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156화 (156/191)

# 156

선거가 끝났다.

최종 투표율은 19대보다 3.8%포인트 상승한 58%.

투표율은 낮을수록 보수에게 유리하다는 게 정론이나 이번만은 달랐다.

아니, 행복한국당이 보수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지역구 의석은 253곳 중 행복한국당이 137곳, 신민주당이 76곳, 새정치당이 25곳, 보수신당이 8곳, 무소속 후보가 7곳에서 당선 됐다.

비례대표는 행복한국당이 25석, 신민주당이 11석, 새정치당이 3석, 보수신당이 1석을 차지했고.

총 300개의 의석 중에 행복한국당이 무려 162석을 챙겼다.

압도적인 승리였다.

과반 의석을 획득했고, 이는 군사정권 이후에 낸 최고의 성과였다.

18대 총선 때 총 의석수 299석 중 153석을 차지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 때는 여소야대의 상황이고 투표율도 46.1%로 지금보다 현저하게 낮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비례대표 득표율.

유권자의 정당 지지도로 가늠할 수도 있는 비례대표 득표율이 60퍼센트를 넘었다.

그만큼 지지율이 높다는 뜻이 될 수도 있었다.

그 아래로는 볼 필요도 없었다.

신민주당이 20%중반이었고, 나머지는 새정치당과 보수신당이 갈라먹는 꼴.

그 와중에 보수신당은 교섭단체 지위까지 잃었다.

반등의 여지조차 없었다.

바야흐로 행복한국당의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윤 최고 공이 정말 큽니다."

술이 조금 오른 조성현 당대표가 벌게진 얼굴로 말을 건넸다.

"알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고맙긴, 당연한 건데요. 여보, 여기 새 와인 잔 좀 줘."

조 대표의 집에 와 있었다.

개표 결과를 같이 보고, 짧게 담소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그의 말처럼 내 공이 정말 컸다.

애초에 내가 총괄본부장이라는 직책을 갖고 있었다.

장세룡 같은 실세들만 지냈던 자리.

그래서 공천에도 개입해서 이번에 우리 당만 50% 가량이 물갈이 됐었다.

신민주당의 물갈이 비율이 30%도 채 되질 않으니, 거의 두 배에 달했는데 그럼에도 253곳 중에 137곳에서 당선자를 냈다.

조 대표가 나를 집으로 따로 초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새 새 와인잔에 다른 종류의 와인이 채워졌다.

벌써 네 병째였다.

조 대표가 젊은 시절에 사두고 아껴두었다는 와인을 다 따는 것이었다.

"자, 듭시다."

그의 말에 엷게 웃고 와인을 마셨다.

쌉싸래한 알콜과 포도 향이 입 안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콧속까지 끼쳤다.

너무 진해서 보관을 잘못한 건 아닌가 싶었는데.

조 대표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 최고."

"예, 대표님."

그의 눈빛에 힘이 있었다.

술기운 때문에 목소리가 잠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중요하게 할 말이 있는 것이었다.

"그간 나 때문에 고생 많았습니다. 공천도, 선거도 윤 최고가 휘젓지 못하게 방해도 많이 했고······."

"아닙니다, 대표님."

"아마 돈도 많이 썼겠지요?"

"조금 쓰긴 했습니다."

장세룡을 잡기 위해 풀었던 천억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꽤 쓰긴 했었다.

약 400억 원.

전국의 시도당협위원회에 활동비를 뿌렸고, 주요 단체마다 찬조금을 돌렸으며 선대위 운영비로 거액을 배부했다.

여기에 내 공약 비용을 더하면 500억에 달할 터.

그래도 나름 세이브했다.

보통 총선을 돈으로 치른다면 1인당 수억에서 십억 단위의 돈이 쓰였는데, 내가 총선을 이리저리 커버하는데 400억을 태웠으니까.

단순 숫자로 보면 꽤 아껴 쓴 셈이었다.

심지어 흑막 같은 게 아니라, 총괄본부장이라는 직책까지 있었고.

물론 내 기준에서는 그랬다.

보통의 선거는 뇌물수수나 알선 약속 따위로 자금을 융통하는 경우가 잦았다.

기업에서 몇 억, 개인한테 몇 천 만원 등등.

당선만 되면 해먹을 사업이 무궁무진하게 많으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그게 나중에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걸려서 의원직을 많이들 상실했었고.

나는 그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내 돈을 지출한 것이었다.

물론 그 사실은 조 대표도 잘 알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나만 알았다.

중간중간에 박 보좌관이나 영석이, 다른 의원을 통해서 자금을 전달하긴 했지만, 금액이 얼마인지, 누구한테로 갔는지 전부 아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그 돈 말입니다."

천천히 나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조 대표가 진득하게 말을 이었다.

"회수하겠지요? 그러면······, 나도 알아야겠습니다. 어떻게, 얼마를 회수할 건지."

그의 눈빛에서 걱정이 보였다.

조 대표가 언급한 자금 회수가 뜻하는 건 하나였다.

뇌물이나 리베이트 같은 부정적인 방법.

이미 많은 의원들이 당직 배분이나 각종 사업과 이권에 대한 상임위 활동, 법안 발의 등으로 기업이나 개인으로부터 돈을 착취해 왔었다.

총선 과정에서 사비가 많이 쓰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 대표가 분위기를 잡는 모양이었다.

자신 또한 책임을 나눠지겠다고, 차라리 공범이 되겠노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당대표로서, 그리고 우리 당에 남아 있는 유일한 대선 후보로서.

역시 조 대표였는데, 그럴 필요는 없었다.

"아닙니다."

"아니라는 건······."

"제가 쓴 건 돈이 아니라 거름입니다. 그걸 어떻게 긁어오겠습니까?"

내 말에 조 대표가 상체를 기울여왔다.

"그 말, 진심입니까? 정말 되찾을 생각이 없다는 뜻입니까?"

"예."

"······못 믿어서 미안합니다. 여태 윤 최고하고 함께 했지만, 내 마음이 걸리는 걸 어쩌진 못하겠더군요."

"흐흐흐, 그래서 제가 대표님과 함께 하는 겁니다."

"그래서라니요?"

"마음에 걸려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 말입니다. 우리 시대에 그런 정치인이 어디 있습니까?"

"있었습니다, 배척당해 사라졌을 뿐이지요."

"그래서 없다는 겁니다. 있었지만, 결국 사라지니까요. 그런 점에서 대표님이 대단합니다. 이번에 4선에도 성공하셨지 않습니까?"

"나도 윤 최고 덕분이지, 원래라면 정치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겁니다."

맞는 말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생이고 과거였던 얘기였다.

"중요한 건 지금 여기에 대표님이 계시다는 겁니다."

내 말에 조 대표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윤 최고는 꿈이 뭡니까?"

"정치입니다."

"정치는 지금도 하잖습니까?"

"제대로 된 정치, 그게 하고 싶습니다."

이건 내 욕심이었다.

정치욕인지, 권력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복수 다음으로 나를 움직이게 만든 동력원이었다.

정점에 오르고 싶었다.

그리고 그 힘으로 정치를 하고 싶었다.

그랬기에 온갖 위험을 자처하면서 이미지를 만들었고, 내가 쓸 돈까지 벌었다.

제대로 정치하기 위해서.

어느새 조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라면 그런 야망이 있어야지요."

"하하, 잘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래서 내가 더더욱 윤 최고의 곁에 있어야 되겠습니다."

"예?"

"그 야망이 딴 길로 새지 않게 내가 봐야 겠습니다."

또 다시 역시라는 말이 속을 맴돌았다. 조 대표가 이래서 필요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한 점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평생 당당하고 떳떳하게 살았으니 이 정도 말은 해도 되겠지요?"

"그럼요, 그리고 연세도 있으시고, 당대표시지 않습니까?"

"그게 중요하겠습니까? 사람이 중요하지."

그가 웃으며 와인잔을 들었다.

"재선 축하합니다, 윤 최고. 한 잔 더 합시다."

"예, 대표님."

* * *

2016년 4월 14일, 목요일.

선거 다음 날.

[20대 총선 행복한국당이 의석 과반 차지해(종합)]

[신민주당, "총선 결과를 토대로 진보 정당의 혁신을 위해 노력할 것"]

[새정치당 염상수 대표, "국민께 실망 드려 죄송, 당 지도부 사퇴하고 반성할 것"···개혁위 추진 예고]

신문을 확인한 새정치당 정책위의장인 노병선이 마주 앉은 염상수 당대표를 쳐다봤다.

"발 빠르게 대응은 잘 하셨습니다. 근데······ 이게 상황 악화만 막는 거지, 더 나아지긴 힘듭니다."

"여기서 행복당 빼고 나은 정당이 어딨나?"

"그 말씀은 맞지만······."

노병선이 말끝을 흐리자, 염상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얘기 꺼낼라면 말도 말아."

난 데 없는 말에 노병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합당 말이야, 이 사람아."

노병선의 입이 탄식하듯 벌어졌다.

마흔 석이 넘었던 의석이 스물여덟 석으로 줄었다.

이런 식으로 가면 점점 줄어 보수신당처럼 교섭단체 지위를 잃을 가능성도 높았다.

이런 정당의 말로는 뻔했다.

탈당과 합당.

염상수가 팔자주름을 진하게 만들며 말을 이었다.

"그 말 하려던 거 아냐? 사퇴하고 개혁위 만들고, 더 할 건 합당 밖에 없잖아?"

"그것도 그렇긴 합니다만."

"합니다만?······ 그럼 딴 수가 더 있다고?"

소파에 푹 퍼진 듯 기대있던 염상수가 상체를 세웠다.

"······VIP의 탈당입니다."

"노 의장!"

염상수가 바로 고함을 쳤다.

역사적으로 대통령의 정당 탈당은 반복되어온 지겨운 역사였다.

그러나 이제야 임기 2/3를 채운 상황.

염상수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가진 것도 없는데, 여당 자리를 내려놔? 그게 가당키나 해?"

"국민들은 이미 정치에 신물이 났습니다. 그것도 대통령의 행보에 크게 실망을 했고요."

구제역과 AI관리 미흡, 영원호의 엉성한 수습, 메르스 늑장 대응 등등.

매 해마다 정부에 대한 비난과 비판이 크게 일어났었다.

또한 대통령을 향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잠깐을 생각하던 염상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무능해도 VIP는 VIP야. 우리가 지역구에서 의석 25개 낸 것도 전부 VIP 팔아서 이뤄낸 거라고."

새정치당은 이번 총선 선거 슬로건에도 대통령을 사용했었다.

구체적으로는 여당의 장점을 내세워서 정부와 함께 지역구 개발을 도모하겠다는 내용이었지만.

이는 대통령이 같은 정당이라서 가능한 말이었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새정치당이 내세울 것도 없었다.

애초에 신민주당과 행복한국당, 보수신당의 패잔병들과 무소속 출신이 모여 혁신으로 치장했고, 이민수를 대선 후보로 옹위한 게 다였다.

정치 전략이나 목표가 있는 게 아니었다.

기존 당내 입지와 새 정당의 가능성, 각종 이익에 움직이기만 했을 뿐.

"어차피 다음 총선은 대선 이후입니다. 대통령 그림자 벗어나려면 지금이 적기입니다. 개혁위가 명분도 만들면 언플도 쉽습니다."

그 말에 팔자주름을 그리던 염상수가 천천히 대꾸했다.

"그 다음은, 합당이야."

"압니다."

담담한 대답에 염상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고작 몇 해 전에 탈당했었다.

"걷어차고 나왔던 신민주당에 다시 기어들어가게? 자네 자존심도 없나?"

둘 다 신민주당 대선 후보인 황택근과 대립해서 나온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노병선이 고개를 저었다.

"······제 목표는 행복당입니다."

염상수의 눈이 빛났다.

군사정권 이후 최대 다수당을 이룬 행복한국당이 아닌가?

여당 자리 버리고 들어가기에는 나쁘지 않은, 오히려 좋은 조건이었다.

물론 보수와 진보의 기치를 내걸고 대립하긴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일 뿐, 다 같은 정치인들이었다.

염상수가 얼른 물었다.

"행복당이랑 연락 했나?"

"계획 중이라서 아직 언급하진 않았습니만, 행복당에 친한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임청학이라고, 이번에 선대위원장 맡았던 그 친굽니다."

그 말에 염상수가 턱을 쓸었다.

선대위원장까지 했다면 발언권도 강력할 터,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아군을 두고 행복한국당에 들어간다면?

모든 게 일사천리였지만, 걸림돌이 없진 않았다.

어르거나 달래거나 적으로 둬야 할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당대표인 조성현이나 이번에 4선을 단 의원 몇, 그리고 총괄본부장을 맡았던 윤수혁 정도.

그 외에는 별 사람이 없었다.

애초에 대선 후보도 거의 정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나름 정치계의 거물이었던, 이번에 5선까지 한 자신이 들어간다면 괜찮은 자리는 충분히 차지할 가능성이 있었다.

염상수가 계산을 마치자마자 입을 열었다.

"같이 움직일 의원이 몇이나 되나?"

"14명은 확실하고, 나머지는 찔러봐야 하는데 아마 18명까지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보수신당에서 넘어오고 무소속이었던 의원도 있어서······."

"알아, 알아. 한 번 추진해볼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이번에 총괄본부장 맡았던 윤수혁이가 실세인 거 같은데······, 기껏해야 서른 줄 밖에 안 된 놈입니다. 정치욕도 있는 놈이니 우리가 손들어준다고 하면 오케이 할 겁니다."

"그래도 만만히 보지는 마, 윤수혁이 요새 소문 자자해."

이미지와 돈 말고도 정치력을 말하는 것이었다.

비록 윤수혁이 만든 계파나 모임이 없긴 했지만, 당내에선 종종 윤수혁계라는 말이 나돌고 있었다.

그건 당권에 어느 정도 간섭한다는 뜻이었다.

노병선이 다 안다는 듯 웃었다.

"걱정 마십시오, 제 친구도 윤수혁이랑 가깝고······ 저도 이제 4선 쨉니다, 대표님. 그 정도는 구분하지요."

"그래, 그것만 잘 추진되면······."

염상수가 단단하게 말을 이었다.

"VIP는 내가 알아서 하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