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165화 (165/191)

# 165

치바그룹 대외협력단장실.

총괄사장인 주명규가 부하 직원이 올린 서류에 인상을 찌푸렸다.

[근로환경개선특별위원회 제 1차 회의 분석의 件]

안에 적힌 것은 치바그룹을 표적으로 삼아 공격하는 내용이었다.

업계의 관행이나 다름없는 근로자 이면 계약서 작성과 노조 차별 대우, 계열사의 원자재 마진 폭리를 시작으로 더 큰 부정 의혹까지 있었다.

천기윤 회장의 수족인 치바카드 대표이사에 대한 배임, 그리고 오너 일가이자 치바면세점 이사장인 천금자의 뇌물 수수 의혹.

밝혀지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질만한 얘기였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천기윤 회장까지 법정에 출두해야 할지 모를 일.

그래서 이미 입막음을 했었다.

검경은 물론이고, 청와대까지 접촉해서 로비했던 것이었다.

막대한 비자금을 썼고, 인맥을 총 동원해서 대통령과도 만날 수 있었다.

그게 몇 개월 전.

이후 형제의 난 이후에 예정된 수사를 기획 단계에서 막았었다.

사업가 출신인 이민수 대통령과 얘기가 잘 통한 덕분이었다.

오래 되지도 않은 과거.

그런데 윤수혁이 수사에 불을 지피려는 것처럼 일을 벌이고 있었다.

'이 놈이 왜?'

말이 근로특위 위원장이지, 전 월요회 멤버까지 했던 윤수혁이라면 다른 의도가 있을 게 뻔했다.

주명규가 미간을 찌푸리며 서 있는 국회 대관팀장 이경식 전무를 쳐다봤다.

"이 전무."

"네, 단장님."

이경식이 긴장하며 대답하자, 주명규가 책상에 놓인 서류를 툭 쳤다.

"이거, 이유는 찾았어?"

"확인 중에 있습니다. 국회 대관팀 전부 근로특위 위주로 돌려서······."

"모른다 이거지?"

"네, 아직 구체적인 건······."

"그럼 이 전무 판단은 뭔데?"

"행복당의 대선 지지율 확보를 위한 작업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경식이 재빨리 대답했는데, 주명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거 말고."

차가워진 주명규의 말투에 이경식이 주춤했다.

"······그럼 어떤 판단을 말씀하시는 건지."

"왜 우리냐고."

"······."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주명규가 다시 서류를 툭 쳤다.

"왜, 판단 못하겠어?"

"죄송합니다."

"이 전무가 대답 못하면 누가 해? 당신이 국회통 아니야?"

"······윤수혁이 사전 정보를 접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정보가 어디서 나오는데?"

"죄송합니다, 확인해보겠습니다."

이경식이 칼같이 대답하자, 주명규가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천성윤 전 부회장하고 접점 있는지 파악해. 다른 팀도 전부 협조해서 같이 움직여."

이경식이 당황함을 감추며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가 꾸벅 허릴 숙이고 나간 뒤, 주명규가 인터폰을 눌렀다.

"3비서실하고 연결해."

- 네, 3비서실하고 연결하겠습니다.

회장을 제외한 기업 오너 일가의 관리를 맡는 조직이 3비서실이었다.

이윽고 인터폰에서 묵직한 남성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 3비서실장입니다.

"근로특위 보고 들었지?"

- 네, 들었습니다.

"그거 전 부회장이 접촉한 거 아닌가 의심되는데, 행적 확인하고 연락 주게."

- 저, 단장님.

3비서실장이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 그거 저희도 확인했습니다만······, 아무런 특이사항 없었습니다.

"확실해? 회장님께 보고 들어갈 거야."

- 3비서실 전부 매달려서 2차로 교차 검증까지 마쳤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 * *

[행복한국당 근로특위, 치바그룹 불공정 행위 의혹 고발]

[치바그룹 고발, 청와대 청원, 법안 발의까지 트리플 달성···행복당 근로특위 출범하자마자 성과 내나?]

[윤수혁 "치바그룹 고발은 시작에 불과, 근로환경 개선을 위해 국민의 대표로서 직무 다할 것"]

움직이자마자 언론 보도가 났다.

당연히 이슈도 됐다.

인기몰이 중인 국회의원이 대기업을 공격한 것만큼 좋은 얘깃거리는 없으니까.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연락이 왔다.

바로 주명규 총괄사장.

그와는 전 월요회 멤버여서 안면도 있고, 회장의 국감장 출석으로 트러블도 있던 사이였다.

여보세요, 라고 하기도 전에 주 사장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 만나서 얘기 좀 합시다.

"제가 바빠서요. 그리고 요새 기자들이 파파라치처럼 들러붙어서 만나기도 좀······."

- 내가 찾아 가겠소.

"그러지 마세요, 제가 볼 생각이 없습니다."

- 윤 의원!

주 사장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예, 말씀하세요."

- 이러지 말고 시원하게 얘기합시다, 우리한테 원하는 게 뭡니까?

"기자회견장에서 발표한 게 전부입니다. 원하시면 회견문 한 부 보내드릴게요."

- 진심으로 하는 소리요?

"예. 그리고 제가 바빠서 전화 끊어야 할 거 같은데,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 이, 이봐요, 윤 의원! 대체 왜 이렇게 척을 지려고 안달하는 거요? 이래서 좋을 거 하나 없어요. 대기업하고 싸우는 국회의원, 소수 진보 야당 밖에 없는 이유 알지 않소?

"알죠."

- 그리고 초선 때는 일도 같이 하지 않았습니까? 청년정책위 할 때, 청년 실업 대안 마련한다고 교류하고 인턴 제도 개선 간담회도 열었고······.

그의 입에서 까마득한 옛날 얘기까지 나왔다.

새한국당 시절, 막 금뱃지를 달았을 때를 말하고 있었다.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단장님하고 하진 않았죠, 정기윤 상무 통했었는데, 그분도 얼마 전에 보니까 잘렸더라고요?"

- 지금 인사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고, 아! 설마 정 상무요? 정 상무가 윤 의원한테······.

그가 헛다리를 짚는데 웃음이 날 뻔했다.

"일개 상무가 알 자료가 아닙니다, 오너 일가면 몰라도."

- 크헙?!

이상한 숨소리가 확 넘어왔다.

- 전 부회장을? 언제? 아니, 어떻게 말이요?

많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제 나름대로 전 부회장을 조사하고, 여기저기 찾아 봤을 텐데 내가 부회장을 만난 것처럼 굴었으니까.

그가 울기 전에 똑바로 말해줬다.

"내가 언제 전 부회장 만났다고 했습니까?"

- 뭐요? 그럼 무슨 말입니까, 그게?

이건 나 밖에 모르는 것이었다.

치바그룹 경영진 및 오너 일가의 횡령 배임, 뇌물죄 등등으로 인한 수사와 재판.

바로 전생의 기억이었다.

지금 즈음 천기윤 회장의 남매가 뇌물 수수 의혹에 얽혀 수사 대상이 되어야 했고, 이후로 17년도, 18년도까지 휘청거려야 했다.

그 과정에서 주명규가 자살을 했었고.

원래대로라면 한 달 뒤에 그의 부고가 보도될 예정.

어느새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너 일가 어쩌고 언급한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 윤 의원, 알 거 다 아는 사람끼리 이러지 맙시다. 차라리 원하는 걸 말 하세요, 무리한 것도 좋습니다. 일단 얘기라도······."

목소리에 힘을 주던 그가 어느새 타협하는 식으로 어조를 바꿨다.

이렇게 집요하게 매달리는지 이해가 되긴 했다.

그가 소속된 기업의 일이기도 하지만, 속칭 재벌 때리기는 이면적인 목적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은 탓이었다.

새 정권 초기에 유리한 협상 고지를 위해서, 혹은 이권을 얻거나 사업을 위해서, 그 외에도 각종 이익을 위해서 등등 숱한 이유로 재벌 때리기가 매 정권마다 발생했었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나는 나지.

내가 바라는 것도, 하는 것도 그냥 재벌 때리기였다.

그로 인한 지지도와 이미지 상승을 얻기 위해서, 국민적 신뢰를 위해 일하는 것일 뿐 딴 건 없었다.

이번에 최저임금이라는 이슈가 있기에 명분으로 삼아 움직인 것이었고.

"이미 배는 떠났습니다, 사장님."

- 윤 의원 그러지 말고······.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자살 같은 건 생각지도 마세요. 내가 지켜볼 겁니다."

그러자 한 박자 늦은 대답이 건너왔다.

- ······말이 지나칩니다.

생각이 늦은 건지, 뭔지는 모를 낮은 억양.

나도 얼른 대답했다.

"사장님 자리가 중책이라는 뜻이었는데,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시금 늦은 대답이 들려왔다.

- ······혹시라도 생각이 바뀌면 전화하세요.

여지를 남겼지만, 마치 포기한 듯한 말.

담담하게 대답했다.

"예, 사장님도요."

* * *

- 치바그룹을 수사 중인 검찰이 그룹 정책본부가 총수 일가의 비자금을 관리한 정확을 포착하여, 차명 의심 계좌를 집중 추적하고 있습니다. 서울중앙지검 치바그룹 수사팀은 치바그룹 본사와 주요 계열사에 대한 압수수색을 통해······.

TV를 보던 오성그룹의 부회장, 이진철이 좌우에 앉은 사람들을 쳐다봤다.

"저거 말고, 딴 소식 들은 사람 없습니까?"

치바그룹이 아닌, 윤수혁의 근로환경개선특별위원회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

치바그룹이 로비로 무마했던 검찰 수사를 재개시킨 존재가 근로특위기 때문이었다.

"······."

"······."

임원들이 대답하질 못하고 입맛만 다셨다.

그들도 사태 파악을 위해 전방위로 뛰어 다녔는데, 알아낸 게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정보의 출처와 의도 등 가장 중요한 걸 알지 못했다.

접촉이나 협상의 기회도 마련하질 못했었고.

애초에 윤수혁이나 근로특위가 대기업과는 일절 만나주지도 않았다. 근로특위 위원 일부는 아예 윤수혁 돈으로 호텔에서 숙박하고, 경호원까지 달고 다녔다.

임원들이 눈치만 보며 입을 닫고 있자, 이진철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없으면, 대책은? 나중은 늦습니다, 지금 보고들 하세요."

임원들이 다시 눈치를 살폈다.

윤수혁하고 접촉도 못했기에 대책도 마찬가지로 뚜렷하질 않았다.

여전히 시작하거나 과정에 불과한 것들.

이진철이 표정을 굳혔다.

"윤수혁이 치바는 시작이라고 했었죠, 다음은 오성일텐데. 아무 생각 없습니까?"

"죄송합니다."

"내가 지금 그 대답 듣자고 여러분들 모았습니까?"

"······."

임원진의 침묵이 이어지는 사이, 사장 하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부족하지만 준비 중인 사항 보고 올리겠습니다."

"하세요."

"근로특위의 창설 목적에 맞게 좌담회를 개최하여 접촉하거나 노조나 시민단체 민원을 통해서······."

"중간에 다른 단체 끼워 넣진 말고, 딴 건 없습니까?"

"죄송합니다."

"그래서 과정은? 검토한답니까?"

"아직 윤수혁 의원과 접촉하진 못했습니다. 좌담회 논의 내용을 준비해야 할 것 같아서······."

"다른 분들은 의견 없습니까? 김 사장님처럼 준비 중인 거라도 말을 하세요."

그러자 임원 몇이 조심스레 의견을 내놨다.

정당 접촉과 시민 단체 통해서 데모하는 일, 보좌관에게 사람을 붙이는 것까지.

그러나 이진철은 전부 고개 저은 뒤, 최초에 방안을 내놨던 사장을 쳐다봤다.

"김 사장님, 협상 카드로 쓸 만한 건 뭐 있습니까?"

"현재로선 일선 계약직 고용이나 복지 혜택 증가 정도 마련 중입니다. 구체적인 사항은 아직 계산 중이어서······."

그 말에 이진철이 안경을 벗고 눈을 문질렀다.

계산하는 것이었다.

협상카드로 쓸 만한지, 쓰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추가로 뭐가 더 있는지.

이윽고 안경을 고쳐 쓴 이진철이 입을 열었다.

"복지는 놔두고, 계약직 고용 얼마나 가능한지, 예산 추정해서 보고하세요. 숫자에 집중해서."

"알겠습니다."

"그리고 근로특위하고 좌담회 성사 먼저 시키세요."

"그럼 기간은······."

조심스레 나온 말에 이진철이 차갑게 대답했다.

"기간 알아보다가 치바하고 같은 처지 됩니다. 지금 중요한 게 뭔지 모릅니까?"

"죄송합니다, 부회장님. 최대한 빨리 하겠습니다."

그가 고개 숙인 뒤, 이진철이 다른 이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까 최 실장님, 윤수혁 보좌관 접촉한다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접촉 말고 보좌관 보고서 써서 올리세요."

탈탈 털어보라는 뜻이었다.

가족 관계 같은 단순 이력부터 범죄 의혹이나 부정이 있는지 등등.

"알겠습니다."

단단한 대답 뒤에 이진철이 회의를 파했다.

그 뒤, 자신의 사무책상으로 자리를 옮긴 그가 목을 조이던 넥타이를 풀었다.

바짝 긴장이 된 탓이었다.

치바그룹의 사건이 터진 뒤부터 내내 정계에 전화를 돌렸었다.

거기서 들은 답은 모두 달랐지만, 뜻하는 바는 같았다.

윤수혁이 생각보다도 대단하다는 것.

그가 아는 수 많은 국회의원들과 정치인들 중에 단 한 명도 윤수혁의 행보를 막아보겠다고 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보수든 진보든.

문장의 시작과 끝은 저마다 달랐지만, 뜻은 하나였다.

거절.

'잘못하면 일 나겠는데······.'

이진철의 미간이 구겨졌다.

근래에 경영권 승계를 위해 대통령과 접촉하고, 국민연금에 로비해서 간신히 그룹 지분을 끌어 모은 일이 있었다.

까딱 잘못하면 그 사실이 드러날 수도 있으리라.

그 외의 부정은 그룹 지분에 비하면 자잘한 것에 불과했으니 신경 쓸 필요는 없었고.

이진철은 안경을 고쳐 쓰면서 윤수혁을 떠올렸다.

그러나 생각나는 게 없었다.

오히려 어떻게 해야 할지, 아득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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