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169화 (169/191)

# 169

[3당 지도부, 오성 특검 비공개 회담 예정]

[오성그룹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 중, 특검 논의는 과한 조치"]

[행복당 오성그룹 특검법 추진, 신민주당과 새정치당도 협상 테이블에 앉아]

3당 논의가 언론에 보도 됐다.

내가 낸 기사였는데, 좀 아쉬웠다.

원래 내 목적은 기자회견을 가장한 공개형 논의였다.

바라던 장소도 국회 귀빈식당이었다.

10년 전에 오성 비자금 특검법 논의로 대선 주자 셋이나 모였던 곳.

나름 뜻 있는 장소라서 고르려고 했는데, 비공개 형식에 회담 장소도 호텔 비즈니스룸으로 정해졌다.

따지자면 굳이 안 가도 그만이었다.

애초에 본회의 의결은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되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의석 162개를 차지한 우리 당만 있어도 지지고 볶는 게 가능하다는 뜻.

더구나 국회의장도 우리 당 출신이고, 국회사무총장은 외삼촌이었다.

수월한 심의와 의결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뭐, 다른 당에서 필리버스터로 시간을 끌면 모르겠지만, 국가적 대계도 아닌 대기업 조사에 그럴 인간은 없었으니 모든 게 내 뜻대로 될 예정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신민주당과 새정치당의 비공개 논의에 응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미지 때문이었다.

오성 측이 주장하는 독주의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른 정당까지 참여하는 순간, 국회와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사안이 되는 법.

그래서 비즈니스룸에 찾아갔었다.

그런데 웬걸.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있었다.

"부회장님?"

오성그룹 이진철 부회장이었다.

그가 여기에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장소도, 내용도 비공개로 진행된 회담이지만 언론에 보도된 것이 아니던가?

더구나 이 호텔도 오성 계열 호텔이 아니었다.

경쟁사인 외국계 기업의 호텔.

내가 자리에 앉지도 않고 바라보자, 딴 데서 목소리가 나왔다.

"윤 최고, 일단 앉지."

신민주당의 전 당대표이자, 현 상임고문인 황택근 의원이었다.

맞은편에는 마찬가지로 새정치당의 전 당대표이자 현 상임고문인 염상수 의원이 앉아 있었다.

당 지도부 회의라더니, 지도부였던 대선주자들만 모여 있었다.

두 정당 모두 전당대회도 아직 못한 상황, 이번에 선발된 지도부라면 원내대표나 정책위의장이 왔어야 했다.

그게 아니면 비대위원장이나 비대위원.

그러나 비대위도, 원내대표도 없었다. 각 정당의 실세인 두 사람과 이진철 부회장뿐.

왠지 조성현 당대표의 스케줄을 고려하지 않고 회담 일정을 잡은 것부터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 그림을 원했던 모양이었다.

"윤 의원, 거 서 있지 말고 좀 앉아. 선배들 목 아프게 할 셈인가?"

이번에는 염 의원까지 거들었다.

"알겠습니다."

나를 구슬리는 게 목표일지, 대가를 뭘 제시할 건지 등등 떠오른 생각을 정리하며 앉는 사이.

가장 연장자인 황 의원이 입을 열었다.

"미리 말해주질 못한 건 미안하네. 부회장님이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는데, 주변 이목이 있잖은가?"

"예, 이해합니다."

"그래, 그러면 말이 쉽겠네. 특검법 좀 날려주게."

날린다라는 말은 국회의원끼리 쓰이는 은어였다.

일부개정법률안의 문장을 삭제하거나, 법률안을 통째로 폐기한다는 뜻.

곧 특검법 선언을 철회하라는 말이었다.

"하."

헛웃음이 절로 나오자, 이 부회장의 무표정이 움찔했다.

내 결정이 자신의 안위와 관계되었음을 알기에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단칼에 잘랐다.

"번복할 생각 없습니다."

안 그래도 여야가 바뀔 때마다 스탠스도 덩달아 바뀌어서 욕먹는 존재가 국회의원이었다.

공약 남발하고 못 지키는 것보다 욕먹기 쉬운 요소였다.

황 의원의 목소리가 곧장 내 대답을 뒤따라 나왔다.

"아참, 번복하라는 뜻이 아니었네."

"그러면 뭘 날리라는 겁니까?"

내 차가운 물음에 황 의원이 능청스레 손을 내저었다.

"내가 생각이 많다보니 말이 잘못 나왔네, 날리는 게 아니라 묻어 두자는 말일세."

능구렁이 같았다.

내가 고민했으면 번복 하자고 설득시키려 들었겠지.

"계류(繫留)시키자는 겁니까?"

발의된 법안이 상임위나 법사위를 통과하지 못해서 본회의에 상정되지 못하는 것을 계류한다고 했다.

상임위원들이 합의하지 못하거나 법사위의 해석이 일치하지 못할 때, 주로 계류가 되곤 했다.

그 말로는 뻔했다.

헌법 제51조에 따라 국회가 종료됨과 동시에 자동 폐기되는 것.

이후 총선을 치르고, 다음 국회 때 재활용하는 법안이 있기도 했으나, 그건 아주 극소수에 불과했다.

퍼센티지로 따지면 소수점 정도 될까?

그 외의 모든 법안은 사라졌고, 다시 언급되는 일도 없었다.

황 의원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번복할 필요 없으니 어떤가? 자네도, 여기 부회장님도 줏대 지킬 수 있으니까 서로 좋을 것 같네만."

그의 말은 이미 익숙한 것이었다.

많은 국회의원들이 일부러 법안 계류를 이용해 왔었다.

성실한 것처럼 발의를 남발하고, 이슈가 생겼을 때 언론 보도용으로 그럴싸한 법안을 발의하는 것이었다.

이후 이슈가 가라앉게 되면 법안이 조용히 폐기되게끔.

이는 기득권이나 스폰서에게 밉보이지 않으면서 서민층의 표심을 모으려는 수작이었다.

그래서 여야 따지지 않고, 민생이니 복지니 하면서 많은 법안을 발의했었다.

국회가 막을 내릴 때마다 수천 건의 법안들이 같이 폐기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가결되는 것보다 폐기되는 법안이 몇 배는 더 많았다.

18대 국회 때는 무려 6,453건의 법안들이 자동폐기되었고, 19대 때는 그보다 심각한 9,220건이 폐기됐었다.

전생의 19대 국회 때 9,809건의 법안이 폐기된 것에 비하면, 지금이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크게 달라진 것도 없었다.

근본적으로 국회가 바뀌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내가 우리 정당을 손아귀에 넣고, 국회 전반적으로 영향력을 끼치는 데만 6년이 걸렸다.

국회를 싹 바꾸려면 그 갑절의 시간은 필요할 터.

나는 마주 앉은 이 부회장을, 그리고 좌우에 앉은 두 의원을 쳐다봤다.

특검법의 계류와 폐기로 이 사람들이 얻는 건 뭘까?

이 부회장은 안도.

그렇다면 두 의원들은?

황 의원과 염 의원을 차례로 바라봤다.

"뭘 받기로 하셨어요?"

"어허, 받다니? 우리가 뭐 받아야만 움직이는 사람인가? 정치 하루이틀 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재계 미움 사서 좋을 거 뭐 있는가? 어차피 대통령도 여기 3당 중에 하나 나올 건데, 국정 운영은 편하게 해야지."

내가 묻자마자 두 사람이 연이어 변명을 떠들어댔다.

그러자 머리가 반짝했다.

쿵짝이 잘 맞아도 너무 잘 맞았다.

"두 분, 당 통합 결정 됐습니까? 아니······, 후보 단일화라도 하십니까?"

"허, 참."

"뭐? 어디서 그런 얘길 들었나?

염 의원이 짧게 웃었고, 황 의원이 덤덤히 나를 바라보며 묻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이 부회장님이 도와주셨고요?"

내 말에 천연하던 셋의 시선이 흔들렸다.

황 의원이 나를 재깍 쳐다봤다.

"어허······, 지나치네 이 친구야."

내가 대꾸하지 않자, 염상수도 말을 뱉었다.

"거 참, 젊은 사람이······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말게."

맞는 건지, 아닌 건지 아리송했다.

전생과는 전혀 달랐다.

당 통합의 대상도 달랐고, 상황과 사람도 모두 달랐으니까.

다만 이 부회장이 둘을 돕는 건 기정사실인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둘이 입을 맞추고 이 부회장을 도울 이유가 없었다.

짐작으로는 조성현 당대표의 대선 지지도가 높으니, 그에 대비한 걸로만 보였을 뿐.

그럼 이들과 더 말 섞어서 좋을 게 있을까?

고개가 저어졌다.

"계류는 여기서 정할 일이 아닌 것 같네요."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윤 의원님."

이 부회장이 반 즈음 몸을 일으키며 나를 붙잡았다.

"······따로 얘기 좀 할 수 있겠습니까?"

대꾸하지 않자, 그가 말을 이었다.

"비품실도 상관없습니다."

오, 비품실?

* * *

'주인 될 사람은 피부터 다른 법이다.'

이진철의 아버지, 오성의 회장인 이청기가 그를 가르칠 때 한 말이었다.

이진철은 이청기가 자신에게 오성을 물려주기 위해서, 일찍부터 마음가짐을 가르치기 위해 한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 말이 어울리는 이가 자신의 앞에 있었다.

바로 윤수혁.

당대표씩이나 했던 황택근과 염상수가 기를 펴질 못해서인지, 아니면 윤수혁의 당당함을 느껴서인지, 구체적으로 그런 생각이 어디서 기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수혁에게는 그 말이 딱 맞았다.

어쩌면 정당의 주인이 되는 것도, 그룹의 주인이 되는 것과 맥락이 같을 수도 있었다.

비록 이진철이 정치를 전문으로 배운 것은 아니어서 잘은 몰랐지만.

어쨌든 둘 다 머슴이 아닌, 주인 아닌가?

간담회 때 화를 꾹 누르게 했던 그 위압감이 비로소 확실하게 느껴졌다.

그 때는 윤수혁을 얕잡아 봤었다.

젊은 놈의 치기라고.

은연중에 느끼던 압박을 그렇게 치부하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윤수혁은 달랐다.

이대로 호텔 방을 나간다면 필히 특검법을 통과시켜서 오성그룹을 향해 칼질을 시작할 터.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이건 시끄러워지는 것 이상의 문제였다.

물론 끝은 뻔했다.

심각한 경우에도 최후진술을 하고 집행유예로 끝날 것이었다. 어쩌면 아버지가 겪었듯, 대통령 특별사면을 두고 협상해야 할지도 몰랐지만.

현 이민수 정권과는 말이 통하니, 특별사면도 가능 할 것이었다.

그러나 이진철은 그 때의 고초를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도 당사자였다.

소환 당해서 조사 받았고, 법무팀의 브리핑을 수십, 수백 번을 들으며 업무를 보지 못했었다.

지금도 해야 할 일이 밀려 있었고.

오성의 고문으로 있는 전직 국회의원 부성철이 전한 말처럼 좋게 넘어가야 했다.

이윽고 이진철이 입을 열었다.

"윤수혁 의원님, 제가 뭘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더 이상 자존심 세우긴 힘들었다.

이제 머리를 숙여야 할 때였다.

재계와 정계가 줄다리기 하는 건 흔한 일이었고, 그러다보면 끌려가거나 당겨오는 일도 있는 법이었다.

이번에는 자신이 끌려가는 것일 뿐, 큰 의미는 없었다.

이진철은 아버지 이청기가 겪은 파란만장한 삶을 지켜봤기에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간담회 때 근로특위 조건을 받아들이시지 그랬습니까?"

"그 때는······, 아니.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말씀하시죠."

"그냥 특검 받으시면 됩니다. 이건 더 이상 협상의 여지가 없습니다."

윤수혁의 담담하면서도 단호한 말에 이진철이 고개를 저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재벌 때리기치곤 과한 조치입니다."

윤수혁이 연하게 미소 지은 뒤 대답했다.

"적당히 때려서 무슨 효과가 있겠습니까?"

"······!"

재벌 때리기를 시인했다.

말인즉슨, 치바그룹을 시작으로 오성과 기타 대기업을 줄줄이 세워놓고 때리겠다는 뜻이었다.

명백히 대선을 염두에 둔 행위였다.

"그럼······ 한 대라도 줄일 순 있겠습니까?"

"글쎄요."

윤수혁의 의문스런 말에 이진철이 얼른 말을 이었다.

기회였다.

"현재 행복당에서 진행 중인 사업과 근로특위의 업무에도 적극 투자하는······."

윤수혁이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잘랐다.

"아뇨, 그런 걸로는 모자랍니다. 좀 더 세야죠."

"······?"

"노조 인정은 어떻습니까? 그럼 특검에서도 오성의 개혁 의지를 참작해줄 겁니다. 오너 일가 대신에 임원 선에서 책임을 물을 수도 있고요."

"노조······."

이진철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무노조 기업이 오성이었다.

일부 계열사에 노조가 있고, 오성그룹에서 인정하지 않는 노조연합이 있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노조 창설도, 가입도 오성에선 끝을 의미했다.

이진철은 섣불리 대답하질 못했다.

오성의 역사가 바뀌리라.

그사이, 윤수혁이 입을 열었다.

"아니면 버텨도 됩니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습니다."

"······?"

"10년 전보다 더 힘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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