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
9월 말, 마포구 신수동.
서강대 인근의 왕복 6차선 대로변에 서서 고개를 젖혔다.
높다랗게 솟은 빌딩은 초가을 햇빛을 눈부실 정도로 튕겨내고 있었다.
재단 사옥이었다.
저번에 언급했던 층수보다 살짝 높았다.
지상 11층, 지하 3층.
더 높아도 좋을 것 같았지만, 이것도 근사했다.
한 층의 전용면적이 90평짜리 건물이라서 널찍한 게 제법 무게감이 있어 보이기도 했고.
"진짜 끝내줍니다, 의원님."
어느새 박 보좌관이 옆에 붙어 있었다.
나처럼 위를 올려다보던 그가 눈을 잔뜩 찡그린 채 감탄을 이어갔다.
"크으······. 윤수혁재단, 로고 디자인도 기가 막히네요."
그가 건물 정문에 달린 로고를 보고 있었다.
'윤수혁재단'이라고 쓰인 순수 한글과 'YSH FOUNDATION'을 단정하게 모아 놓은 모습.
해외 디자이너를 값비싸게 고용했다고 보고 받았다.
재단명이 내 이름이고, 내가 설립자 겸 명예이사장이었고, 아버지가 이사장이니 싸구려로 할 순 없어서 그랬다.
건물부터 꽤 값이 나갔다.
2009년에 준공한 120억짜리 매물로, 리모델링 비용만 50억이 넘게 쓰였다.
각종 사무집기까지 포함하면 건물에만 200억 정도가 들어간 셈.
재단 기금이 3,000억이니 비율상 큰돈은 아니었으나, 200억만 있어도 재단 설립이 가능한 일이니 큰돈이라고 봐야겠지.
"의원님 스케일이면 진즉에 재단 하나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거 정말 멋지네요. 역시 의원님 스케일에 어울리게······."
늘어지는 칭찬에 앞을 바라봤다.
곁에 있던 영석이가 눈치껏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먼저 움직였다.
"사람들 기다립니다, 들어갑시다."
"아, 네!"
박 보좌관, 영석이와 함께 재단 전용 엘리베이터에 탔다.
누를 수 있는 층이 여섯 개 뿐이었다.
11층부터 6층까지.
재단이사장실과 상임이사의 사무실이 최상층이었고, 재단 본부가 업무를 하고 회의를 보게 될 곳이 10층, 사무국 직원들의 업무와 복지에 쓰이게 될 나머지 층이 9, 8, 7, 6층이었다.
그 중 돼지머리 고사를 지낼, 강당으로 리모델링한 9층에서 내렸다.
"의원님!"
"아, 이사장님!"
미리 와 있던 사람들이 내게 허리를 숙였고, 동시에 환영의 박수 소리가 퍼졌다.
"아드을!"
아버지가 감격스런 얼굴로 나를 끌어안았다.
내가 초선에 붙었을 때, 최고위원이 되고 재선에 성공했을 때보다도 더 감정적인 모습이었다.
뒤에 있던 어머니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고생 많았다, 고생 많았어."
눈에 과장되게 힘을 준 아버지의 모습에 차마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대답했다.
"제가 뭐 한 게 있나요. 여기 계신 분들이 고생했죠."
이어서 장인장모, 그리고 유모차를 끌고 있던 아내까지 다가왔다.
"오늘도 늦었네요.“
"근로특위 일 때문에······, 아, 지훈이는 자요?"
커버를 덮어 놓은 유모차를 바라보며 묻자, 한사랑이 싱긋 웃었다.
"차만 타면 천사처럼 자요."
그사이, 장인의 두꺼운 손이 내 팔뚝을 잡았다.
"수고했네, 사위. 그리고 고맙네."
"아닙니다, 장인어른."
장인도 윤수혁재단의 이사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중소기업진흥협회의 협회원 자격도, 사업 투자금까지 줘서 러시아에서의 영역 확장을 돕던 중이었고.
그 때, 법무법인 손문의 문석민 대표 변호사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가족들 틈에 낀 그의 얼굴이 난처해보였다.
그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죄송합니다, 의원님. 결례지만, 미리 말씀드릴게 있습니다. 초청하지 않은 손님들이 와서 부득이하게 위층에 모셨습니다."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
"누군데요?"
내가 되묻자, 목소리가 더욱 졸아들 듯 작아졌다.
"······대기업 대관담당들입니다."
"몇 명이나 왔어요?"
"총 16명입니다만, 돌아간 사람도 6명이나 됩니다."
동시에 문 변호사가 작은 포스트잇을 하나 건넸다.
기업과 이름이 간략히 적힌 명단이었다.
잠깐 내려다봤는데, 헛웃음이 날 뻔했다.
포스트잇에 적힌 기업들의 가치를 다 합치면, 시가총액 수백조 원이 이르는 엄청난 규모였다.
우리나라 한 해의 예산 즈음 될까?
그래도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이들이었다.
기업의 때 묻은 돈 썼다고 오해하게 만들 일이 있는가?
그래서 초청하지도 않은 것이었다.
내 재산을 줄이고, 이미지 메이킹과 사회 환원하는 게 목적이었다.
기업 자금을 후원 받고, 돈세탁이 목적이 아니라.
물론 재단을 편향적으로 운영하고, 내 입맛에 맞게 주물럭거리긴 하겠지만.
어쨌든 내 돈만 투자했고, 홍보를 위해 주요 언론사 기자들만 스무 명을 따로 초청했었다.
그런 와중에 대관팀이라니.
애초에 들여서는 안 될 일이었지만, 회의실에 데려다 놓은 것도 이해가 되긴 했다.
문 변호사가 감히 쫓아내긴 버거울 것이었다.
우리나라를 주름 잡는 기업들이 아닌가?
대기업 그룹부터 자동차 회사, 통신사, 게임사, 중공업, 항공사까지······.
대관팀이면 최소 상무이사 이상이고, 나를 만나기 위해서는 전무이사나 사장급이 왔을 테니 더더욱 부담이 됐을 터.
"돌려보낼 수 있겠어요?"
내가 조용히 묻자, 그의 동공이 잠깐 흔들렸다.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고개가 저어졌다.
대검 출신이라던 문 변호사도 변호사 개업 이후 고용주 눈치를 많이 봤던 모양이었다.
"내가 가볼게요."
"알겠습니다."
"아, 고사는 지내고 갑시다. 불청객 먼저 찾아갈 이유는 없잖아요?"
"아, 네. 그럼 행사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규모가 예상보다 컸다.
건물 매입부터 리모델링까지, 대부분을 맡겨두고 간략한 보고만 들었기에 오늘에서야 제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9층에 마련된 강당은 마치 영화관 같았다.
한 층을 재단 행사나 강연 청취, 영상물 시청을 위해서 만들어진 곳이라고 알았는데, 생각보다 웅장했다.
천장 석고보드를 드러냈고, 좌석도 층층이 높인 모습이었다.
수용 가능한 인원만 250명.
중소기업진흥협회를 창설 할 때 했던 약소한 돼지머리 고사와는 차원이 달랐다.
좌석이 꽉 찼다.
지상파 출신의 앵커가 사회를 진행했고, 식순 이후에 온갖 축사와 기념사가 이어졌다.
그리고 나도 올라서 재단 설립 기념문을 낭독했다.
조컨설팅의 조양준 대표하고 박 보좌관이 고심 끝에 마련해준 원고였다.
언론에도 배포될 내용이었고.
이후 1대 홍보모델로 발탁된 국내 톱클래스의 남녀배우들도 인사했고, 몇 개의 코너 뒤에 홍보지원본부장이 재단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윤수혁재단은 3천억 원의 기금으로 설립되었으며, 이사회와 5개 본부, 1개의 사무국에 지역사무소 7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중 이사회는 윤수혁재단의 최고 의사결정기구로서, 재단의 사업과 운영에 관한 모든 사항을 심의, 의결하며······."
뻔한 얘기가 흘러 나왔다.
그러나 규모는 흔하지 않았다.
돈은 당연했고, 인원도 상당했다.
이사가 24명, 5개 본부 구성원이 180명, 사무국 직원 360명, 지역사무소 직원 420명으로, 재단의 총 구성원이 천 명에 가까웠다.
본래 8월 중에 완료하겠다고 한 게, 9월말까지 늦어진 이유가 여기 있었다.
돈이 넘치고, 사이즈가 커지다보니 이렇게 된 것이었다.
"휴, 이거 참······. 잘 해야 될 텐데, 막상 설명 들으니까 어깨가 점점 무거워 지는구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전문가분들 모셨잖아요."
"그 분들도 보통 대단한 분들이 아닌데, 참······."
전직 유니세프 사무국 출신과 서울대 교수, 외국계 은행 간부 등이 모인 자리긴 했다.
기본만 갖춰 놓은 중소기업진흥협회나 한국문화예술진흥협회와는 상황이 달랐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내가 따로 접촉을 부탁한 이들이었다.
설립식 참석자 태반이 내게 필요한 인맥이자, 도움을 주고받은 사람들이었다.
애초에 이사부터 그랬다.
안순익 협회장, 오준범 이사 등등.
내 정치에 유익하고, 선거에 도움이 되며 각자의 능력도 있는 인사들이었다.
한마디로 재단도 내 정치 인생을 위해 있는 것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아주 비싼 도구.
그 사이 이번에는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의원님······."
문 변호사가 망설이듯 말을 걸어온 것이었다.
"예."
"대관담당자들······, 제가 돌려보내도 되겠습니까?"
"괜찮으시겠어요?"
"아, 예. 행사 시간도 있고, 의원님께서 직접 마주하기보다는 제가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벌써 한 시간 반이 지난 상황.
문 변호사가 애가 탄 모양이었다. 그가 당장이라도 일어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래요, 이왕 가실 거면 정 대표님하고 같이 가세요."
"무궁의 정대환 대표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그 분 있으면 도움 될 겁니다."
경호업체 무궁의 대표인, 정 대표라면 대관담당자 정도는 기세로 쫓아내는 것도 가능했다.
문 변호사가 주춤하면 기댈 수 있는 지지대 역할을 해주기도 할 터.
"네, 알겠습니다."
문 변호사가 고개 숙이고 일어났다.
어느샌가 같이 나가는 정 대표의 뒷모습이 아주 듬직했다.
그에게 재단 경호부터 우리 가족 신변과 집 경비까지 모두 맡기고 있었다.
근래에는 내 차 뒤에 항상 무궁의 까만 SUV가 따라 붙기도 했고.
당연히 기존의 인력과 시설로는 모자라서 내가 투자금을 따로 챙겨준 것이었다.
나를 위한 투자였는데, 정 대표는 중기협의 설립 취지라고 생각한 듯 어느샌가 나를 열성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그사이, 어린이합창단이 무대에 올랐다.
벌써 중간 공연 타임이었다.
* * *
미래자동차의 대관담당 부사장 박경익이 앞에 놓인 빈 종이컵을 바라봤다.
정수기 물만 두 잔 째였다.
윤수혁과 만나기 위해, 초청장도 주지 않은 설립식에 일부러 찾아왔었다.
그것도 윤수혁과 급을 맞추기 위해서 상무나 전무를 보내지 않고 직접 온 것이었다.
그러나 한 시간 반이 되어가도록 나타나는 사람은 없었다.
3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경호원 한 명이 서 있을 뿐.
박경익이 경호원을 쳐다보며 물었다.
"흠, 거 아직 멀었나?"
"네, 아직 행사 중입니다. 한 시간 반 정도 남았습니다."
경호원의 칼 같은 대답에 박경익이 입맛만 다셨다.
아쉬운 소리를 하러 와서 갑질을 할 수도 없고, 따질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재단의 최초 기금만 3,000억이라고 했다.
그것도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추가금이 올해 안에 최소 수백억 원 이상 투입된다는 찌라시가 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돈을 대는 게 맞을까?
그러나 재단은 후원으로 운영되는 것이었다. 국제적인 후원단체도, 국내 유명 복지재단도 마찬가지였다.
개인에게 단 돈 만 원을 받기도 하고, 기업에게 정기 후원을 받아가면서 운영되는 것이었다.
그게 비영리재단이 존속하는 방법이었다.
또한 대기업의 후원은 단순 후원금 증가의 문제가 아닌, 재단의 신용도를 높여주는 중요한 일이었다.
정부의 사업을 따내고, 국제적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선 대기업 후원은 필수 코스였다.
더구나 재단은 다른 쪽으로도 쓰였다.
바로 재산 세탁.
회계 조작이나 후원 부풀리기, 페이퍼 컴퍼니 자금 조달 따위로 비자금 조성에 쓰이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박경익이 이 자리에 와 있었다.
물이나 한 컵 더 떠먹을까 하던 중.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최초에 자신을 맞이했던 문석민 대표 변호사가 나타났다.
"어! 오셨습······?"
환한 미소와 함께 일어나던 박경익이 주춤했다.
뒤에 험상궂은 인상의 정대환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조폭 두목의 모습이 아닌가?
문석민이 목소리를 냈다.
"죄송합니다만,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재로서 기업의 후원을 받을 예정은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죄송합니다."
"아니, 일단 만나서 얘기라도 좀 나눌 수 있게 해줘야죠. 나, 여기서 한 시간 반이나 기다렸습니다."
박경익이 얼굴을 굳혔다.
그가 누군지 잘 아는 문석민은 형식적이지만, 사과 인사를 다시 하려고 했다.
그러나 뒤에서 비교적 젊은 경호원들이 나왔다.
"나가시는 길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이쪽입니다."
정대환의 눈짓에 경호원들이 움직인 것이었다.
"아, 아니. 내가 누군 줄 알고······."
"이쪽입니다."
경호원이 말을 묵살하고 입구를 안내했다.
다른 방도 마찬가지였다.
윤수혁재단 건물 10층의 본부장과 부본부장 응접실에 있던 15명 대관담당들도 전부 경호원의 안내를 받고 있었다.
분에 찬 박경익은 올라오는 말을 억지로 삼켰다.
미래자동차 사장단과 오너 일가를 제외하고, 이런 적은 없었다.
정치인도 눈치를 보는 게 자신이었다.
그런데 윤수혁만 달랐다.
경호원을 시켜서 강제로 쫓아내려 하다니?
그러나 윤수혁이 굽힐 이유가 없긴 했다. 그는 헌정사상 유일무이한 정치인이었다.
박경익은 여러 번의 필터를 거친, 한 마디만 간신히 내뱉었다.
"······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