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
2017년 6월.
대선 공약을 가다듬었다.
정확하게는 워딩만 교묘하게 고쳤다.
이미 정책위원회와 민간자문위원들이 밤새서 만든 것이라서 내가 손댈 게 별로 없었다.
보육정책 개편, 공공산후조리원 설립, 노인과 장애인 돌봄시스템 운영 확대, 근로환경 개선, 공무원 추가 고용, 사교육 제한 확대, 임기 내 시급 1만원 인상 등등.
그리고 개헌까지.
웬만한 정책이 다 나왔다.
따지자면 역대 대통령들도 그래왔다.
표를 얻기 위해서 지키지 못할 공약을 남발했다.
공약의 개수를 늘리거나 규모를 부풀려서 일종의 공수표를 띄우는 것이었다.
당연히 다른 후보들도 이만큼은 해야 된다는 강박에 공약 개수를 그 이상으로 늘려 왔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지키지 못할 공약이 하나의 관례가 돼버렸다.
군정 이후의 대통령들과 현직에 있는 이민수 대통령만 봐도 답이 나왔다.
애초에 임기 내 공약을 절반 이상 이행한 사람이 없었다.
물론 공약 숫자가 많은 건 우리 캠프도 마찬가지였다.
개수만 세어보면 다른 후보들을 압살하고도 모자라, 대한민국을 전반적으로 뜯어고칠 만큼 그 양이 많았다.
임기 내에 전부 실현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공약을 삭제하거나 줄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차피 공약이행률은 잠깐 나왔다가 사라질 기사 소재에 불과했다.
내가 바라는 건 그나마 나은 대통령이지, 실천 가능한 공약이나 내놓는 실패자가 아니었다.
공약의 절반만 이행해도 역대 대통령들보다 나을 터.
그러기 위해선 당선이 우선되어야 했다.
공약도 일단 쓰고 볼 수 밖에.
한국갤럽이나 한국리서치 여론조사 결과 지지율 차이가 크지 않은 탓이었다.
5%p 내외의 격차.
당 지지도나 업적과 상관없이 황택근 후보가 꽤 강력한 인물이라 어쩔 수 없었다.
2012년도에 이민수와 막판까지 경쟁한 것도 황 후보였다.
비록 기존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실망, 염증 따위로 패배하긴 했지만.
결국에 이민수도 똑같았다.
새정치는 없었다.
그랬기에 조 후보가 잘해주고 있었음에도, 막상 대선에 나오니 지지율이 생각보다 높지 않은 것이었다.
결국 그 놈이 그놈이라고 생각하는 인식이 팽배해진 모양이었다.
이제 남은 건 황 후보와 조 후보의 경쟁뿐이었다.
그러던 중,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국제전화였다.
“여보세요.”
- Как дела?(요즘 어떻게 지내나?)
러시아어.
그리고 낯익은 목소리였다.
“이고르 그레프.”
상대방의 이름을 읊자, 이번에는 다른 목소리가 넘어왔다.
역시나 들어봤던 목소리였다.
- 안녕하십니까, 의원님. 통역사 알렉산드르입니다. 전에 한 번 뵀었는데, 기억하십니까?
“아, 네. 기억하죠.”
- 제가 통역을 대신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여 러시아어 회화가 가능하시면······.
“아닙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내 말 뒤에 상황을 설명하는 듯한 통역사의 목소리가 나왔고, 이어서 이고르 그레프의 물음이 건너왔다.
통역은 실시간으로 이뤄졌다.
- 전화 환경은 안전합니까?
듣는 귀나 감청을 의식한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완전을 기하기 위해서 무궁의 케어를 받는 중이었다.
집 안팎과 의원실, 캠프, 재단까지 내가 가는 모든 곳은 무궁으로 도배를 해놓은 상태였다.
“예, 안전합니다.”
- 좋습니다. 대선 준비는 잘 되어 갑니까?
“아주 좋습니다.”
- 한국의 아킬레스건은 어떻게 할 겁니까?
어렵지 않게 한 가지가 떠올랐다.
“······북한이요?”
- 역시, 눈치가 빠릅니다. 그들과 얘기한 건 있습니까?
“아뇨, 아직······.”
할 수가 없었다.
몇 없는 공산국가 중 하나가 바로 북한이었다.
심지어 3대 세습 중인 독재 집단.
공식적인 대화 창구도 종종 닫으며,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연락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아니, 이런 대선 기간에 직접 연락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중국이나 러시아를 통한다면 모르겠지만.
- 얘기해볼 생각 있습니까?
그리고 이고르 그레프가 내 생각을 안다는 듯 물어왔다.
역시나 다리를 놔주려는 모양이었다.
러시아 대통령의 오른팔이면 북한과 대화하는 건 별 일도 아닐 터.
가능하다면 대선에 써먹는 것도 괜찮았다.
북풍 카드는 이용가치가 높았으니까.
그러나 걸리는 게 있었다.
“조건이 있을 것 같습니다만.”
- 우리 쪽 수수료는 없습니다. 나는 내 동지가 잘 되길 바랄 뿐입니다.
“그럼 북한은요?”
- 저렴한 것부터 말해주자면, 비무장지대 총알 한 발당 500만 불, 해안포 사격 1회에 3,000만불······.
“잠깐만요. 그 가격을 주면 하겠다는 뜻입니까?”
- 아직 모르고 있던 겁니까?
어느새 들려온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직접 듣는 건 처음이라서요.”
내가 가진 재산에 비하면 저렴한 비용이지만, 그렇다고 합리적인 금액도 아니었다.
북풍 몰이 한 번 하자고 수십, 수백억을 쓰고 싶진 않았다.
그 돈이 결국 총알과 포탄이 되고, 핵미사일 개발에 도움이 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쓰일 수도 있겠지만, 기분 안 좋은 건 매한가지였다.
차라리 그 돈으로 임대주택을 지어주는 게 나았다.
최소한 내 나라에 도움이 될 테니까.
- 내키지 않습니까?
“그 돈 주고 써먹을 정도는 아닌 것 같네요. 아직 저희가 유리하기도 하고요.”
- 그렇다면 북한을 보수주의로 상대할 생각입니까?
“가능하다면 교류하고 화해 무드를 만들겠지만, 적대적 행위에는 강경 조치할 겁니다. 북한한테 지고 들어가면 좋은 소리 못 듣습니다.”
- 제대로 이긴 대통령을 못 봤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한 번 노력해보겠습니다.”
- 그럼 북한은 필요 없는 겁니까? 대선 때 사용하면 이득이 있을 텐데.
“아직은요.”
- 좋습니다. 선거 열심히 하고, 당선되면 러시아에서 한 번 봅시다.
“알겠습니다.”
- 그런데 윤수혁 의원은 무슨 직책으로 방문할 겁니까?
한국어보다 앞서 나온 이고르의 러시아어에 웃음기가 스며있었다.
궁금한 건지, 아니면 예상하고 있는 건지 모를 일.
“아직 미정입니다.”
- 기대하겠습니다.
능청맞은 대답 이후로 금방 통화를 끊었다.
그의 용건은 북풍 카드였다.
우리나라에서 선거철마다 쓰이는 아이템.
그러나 지금 내 캠프와 나한테는 필요 없었다.
내게는 수첩이 있었다.
물론 황 후보가 저지른 부정이 기록된 건 아니었지만, 아랫사람들의 허물까지 없는 건 아니었다.
별 거 아니겠지만 부풀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받은 적도 없던 내 예비군 훈련 특혜까지 기사가 난 마당이었으니.
* * *
의원회관 818호.
대선 캠프를 앞두고 눈에 띄게 바빠진 사무실.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가 작게 울렸다.
문가에 있던 인턴비서가 먼저 반응했다.
이 시간에 방문하기로 예약한 민원인은 없었지만, 선거 기간을 앞두고 주요 인사들이 여럿 방문하기 때문이었다.
국회의원뿐만 아니라 시민사회단체장이나 주요 모임의 수장들.
“어떻게 오셨······ 아, 안녕하십니까!”
인턴비서가 얼른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하자, 어수선하던 사무실이 멈칫했다.
4급 보좌관 박민표가 순식간에 상황파악을 마쳤다. 하던 일을 멈춘 그가 냉큼 달려갔다.
“의원님!”
“아, 박 보.”
“죄송하지만, 의원님 아직······.”
“알아, 수혁이가 들어가 있으래.”
윤수혁을 이토록 편하게 부를 수 있는 국회의원은 대한민국에 오로지 단 한 명뿐이었다.
국회사무총장이자 윤수혁의 외삼촌인 김정수였다.
그가 엷게 웃었다.
“카톡 보여줘? 국토위 소위원회 심사 다 끝나간다던데.”
장난스런 말에 박민표가 얼른 개인사무실로 안내했다.
“아닙니다, 들어가 계시면 커피 내오겠습니다.”
“고마워, 박 보.”
김정수가 가볍게 웃으며 개인 사무실로 들어갔다.
박민표는 반사적으로 윤수혁에게 메시지로 보고하고, 커피머신으로 내린 뜨끈한 커피 한 잔을 가져다 줬다.
“올 때마다 느끼는 건데 여기 참 좋네.”
“사무총장실이 더 넓지 않습니까?”
“조망이 다르잖아. 박 보도 본관 3층 어떤지 잘 알잖아?”
김정수가 눈썹을 올리며 물었고, 박민표가 겸연쩍은 웃음을 흘렸다.
“흐흐, 죄송합니다. 그럼 나가 있겠습니다, 필요한 거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없는 셈치고 일들 봐.”
“그럼 가보겠습니다.”
박민표가 꾸벅 허리를 숙인 뒤 개인실을 나갔다.
그리고 몇 분 뒤.
의원실로 윤수혁과 함께 비서관들이 함께 들어섰다.
“고생하셨습니다, 의원님.”
인턴비서의 인사 이후에 보좌진이 한 차례 고개 숙였다.
윤수혁이 피곤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고생은 여러분들이 더 하는데요, 뭐. 아······, 외삼촌 기다린지 얼마나 됐어요?”
“몇 분 안 됐습니다.”
“커피도 드렸죠?”
“네.”
“그럼 피로회복용으로 하나만 진하게 타서 갖다 주세요.”
“더블샷에 모카, 시럽 만땅이죠?”
“예.”
“바로 뽑아드리겠습니다.”
그러자 개인실 문이 활짝 열렸다.
“왔구나, 우리 조카.”
“외삼촌, 바쁘실텐데 어쩐 일로······.”
“들어와서 얘기하자.”
그렇게 개인실 안에서 윤수혁이 진한 커피를 마셨을 때였다.
김정수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커피를 마시던 윤수혁이 먼저 물었다.
“무슨 일이신데요?”
“먼저 오해하지 말고 들어라, 너야 알아서 잘 판단하겠지만······.”
흐려진 말꼬리 뒤로 윤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시고 편하게 말씀하세요.”
“일본에서 연락이 왔어.”
“일본이요?”
“원래 한일의원연맹 통해서 연락이 오는데······, 이상하게 이번에는 직통으로 전화했더라고.”
“삼촌한테요?”
“그래, 나한테.”
그 말에 윤수혁의 표정도 조금씩 진중해졌다.
“너하고 만나서 얘기 좀 하고 싶은가봐.”
“무슨 얘기요?”
“차기 정부 관련한 거 같다. 아무래도 대선 가능성이 높으니.”
“제대로 말 안 해줬어요?”
“당사자하고 얘기하고 싶다고 그러더라.”
“그럼 외삼촌도 더 아시는 건 없으시고요?”
“핫라인 넘버만 받아뒀다.”
동시에 김정수가 포스트잇을 하나 내밀었다.
일본 국번인 81번으로 시작하는 연락처와 일본어 이름이 하나 적혀 있었다.
윤수혁은 포스트잇을 받아들면서 잠깐을 고민했다.
대선에 일본을 써먹을 수 있을지, 일본과 관련된 현안이 무엇인지 등등.
이윽고 윤수혁이 시선을 들어 김정수를 바라봤다.
“저도 캠프 인원하고 얘기 좀 해볼게요.”
“그래, 신중하게 해라.”
“참, 이게 뭐라고 적은 거예요?”
윤수혁이 포스트잇의 이름을 바라보자, 김정수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고토 요시히로.”
순간 윤수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자민당에 있는 그 고토 요시히로요?”
“······그래.”
“하.”
윤수혁의 입에서 헛바람 빠지듯 탄식이 나왔다.
새한국당이었던 2012년도.
대선 후보였던 김정환과 교류했던 일본 정치인이 바로 고토 요시히로였다.
정확히는 전생에 친일 논란으로 김정환이 대통령직을 사임하게 만들고, 이번 생에서는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게 만든 이였다.
기억이 뚜렷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가 오해하지 말라고 했던 거야.”
“오해할 게 뭐 있나요.”
“표정이 영 마뜩찮아 보이는데?”
“듣기 좋은 이름은 아니잖아요.”
“그래도 너무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지 마라, 일본 경제대국이다. 써먹을 데 많을 거야, 그러니까 캠프 보좌진하고 상의 잘 해서 연락해봐.”
“······예, 걱정 마세요.”
윤수혁이 남아 있는 커피를 휙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