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
“Thank you very much. I'll treat you to dinner.(정말 고맙습니다. 제가 식사 대접하겠습니다.)"
- Ha-ha. I hope our alliance will become stronger. See you later then.(하하, 우리 동맹이 더 돈독해지길 바랍니다. 그럼 다음에 봅시다).
“Thanks again, Ambassador.(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대사님.)”
돌아오자마자 존 패터슨 미 대사에게 감사 전화를 했고, 이고르 그레프에게도 아내를 통해서 감사의 말을 전했다.
영어 회화는 떠듬떠듬했지만, 러시아어는 아직도 많이 모자란 탓이었다.
러시아어는 영어와 알파벳 비슷한 거 빼고는 전부 어려웠다.
통역 역할을 해준 한사랑이 나를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수혁 씨.”
조금은 낮은 목소리.
평소 같은 매력적인 저음이었는데, 지금은 유독 침착했다.
“해외에 너무 많이 나가지 마세요.”
“갑자기? 왜요?”
“정치인, 그것도 고위직은 해외 출장을 안 좋게 보잖아요. 놀러 다닌 다거나 성매매하러 다닌다고 그러고. 사모들 모임에서 그런 말 많이 나와요.”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나도 외국 연수를 종종 다녀 봐서 알았다.
국방위 때는 태국이나 동남아도 돌아다녔고, 작년에는 선진 건축법 좌담회 참석한다고 유럽에 다녀왔었다.
실익은 없는 자리들.
한사랑의 말대로 많은 의원들은 스케줄 소화 후에 놀러 다니거나 성매매를 했었다.
그 외에는 애초에 할 게 없었다.
굳이 있다면 현지 고위 공무원들의 명함 교환 정도.
당연하게도 그게 내가 한 일이었다.
괜한 위험부담을 가질 필요도 없고, 다른 여자를 보거나 관광을 즐길 이유가 없었다.
나는 얼굴 팔고 다니면서 현지 유력가들을 만나고 다녔었다.
당연히 미 대사나 이고르 그레프 같은 장차관급 이상의 인사는 없었지만, 그들도 한가락 한다는 실무 책임자들이었다.
그래서 만났다.
나중에 쓸모가 있을 것 같아서, 열심히 사교 활동을 했었다.
그사이, 한사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요, 수혁 씨가 잘 될 사람이란 건 알았는데, 이렇게 큰 사람일 줄은 몰랐어요.”
“저 키 174.......”
“농담하지 말구요, 정말로. 수혁 씨가 앞으로는 외국에 더 많이 나갈 거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그렇다고 출국이 나쁜 건 아니지만.......”
설명에 힘이 들어간 것인지, 한사랑의 미간에 구김이 잡히고 있었다.
그 모습마저 예뻤다.
“흐흐흐, 사랑 씨.”
“네?”
“할게요, 그러니까 이제 얼굴에 힘 빼요. 다음 달 출산 예정이잖아요, 스트레스 받지 마요.”
“아, 네. 스트레스 안 받았어요. 그냥 나도 모르게.......”
영락없는 스물네 살의 모습이었다.
물론 만삭을 한 달 앞둔 배가 크게 부풀고, 허리와 등이 쑤셔서 종종 출장 마사지를 부르고 있긴 했지만.
한사랑은 부푼 배마저 예뻤다.
아니, 모든 게 아름다웠다.
“......눈빛이 갑자기 왜 그래요?”
상념을 깨는 한사랑의 목소리에 픽 웃고 말았다.
그녀가 바로 말을 이었다.
마치 아이를 타이르듯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앞으로 한 달, 아니...... 두 달만 참아요. 알았죠?”
“그래요. 참아보죠.”
어차피 얼굴 보기도 힘들어질 것이었다.
한사랑은 선거운동기간에 맞춰서 산부인과 특실에 들어가기로 예정돼 있었고, 나는 총선 선거 운동을 해야 했다.
최선을 다해서 총선에 집중해야 했다.
뭐 나야,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으로 손꼽히는 상황이었다.
타임지에도 실린 캡틴코리아니까.
그러나 지역구 당선도 가능성이 높은 것일 뿐이고, 중요한 건 내가 아니라 우리 당이었다.
나 혼자만 당선돼서 뭐하랴?
대한민국의 정치는 정당 정치가 기본이었다. 혼자가 아니라, 300명이 정치를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이번 총선은 선거구역 조정 때문에 지역구 의석이 253석으로 늘고, 비례대표가 47석으로 줄었다.
19대 국회보다 지역구가 7석이나 더 늘어서 돈도, 시간도 더 들게 될 터.
내가 더 바빠진다는 말이었다.
당 지도부는 본인의 지역구뿐만 아니라 격전지 같은 곳에 주로 투입되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우리 당에는 조성현 당대표 말고 별 인물도 없었다. 내가 지도부 중에, 아니. 당내에서 가장 바쁠 사람이었다.
장거리 이동을 고려하면 집이 아니라, 차에서 자게 되리라.
초선 비례대표 후보 때하고는 비교할 수 없었다.
나는 가만 있기가 힘든 사람이었다.
움직이기 싫다고 해도 사람들이 나를 들고 움직일 것이었다.
아마 수도권 주요 격전지는 모두 방문하고, 강원도나 충청권까지 가야겠지.
그나마 다행이라면 엊그제의 방중(訪中)에 대한 언론 반응이 좋다는 점이었다.
내가 먹인 돈 이상으로 긍정적인 기사가 많이 나왔다.
[행복한국당 “사드 배치 과정에서 협의하면 중국 내 한국기업에 대한 불이익 없어.”]
[행복당, 방중으로 중국 사드 보복 축소 성공해...中, 한 때 관광객 입국 전면 금지까지 논의돼]
[조성현, “한국의 국가 안보와 북한과의 관계에 대해 심도 깊게 토의, 사드 배치에 대한 공감 이끌어 내는데 성공해]
아쉬운 게 있다면, 이 성과가 얼마나 큰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기사로 언급한 관광객 입국 전면 금지가 실제로 일어나고, 그로 인해 중국 관련 산업이 순식간에 마이너스가 된다는 걸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나뿐이었다.
그저 전문가들의 짐작이나 예측만 있었다.
그나마 중국 외교부장의 성명서에서 관광객 전면 입국 금지가 논의됐었다고, 성급한 사드 배치를 욕하는 게 거론돼서 다행이었다.
이제 대선 전에 중국에 가서 마무리를 지으면 될 일이었다.
물론 지금 급한 건 총선이었다.
할 일이 많았다.
* * *
강북구 미아역 앞 스타벅스.
두 중년 여성이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맞은편 여성을 불렀다.
“얘!”
“어머, 왜?”
“너 어제 선거 홍보지 봤니? 강북구에 공공산후조리원을 두 개나 지어준대.”
“산후조리원을? 어디, 어딘데?”
“일단 하나는 번동사거리 근처에 지을 예정이고, 나머지는 미정이래.”
“번동사거리면 우리 집하고도 가까운데? 근데 시설이 어떤데? 공공이니까 뭐 후지지 않아?”
중년 여성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봤던 팜플렛에는 산후조리원 예상 조감도까지 실려 있었다.
지하 2층, 지상 5층의 번듯한 건물과 옥상 정원까지.
더구나 서울시에는 공공 산후조리원이 단 하나 밖에 없는 실정이라는 설명까지 달려 있었다.
맞은편 여성이 손뼉을 쳤다.
“어머, 그 사람 뽑아야 되겠다. 누군데?”
“윤수혁, 왜. 최연소 정치인 있잖아.”
그러자 맞은편 여자가 또 다시 손뼉을 쳤다.
“어머, 윤수혁! 나도 알지. 걔 와이프 임신 했대잖아. 이제 막달인가 그럴 걸?”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어? 잡지에서 둘이 결혼한 거 얼마 전에 본 거 같은데.”
“너도 요새 미용실에 나오고 그래라. 와이프가 모델 같이 생겨서 그런가, 걔네 인터뷰도 되게 많이 실려.”
그렇게 둘이 수다를 떠는 사이.
스타벅스 입구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빨대를 물던 중년 여성의 입이 턱하고 벌어졌다.
윤수혁이 들어온 것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국회의원 윤수혁입니다! 잠깐 인사만 드리고 나가도 되겠습니까?”
활기찬 인사와 함께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졌고, 아르바이트를 하던 젊은 남성이 얼결에 악수를 받았다.
“아, 예....... 저기 사장님 안에 계신데......, 저 잠깐만요.”
아르바이트생이 서둘러 사장을 불러왔고, 사장이 몰려온 카메라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기호 1번 윤수혁입니다, 손님분들께 인사만 드리고 나가도 되겠습니까?”
다시금 반복된 인사.
그러나 변함없이 정중한 태도였고, 놀란 사장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휴, 그러믄요. 저하고 악수 한 번만 좀.......”
“예! 잘 부탁드립니다, 사장님.”
윤수혁이 허리도 살짝 기울며 양손을 내밀었고, 장년의 사장과 악수를 나눴다.
“고맙습니다, 기호 1번입니다.”
그 뒤 윤수혁이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며 명함을 돌렸다.
그 중에 긍정적인 얼굴을 하거나 반가워하는 유권자에게는 말을 덧붙였고 악수까지 나누며 종종 셀카도 찍었다.
물론 싫어하는 분위기가 있을 때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모든 사람이 윤수혁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눈치를 살피는 것이었다.
그래도 대다수가 호의적이었다.
어찌됐든 윤수혁은 국가적인 영웅이었으니까.
그렇게 윤수혁이 두 중년 여성의 테이블에 당도했을 때였다.
“어머어머, 실물이 이렇게 잘생기셨어?”
“감사합니다, 아침에 미용실에서 분 좀 조금 바르고 나왔습니다.”
“호호호호, 말도 잘 하시네.”
“참! 나 홍보 용지 봤어요. 번동 사거리에 산후조리원 지어준다면서, 나머지는 어디에 올릴 거예요?”
“서울시장님과 강북구청장님과 추후 협의해서 착공할 예정입니다. 한 쪽에 편향되지 않게, 잘 나눠서 부지 선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머, 그것도 의원님 있을 때 짓는 거죠?”
“당연하죠. 제 돈 들어가는 일입니다. 임기 끝나기 전에 준공까지 마치겠습니다.”
이미 팜플렛에도 있었다.
초기사업비의 80%를 부담하는 조건을 내걸고 공공 산후조리원을 짓기로 했으며, 그 중 번동사거리는 이미 부지 협의와 감정평가까지 마친 상황이었다.
윤수혁이 자신감 있게 대꾸하자, 여성들이 호호거리며 웃었다.
“그러면 잘 부탁드립니다, 기호 1번 윤수혁입니다.”
* * *
4월 초.
선거 운동한 지 3일 만에 벌써 지쳤다.
오전 6시부터 오후 11시까지, 내내 움직였고 말했다.
드문드문 헬스하고 골프 치는 걸로는 역시 체력이 많이 모자랄 수 밖에 없었다.
강북구가 이모양인데, 나머지 지역은 또 어떻게 도나?
초선 비례 때보다 더 빡셌다.
아니,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힘들었다.
‘강북구을’의 인구 밀집 지역만 찾아다니는데도 아직 절반도 채 못 돌았다.
인사하고, 명함 돌리고, 악수하고, 셀카 찍다보면 한두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더구나 설교하는 노인에게 붙들리기라도 하면 더더욱 지체됐다.
따로 고용한 무궁의 경호원과 보좌진이 사람들을 떼어놓지 않았다면 절반이 아니라, 반에 반도 못 돌았을 것이었다.
그렇게 바빴다.
아직 가지 못한 장소도 많았다.
나 대신에 전광판 설치 차량, 유세 트럭, 선거운동원이 있긴 했지만, 직접 얼굴 보는 것하고는 또 다르지 않은가?
물론 나만큼 당선 가능성 높은 사람이 없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이었다.
당선이 확실시된 건 아니었다.
나는 나이도 부족했고, 경력도 없기 때문이었다.
도둑질도 해본 놈이 한다고 했고, 고기도 먹어본 놈이 안다는 말이 있는 곳이 대한민국인 만큼, 나이와 경력은 중요했다.
정치도 해본 놈이 잘하는 것이었다. 초선 비례대표는 경력으로 치기에도 부족했다.
더구나 강북구는 진보 강세지역이었다.
압도적인 표 차이는 아니지만, 항상 신민주당이 적잖은 표차이로 의석을 차지했었다.
그래서 내가 처음에 지역구 사무소를 개소하거나 원외당협위원장 자리를 얻는 것도 간섭 없이 이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틀 뒤부터는 전국구로 움직일 예정이었다.
내 이미지와 호감을 이용해서 다른 지역구 후보자를 도와주러 가야했다. 부득이하다면 내 돈을 내걸기라도 해야 했고.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하고 있었다.
내 인지도와 이미지를 고려하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공공 산후조리원 건설 공약까지 넣었다.
그 것도 두 개의 조리원에다가 초기 사업비 80%를 자비로 부담하기로 했고.
짧은 선거운동을 하면서도 확실한 표를 얻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시간이 부족했다.
공식적인 선거운동기간은 고작 13일.
이미 3일째가 됐으니, 하루에 한 지역구씩 들러도 열 군데 밖에 가지 못할 터.
악착같이 해야 했다.
나는 상념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선거운동 기간이 며칠만 길었어도 좋겠다는 생각과 선거운동 기간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서로 상충하고 있었다.
힘든 탓이었다.
정신적으로 힘든 거면 버티겠는데, 몸이 무겁고 숨이 딸리니 생각만 많아졌다.
“의원님! 내리셔야 합니다!”
오늘만 해도 백 번은 불러댄 박 보좌관의 목소리였다.
“예, 갑니다.”
내가 천천히 움직이자, 박 보좌관이 바로 말을 이었다.
“초선 때는 안 그러시더니, 변하신 겁니까?”
“......변했죠.”
딴 건 몰라도 초선 때보다 몸무게가 7kg이나 불었다. 조금 있으면 체중계 앞자리가 ‘8’이 될지도 몰랐다.
그사이, 변함없는 재촉이 들렸다.
“그런 말씀 마시고, 빨리 내리셔야 합니다, 의원님!”
괜히 웃음이 났다.
지쳐서 그런지.
“흐흐, 지금 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