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162화 (162/191)

# 162

강남구 테헤란로.

오랜만에 핸들을 쥐고 차를 몰았다.

개인적으로 처리할 일이 있어서 직접 운전하는 중이었다.

안 그래도 지역구 사무소 사무장과 경리부터 국회 보좌진까지 전부 휴가를 쓰게 했다.

당연히 휴가비까지 챙겨줬고.

총선부터 전당대회까지 쉬지 않고 일한 보좌진을 격려하기 위해서, 그리고 원구성 협의부터 대선가도까지 달리기 위해 숨 고를 시간을 조금 준 것이었다.

물론 박 보좌관이나 영석이나 둘 다 애아빠고, 인턴을 제외한 보좌진 전부 처자식이 있기에 일부러 신경을 좀 써주기도 했다.

국회 개원하자마자 휴가 간 보좌진은 국회에서 이들이 유일했으니까.

그사이, 조수석에 앉아 있던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크흠, 이건 또 언제 샀어?”

아버지가 팔걸이를 슬쩍 문지르면서 묻고 있었다.

“차요? 두 달 정도 됐어요.”

포르쉐 파나메라 터보.

아내의 임신 막달쯤에 집 근처 용산전시장에서 계약한 차였다.

기본가만 2억 5천, 옵션 추가금을 9천만 원 정도 준 아게이트 그레이 메탈릭 컬러의 4인승 스포츠 카.

사는 김에 아내가 타고 다닐 카이엔 GTS도 한 대 같이 구입하기도 했고.

어느새 아버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건 세단하고 다른가보다?”

“예, 스포츠카에요. 마침 집 근처에 용산전시장이 있더라고요.”

“······그래? 이게 디자인이 좋네, 젊어 보이고 말이야.”

잠깐 바라봤는데, 아버지가 눈을 빛내면서 차를 뜯어보고 있었다.

괜히 웃음이 났다.

“아버지도 이걸로 타실래요?”

“음······, 뭐. 지금 타는 것도 나쁘진 않은데, 벌써 한 5, 6년 되니까······.”

내 대답을 피한 채, 아버지가 말끝을 흐렸다.

생각해보니 서초구에서 벤츠 대형으로 부모님께 한 대씩 사드리고 따로 차를 사드린 적이 없었다.

“제가 드렸던 카드로 사세요. 한도 없어요, 그거.”

“한도 없는 건 아는데······, 아니다.”

멋쩍은지 입을 다문 아버지를 보다가 속도를 줄였다.

볼 일을 보기로 한 장소에 벌써 도착했다.

“여기냐?”

“예, 다 왔어요.”

“어휴, 변호사들 돈 많이 벌었나보네, 10층이 넘네?”

차가 멈춘 곳은 테헤란로의 지상 13층의 빌딩 앞이었다.

그리고 내가 가기로 한 곳은 바로 법무법인 손문의 사무실.

“다는 아니고, 세 층 밖에 안 써요.”

“세 층도 어디야, 허허.”

그렇게 지하주차장에 주차를 마치자, 정장 차림의 사내들이 다가왔다.

가장 선두에 있던 50대 남성이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의원님, 회장님. 사무실까지 모시게 될 법무법인 손문의 대표변호사 문석민입니다. 오랜 만에 뵙습니다.”

문석민 변호사는 손기택 대전지검장과 함께 법무법인을 설립한 이로 한두 번 식사자리를 한 경험이 있었다.

“예, 오랜만입니다, 변호사님. 윤수혁입니다.”

“아······, 저는 회장님이 아니고 윤수혁 애비되는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조금 당황해하며 인사를 받는 사이, 문 변호사가 입구로 안내했다.

“그럼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 * *

법무법인 손문.

윤수혁과 친부 윤동현이 정리된 응접실로 들어섰다.

안에서 미리 대기해 있던 두 변호사가 일어서면서 꾸벅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안녕하십니까?”

그간 윤수혁의 투자와 후원에 관해 법률 자문을 한 주병철 변호사와 부동산을 비롯한 자산 관리를 맡은 이정기 변호사였다.

마지막으로 문석민이 안으로 들어서자, 회의실 문이 닫혔다.

“자, 그럼 말씀하셨던 재단 설립 건에 대해 우선 의견을 경청하겠습니다. 편히 말씀해주십시오.”

전당대회 직후에 재단을 설립해야 되겠다며 윤수혁이 먼저 언질을 준 상황.

그러나 재단 설립에 대해 구체적으로 들은 바가 없기에 문석민을 비롯한 주병철과 이정기가 윤수혁을 쳐다봤다.

윤수혁의 입이 열렸다.

“효율적으로 재산도 관리하고 투자하고 뭐 그런 목적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까놓고 말해서 재산을 좀 줄여야 합니다.”

“······네?”

“이번에 총선 재산 공개 때 1조 20억으로 신고 됐었습니다. 아시죠?”

“네, 압니다.”

이슈가 될 법 했었으나, 웬만한 중견 언론사 이상은 윤수혁의 요청으로 다루지 않은 부분이었다.

문석민이 잘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윤수혁이 말을 이었다.

“그거 너무 많아요, 줄여야 됩니다. 얼마 안 있으면 대선 준비 해야 되는데, 재산이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죠?”

“네, 이해했습니다.”

문석민이 곧장 대답했다.

대한민국의 빈인빈부익부는 수년 전에 비해 크게 심화되어, 몇 명 되지 않던 1조 클럽의 인원이 무려 40명으로 늘었다.

1조 클럽의 멤버는 대기업 회장과 대표이사들.

거기에 윤수혁까지 이름을 올린다면 같은 급으로 평가 받고, 대선에도 썩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컸다.

우선 상대 당에서 난리를 칠 게 뻔했다.

“그래서 재단이 필요합니다. 이사장은 여기, 저희 아버지께서 맡으실 거고요. 우선은 최소 자금으로 3천억 정도 들어갔으면 하거든요.”

“······!”

그 말에 윤동현이 움찔하며 아들, 윤수혁을 쳐다봤다.

이건 상상 이상이었다.

아들에게 대충 얘기를 들어서 상황을 알고 있긴 했으나, 그저 재단 이사장을 맡는 걸로만 알았다.

그 때의 윤동현은 예순넷밖에 안된 나이에 백수인 게 아쉬워서, 그리고 아들 볼 면목이 없어서 고민 끝에 동의했었다.

그게 아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했고.

그런데 3천억이라니.

윤동현은 수십억 정도로만 어림잡고 있었다. 많아도 기백억.

윤수혁이 친형인 윤재혁에게 4, 50억 상당의 6층짜리 빌라를 양도해준 이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윤수혁의 입에서 나온 3,000억이라는 말에 윤동현은 소름이 돋고 말았다.

그것도 우선이라고 했으니 추가될 돈이 또 있다는 뜻이 아닌가?

“3, 3천억······.”

문석민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숫자를 헤아렸고, 법률자문을 도왔던 주병철도 움찔했다.

구체적인 액수는 처음이었다,

그 중에 자산을 관리해왔던 이정기만이 익숙한 듯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의원님, 공개된 자산 내역에서 상당 부분 감축하실 예정이시죠?”

“예.”

“그럼 여기 두 변호사님께도 실제 재산 가치를 공유해야 되는데, 괜찮으십니까?”

윤수혁이 고개를 쉽게 끄덕였다.

고객의 비밀을 비켜야 하는 변호사의 원칙이 있긴 하지만, 이들 모두가 윤수혁의 부하라고 봐도 무방했기 때문이었다.

법무법인 손문의 설립도 윤수혁이 하질 않았던가?

또한 이들 모두가 윤수혁과 한솥밥 먹은 지 벌써 수년 째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재단 설립에 의원님 재산 공유와 더불어 최대한 협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려고 같이 모셨던 겁니다.”

그 때, 계산을 마친 문석민이 끼어들었다.

“저, 그러면······. 이 업무를 전담할 변호사까지 데려와야겠습니다. 제가 업무 지시를 하기엔 액수가 좀 큽니다.”

“그렇게 하세요.”

대답이 끝나자, 문석민이 바로 인터폰으로 변호사를 호출했다.

“공재환 변호사, VIP 응접실로 당장 오세요.”

그는 많아도 수백 억 단위를 생각하고 있었다. 대가성 투자를 위한 단체 설립 정도.

3천억이라면 말이 달랐다.

웬만한 중소기업은 씹어 먹을 자금이 아닌가?

이윽고 변호사 한 명이 노크 뒤에 안으로 들어와 구십 도로 허리를 접으며 인사를 올렸다.

윤수혁이 편히 악수를 나눈 뒤, 걱정 어린 윤동현의 시선을 마주했다.

“어차피 일은 여기 변호사님들하고 전문가분들이 하실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3천억이 어떤 돈인데······, 네 재산 삼분지 일이 아니냐? 부모 도움 하나 없이 너 혼자서 피땀 흘리면서 만든 재산을 내가 감히······.”

“그거 삼분의 일 아니에요.”

“어? 그럼······.”

“이 변호사님, 제 재산 전부가 얼마죠?”

“보름 전 시세로 2조 9천억이십니다.”

“흐업.”

윤동현이 숨을 들이켤 때, 윤수혁이 말을 이었다.

“아버지, 그렇다고 오해하진 마세요. 음지에서 검은 돈 굴리는 게 아니고, 공시가로 최대한 감소시키고 이리저리 분산해서 자산 규모만 잠깐 줄였던 거예요.”

“아, 그, 그래.”

“그리고 그것도 이제 재단 설립으로 줄일 예정이고요. 참, 공 변호사님이라고 하셨죠?”

문석민의 옆자리에 앉았던 공재환이 정중하게 대답했다.

“예, 공재환입니다. 의원님.”

“재단 설립과 사후 쓰일 자료입니다. 확인해보시고, 필요에 맞게 진행하세요.”

윤수혁이 직접 챙겨왔던 서류가방을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공재환이 가장 먼저 가방을 열자, 안에서 두꺼운 서류뭉치와 각종 봉투 따위가 나왔다.

가만히 바라보던 윤수혁이 말을 덧붙였다.

“사람하고 단체도 있고, 사업도 있습니다.”

수백 페이지였다.

러시아 극동 지역 개발을 시작으로 각종 후원과 투자 사업, 민생 관련 사업부터 중소기업진흥협회와 한국문화예술진흥협회 같은 단체, 그리고 국내외 주요 시민사회단체, 복지단체까지 항목이 수두룩 빽빽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두꺼운 건 인사 명단이었다.

흡사 대기업 인사팀의 입사지원서라도 되는 듯 서류 뭉치가 단단히 묶여 있었다.

공재환이 서류를 빠르게 살피는 사이, 윤수혁이 덤덤하게 물었다.

“기간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음······, 2개월 정도 보는데 괜찮으십니까?”

두 달 뒤면 8월이었다.

전생의 역사에서는 다른 정당들이 전당대회를 개최한 무렵.

윤수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공재환이 입을 열었다.

“추가로 하실 말씀 없으시면 재단 설립에 관해서 간략히 브리핑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장님께서도 보시고 편히 말씀해주십시오.”

뒤늦게 자신을 지칭한 말임을 깨닫고 윤동현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 뒤 브리핑이 시작됐고, 재단 설립의 기초 원리가 공재환의 입에서 줄줄이 나왔다.

* * *

약 20여분 뒤.

브리핑도 끝나고, 재단 설립에 관한 논의도 금세 끝났다.

애초에 내가 할 일은 방향 지시가 전부였다.

세부적인 일은 여기 변호사들과 전문가들이 알아서 진행할 터.

어느새 공 변호사가 입을 열었다.

“더 궁금하신 사항이나 지시하실 사항 있으십니까?”

“저는 없습니다.”

아버지가 대답하면서 나를 바라봤다.

아들이지만 결정권자가 나이기에 내 의견을 묻는 것이었다.

조금 위축된 것 같은 모습.

괜히 마음이 쓰였다.

안그래도 아들이 국민적 기대를 업고 있는 국회의원이라서, 이곳저곳 자랑 하면서 더욱 조심하고 신경 쓰고 있음을 잘 알았다.

그래서 차도 한 대 사지 않고 내가 사준 것을 끌고 다니는 것이겠지.

나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눈치가 보이기도 할 테니까.

나한테 짐이 될지언정, 아버지는 최대한 가벼운 짐이 되기 위해서 나름대로 애쓰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야 되겠는가?

재단 이사장이고 내 아버지였다.

이제부터 아버지의 기를 세워주고 자존심도 살려줘야 했다.

비록 쓰이는 돈은 내 돈이겠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 않던가?

“재단 사옥은 최소 10층 이상 건물로 매입해주세요.”

아버지가 움찔한 사이, 공 변호사도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건물 위치나 규모에 관해서는······.”

“이 변호사님하고 같이 판단해서 재량껏 진행하시면 됩니다.”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언론 보도 관련해서는 박 보좌관하고 연락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네.”

문 변호사가 귀 기울이기에 멋쩍은 미소를 보여줬다.

“근처에 괜찮은 자동차 매장 좀 가려는데, 어디 있는지 아세요?”

공 변호사가 주춤한 사이, 문 변호사가 벌떡 일어났다.

“바로 알아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역시 눈치가 대표 변호사다웠다.

괜히 손 지검장과 동업한 게 아니구나 싶었다.

2, 3분 정도 지났을까?

문 변호사가 프린트한 인쇄물과 함께 나타났다.

“각각 포르쉐와 람보르기니, 롤스로이스, 벤틀리 매장입니다. 혹시 바로 가실 예정이십니까?”

“예.”

“그럼 저희 직원들이 매장마다 전화 넣겠습니다. 방문하시면 바로 차량 안내할 겁니다.”

“고맙습니다, 변호사님.”

문 변호사의 고개가 숙어졌다.

“제가 감사합니다, 의원님.”

나는 얼떨떨해 하는 아버지와 함께 회의실을 나왔다.

배웅하러 나오는 변호사들을 물리고 차에 오르자, 아버지가 당황한 듯 물어왔다.

“지금 차 사러 간다고?”

“예.”

“갑자기 또 무슨 차를······.”

“이사장님이 타고 다닐 차요.”

내 말에 아버지가 얼떨떨한 얼굴로 눈을 껌뻑거렸다.

“그리고 어머니하고 쇼핑도 한 번 하고 오세요. 3천억 재단 이사장님이면 옷도 좋은 걸로 입으셔야 해요. 앞으로 상대할 사람들한테 밀려서 좋을 거 없거든요.”

“어, 어. 그러마.”

엉겁결에 대답하는 아버지를 보자 가볍게 웃음이 났다.

“흐흐, 벨트 하셔야죠.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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