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152화 (152/191)

# 152

47. 국제 친선 게임 (2)

비서실장은 돌아갔다.

생각해보겠다는, 부정적인 대답을 남긴 채.

그것도 이해는 됐다.

제대로 된 외교 채널 하나 없으면서도 야당의 들러리가 되기는 싫고, 사드 검토부터 발표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다른 수가 있는지 정말로 생각해보려는 것이겠지.

검토 발표를 먼저 해놓고 여론 반응을 보는 것도 하나의 수긴 했다.

물론 야당 반발이 많겠지만.

정부 입장에서는 시간을 벌어 놓고, 필요한 것을 찾아야 했으며, 차선도 확보해둬야 했다.

정치나 외교 문제는 갈래가 많았으니까.

그래서 내가 가진 러시아 채널도 쉽게 보면 하나의 방법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비서실장이나 돼서 대통령한테 야당 들러리를 서야 한다고 조언할 수 있을까?

방법의 장단점은 둘째치고,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이고르 그레프라는 급수 높은 외교 인사가 아니더라도, 지금의 혁신정부가 접촉할 곳은 많았다.

그게 외교 채널만큼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게 문제였지만.

나는 곧장 조성현 당대표를 찾아갔다.

그가 일어나면서 나를 맞았다.

“윤 최고, 어서 오세요.”

“많이 바쁘실 텐데, 잠깐만 시간 좀 뺏겠습니다.”

“누구 일인데 시간을 안 내겠습니까? 내 시간 다 가져다 쓰세요.”

조 대표가 편한 웃음을 지었다.

예결산 당론부터 연말 행사며 주요 당무까지 정신이 없을 텐데도, 그가 사무책상을 내버려두고는 자연스레 응대용 소파에 앉았다.

“대표님, 중국 채널 갖고 계십니까?”

“네?”

“외교 인맥 말입니다.”

내 갑작스런 물음에도 조 대표가 덤덤하게 고개를 저었다.

“없지요.”

“그럼 만들 순 있겠습니까?”

연이은 질문에 어느새 심각해진 조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음알음 아는 지인들이 있습니다. 화교 정치인도 있고······. 그 루트를 통하면 시간이 좀 걸려도 될 것 같습니다.”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글쎄요, 몇 년은 내다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돈도 돈인데······, 무슨 일입니까?”

“중국 쪽 채널이 필요합니다.”

“의원들한테······.”

“아닙니다, 아직 일 키울 때는 아닙니다.”

“일이라니요?”

조 대표가 묻기에 고개를 저었다.

예상은 했었다.

외교 채널을 만드는 게 그래서 어려웠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몇 년은 걸리고, 거기에 돈까지 적잖게 들어갔다.

한마디로 힘든 일.

지난 10년의 과거를 기억한 채 살아나서 돈과 여자, 접대 좋아하는 놈들을 줄줄이 꿰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건 국내 사정이 전부였다.

대한민국 밑바닥 훑기도 바빴는데 중국 사정을 안다는 건 불가능했다.

알았다면 좋겠지만, 그것도 좋을 것 같진 않았다.

어쩌면 어정쩡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국내에 집중하지 못했다면 1조클럽이니, 캡틴코리아 같은 말은 더 먼 이야기가 됐을 수도 있었다.

국내만 해도 기억하고, 접대하고, 안면 터야 할 사람들을 다 아는 데 걸린 시간이 다해서 10년이었다.

중국은 땅이 넓으니 더할 것이었다.

시작점이 다르니 수십 년이 걸리진 않겠지만, 조 대표의 말대로 족히 몇 년은 걸릴 것이었다.

특히나 꽌시로 유명한 곳이 중국이었다.

친소(親疏)를 따지고, 의형제의 전통을 아직까지 써먹지 않던가?

러시아 인맥을 통한다면, 그런 의형제와 친소 관계 거치는 건 일도 아닐 것이었다.

그래서 비서실장이 내게 매달렸을 터.

나는 의아해하는 조 대표에게 하나씩 설명해줬다.

“정부에서 곧 사드 검토를 선언할 겁니다.”

“사드요? 미사일 방어 체계 말하는 거 맞습니까?”

“예.”

“아직 아니라고 하더니 내부에선 결정이 난 모양이군요.”

그가 내 말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일 때, 말을 덧붙였다.

“대표님께서도 사드 준비를 해놓으셔야 합니다. 사드 제원부터 부작용, 사드 유치 후보지까지 다 파악하십시오.”

“아예 확정이 된 겁니까?”

다름 아닌 미국의 요청이었다.

이건 다음 정권에 넘기거나 검토, 준비 같은 걸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니, 미국의 말을 거부하는 게 말이 될까?

어림 없었다.

정부가 바뀌어도 마찬가지.

전작권 이전도 벌벌 떠는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미국 말을 거부하겠는가?

사드는 무조건 유치해야 했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더구나 사드 도입이나 후보지 등은 이미 언론에서 드문드문 다뤄지기도 했었다.

여론을 살피고 반응을 보려는 의도로 도입이나 검토라는 말을 정부가 공표한 적이 없었을 뿐, 사드 도입이 시행될 거라고 말해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예, 그리고 사드는 중국을 타깃으로 삼을만한 회유수단이 필요합니다. 부정적 의견에 대응할 방안을 강구하셔야 합니다.”

“하······, 여러 번 겪지만 윤 최고 능력은 종잡기가 힘드네요.”

“앞으로 더한 것도 보실 겁니다.”

“허허, 무섭습니다.”

조 대표가 그러면서 안순익 고문처럼 웃었다.

그건 의심이 걷힌 미소였다.

물론 그의 성정이 여전히 공천 개입이나 접대, 편법 후원 같은 방식 앞에서 머뭇대곤 있었다.

그러나 조 대표는 내 능력을 믿었다.

과정에 문제가 있을지라도, 결과가 그 모든 걸 압도한다고 확신하는 것이었다.

흠결이 생긴다면 그것조차 메울 수 있다고.

애초에 조 대표가 나와 함께 하는 이유도 긍정적인 결실 이상의 초월적인 성과 때문이었다.

한 정당과 국회를 넘어서서 정치인의 마스코트가 된 나를 믿는 것이었다.

“사드 관련해서는 아마 최초 발표가 먼저 날 겁니다. 그 다음에 중국이나 여론 반응 봐서 20대 총선에 써먹을지 뺄지 결정할 확률이 큽니다.”

“최초 발표라는 건, 정부 입장을 공표한다는 뜻이죠?”

“그렇습니다.”

“알겠어요, 나름대로 사드 대책을 세워 놓겠습니다.”

“저도 준비해두겠습니다.”

나한테는 이고르 그레프 말고도 한 명 더 있었다.

미 대사 존 패터슨.

* * *

12월 초, 늦은 저녁.

서울 중구 덕수궁 길.

돌담을 따라 이동하던 까만 벤츠가 담벼락 중간에 난 철문 앞에서 멈춰 섰다.

차량의 깜빡이가 철문 쪽으로 깜빡이자, 시설근무를 서던 의경이 기웃대며 다가왔다.

이 문 안은 외교공관이었다.

그것도 미 대사가 기거하는 주한미국대사관저, 하비브 하우스(Habib House).

의경이 한 손에 무전기를 쥐고 주저하며 차창으로 다가갔다.

망설여진 것이었다.

시설근무를 서긴 하지만 애초에 아는 것도 없었고, 전번 근무자에게 따로 인수인계 받은 것도 없었으니 내심 긴장까지 됐다.

당당하게 대사관저로 들어가겠다고 깜빡이까지 킨 사람이 보통 사람이겠는가?

더구나 차도 새까만 벤츠였다.

길가는 행인들의 물음에 대꾸하거나 시설근무를 명목으로 서 있다가 돌아오는 게 전부인 의경은 경례 자세를 취한 뒤 차창을 쳐다봤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스윽-

차창이 반 정도 내려가고, 윤수혁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대사님하고 저녁 식사하기로 했습니다.”

“아······, 유, 윤수혁! 아니, 윤수혁 국회의원님.”

“예, 맞습니다. 아, 문 열렸네요. 들어가 볼게요, 수고해요.”

“넷, 알겠습니다!”

의경이 바짝 군기 든 목소리로 대답한 뒤 얼른 경례를 붙였고, 윤수혁이 탄 벤츠는 철문이 열린 정문으로 들어갔다.

의경은 급하게 무전을 쳤다.

조용하던 대사관저 근무 중에 인수인계 할 게 생긴 탓이었다.

그사이,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던 벤츠는 마중 나온 존 패터슨 미 대사의 손짓에 천천히 섰다.

“미스터 윤, 한영합미다!”

어설픈 한국어 발음에 윤수혁이 웃었다.

“Thank you, ambassador.(감사합니다, 대사님.)”

한국어와 영어가 교차한 뒤, 존 패터슨이 조수석의 한사랑을 바라봤다.

스물셋 밖에 안 된 젊음과 아름다움에 존 패터슨이 말을 잃었다. 윤수혁을 보긴 했어도, 한사랑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가 곧 윤수혁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윤수혁이 웃자, 존 패터슨도 웃으면서 한옥 디자인의 대사관저로 들어갔다.

부부동반 식사였다.

연말을 기념해서 윤수혁 부부가 존 패터슨의 가족과 함께 저녁 만찬을 먹는 것이었다.

존 패터슨의 아내와 만 10개월된 아들까지.

“해준이도 이제 일어설 수 있대요.”

해준은 존 패터슨의 아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성장이 빠르네요, 전에 들을 때는 기어 다닌다고 했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윤수혁이 말하자 한사랑이 통역했고, 존 패터슨이 대답하면 한사랑이 다시 말을 전했다.

“좋긴 한데 힘들대요. 임신 했을 때가 좋을 때라고 그러네요.”

“해준이 얌전해 보이는데, 그렇게 힘들어요?”

“곧 겪을 테니 말하지 않겠대요.”

존 패터슨이 웃었고, 그의 아내도 따라서 웃었다.

아기 의자에 앉아 있던 해준은 아기 포크로 수프를 휘젓고 있었다.

“우리 콜리도 저럴까요?”

한사랑이 말하자, 윤수혁이 가볍게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요.”

둘의 걱정어린 대화에 존 패터슨과 부부도 엷게 웃었다.

그렇게 식사가 마무리 된 뒤.

존 패터슨의 아내가 커피를 내리러 자리를 떴다.

남은 사람들도 소파와 티테이블로 자리를 옮기자, 존 패터슨이 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How's work?(일은 어때요?)”

식사 자리에서는 일부러 일 얘기를 피하고, 가족과 안부 얘기만 나눈 상황이었다.

윤수혁이 기다렸다는 듯 미소를 띠었다.

“안 그래도 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 대사님은 제 친구고, 미국은 대한민국의 동맹국이잖습니까?”

한사랑이 말을 전하고, 존 패터슨이 상체를 기울여왔다.

“Tell me anything.(뭐든지 말해봐요.)”

“Missile Defense, It called THAAD in korea.(미사일 방어, 한국에선 사드라고 불립니다.)"

한사랑이 대화 양상을 지켜보는 가운데, 어느덧 커피 두 잔과 과일 음료 한 잔이 나왔다.

“수혁 씨, 마시고 말씀 나누래요.”

존 패터슨의 아내가 한 말을 전하고, 한사랑이 조심스레 과일 음료를 들었다.

그사이 존 패터슨이 천천히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음료를 들던 한사랑이 급하게 말을 전했다.

“원래 그 얘기에 대해서는 노코멘트 하도록 지침이 내려왔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래요.”

“대사님, 사드 배치에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대신에 중국과의 협상을 도와주십시오.”

“중국의 반응에 따라 성명을 발표할 수는 있을 거래요.”

“성명이 아니라, 협상이 가능하게 도와달라는 뜻입니다. 정말로 중국과 대화할 수 있게 말입니다. 제가 꼭 보답하겠습니다.”

존 패터슨이 윤수혁을 쳐다봤다.

윤수혁은 자신의 피습을 몸으로 막은 사내이기도 했지만, 한국의 정치 희망으로도 불리는 청년이었다.

그래서 가까이 두고 친분을 쌓는 것이었다.

고마운 마음이 있기도 했지만, 성공한 정치인이라서, 그리고 더 성장할 정치인이라서.

그래서 직접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해줄 생각이 있었지만, 이번 부탁은 조금 과한 것이었다.

자신의 권한을 넘어서는 요청이 아닌가?

망설여졌다.

윤수혁은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일까?

그러다 다른 게 떠올랐다.

윤수혁과 연을 맺은 러시아 고위 인사, 이고르 그레프.

그는 존 패터슨이 개인적으로 알진 못했지만,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관리하는 요인 중에 하나였다.

한국에 입국한 순간부터 미 대사인 그도 이고르 그레프의 한국 일정을 확인했었다.

긴 고민 끝에 존 패터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러시아 요인을 봐서라도, 윤수혁과 더 튼튼한 줄을 만들어 둬야 했다.

윤수혁을 통해서 이고르 그레프, 나아가 러시아의 작은 목적 하나 쯤은 알 수도 있으리라.

존 패터슨의 입이 열렸다.

“Okay, I'll try.(알겠어요, 노력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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