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157화 (157/191)

# 157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새정치당의 노병선 정책위의장과 만나볼 수 있겠냐고, 임청학 의원이 뜬금없이 물어 왔다.

둘이 친구인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 이 시점에 말할 줄이야.

임 의원이 금방 말을 이었다.

"대학 동창인데, 그 친구가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다고 그러내요. 나도 웬만하면 거절하려고 했는데, 그 친구가 정말 중요한 일이라고 해서······."

"중요한 일이요?"

그러자 임 의원이 살짝 주춤했다.

"······저한테도 이유를 말하진 않았습니다."

"그럼 저도 안 만날 겁니다."

"하지만······, 그 친구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임의원이 고심하듯 말을 끄는 것을 보니, 정말 중요하긴 중요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대답은 하나였다.

"안 됩니다, 왜인지는 의원님께서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총선에서 무너진 여당, 그리고 정책위의장의 접선 요구가 뜻하는 건 하나였다.

탈당과 합당.

둥지를 옮기려고 간을 보려는 것이리라.

그것 외에 다른 가능성은 없었다.

당적 변경에 4선까지 한 정책위의장이 설마 내 뒷구멍이나 닦겠다고 찾아오진 않을 테니까.

그리고 임청학 의원도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말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생각조차 못할 사람이 아니고, 그리고 그 정도는 쉽게 알아차릴 명석한 이였으니까.

"······그래요, 윤 의원."

고개를 끄덕인 그가 말을 이었다.

"합당을 묻겠죠, 그것도 열 명 이상은 될 겁니다. 하지만 그 정도 머릿수면 분명 윤 의원한테도 큰 힘이 되지 않겠습니까?"

역시나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합당하길 바라는 모양이었다.

그의 말대로 국회의원 열 명이라는 숫자는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무소속 의원 한 둘만 추가돼도 상임위 표결에서 영향력이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162명에 이르는 최대 다수당이 더 강력해지리라.

하지만 그건 좋게 굴러갔을 때의 상황일 뿐.

다른 가능성이 많았다.

"그 외에 다른 이유는요?“

"힘이 된다는 이유 하나만 있어도······."

"그래도 안 됩니다. 아실만한 분이 자꾸 왜 그러십니까? 친구라서 그러시는 겁니까?"

내 말에 임 의원이 입을 닫았다.

"철새 이미지로 우리 당까지 안 좋은 말을 들을 겁니다. 그리고 5선에 4선까지 하신 분들이 얌전히 계실까요? 아니죠, 불협화음이 날 겁니다. 지금은 또 어떤가요? 총선 직후고 원내대표 경선과 전대 준비까지 해야 됩니다. 그리고 내년 12월에 대선까지 있는데······, 정말 그 이유 하나로 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내 긴 대꾸에 임 의원이 잠시 동안 가만히 있었다.

이윽고 닫혀 있던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고, 목소리가 한 글자, 한 글자 묵직하게 다가왔다.

"······현실적으로, 그 이유 하나로 안 됩니까?"

차마 대답하질 못했다.

맞는 말이었다.

의석을 늘리는 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의석은 당장의 힘이자, 미래의 권리였다.

아니, 더 중요했다.

당이 의석을 만드는 게 아니라, 의석이 당을 만드는 게 작금의 현실이었다.

그게 국회의원 의석이었다.

당장 본회의장에서 법안을 표결에 부칠 때만 해도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이 필요했다.

상임위에서 중요한 것도 마찬가지.

괜히 국회의원을 1인 헌법기관이라고 부르겠는가?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미래였지, 지금이 아니었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내 말에 임 의원이 상체를 기울여왔다.

물론 지금부터 할 말이 새정치당의 입당을 허락한다는 건 아니었다.

나는 거부할 수밖에 없는 제안을 할 생각이었다.

스스로 입당을 포기하게끔.

물론 임 의원이 듣기에는 그럴싸한 제안이어야 했다.

임 의원이 납득시킬 생각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다 잘라버려도 되지만, 이 현실주의자하고는 척을 지고 싶지 않았다.

내가 갖고 있는 몇 안 되는 4선 의원이니까.

* * *

"그래, 이해한다. 싫은 소리 들었겠지, 내가 미안해. 대신에 만나기만 하면······."

주저리주저리 말을 잇던 노병선이 멈칫했다.

윤수혁과의 만남을 주선하겠다며 다녀온 임청학의 표정이 생각보다 더 나빴다.

이건 의견 불일치가 아니라, 결사반대에 막힌 표정이었다,

노병선이 얼른 물었다.

"왜? 만나는 게 아예 안 된대?"

"아니, 그것 때문은 아니고······."

"그럼 왜?"

짧게 숨을 뱉은 임청학이 늦지 않게 대꾸했다.

"너 합당 얘기 꺼내려는 거, 안다."

그 말에 노병선이 움찔했다.

합당 얘기는 당대표인 염상수에게만 했었다.

친구인 임청학이나 다른 행복한국당 인사에게는 입도 벙긋하질 않았고.

"어? 뭐야? 어디서 들었어?"

노병선의 놀란 음성에 임청학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 눈치도 없겠냐, 나도 네 분위기보고 짐작했는데."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게 합당이라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의심에 불과했지만.

이미 눈치 채고 있는 상황에서 부인해서 뭣하랴?

노병선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패 보여주고 시작하는 기분인데, 이거. 그래서 뭐래?"

잠깐을 생각한 노병선이 포기한 듯 묻자, 임청학이 주저하며 대답했다.

"합당 얘기 꺼낼 거면은······, 뭐 좀 선행하란다."

"뭘 선행해?"

"VIP 탈당."

"······."

노병선의 입이 벌어졌다.

마치 속이 까발려진 기분이었다.

선행할 게 아니라, 후행할 일이긴 했지만.

혹시나 도청기로 얘기를 들었거나 염상수가 말을 흘린 건 아닐까 싶었으나, 다음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염상수 대표, 21대 총선 불출마 선언."

"······허, 허허."

노병선이 헛웃음을 뱉었다.

놀라기도 했고, 어이가 없어서 절로 나온 소리였다.

임청학이 이해한다는 듯 설명을 달았다.

"너도 알잖아, 새정치당 이미지 버리려면 이렇게 해야 돼. 안그래도 철새 이미지인데······, 아니면 전하고 다를 게 없잖아."

노병선이 고개를 저었다.

VIP 탈당을 선행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염상수의 다음 총선 불출마 선언이라니.

불가능에 가까운 말이었다.

"이건······ 너무 갔다."

"그래도 확실히 하려면 이 수 밖에 없다."

"청학아. 너 이런 걸 조건이라고 듣고 왔냐?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힘든 거 아는데, 이게 가장 현실적이야."

노병선의 눈썹이 팔자로 휘어졌다.

"너 왜 이렇게 변했냐?! 정치 잘하던 놈이, 어?"

"이 조건 아니었으면 무조건 비토(Veto)당할 거였어, 그것도 윤 의원하고 불똥 튀겨서 만든 거다."

임청학의 대답에 노병선이 언성을 높였다.

"그 조건 자체가 비토야, 인마!"

"가능성 있잖아, 대통령 탈당 시키고 염 대표 불출마 선언해. 그럼 되잖아?"

임청학이 조금 힘을 주며 말하자, 노병선이 인상을 확 썼다.

"야! 이······, 됐다. 내가 너라서 믿고 말했는데······, 그만하자."

"······병선아."

"뭐, 또?"

"너는 왜 이렇게 변했어?"

"뭐?"

"실낱같은 희망에 청춘을 걸었던 노병선이가 어쩌다 이렇게 됐냐고."

처연한 물음에 노병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친구하고 말싸움해서 좋을 게 없었다. 어차피 둘은 입장이 다르고, 지금은 한시라도 급할 때였다.

곧 원내대표 경선이 시작되고, 여름에는 전당대회가 시작될 터.

그 전에 얘기는 마쳐놔야 했다.

물론 윤수혁이 아닌, 다른 실세들에게.

행복한국당에는 임청학과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던 원로 의원과 다른 4선 의원 등, 힘깨나 쓰는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따르는 사람들도 있고, 경력도 괜찮은 사람들.

마침 그중에 한 명은 전화번호도 있었다.

그러나 바로 전화하기가 꺼려졌다.

친분이 있는 사이가 아니라서 얘기가 흘러나갈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었다.

임청학과는 달랐다.

대학 동창이나 같이 사회 운동했던 친구여서 주선을 부탁했던 것이었다.

또한 조금이라도 얘기가 부드럽고 쉽게 진행될 수 있게, 일부러 친구를 이용한 것이기도 했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당장 나아갈 다른 길이 없었다.

윤수혁이 요청한 VIP 탈당과 염상수의 탈당을 선행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도 염상수 탈당은 선행이든, 후행이든 이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적을 옮길 십수 명의 의원들 모두가 염상수를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지, 자신을 따라 다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다른 출구를 찾아야 했다.

소문이 조금 날지라도, 해명하면 그만이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 가라."

"소용없다."

"뭐가?"

"다른 데 전화하는 거면 소용 없다고."

노병선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임청학을 쳐다봤다.

"······내 표정이 그렇게 잘 보이냐? 너 독심술 배우냐?"

"내 짐작이었는데, 윤 의원도 그렇게 예상하더라. 너 그럴 거 같다고."

고개를 젓던 노병선이 주춤했다. 불길한 생각이 든 탓이었다.

"설마 약이라도 쳐놨어?"

"글쎄."

"약 좀 쳤다고 해서 어쩔 건데. 윤수혁이가 행복당 주인이라도 돼?"

독재정권에서도 새로운 비선과 실세가 생기는 법이었다.

하물며 민주 국가인 대한민국의 정당이라면, 온갖 사람들이 저마다 등에 권력을 업고 떠들 게 분명했다.

그 결과가 분당과 창당으로 이어져 지금의 사태에 이르게 된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누구한테 전화할 줄 알고?"

노병선이 그러면서 스마트폰을 꺼냈고, 연락처에서 번호 하나를 눌렀다.

이번 행복한국당 총선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던 원로 의원이었다.

따르르릉-

긴 통화음이 연결된 뒤.

- 김근수입니다.

"의원님, 저 노병선입니다. 두달 전인가, 한 번 뵀는데. 기억나십니까?"

- 기억나지, 웬일인가?

"찾아뵙고 드릴 말씀이 있는데, 시간이 좀 나십니까?"

- 찾아온다니. 자네는 원내대표도 조기 경선해야 될텐데 이럴 시간이 있나?

"그 전에 얘기를 나눠야 해서요."

- 잘못하면 구설수에 오르는 거 알잖나, 다음에 보지. 전대도 끝나고 천천히.

"의원님! 정말 중요한 겁니다. 당의 사활이 걸린······."

- 혹시라도 합당 얘기할 거면, 나 말고 윤 의원한테 해.

"······아."

직설적인 말에 노병선이 입을 벌렸다가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 합당 얘기 아니더라도 사활이 걸린 거면 윤 의원한테 가게. 나는 지는 해고, 윤 의원은 뜨는 해가 아닌가?

"그래도 의원님······."

노병선이 대꾸하려 하자, 혀를 차는 소리가 스마트폰을 넘어왔다.

- 이보게, 노 의원. 정책위의장이나 된 사람이 그렇게 사리판단이 늦나?

"말씀이 좀 이상합니다······."

- 이상하긴, 자네 윤 의원한테 뺨 맞고 나한테 전화했지?

"······."

노병선이 차마 대답하질 못했다.

눈앞에서 대학 동문인 임청학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내가 하나 말해줌세, 윤 의원 말이야. 거품 아니야, 자네가 본 게 아니더라도, 들은 게 아니더라도 다 믿게.

"예?"

- 으흐흐, 자네하고 정이 있어서 해준 말이야. 소문 듣고 도깨비가 아닌가 싶을 텐데, 차라리 도깨비라고 믿게. 그게 편하니까.

윤수혁에 대한 소문.

그제야 노병선이 천천히 입을 벌렸다.

부동산, 투자 따위로 1조가 넘는 재산을 불렸고, 완벽한 피아구분으로 정치권 밑바닥부터 윗대가리까지 구워삶았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건 운이 따르고, 도움이 있지 않는 한 불가능한 얘기였다.

애초에 말이 되질 않았다.

운이나 도움도 없이 자수성가로 1조를 버는 것도, 온갖 검은 자금이 오고가는 정치권 밑바닥을 다 꿰고 있던 것도 도깨비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다 믿질 않았다.

애초에 직접 겪질 못했고, 찌라시 같은 얘기가 많으니 믿을 수 없던 것이기도 했다.

예컨대 이번 총선을 윤수혁이 전부 기획했다던가 하는 말.

'그딴 말을 다 믿으라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