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
“기업은 기업의 역할만 하세요. 괜한 곳에 손대지 마시고.”
윤수혁의 말에 정적이 감돌았다.
둥근 원형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열 명의 중년 남녀들이 침을 삼켰다.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친모인 김을자까지 같이 온 상황.
비록 테이블이 달라서 같은 대화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작 몇 미터 거리에 그녀가 있었다.
더구나 자선 전시회장의 뒤풀이 겸 정찬 모임이었고.
조금 더 편한 분위기에서 원하는 바를 듣거나 요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눈을 껌뻑거렸다.
그사이, 윤수혁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풍랑을 정 피해가고 싶다면······.”
이어진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윤수혁에게 몰렸다.
그들이 바라던 얘기가 나오고 있었다.
대기업을 향한 고발과 시정 조치 요구, 각종 성명서 발표와 정치적 압박 등등을 비켜갈 방법.
“각자의 일을 하세요. 어쭙잖게 딴 데 눈 돌리고 애먼 짓하지 마세요. 선장은 배를 조종하고, 등대는 불을 비추면 되는 겁니다.”
분위기가 싸해졌다.
김을자와 친한 몇몇 중년 여성들이 조심스레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옆 테이블에서 김을자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정치와는 동떨어진 주제를 떠들고 있는 테이블이었다.
척 봐도 정 반대의 분위기.
그녀들의 시선을 의식한 윤수혁이 좀 더 가볍게 말을 꺼냈다.
“처음에 근로특위 얘기 꺼내셨던 분이······.”
“······접니다, 의원님.”
한 참석자의 대답에 윤수혁이 말을 이었다.
“예, 김 사장님. 근로특위가 뭘한다고 생각하세요?”
“······.”
김 사장이라 불린 중년의 사내가 난처한 얼굴로 대꾸하지 못했다.
혹여 성에 안차는 대답이 될까 망설인 것이었다.
윤수혁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말 그대로 근로환경개선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근로특위가 한 일을 잘 아실 테니까, 따로 말씀드릴 필요는 없겠죠. 그럼 기업은 뭘 해야 할까요?”
말투는 나긋하지만 한 글자, 한 글자가 벼려진 듯 날카로웠다.
좌중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애초에 기관별 대관팀이니, 국회 대관담당이니 그런 게 있어선 안 됐습니다. 공장과 회사가 있는 지역의 의원들 로비 전략을 세워서도 안 됐습니다. 그게 작금에 이르러서 기업의 본질을 호도하게 만든 겁니다. 기업이 정치에, 외교에······.”
잠시 늘어진 말에 사람들이 물을 마시고, 숨을 돌린 사이.
“나랏일에도 간섭하고 있죠.”
윤수혁이 나직한 말에 헛기침이 쏟아져 나왔다.
“컥.”
“크흠······.”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이 모를 리가 없는 말이었다.
오성그룹의 계열사 합병 과정이 바로 그 예였다.
국민연금공단이 국익이 아닌, 오성의 이익을 위해 딴짓을 했었다.
“저는 그걸 제자리에 돌려놓으려는 겁니다. 가급적 이번 정권의 임기 안에서 말입니다. 다음 정권까지 이어지는 건 별로······.”
비교적 가벼운 끝맺음에도 섣불리 말을 꺼내는 이가 없었다.
윤수혁이 모인 이들을 둘러봤다.
“제가 주장하는 게 과한 겁니까?
“······아, 아닙니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의원님.”
자리에 앉아 있던. 대기업 임원들이 서둘러 대답했다.
윤수혁의 말에 잘못된 건 없었다.
말투가 강압적이어서 그렇지, 내용은 언론에 공개돼도 상관없는 수준.
싫어하는 국민들은 없을 것이었다.
언론에서 보도 방향을 조금만 바꾸면 오히려 환호하고 좋아할 일.
“그럼 오늘은 자선 전시회답게 자리를 빛내주시고, 다음에 공적인 자리에서 뵙고 말씀들 나누시죠.”
“아, 네.”
“그리고 이만 어머니께 가봐야 할 것 같은데, 더 말씀하실 거나, 제가 말씀드릴 게 있나요?”
반 박자 늦게, 참석자들이 입을 열었다.
“아······, 없습니다.”
“의원님, 말씀 정말 잘 들었습니다.”
“훌륭하신 고견을 들었는데 더 이상 잡아 두면 실례지요.”
모두가 쉽게 이해했다.
재계 때리기가 아니라, 아예 정리하겠다는 의미였다.
그것도 어떤 대가도 없이, 이번 이민수 정부의 임기 안에.
그 이유도 알았다.
윤수혁의 입으로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차기 정부의 원활한 행정을 바라는 것이었다.
참석자들이 머리를 굴렸다.
총수 일가나 최측근의 지시를 받았던 그들은 보고 뿐만 아니라 대안도 제시해야 했다.
‘골치 아프게 됐어.’
‘해먹은 것도 없으니 구슬릴 수도 없고, 이거 원······.’
‘제 돈 들여서 산후조리원 지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들의 생각은 탄식으로 끝났다.
이미 근로특위를 건들거나 윤수혁 주변을 로비해왔었기에 다른 방법이 없던 탓이었다.
타깃이 된 대기업들은 결국 검경의 조사를 받고 있었다.
그들도 피하려 했으나, 피하지 못했다는 의미.
그 이하의 대기업과 중견기업들이 다른 방도를 찾는 건 불가능했다.
그나마 오성그룹의 상황이 좀 나았다.
특검을 받고 있긴 했지만, 수사도, 언론도 모두 유해졌기 때문이었다.
노동조합을 인정하고, 미래전략실 해체를 선언한 덕분이었다.
검찰도 중간 보고에서 오성의 자진납세와 다름없는 태도를 감면 사유로 언급했었다.
결론은 하나.
‘까라면 까야지.’
속말을 입안에서 굴린 윤수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식사들 하세요. 먼저 가보겠습니다.”
윤수혁이 자리를 떴고, 열심히 웃고 있던 김을자에게 다가갔다.
“어머, 아들. 벌써 얘기 끝났니?”
“예, 덕분에요.”
윤수혁의 가벼운 미소에 김을자가 활짝 웃었다.
“우리 수혁이, 다들 아시죠? 요새 근로특위 일 본다고 집에도 못 들어가고, 의정 본다고 국회에서 사느라 얼굴 못 본 지가 까마득해요. 그래도 재단 일도 볼 겸 엄마랑 데이트 하겠다고 같이 전시회장까지 왔지 뭐예요. 요새 우리 아들 얼굴을 TV로 더 많이 보고 그래요, 호호. 참, 우리 아들하고 인사 나누세요. 자, 수혁아, 이 분은······.”
김을자가 신난 얼굴로 수다를 떨기 시작하자, 윤수혁이 엷게 미소 지었다.
‘······이거면 됐다.’
* * *
근로특위의 창설 목적은 애초에 하나였다.
재벌 때리기나 기선잡기, 혹은 사회 정화나 정의구현이 아니었다.
나를 위해서였다.
정확히는 내년 12월의 대선 이후, 18년도의 차기 정권을 위해서 하는 일이었지만.
지금 하는 이유도 명확했다.
어차피 재계 정리가 하루이틀만에 가능한 게 아니었다. 그 안에 끝낼 생각도 없었고.
그래서 지금부터 열심이었다.
이민수 정권의 임기가 남아 있는 이때부터 대기업을 정리하는 이유가 딴 데 있는 게 아니었다..
차기 정권이 들어선 뒤면 칼부림하기가 어려웠다.
일선 공무원과의 유착부터 각종 정부 정책과 사업, 지원금이나 보조금 같은 눈 먼 돈 빼먹기가 이뤄진 다음일 테니까.
대기업을 쳐내면 자연스레 행정부 이미지도 깎일 수밖에 없었다.
오성만 해도 국민연금공단과의 유착이 있지 않았던가?
애초에 이미지가 별로였던 국민연금공단은 하루아침에 사기업이라는 욕까지 얻어듣다시피 했다.
그래서 지금이었다.
또한 나는 미래도 준비해야 했다.
내가 참가했던 정당이, 내가 지지한 정권이 갖가지 간섭으로 쉽게 망가지게 둘 생각이 없었다.
나 또한 타격을 입게 될 테니까.
그래서 위협요인인 재계를 압박하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다른 자질구레한 것들도 정리할 예정이었다.
이제 곧 대선이었다.
그렇게 자선 전시회를 마친 뒤.
접촉이 줄었다.
엄포를 놓은 게 소문이라도 났는지, 자선 전시회에 오지 않았던 기업들도 알아서 꼬랑지를 말고 찌그러진 것이었다.
각종 기업발(發) 초청장과 공문 따위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었다.
동시에 기사도 나기 시작했다.
[케이모터스, 하청업체 갑질한 임원 3명 해고, 사장 1명 중징계]
[한양그룹 조태형 회장 “5년 내에 계약직 절반 이상 정규직으로 전환할 것”]
[기업별로 대관팀 로비 불법여부 자체 조사···국회 드나드는 대관 인원도 줄어]
듣기에는 그럴싸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선심성 쇼에 불과한 기사였다.
기업들이 미쳤다고 제 살 파먹기를 하겠는가?
오성이 노조 설립을 하고, 미래전략실을 해체했듯 그들도 똑같이 반응하는 것이었다.
그게 처벌을 줄이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그래서 로비가 거의 줄었는데, 중견기업 이상의 기업과 각종 단체에서 여전히 연락을 해오기에 연락 횟수는 많았다.
재단까지 설립한 바람에 방문객도 추가로 늘었고.
덕분에 일이 많아졌지만, 모든 게 순조로웠다.
근로특위는 계속해서 도장깨기하듯 기업을 하나씩 박살냈으며, 윤수혁재단도 복지단체에 이어 사학재단과 노동계까지 손을 뻗치고 있었다.
16년도 12월에 300억이 추가로 투입될 예정이었다.
그 외에도 내 이름이 올라간 수십 개의 단체들도 왕성하게 활동했다.
대선이 14개월 남은 무렵이었다.
* * *
2017년 1월 1일.
제주도 근해.
오전 6시 40분이 넘어가기 시작하자, 까맣던 하늘에 색이 들기 시작했다.
수평선이 드러났고, 하늘은 어느새 짙은 남색이 됐다.
근해에 정박해 있던 배도 모습이 드러났다.
흰색과 남색의 투톤 컬러로 칠이 된 길이 42.78미터의 3층짜리 호화 요트.
신혼여행지에서 자주 보이는 얄팍한 디자인이 아니었다.
마치 호텔을 압축한 모습.
갑판에는 뚜껑이 닫힌 외부 수영장이, 내부에는 다섯 개의 객실과 핀란드식 실내 사우나가 있었다.
선미 하부에는 하계용 고속 보트와 서핑 보드도 있었고.
곧 요트의 주인, 윤수혁이 문을 열고 갑판으로 나왔다.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에선 하얀 김이 휘날렸고, 동시에 경호팀장 김백현도 갑판으로 따라 나왔다.
영원호에서 윤수혁을 담당했던 이였다.
“김 팀장님도 커피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김백현이 컵을 받아들고 홀짝거렸다.
하얀 김과 함께 커피 홀짝이는 소리가 바람에 쓸려서 사라졌다.
그렇게 둘이 말없이 커피만 나눠 마시던 중.
“저기 해경은 뭐예요?”
윤수혁이 멀찍이 있는 해경 경비정을 바라보며 물었다.
100톤급 경비정 한 대가 손톱만한 크기로 바다 한 가운데 정박해 있었다.
“신년맞이 해돋이 행사 중입니다.”
“군대 있을 때는 연병장에서 일출 행사 같은 거 했었는데, 참······. 아, 해 뜨는 모양인데. 몇 시에요?”
돌연 생각난 듯 묻자, 김백현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07시 04분입니다.”
하늘이 어느새 파란색에 가깝게 변해 있었다.
수평선 너머로 태양만 없을 뿐, 하늘이 환해진 상황.
“사랑 씨 깨우러 갔다 와야겠네요.”
윤수혁이 실내로 들어가자, 김백현도 안으로 들어갔다.
서둘러 들어간 침실.
한사랑은 하얀 이불과 아들 윤지훈을 껴안은 채 곤히 자고 있었다.
“사랑 씨, 일출 볼 수 있겠어요?”
윤수혁이 귀에 대고 작게 말하자, 한사랑이 웅얼거리듯 대답했다.
“지훈이는요?”
아들 윤지훈을 말하는 것이었다.
한사랑의 허벅지 근처에서 새우처럼 등을 굽은 채 자는 모습에 윤수혁이 엷게 웃었다.
“다리 옆에서 잘 자요.”
“그럼 수혁 씨가 지훈이 우주복 입힐 수 있겠어요?”
“당연하죠.”
윤수혁이 조심스레 우주복을 가져와 윤지훈에게 입히기 시작했다. 팔다리를 넣고, 지퍼를 올릴 때까지 윤지훈은 칭얼거릴 뿐 깨진 않았다.
“아직 자는데, 깨울까요?”
“어제 새벽에 깨서 아직 피곤할 거예요. 수혁 씨가 지훈이 잘 안아줘요.”
“새벽에 깼어요? 나 못 들었는데······?”
윤수혁이 눈을 껌뻑이며 묻는 사이, 외투를 걸쳐 입은 한사랑이 싱긋 웃었다.
“요새 밤에 자주 깨는데, 그것도 몰랐죠?”
픽 웃은 한사랑이 침실 문을 열었다. 거실에 있던 김백현과 휘하 경호원 하나가 그 뒤를 따랐다.
이윽고 테라스 문을 연 순간.
한사랑이 몸을 떨었다.
“너무 추운데? 지훈이 감기 걸리겠어요. 그냥 여기서 봐요.”
어차피 거실 벽 한쪽 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었다.
“아, 마침 해 뜨네요.”
“얼른 소원 빌어요. 뒤에 경호원 분들도.”
한사랑이 눈을 감으며 말하자, 뒷짐을 지고 서 있던 김백현은 슬그머니 앞으로 손을 모았다.
그렇게 거실에 잠깐의 침묵이 퍼진 뒤.
“이제 일출도 보고 소원도 빌었으니까······, 아침 먹고 천천히 배돌리라고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윤수혁이 말하고, 경호원이 답했다. 그러자 한사랑이 가볍게 타박했다.
“여운도 남기고, 여유도 갖고 그래요.”
“아, 그럼 점심 먹고서 돌리라고······.”
“푸흐흐, 괜찮아요. 고백할 때 무드 없는 거 다 알고 오케이 했잖아요.”
“음······, 그럼 무드 있는 말 해볼까요?”
한사랑이 궁금하단 눈으로 바랍자, 윤수혁이 윤지훈을 안은 채로 주위를 둘러봤다.
“이 요트. 280억에 딴 사람한테 넘어갈 뻔한 거, 300억 주고 샀어요. 이번에 일출 볼 때 타려고.”
“······역시 수혁 씨.”
한사랑이 장난스럽게 엄지를 치켜세우자, 윤수혁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별로에요? 대신에 소원은 로맨틱한 걸로······.”
“소원 말하면 안 돼요. 그럼 효과 없어요.”
한사랑이 얼른 말을 끊자, 이번에는 윤수혁이 짧게 웃었다.
“어차피 이뤄질건데······.”
“으응, 안 돼요.”
한사랑이 앙탈부리듯 고개를 젓자, 윤수혁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간직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