주당의 당대표가 될 확률도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신문을 확인한 윤수혁은 고개를 저었다.

'······정권 잡으면 가장 먼저 털어야 되겠어.'

흔히 말하는 표적 수사, 야당 탄압이라고 비판을 받을 순 있겠으나 상관할 정도는 아니었다.

결국 비리가 드러나게 될 테니까.

비록 염상수가 기회주의적인 성격으로 빠져나갈만한 개구멍을 만들어뒀겠으나, 그것도 뻔했다.

죄를 실무진에게 떠넘기는 것.

죽기 전 윤수혁이 했던 것이라 잘 알았다.

실무진들이 죄를 나눠지고, 염상수가 그 죄를 감춰주고 있으리라.

수행하는 비서부터 보좌관, 고위 당직자와 당협 간주 등등, 그들 모두가 증거였다.

그들이 입만 벙긋하면 뭔가 터지리라.

물론 그 과정이 쉽진 않겠지만,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정계의 거목이었던 도정환도 결국 500억에 넘어왔다. 그 돈의 5%만 줘도 눈이 안 돌아가고 배겨?'

5%는 액수로 계산해도 로또 1등과 맞먹는 돈이었다.

보통의 사람들이 바라던 그 1등.

윤수혁이 그렇게 대선 이후의 정계 정리를 구상하던 중.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대외용이 아닌, 내부 업무용으로 사용하는 스마트폰이었다.

화면을 본 윤수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윤수혁재단 국제협력본부 이윤주 본부장]

걸려올 전화가 아니었다.

이 시점에 재단이라니?

민감한 시기여서 정기 보고를 받는 것과 자금을 대는 것 외에는 재단의 업무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애초에 재단의 일은 모두 재단 내에서 처리가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이사회가 있고, 5개의 본부가 있으며 천 명에 가까운 구성원이 재단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것도 업계 최고의 전문가들.

그 안에서 이뤄지지 않는 일은 없어야 했다.

그래서 윤수혁재단의 이사들과 본부장들에게 업무용 직통 연락처를 줬지만, 이렇게 전화가 걸려온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국제협력본부.

순간 멈칫한 윤수혁이 통화 버튼을 드래그했다.

"여보세요."

- 안녕하십니까, 명예이사장님. 윤수혁재단 국제협력본부장 이윤주입니다.

"예, 윤수혁입니다. 말씀하세요."

- 다름이 아니라, 인도네시아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차질이 생겨 연락드렸습니다.

"차질이요? 이사회에 보고하고, 본부 내에서 해결이 안 됩니까?"

그 물음에 또렷한 대답이 건너왔다.

- 그런 문제가 아닌 것 같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면요?"

- 정치적 관계, 그러니까······ 국제 정세에 의한 방해로 보입니다.

반사적으로 윤수혁이 물었다.

"일본입니까?"

- 제가 파악하기에는······, 네.

주춤했지만, 단호한 대답.

그렇다면 이사회에 보고하고 자체 처리하긴 어려웠다.

실질적인 권력을 가진 자신에게 보고하는 게 옳았다. 그래서 직통 전화번호를 줬던 것이었고.

- 그보다 더큰 문제는 이게 나쁜 쪽으로 언론화 될 것 같습니다.

"나쁜 쪽으로라면······?"

- 현재 하고 계시는 선거 준비에 차질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 네. 현재 인도네시아에서 자원봉사와 인프라 구축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데······. 실무진의 착오가 있었습니다. 이걸 현장에서는 부정과 비리라고 우기고 있고요.

이윤주의 대답과 동시에 윤수혁은 보름 전의 일을 떠올렸다.

오자와 요시로의 문전박대.

그게 재단의 걸림돌로 돌아왔으리라.

"······거기에 일본이 가세한 겁니까?"

- 제 추측은 그렇습니다. 실은 추가금을 요구할 때부터 일본이 연루돼서 주시 중이었는데, 이번에 프로젝트까지 방해하는 바람에 전화드리게 됐습니다.

윤수혁이 고개를 젓는 사이,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 그리고 조만간 일본 내에서 기사화 된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에 윤수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한국 언론에서 받아쓰는 건 순식간이었다. 더구나 일본이 사주하게 된다면 더 빠르게 확산되리라.

윤수혁은 금세 퍼져나갈 기사 타이틀과 내용을 떠올렸다.

자신의 이름이 부각될 부정과 비리 사건.

염상수의 전직 보좌진이 뇌물수수한 사건과 비교할 확률도 있었다.

언론사 중 일부는 자신의 돈을 받지 않고, 후원을 거부하기도 했으니까.

'이딴식으로 나온다······.'

윤수혁이 헛웃음을 흘렸다.

직접 움직이지도 않고 인도네시아의 뒤에 숨어서 윤수혁재단에 발을 걸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할 털.

만약에 희망민주당과 손을 잡았다면, 다른 공세가 이어질 것이었다.

윤수혁이 계산을 마치면서 말했다.

"알겠습니다, 다시 연락드리죠."

전화를 끊은 윤수혁이 다른 스마트폰을 꺼냈다.

'해보자, 이거지?'

스마트폰 상단의 시계를 확인한 윤수혁이 바로 연락처를 뒤졌다.

이어서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국제전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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