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174화 (174/191)

# 174

2017년 3월.

마포역 인근의 8층 빌딩.

펜트하우스로 쓰이던 꼭대기 층을 정리했다.

기존에는 건물주가 기거하던 곳이었고, 내가 구입한 뒤로는 방송이나 사진 촬영 등의 용도로 쓰이던 공간이었다.

공용면적 163평에 전용면적만 110평.

내부를 싹 허문 뒤 새로 벽을 쳐서 구조를 변경했다.

4, 50명까지 너끈히 수용가능하게 생활공간과 사무 공간으로 나눈 것이었다.

듣는 건 공장형 아파트와 비슷하지만, 보는 것은 전혀 딴판이었다.

바닥에는 히노끼 원목마루가 깔렸고, 벽에는 천연 대리석과 파벽돌이 시공 됐으며, 천장에는 이탈리아 조명이 달렸다.

한마디로 근사했다.

내가 관심을 뒀고, 5성급 호텔 인테리어를 예시로 든 덕분이었다.

수십 개의 사무 책상과 커다란 회의 테이블, 각종 사무집기만 아니었으면 호텔이라고 생각될 정도.

이만큼 건물에 신경을 쓴 적이 없었다.

공사 중에 현장을 방문한 것만 열 번은 넘었다.

국회가 가깝고, 집에 가는 길이라 타이밍이 맞을 때마다 들른 것이긴 했지만, 이촌동의 내 아파트나 전국 각지의 별장에도 공사 중에 방문한 적은 없었다.

그 중에는 완공 후에나 한두 번 가본 곳도 있었고.

그러나 여긴 달랐다.

바로 대통령 선거 캠프가 될 공간이었다.

그래서 더 신경 썼다.

앞으로 10개월은 이 안에서 살다시피 일해야 했다.

나뿐만 아니라 싱크탱크 역할을 할 수십 명의 인재가 모일 장소였다.

그들에게서 더 나은 업무 능력을 뽑아내기 위해서라도, 희뿌연 석고텍스 천장을 바라보며 새우잠을 자거나, 싸구려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게 둘 생각은 없었다.

안마 의자에서 쉬고, 수백만 원짜리 매트리스에서 눈을 붙여야 했다.

그래야 회견문의 오타 같은 실수를 하나라도 줄일 테니까.

들어서던 조성현 당대표도 어느새 놀란 눈이 되어 있었다.

“와······, 이거 참. 호텔이 따로 없습니다. 윤 최고가 돈 많이 썼겠어요.”

“앞으로 계속 쓸 거라서 투자 좀 했습니다. 경선이나 전대, 총선, 지방선거도 있잖습니까? 그 때마다 이곳저곳 옮겨다녀봤자······.”

그러자 조 대표가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나를 돌아봤다.

“이거, 윤 최고 건물입니까?”

“예.”

“그렇지, 윤 최고가 누군지 잠깐 깜빡했습니다. 손에 꼽는 거부를 매일 보니, 참······.”

그가 멋쩍은 웃음을 짓기에 나도 웃어줬다.

“흐흐, 들어가시죠. 대표님.”

그렇게 들어서자, 사람들의 인사가 쏟아졌다.

중앙당의 당직자, 조컨설팅과 법무법인 손문에서 파견 나온 이들, 그리고 학계나 주요 단체에서 스카우트한 사람들이 섞여있었다.

조 대표가 일일이 악수를 받아주고, 격려의 말을 전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몇 분 뒤에 들어간 후보실.

“어, 오셨습니까?”

사람들이 미리 와 있었다.

당대표 비서실장이던 성태우 재선 의원과 조컨설팅의 조양준 대표, 오준범 이사, 안순익 협회장까지.

그들을 이 자리에서 모두 만나자, 새삼 새로웠다.

영화 속 슈퍼 히어로들을 모아 놓은 분위기가 풍겼다.

조 대표부터 오 이사나 안 협회장, 그들 모두 지난 6년이라는 시간 동안 각각의 업계에서 거물로 변화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내가 쏟아 부은 자금과 정보력 덕분이지만.

어쨌든 지금의 이들은 한 자리에서 모아 놓고 보기 힘든 얼굴이었다.

다들 중요한 사람이고, 능력 있는 이들이며, 바쁜 사람들이었다.

세계 각지의 유명 구단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을 국대로 소집한 기분이었다.

나는 그들을 데려온 감독이고.

어느새 조 대표가 허리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조성현입니다. 한 번 잘 해보십시다.”

안에 있던 이들도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 * *

3월 말, 63빌딩 백리향.

염상수가 마주 앉은 이들을 바라봤다.

현 희망민주당의 의원이자, 함께 새정치당을 탈당하고 넘어온 의원들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계파에 속한 의원들.

염상수가 나긋하게 말했다.

“자, 들지.”

의원들이 앉은 자리에서 고개 숙였다.

“맛있게 드십시오.”

“감사히 먹겠습니다.”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의원님.”

열 명도 안 되는 숫자.

그의 계파 소속으로 함께 하지 못한 계파 의원들을 합치면 열다섯 명이 전부였다.

탈당과 입당 과정에서 의원 몇이 떨어져 나간 탓이었다.

희망민주당의 총 의석수가 108석인 점에 비하면 숫자가 상당히 적은 편.

그러나 아직 염상수에게는 과거의 위명이 남아 있었다.

90년대 정계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동교동계 출신으로 당 원내대표와 최고위원을 역임한 경력.

그랬기에 염상수가 버티고 있었다.

철새처럼 탈당과 입당을 반복했지만, 그의 고향인 목포에서도 견줄 자가 없었다.

시장이나 도지사도 무리 없이 가능한 정도.

그러나 지자체 단체장이 가지는 권력은 아주 한정적이었다.

당대표, 혹은 그에 준하는 권력이 더 강력했다.

새정치당에서 탈당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이민수 정부는 레임덕을 맞았고, 새정치당은 여당으로서의 권한을 잃고 책임만 졌다.

한마디로 유명무실할 뿐, 힘이 없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었다.

정치에 대한 신념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실권이었다. 신념만 있고, 힘없는 자의 말로는 몰락일 뿐.

염상수는 숟가락을 몇 번 뜨다가 다시금 의원들을 바라봤다.

“그래, 들은 소식들 있는가?”

“네, 저부터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의원 하나가 얼른 대답하자, 염상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말해보게.”

정보 교류의 시간이었다.

이게 오늘 서울 63빌딩 백리향에 모인 목적이었다.

정보 보고와 동시에 계파 의원들이 정보를 나눠 갖는 것이었다.

계파가 있는 국회의원이라면 필수적으로 생기는 모임.

유리한 정보를 선점하거나, 사회적 이슈를 예측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계파의 결속력을 다지고,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힘이 됐고.

곧 의원들이 돌아가며 저들이 아는 얘기를 떠들었고, 서로 필기나 녹음 없이 있는 그대로 듣기만 했다.

이는 얘기가 바깥으로 새어나가도, 물적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찌라시 스캔들에 가까운 저급한 얘기 따위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 중 염상수계파의 서열 2위, 노병선이 입을 열었다.

“행복당이 비공식 캠프를 차렸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소리야?”

염상수가 눈을 찌푸렸다.

대선 경선이 이뤄지는 것도 앞으로 최소 3개월 이상은 있어야 했다.

작년부터 암묵적으로 대선 출마를 위한 준비가 있긴 했으나, 아직은 경선 후보자 선언도 없는 상황.

벌써 캠프를 차렸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노병선의 말에 염상수가 한숨을 뱉고 말았다.

“캠프 지휘하는 게 윤수혁입니다.”

“허, 또······ 윤수혁이야?”

염상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민수 정권을 공격하고, 여당을 흠씬 두들기는데 앞장선 사람이 바로 윤수혁이었다.

근로환경개선특별위원회도 마찬가지.

그 외의 일은 조성현이 앞에 나와 마이크를 잡긴 했으나, 뒤에는 항상 윤수혁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탈당을 유발한 인물이 바로 윤수혁이었다.

당이 무너지고, 정부를 공격한 대표적인 인물이었으니까.

삐딱한 자세의 염상수가 물었다.

“그래서 경선 계획은 있던가? 아직 후보 선언도 안했지 않나?”

“네, 아직은 없습니다. 내부 논의 중이라고 아는데······.”

“뭣 한다고 캠프를 먼저 차려? 그래서 캠프는 어디야?”

“마포역 근처 빌딩입니다. 건물주가 윤수혁으로 되어 있고 경호가 워낙 삼엄해서 정확히 확인은 못했습니다만, 조성현 당대표와 윤수혁이 드나드는 게 포착됐습니다.”

“웬 마포역이야?”

“아무래도 시선을 피하려던 것 같습니다.”

“쯧쯧쯧, 정치 상징성도 모르는 게 선거를 하겠다니, 원······. 돈 많고, 힘 있다고 정치 잘 하는 게 아냐, 안 그래?”

염상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본적으로 사무실은 여의도에 있어야 했다. 전당대회도 그렇고, 대통령 선거도 마찬가지였다.

국회, 당사, 갖가지 정치단체와 거리가 가까울 뿐만 아니라, 여의도는 정치의 상징이기도 한 장소였다.

종로도 마찬가지긴 했지만, 거리상 비효율적이었고.

이윽고 염상수가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정보 한 번 빠삭하게 모아봐. 노 의원도 그렇고, 자네들도 다.”

그 말에 의원들이 시선을 모았다.

의아한 시선이었다.

정기적으로 하고 있는 이 모임이 정보 수집이 아니던가?

염상수가 고개를 저었다.

“조만간 경선 캠프 차리면 제보 들어올 거 아닌가? 감사철에, 선거철에 겪어 봤잖나? 그거 잘 모으라는 말이야.”

“아아, 네!”

“하여튼 사람들 하고는. 경선이라도 이겨야 될 거 아닌가?”

“맞습니다.”

“한 번만 삐끗해도 물 먹는 거, 다들 알지?”

“물론입니다, 의원님.”

“그래, 몸들 잘 사리고. 경선 출마 선언하기 전에 다시 보세.”

“네, 의원님.”

* * *

2017년 4월.

[희망민주당의 염상수 의원은 1일 “잘못된 정치를 타파하기 위해 당내 경선에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염 의원은 오전 희망민주당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나의 신념은 올바른 정치이며, 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것이다”고 말했으며, 덧붙여서 “당적을 바꾸는 것은 정치의 수단에 불과하고, 정치의 본질은 목적과 신념이며······.”]

잘 정리된 기사를 보자니 웃음이 났다.

말 한 번 그럴듯하게 했다.

더구나 내용 자체는 틀린 것도 하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말하지 않는 게 있었다.

계파 싸움에 밀려서 실권을 갖기 위해 둥지를 옮겨 다닌 것, 입당 과정에서 오성의 도움이 있었다는 사실 등등.

어쨌든 눈치도 기가 막히게 빨랐다.

조성현 당대표의 대선 후보 출마 선언이나 대선 경선 계획을 발표할 참이었는데, 염 의원이 한 발 앞서서 발표한 것이었다.

19대 대선 경선의 최초 스타트는 물 건너갔다.

최초인 만큼 언론의 주목도가 높아서 써먹으려던 것인데, 경선룰도 안 정한 이 시점에 후보 출마를 발표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더구나 인지도도 있는 사람이라 기사도 제대로 났고.

나는 맞은편에 있던 조컨설팅의 조양준 대표를 바라봤다.

“조 팀장님.”

임시 직책이었다.

아직 비공식 선거 캠프라서 나를 제외하고는 전부 팀장이나 팀원이었다.

“예, 윤 의원님.”

“우리도 경선 일정 잡고 홍보하죠.”

“경선이라 하시면······, 합의 추대는 무산된 겁니까?”

합의 추대, 말 그대로 후보자를 합의해서 선출하는 것이었다.

원래 본 선거를 앞두고 지원한 후보자를 걸러내기 위해 경선이라는 예비 선거를 치르지만, 합의 하에 진행하는 것도 가능했다.

주로 지역구 의원이나 전당대회 후보자를 선별할 때 쓰이곤 했다.

비용 절감이나 승리 가능성 따위로 합의하는데, 내가 강북구을에 출마했을 때도 그런 식으로 전략공천을 했었다.

마찬가지로 이번 대선에서도 합의 추대를 했으면 했고.

그러나 마음대로 되진 않았다.

“아무래도 대선이잖습니까.”

내 대답에 조 팀장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의 모든 선거보다 의미나 신념이 유독 많이 부여되는 선거였다.

당선 가능성이나 비용을 고려하고 분석하는 게 아니라, 출마 자체에 뜻을 둔다는 말.

그탓에 이번 20대 국회를 끝으로 은퇴하는 원로들, 혹은 할 만큼 했다고 믿는 일부 의원들이 실리적 판단이 아닌, 심리적 열망에 움직였다.

그들이 합의 추대에 동의하지 않은 것이었다.

경선 과정을 통한 미디어 홍보가 낫지 않겠냐는, 은근한 반대가 대신 나왔다.

그것도 소수에 불과하긴 했으나, 주장을 관철시키진 않았다.

경선을 하기로 흔쾌히 합의했다.

언론도 행복한국당의 대선에 관심을 두고 있는 상황이라서 싸워서 좋을 게 없었다.

불협화음이 나서 기사화 되면 제 살 깎아먹는 꼴만 될 뿐.

또한 경선에서 패배할 가능성은 없었다.

이윽고 조 팀장의 말이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경선 합의 보도자료 배포하고 언론 인터뷰도 잡겠습니다.”

“그리고 경선 일정 나오면 바로 캠프도 공식화 하시죠. 여기로 의원들도 몇 분 추가로 오실 예정이니까 잘 받아주시고요.”

내 말에 조 팀장이 단단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의원님. 그럼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회의 테이블에 앉아 있던 십여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이제부터 제대로 된 대선 레이스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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