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177화 (177/191)

# 177

고속도로 한 가운데.

가는 곳은 전국의 당협 사무소와 시도당위원회였다.

정확히는 거기 속한 대의원들과 책임당원들의 경선 표를 위해서 가는 것이었다.

현장에서 낭독할 기조연설 원고를 확인하다가 차창 너머를 바라봤다.

눈이 제법 뻑뻑했다.

갖고 다니던 인공눈물을 넣는데, 운전석에서 영석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곤하십니까?”

“눈만 좀 뻑뻑하네. 왜, 너 피곤하냐?”

“아뇨, 의원님이 피곤해 보여서요. 저는 아주 멀쩡합니다. 차가 이렇게 좋은데요.”

“좋기는.”

눈을 껌뻑거리면서 인공눈물 뚜껑을 닫는데, 웃음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별로시면 차 바꾸시고, 이거 저 주시는 게······.”

“어쭈? 차 한 대 주니까 욕심 생겨?”

“그건 아니지만······.”

영석이가 말을 흐리면서 웃음을 달았다.

“제가 살면서 이런 차를 언제 타보겠습니까?”

영석이의 말이 맞긴 했다.

다른 차도 아닌 롤스로이스 팬텀이었다.

올해 7월에 새 시리즈가 나올 예정인데, 경선과 대선을 앞두고 있기에 그냥 구입하고 말았다.

선거 때 전국을 돌아다녀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초장거리.

모든 일을 차에서 하게 될 예정이었다. 원고 확인하고, 먹고, 자고, 쉬는 것 등등 전부 다.

물론 선거 운동 기간에는 리무진 카니발이나 스타렉스, 아니면 소형 버스를 타겠지만.

개인적으로 전국 각지의 모임에 참여해야 하기 때문에 더 좋은 차가 필요했다.

아니, 내가 탈 수 있는, 롤스로이스 팬텀 같은 차.

사실 초선 때만 해도 주위의 시선을 의식한다고 벤츠 E시리즈를 샀지만, 선거 몇 번 치른 뒤로 등허리가 나갈 뻔했었다.

카시오 시계를 차고, 기성 정장을 사는 것과는 달랐다.

목도 아프고 온 몸이 아우성을 쳤다.

장거리도 한두 번이지, 밥 먹듯이 타다보면 웬만한 고급차로는 견디기가 힘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재산도 공개가 되고, 재단 설립도 한 김에 새 차를 구입하게 된 것이었다.

포르쉐도 그래서 샀었다.

물론 좌석이 좁아서 장거리용으로 쓰기엔 불편했고.

“그래도 벤츠는 잘 타고 다니지?”

“그럼요, 아주 감사하게 잘 탑니다. 저보다는 와이프가 문센 갈 때 타긴 하는데······.”

“어디를?”

“아, 문화센터입니다. 다른 엄마들한테 기죽지 않으려고 곧잘 타고 다닙니다.”

“그게 왜 문센이야?”

“줄임말이요. 애기 부모들한테 써먹으면 다 알겁니다.”

“아······, 그래. 박 보좌관한테 말해서 원고에 좀 넣으라고 해. 아, 애기는 잘 크지?”

“네. 지금 걷기 시작했습니다. 집에 들어가면 아빠 하면서 아장아장 오는데······.”

“벌써 걸어? 우리 지훈이는 간신히 걷던데.”

“흐흐, 제가 어릴 때도 운동은 좀 했잖습니까? 대학 다닐 때도 축구 에이스였는데, 기억 못 하십니까?”

그렇게 농담을 주고받던 중.

우우웅-

전화가 걸려왔다.

영석이가 자연스레 입을 다무는 사이 화면을 확인했다.

[권창훈 팀장]

그에게 유포자 확인을 지시한 지 3일째.

일을 마무리했거나 거의 끝낸 모양이었다.

“여보세요.”

- 권창훈입니다. 전에 유포자 확인 건, 보고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 현재 판단으로는 염상수 의원 쪽 같습니다. 19대 국회 때 있었던 전 보좌진 출신이 움직였는데, 위에서 오더 받았는지 현재 확인 중에 있습니다.

권창훈 팀장의 보고 내용이 뭔가 익숙했다.

19대 국회, 염상수, 전 보좌진 출신의 단어들이 수첩 안에 있던 내용과 겹쳤다.

그 끝에 이름 하나가 나왔다.

“김성광이요?”

내가 되묻자, 주춤한 목소리가 건너왔다.

- ······어? 알고 계셨습니까?

“조금 압니다.”

근래에 수첩에서 확인한 이름이었다.

염상수의 전 보좌관 출신으로 2018년도에 뇌물수수 사건이 터져 결국 징역을 선고 받은 사람이었다.

그것도 19대 국회에서 염상수 대리로 받은 뇌물 사건이었다.

전적이 있으니 잡혔을 터.

이번에도 움직였을 확률이 컸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많이 먹는다고 하지 않던가?

당시에 염상수는 사과문만 발표한 뒤 사법조치를 피해갔었지만, 그 때와 지금은 달랐다.

희망민주당 경선을 앞둔 상황.

이때의 실수는 부풀려져서 터지는 게 보통이었다.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에 따라서 가벼운 타박상만 입거나 치명상으로 고꾸라지는 차이만 있을 뿐.

물론 폭탄을 떠넘기는 게 이 바닥의 특징이긴 했지만, 여론은 그렇지 않았다.

전 보좌진의 잘못은 염상수의 잘못이 될 것이었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여론의 관심이 쏠리면 사실인지 아닌지도 밝혀지기도 하겠고.

주춤한 권 팀장에게 말했다.

“계속 말씀하세요.”

- 아, 네. 김성광 전화도 녹음까지 따고 있습니다만, 아직 물증 나온 건 없습니다. 현재는 직원들이 현장 감시 중이니 최종 증거 나오는 대로 재보고 하겠습니다.

“그만 철수하세요.”

- 네?

당황한 되물음.

그가 더 헤매지 않게 확실하게 말해줬다.

“저한테 증거 있습니다. 흔적 남기지 마시고, 깨끗하게 빠지세요. 실수한 건 없으시죠?”

- ······아, 없습니다. 바로 철수하겠습니다.

대답이 반박자 늦게 들려왔다.

나하고 함께 한 시간이 꽤 있음에도 이런 당황스러운 상황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일은 본인이 하는데, 정보는 내가 더 많이 아는 게 정상적인 건 아니었으니.

그러나 권 팀장은 쓰임이 많은 사람이었다.

심지어 경선기간.

뒤에서 조용히 처리할 심부름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당장 이번 경선에 쓰일 각종 찬조금과 특활비를 이송할 사람도 필요했다.

상대방 경선장에 보내서 부정 활동을 파악하는 일도 필요했고.

앞으로 대선 기간에 돌입하고, 청와대에 입각하면 더 많은 손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짧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권 팀장님.”

- 네, 의원님.

“이번에 경선 끝나면 팀 사이즈 키우세요.”

- 인원이나 장비, 비용은······.

“그건 결재 받지 마시고 팀장님 판단으로 진행하세요. 사람이든 장비든 에이급으로 채워 넣으시고. 아, 그리고 사업장도 새로 만드세요.”

- 사업장이면 전에 있던 흥신소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뇨.”

- 그럼 어떤······.

궁금해 하는 그를 향해 툭 던지듯 대답해줬다.

“청와대랑 일할 것도 생각해서 드린 말씀입니다.”

- ······아!

“그럼 수고하세요.”

- 감사합니다, 의원님.

그 말에 엷게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어차피 나 좋자고 하는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비용 대주고 키워주고 있던 것이었고.

나는 이어서 바로 조양준 미디어홍보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첩 속 증거를 알려줄 때였다.

정치 컨설팅 전문가인 그가 알아서 정리해서 검경이든, 언론이든 움직일 터.

어느새 든든한 조 본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조양준입니다, 의원님.

* * *

[염상수 경선 후보 전 보좌관 뇌물수수 의혹]

[검찰 “前 보좌관 뇌물수수 증거 명확해, 염상수 소환 조사는 미정”]

[염상수 “전 보좌관 뇌물수수에 관여한 적 없어, 경선 앞둔 네거티브 그만”]

신문사, 방송사 할 것 없이 포털사이트 검색어는 물론이고, SNS와 에도 링크가 퍼졌다.

소문도 당연히 뒤따랐다.

염상수가 뇌물 주인이라고.

이미 2012년도 9월에 알선수재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게 염상수였다. 이후 여당으로 옮겨가면서 조용히 무죄선고를 받았을 뿐, 그에게는 무시하기 어려운 과거 경력이 있었다.

논란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사이에 행복한국당의 대선후보 경선은 조용하고 차분하게 지나갔다.

경선 때마다 돈잔치나 불공정 과정, 편법 등의 안 좋은 얘기가 나오곤 했는데, 염상수 기사로 모두 묻힌 덕분이었다.

물론 조성현의 당내 지지율이 높은 편이고, 후보들이 참여 자체에 의의를 뒀기에 큰 이슈거리가 없기도 했고.

“덕분에 우리 경선은 별 탈 없이 지나갔습니다.”

“전부 후보님 덕분이지요.”

“하하, 음식 내놓고 말이 길어졌네요. 식사들 하시죠.”

호텔 중식당의 룸 여러 개에 나뉘어 캠프 인원이 뒤풀이 겸 식사 중이었다.

자리에 앉은 이들이 잘 먹겠다는 말과 함께 수저를 들었고, 술잔을 비웠다.

요리 몇 개가 바닥을 드러내고, 새로 나올 무렵.

윤수혁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화면에 저장된 이름이 떴다.

[희망민주당 염상수]

글자를 내려다보던 윤수혁이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이 나올지 예상됐기 때문이었다. 전 보좌진의 뇌물수수 사건.

자신이 알아냈듯 염상수도 출처를 밝혀냈을 확률이 컸다.

더구나 이건 은밀한 공작이 아닌, 단순 제보에 불과했으니까.

곧 윤수혁의 엄지손가락이 화면을 드래그했다.

[거절]

그러나 통화가 끊어지자마자, 다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또 다시 염상수.

다시금 거절했으나, 진동이 이어졌다.

‘많이 급한 모양이네.’

속으로 혀를 찬 윤수혁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가운데 술잔이 돌고, 쾌활한 웃음이 오가고 있었다.

여기서 받아선 좋을 게 없었다.

윤수혁이 하릴없이 조성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저 전화 좀 받고 오겠습니다.”

“그럼요, 어서 다녀와요. 윤 본.”

꾸벅 고개 숙인 윤수혁은 곧장 룸을 나와 복도에 섰다.

그리고 이번에는 통화 쪽으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곧장 다급한 목소리가 나왔다.

- 윤 의원,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거 조치가 너무 가혹한 거 아니야?

“예?”

- 그냥 고발 조치만 해도 되는 걸, 왜 이렇게 일을 벌려놔?

“제가요?”

태연한 물음에 스마트폰 너머가 주춤했다.

이윽고 한숨과 함께 염상수의 변명이 천천히 넘어오기 시작했다.

- ······저번에 예비군 기사 터진 것 때문에 그러나 본데 그거 오해야, 오해. 아랫사람들이 성과 내려고 오버한 거야. 그거는 정치하다보면 나오는 흔한······.

“아, 그거요?”

알았다는 듯 한 대답.

염상수의 목소리가 옳다구나 하고 넘어왔다.

- 그래, 그거! 우리가 대선으로 붙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도대체 이게 무슨 경우인지, 원. 고작 경선 아닌가? 그러니까 자네가 말 잘해서 이번 건은······.

“염 의원님.”

다시금 윤수혁이 말을 잘랐다.

두 번이나 반복되자, 염상수의 대답이 반 박자 늦게 넘어왔다.

불쾌함을 꾹 참은 물음이었다.

- ······뭔가?

“그것도 의원님이 이해를 하셔야 해요.”

- 무슨 소리야?! 내가 지금······.

이해하지 못한다는 듯 한 높은 억양의 말.

윤수혁이 담담하게 말했다.

“방금 말씀하셨잖아요.”

- 뭘 말했다는 거야?

“아랫사람이 성과 내려고 오버한 거요.”

- 뭐······?

“저희 쪽도 같아요.”

- 윤 의원, 그건 경우가······.

“지금 제 경우는 식사 중인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 말장난이야, 뭐야!

순식간에 목소리가 커졌다.

스마트폰에 귀를 대고 있던 윤수혁이 눈살을 찌푸릴 정도.

“지금 큰소리 내시는 겁니까? 저한테?”

차가운 목소리에 대답이 늦었다.

따지고 보면 사정하고 부탁하기 위한 전화였다. 다짜고짜 꺼낸 말도 그랬다.

어감만 자존심을 세웠을 뿐, 그 내용은 부탁이었다.

그러지 말라고, 하지 말라고.

- ······경우가, 아니. 상황이 그렇잖아?

“희망민주당 경선이 언제입니까?”

- 아, 7월 말이네.

얼른 나온 대답에 윤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까지는 이슈 되겠네요. 구속수사하고 기소하고, 의원님도 소환 조사하면······.

- 아, 아니. 윤 의원, 내가 다시 말을 하지. 그건 말이야······.

“그러니까 처음부터 잘 하셨어야죠.”

- 예비군 그거는 내가 아까 오해라고 하지 않았나?

“그거 말고요. 전화하자마자 뭐라고 하셨죠?”

- 뭐?

“기본적인 예의를 말하는 겁니다. 내가 나이가 어리긴 해도 의원님 아랫사람은 아니잖아요?”

- ······.

염상수가 차마 대답하질 못했다.

당황스러움, 모멸감, 분노 등등 갖은 감정이 섞였기 때문이었다.

늦어지는 대답에 윤수혁이 먼저 말했다.

“그럼 끊습니다. 아, 전화 예절을 알려드릴 필요는 없겠죠?”

말이 끝나자, 통화도 끊어졌다.

품에 스마트폰을 넣던 윤수혁이 고개를 저었다.

“이제 슬슬 지 분수를 알아야지, 대선도 코앞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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