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
“시위?”
“네, 전자 사옥 남측하고 시청광장, 광화문 광장입니다.”
오성그룹 부회장 이진철이 비서실장이 내민 태블릿PC를 확인했다.
화면에는 오성그룹 직원이 촬영한 동영상과 사진 몇 장, 집회 규모와 주요 인원 등을 보고한 문장 몇 줄 있었다.
대강 내용을 훑은 이진철이 비서실장을 바라봤다.
“생명 앞은?”
오성생명 사옥 출입구 앞을 말하는 것이었다.
오성일반노동조합에서 무기한 시위 중인 현장.
전에는 오성에서 집회 신고를 선점하여 시위 자체를 원천차단 했었으나, 12년도 7월에 법원에서 형식적인 집회를 무효화하면서 노조가 점거한 곳이었다.
그것도 1년 내내.
시위 내용은 백혈병 산업재해 인정이나 무노조에 대한 반발, 그 외의 노동자 탄압 해결과 부당해고 복직 등등 수십 개가 넘었다.
비서실장이 태블릿PC를 몇 번 터치했다.
“시위 중이고, 판넬과 현수막 내용에 합병 건이 추가 됐습니다.”
이진철의 인상이 어두워졌다.
합병 건을 비롯한 각종 비리 내역을 검찰에서 수사한다는 소식이 들린 지 이틀만이었다.
오성노조 뿐만 아니라 노총 같은 대규모 시위 단체까지 움직인 것이었다.
또한 대부분의 언론사가 조용하긴 했으나, 유명 케이블 방송사와 메이저 신문사 두 곳도 모직과 물산의 부당 합병을 떠들었다.
문제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지분이 엮인 합병 내용 말고도 물산의 건설 부문과 토목 부문의 부정 내역도 충분한 이슈거리였다.
수백 억은 물론이고, 해외 수주 내역까지 밝혀진다면 수천 억 규모의 비리가 드러날 가능성까지 있었다.
발각되면 언론에서 불이 붙을 터.
이후에는 역사가 그래왔듯, 불기소나 집행유예, 무죄 같은 처리가 되겠지만 시끄러워서 좋을 게 없었다.
이윽고 이진철이 입을 열었다.
“온겨레하고 제일, 광고 전부 빼고, 시위 주동자들 고발하고 구속조치 시키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윤 의원은······.”
말을 흐리던 이진철이 안경을 고쳐 썼다.
“동향 파악만 하세요. 현행범 같은 단어 안 나오게.”
경영지원실장 장신원의 실수를 언급한 것이었다.
비서실장이 얼른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곧 태블릿 PC를 회수하고 비서실장이 물러가려 하자, 이진철이 다시 불러 세웠다.
“잠깐.”
“네, 부회장님.”
이진철이 엄지와 검지를 문지르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 조치로는 모자랐다.
잠잠하게 만들려면 이 사태의 근본적인 이유를 끊어내야 했다.
바로 윤수혁.
그가 합병 과정의 비리를 눈치채고 움직인 상황이었다.
그랬기에 비품실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몰아붙였던 것이겠지.
그러나 자신이 누구던가?
오성그룹의 부회장인 이진철이었다.
이제 서른둘 밖에 안 된, 재선에 불과한 정치인과는 달랐다.
그룹의 회장이었던 아버지의 밑에서 인맥을 넓혔고, 경영 수업을 받았었다.
자신의 나이 올해 쉰.
윤수혁보다 20년은 앞서고 있다고 믿었다.
국회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해도, 칼자루까지 거꾸로 쥐진 못할 터.
윤수혁이 아무리 난리를 쳐도 어차피 사건은 지난하게 흐르다 끝나게 될 것이었다.
특검이 도입되기 전인 2000년도 초중반에도 전환사채 발행과 재산 편법 증여 등의 사태가 일어났지만, 불기소 처분만 십수 번을 받았었다.
참여연대가 증거를 더해 매번 고발 조치를 했었음에도 6번 연속으로 불기소를 받은 전례도 있었고.
무엇보다 특검이 도입되고, 유죄 판결까지 받았으나 2009년에는 대통령 특별사면을 받음으로서 모든 사건을 종결시켰었다.
이후 오성은 명실상부한 언터쳐블이 됐었다.
정 안되면 청와대를 움직이면 될 일.
그랬기에 윤수혁이 검찰에 정황을 흘린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지만, 시끄러운 건 좋지 못했다.
더구나 윤수혁 같은 이라면, 생명 사옥 앞에서 시위하는 것보다 더 큰 파장을 일으킬 가능성이 농후했다.
사장단이 알아서 하게 놔두는 걸로는 부족했다.
직원이 현행범으로 잡혀 갔었고, 특검이라는 단어까지 은근히 나왔었다.
이 이상 가면 더욱 시끄러워지리라.
이진철이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경영지원실장하고 대외협력담당 사장 호출하세요.”
경영지원실은 그룹 내 다양한 일을 도맡았고, 대외협력담당은 기관이나 단체에 대응하는 오성그룹의 공식적인 대외 창구였다.
그 둘을 부른다는 건 윤수혁에 대한 대응을 하겠다는 뜻.
비서실장이 꾸벅 허리를 숙이자, 이진철이 말을 마무리 지었다.
“지금 당장.”
[행복당 근로특위 치바에 이어 오성까지 고발해]
[전경련 사무국장 “행복당 근로특위 고발 남발은 기업 죽이기에 불과”···성명서 발표]
[대한기업인연합, 행복당의 오성그룹 고발과 특검 언급은 대선 표심 의식한 재벌 때리기에 불과···자유경제시장 침해에 반발]
역시나 반대 기사가 났다.
그것도 내로라하는 단체에서 움직였다.
전경련, 대한기업인연합.
그 외에도 갖가지 단체에서 성명서를 발표했고, 행복한국당을 지탄했다.
내가 잡고 있는 몇몇 언론사를 제외하고는 다들 오성 그룹의 손을 들어주는 모양새였다.
역시 국내 최고의 광고주다웠다.
그것도 단순한 재력이 아닌, 사회적 위치와 인맥 같은 힘이 작용했겠지만.
어쨌든 국회의원들, 그것도 행복한국당을 상대로 이렇게 나온다는 게 웃겼다.
행복당이 보통 정당인가?
제 5공화국 이후로 최대 의석을 낸 정당이며, 국민적 지지는 물론이고 대선가도까지 탄탄한 곳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자금이 흘러넘친다는 사실이었다.
자금이라기보다는 3조 가까이 되는 내 사유재산 덕분이지만.
약 5년 전부터 뿌리기 시작한 돈은 의원들의 정치 자금부터 당의 살림살이에도 쓰이고 있었다.
선거철 특수 기간을 제외하고 연간 수십억 원 정도.
국회의원 평균 재산으로 계산하면 의원 두세 명의 집안을 매년 말아먹는 꼴과 같았으나, 나쁠 건 없었다.
해봤자 연이자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그 적은 돈으로 자금줄 역할을 한다는 건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의원들도 내 돈을 더 반겨했다.
기업인과의 찜찜한 현찰 박치기보다 깨끗하고, 약점 잡힐 것도 없으니까.
그래서 내 라인의 웬만한 의원들은 지역 유지나 중견기업 대표, 대기업 대관팀의 봉투를 받지 않았다.
아니, 있긴 했지만 대부분 바뀌었다.
물론 제 잇속 때문에 받은 사람도 있겠지만, 타 정당에 비해서는 아주 적은 편이었다.
재계의 영향을 거의 안받을 정도.
20대 총선 때 절반 정도가 물갈이되기도 했고, 내 돈맛을 본 이들이 스폰을 끊은 덕분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 효과를 제대로 보게 됐다.
정확히 말하면 오성그룹이 힘을 못 쓴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지.
국회 본관 제2회의장.
행복한국당 의원총회가 열리는 장소였다.
국민의례 같은 식순을 마치고, 조성현 당대표의 기조연설 뒤.
내가 연설대에 올랐다.
“강북구을, 윤수혁입니다.”
소개를 마치고 의원들을 보는데, 그들의 시선이 묘했다.
내가 중요한 말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오랜만이라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둘 다 맞았다.
대선 주자인 조성현 당대표를 띄워주기 위해서 근래에 조용히 있었다.
지역구와 국토위 업무, 근로특위 일이 아닌 한 얌전히 있었고.
그랬기에 마이크를 잡는 것도 흔한 일이 아니라서, 의원들의 시선이 쏠릴 만했다.
윤수혁계라고 할 만한 조 대표나 임청학 원내대표, 고일준 최고위원 등 가까운 의원 몇 명에게는 언질을 줬으니, 그들 말곤 모를 터.
차분하게 운을 뗐다.
“몇 개월 전부터 이슈가 됐던 최저임금 협상을 계기로, 저는 뜻 있는 전문가들과 근로환경개선특별위원회를 창설했습니다. 그리고 제 1차 회의에서 치바그룹의 불공정 행태에 대한 정황을 확인하여, 검경에 수사를 의뢰, 동시에 금융위와 고용노동부 등에 치바그룹에 대한 시정 조치를 요구했고 법안 발의까지 마쳤습니다. 그러나······.”
잠깐 말을 멈추고, 의원들을 바라봤다.
멀찍이서 플래시가 터졌다.
2층에 마련된 기자석에서 사진을 촬영 중이었다.
그들에게 사진 찍을 시간을 잠깐 주고 나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치바그룹 비리사태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습니까?”
내 말에 의원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국회 구내식당 밥은 나보다 더 먹은 사람들이었으니, 무슨 말이 나올지 예상하는 것이었다.
“구속영장은 기각되었고, 수사 열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그라들고 있습니다. 경찰도, 검찰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부도 시정 조치에 대한 법적 해석을 법무부로 이관하며 말을 아끼고 있습니다. 이래서 제대로 된 정의 구현을 이뤄낼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직접 도둑질하는 현장이라도 잡아내야 되는 겁니까?!”
슬슬 긴장을 높이기 위해 언성을 높였다.
다시금 플래시가 터지고,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였다.
“저는 이런 과거와 더불어서, 오성그룹의 비리 정황을 검찰에 넘겼으나 수사 속도가 원활하지 않은 점, 정부의 대응이 미진한 점을 이유로, 또한 법안 발의에 국민적 여론을 모으기 위해서······.”
잠시 말을 멈추고 아랫배에 힘을 줬다.
“오성그룹의 불공정 행태와 계열사의 부정, 부당 합병 건에 대한 특검법 발의를 선언합니다.”
* * *
신민주당의 상임고문 황택근이 관자놀이를 꾸욱 눌렀다.
골치 아픈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개혁위, 전당대회, 새정치당과의 통합 얘기에 이어서 이틀 전에 터진 윤수혁의 오성그룹 특검법 발의까지.
정리되지 않은 게 쌓여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황택근은 오성그룹 관계자와 통화 중이었다.
그것도 5선 국회의원 출신으로 부의장을 했었던, 오성그룹에 고문으로 있는 옛 동료 부성철이었다.
- 황 의원아, 털어놓고 편하게 얘기 하자. 으이?
“지금 골 아파, 이 친구야.”
- 아플 게 뭐 있나? 특검 도입은 행복당 독단이다, 밀어붙이면 되는 일 아니야?
“자네가 몰라서 하는 말이야.”
- 허, 뒷방에서도 들은 건 다 들으면서 살어.
황택근이 소리 없이 고개만 저었다.
뒷방에서 듣는 것과 현장에서 보는 건 체감이 다른 법이었다.
오히려 나중에서야 얘기는 부풀려 진다해도 무게는 가벼워지기 마련이었다.
보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 있듯이.
그사이, 부성철의 말이 이어졌다.
- 10년 전에도 특검 했었다, 뭘 또 하냐고. 어? 대선 의식해서 무리하게, 독단적으로······.
“부성철.”
- 하는······, 음? 정 없게 이름만 불러?
“너 퇴물 다 됐다.”
냉랭해진 말투에 수화기 너머가 주춤했다.
- ······무슨 소리야, 갑자기?
“치바그룹 찔렸을 때, 국회가 왜 조용했겠어?”
이유야 많았다.
치바그룹은 오성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국내 영향력이 적었고, 고발 낌새를 알아차리기 전에 근로특위에 당했었다.
그 외에도 기업과 의원 간의 유착 관계 같은 것도 작용할 터.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윤수혁, 네 생각보다 세다.”
- 듣긴 했다, 돈 뿌려서 당 장악한 지 몇 년 됐다면서?
“아니, 더 있어.”
- 또 뭐?
“돈 많이도 뿌렸다. 우리 당도 몇 받았을 거고, 국회 공무원들도 코꿰고 있을 거다.”
- 오성 돈은 돈이 아니고?
“인마, 돈 받았다고 칼잡이 노릇할 정치인이 어딨어? 정치 생활 끝낼 놈도 그렇겐 못해, 윤수혁이 세다고 했잖냐.”
황택근이 단언하자, 부성철이 입맛을 다셨다.
- 허, 참. 그래도 구슬리면 칼잡이할 놈들 나올 텐데.
“야, 이······. 뭐 들었어? 국회가 통째로 코 꿰었다니까.”
- ······.
비로소 부성철의 입이 닫혔다.
길게 숨을 내쉰 황택근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도 윤수혁이 뭐하는 놈인가 싶다, 내가 한 발 나가면 두 발 앞서고, 두 발 나가면 세 발 앞서. 간극이 좁혀지질 않는다.”
- ······천하의 황택근이가 그런 말을 하네.
“여기 있으면 알게 돼, 분위기가 그렇다.”
- 그럼 나도 옷 벗어야 되겠어. 밥값을 못하니, 원.
“그만두기 전에 네 오너한테 좀 알려줘라. 전경련이고, 대기련이고 다 좋은데······. 국회 사분오열하기 힘들다고.”
그렇게 매듭지을 무렵, 부성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
- 근데, 황 의원아.
“어?
- 너 말하는 거 보니까, 윤수혁이랑······. 맞냐? 붙어먹었냐?
“붙어먹긴.”
- 그럼 뭐야? 내가 윤수혁이는 몰라도, 너 하는 짓은 빤히 아는데.
그 말에 황택근이 천천히 대답했다.
“······나도 대선 준비해야지, 오성 편들어서 좋은 소리 안 나온다.”
- 그럴 줄 알았다.
“새정치당하고 진성당도 그래, 거기도 쓴소리는 못한다. 너도 알잖냐?”
대선이 그랬다.
지역구라는 좁은 인기가 아닌, 국민적인 여론을 신경 써야 했다.
재벌, 대기업은 그 자체로 반국민적인 어휘였다.
애초에 10년 전의 오성 비자금 특검법 발의도 대선을 앞두고 이슈가 됐던 사건이었고.
무안해진 황택근이 툭 말을 뱉었다.
“그냥 좋게 넘어가라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