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150화 (150/191)

# 150

46. 꽃길만 걷자 (3)

"환영합니다, 이고르 씨."

이고르 그레프.

그는 안드레 한을 통해 알게 된 러시아 창구로 힘깨나 쓰는 이였다.

최근에는 정년이 지나서 내무군 간부를 그만두고 FSB(Federal Security Bureau:러시아연방보안국)의 고문으로 자리를 옮긴 상황.

자리가 고문으로 바뀌었지만, 대통령의 손발과 다름없는 부처만 역임한다는 건 여전히 한가락 한다는 뜻이었다.

융숭하게 대접해야 했다.

나도 국방위 시절부터 접근했지만, 얼굴 보는 건 이제야 세 번째에 불과했으니.

어느새 통역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갑습니다, 미스터 윤. 못 본 새에 많이 발전한 모습입니다."

"고맙습니다, 이고르 씨. 호텔과 박람회장, 모두 준비되어 있습니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박람회장으로 먼저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차량으로 모시죠."

"나하고 같은 차에 탑시다."

통역사가 바로 말을 전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영광입니다, 이고르 씨."

걸으면서 곁눈질로 그의 안색을 살폈다.

서구형 마스크의 입체적인 윤곽, 그 중에서도 깊게 들어간 눈이 유독 신경 쓰였다.

이고르가 다른 복안을 갖고 있을 것만 같았다.

박람회 확인과 문화 행사 체결이라는 표면적인 구실이 있긴 했지만, 정부 차원의 교류도 간을 보는 인사가 고작 그런 이유로 한국에 올 것 같지 않았다.

아시아를 담당하는 수하들이 있을 터, 직접 올 이유가 없었다.

나만 해도 행사 실무는 전부 오준범 이사에게 맡겨뒀으니, 더 말해서 무엇하리.

다른 목적이 있을 것이었다.

하다 못해 아시아 스케줄이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그렇게 방문 목적을 짐작하면서 같은 차에 올랐다.

운전석과 조수석에 탄 이들 모두가 그의 수하들이었고, 뒷좌석에 나와 이고르가 나란히 앉았다.

내가 러시아에 방문해서 손님 노릇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인천 공항에서 출발한 지 10여 분이 지난 뒤.

이고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과외 받은 덕분에 중간중간 아는 단어 들렸지만, 그게 전부였다.

아직 외국보다는 국내에 더 집중해야 해서, 영어 공부조차 늦어지고 있었다.

곧 조수석에서 통역사의 목소리가 나왔다.

"당신의 업무는 어떻습니까?"

"업무라면······, 국회 업무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바쁘지만, 계획대로 잘 굴러 갑니다. 궁금한 것 있으십니까?"

"당신의 계획은 어디까지입니까?"

어느새 이고르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위압감이 피부에 와 닿을 정도.

"이건 국회 업무를 묻는 것 같진 않네요. 제 앞으로의 계획을 물으시는 겁니까?"

통역사가 내 말을 전하자, 이고르의 눈꼬리에 엷은 주름이 잡혔다.

대견한 아이를 보는 듯한 눈웃음이었다.

"그렇습니다."

말귀를 잘 알아들어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착실하게 대답했다.

"정권 교체입니다."

"3년 뒤의 계획을 묻는 게 아닙니다. 그 이후의 계획이 뭡니까?"

잠깐을 고민했다.

복수와 정점이라는 목표 중에 하나는 무산됐고, 이제 남은 건 정점뿐이었다.

"정점, 끝입니다."

"대통령입니까?"

"가능하다면 그 이상의 위치까지 올라갈 생각입니다."

통역사가 내 답을 전한 뒤.

"Ха-ха́!(하하!)"

이고르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서 그가 기쁘다는 제스쳐까지 취했다.

"미스터 윤, 내가 왜 당신과의 만남을 수락했는지 압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멈칫했다.

당연히 남겨 먹을 게 있으니까 만난 게 아닌가?

"이익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닙니까?"

"아닙니다."

어느새 진중해진 이고르가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당신이 준 이익은 다른 이들을 통해서 충분히 가질 수 있습니다. 천만 불은 큰 돈이 아닙니다."

내가 투자한 금액을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사람의 진가를 알아봅니다. 내가 이 자리까지 버틸 수 있던 건, 바로 그 능력 때문입니다. 나는 대통령의 진가도 30년 전에 봤습니다."

현 러시아 대통령을 말하는 것이었다.

어느새 입꼬리를 씨익 당긴 이고르가 마저 말을 이었다.

"당신의 진가도 보입니다. 미스터 윤은 충분히 목표를 이룰 사람입니다."

"감사합니다, 이고르 씨."

약간 난데없는 칭찬에 고개 숙이자, 서류봉투가 내 눈앞에 쑥 나왔다.

꽤 두툼한 두께였다.

통역사의 말이 이고르의 말과 겹쳐졌다.

"보답은 나중에 받기로 하겠습니다. 당신이 더 높은 자리에 있을 때를 기다리겠습니다."

고개를 들자, 그가 서류봉투를 뜯어보라는 듯 눈짓했다.

봉투를 열고 주춤했다.

내가 원하던, 바랐던 서류들이었다.

[하바롭스크 발레단 계약서]

[바이칼 스트라시 무용단 계약서]

[러시아 브니코바 오케스트라 계약서]

전에 구두 합의했던 문화행사 관련 서류들.

수십 장의 계약서가 한글과 러시아로 각각 1부씩 만들어져 있었고, 계약 기간이나 비용, 서명란 같은 부분만 비워져 있었다.

심지어 러시아 측의 서명은 완료된 상태.

동시통역이 들려 왔다.

"처음 만난 뒤로 당신은 엄청나게 발전했습니다. 그 성장을 축하하는 선물입니다."

"고맙습니다."

"내가 말했던 대로 보답은 나중에 받겠습니다. 그 때까지 잘 발전하길 바랍니다."

그가 말하면서 눈을 빛냈다.

보답을 바라는 게 아니라, 내 성공을 기대하는 눈이었다.

그가 말했듯이 천만 불은 큰돈이 아니라고 했으니, 보수를 바랄 것 같진 않았다.

물론 내심 신경 쓰인 탓에 미리 선을 긋긴 했다.

"감사합니다만, 너무 많은 걸 바라시면 안 됩니다. 저도 드릴 게 많진 않습니다."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의치 않는 듯한 미소까지 덧달고 있었다.

곧 알아들을만한 짧은 말이 나왔다.

"Как знаешь.(마음대로.)"

* * *

337호 의원실.

개인사무실에 50대 초반의 뱁새눈 사내,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 외교비서관 엄경식이 들어왔다.

사무책상에 앉아 있던 윤수혁이 눈을 마주쳤다.

"오셨습니까, 비서관님. 제가 점심 약속도 다 잡혀 있어서 부득이하게 사무실로 모셨습니다. 괜찮으시죠?"

엄경식이 가볍게 고개 숙였다.

"괜찮습니다."

"소파에 잠깐만 앉아 계세요, 이거 마무리만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외교비서관 엄경식이 자리에 앉자, 9급 비서가 커피를 내온 뒤 다시 나갔다.

그 때까지 타이핑을 하던 윤수혁이 뒤늦게 몸을 일으켰다.

"자, 무슨 용무로 오셨죠?"

"현재 진행 중인 무역박람회에 대해 여쭐 게 있어서 왔습니다."

"아, 말씀하세요."

"먼저 성공적인 박람회 유치를 축하드립니다."

윤수혁이 여유롭게 대답하고, 엄경식은 가볍게 눈치를 살폈다.

당연한 것이었다.

윤수혁은 국회의원으로 제1야당의 지도부이면서, 러시아의 주요 인사를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또 다른 외교 창구가 될 수도 있다는 뜻.

비서실장의 지시로 온 엄경식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다만, 행사의 유치 과정에 비밀스러운 부문이 많아서 말입니다."

"어디가 말입니까? 중기협이 러시아에 갔고, 블라디보스토크 시장하고 만났고······. 일만 잘했잖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언론에 공개된 내용은."

"그러면요?"

"이틀 전에 만난 러시아인에 관한 겁니다."

그 말에 윤수혁이 쓰게 웃었다.

"생각보다 빨리 움직이시네요. 다른 일은 늦으시던데."

엄경식이 주춤하곤 입을 열었다.

"······인천공항에 주요 관리대상이 뜨면 저희 쪽으로 보고하게 돼 있습니다. 이고르 그레프는 근래 방한한 외교 인사 중 가장 높은 등급의 인물입니다."

"등급이 어떻게 돼 있습니까?"

"내부 자료는 말씀드리기 어려운 점 양해해주십시오."

"그러면 하실 말씀은?"

"이번 행사 유치를 조건으로 나눈 말씀이 뭔지, 알려주십시오."

"별 말 안 했습니다."

곧장 나온 대답에 엄경식이 고개를 저었다.

"의원님, 비록 여야가 다르지만 국가를 위한 일입니다. 도와주십시오."

"문화 교류도 하나 하기로 했습니다."

"네?"

"말 그대로입니다."

"러시아에서 말씀이십니까? 그게 조건입니까?"

"아뇨, 한국에서 할 겁니다."

"그럼 조건은······."

"할 줄 아는 말이 조건만 묻는 겁니까? 아니, 정부는 뭘 했습니까?"

엄경식이 멈칫했다.

"행사 유치하니까 초대장도 없이 느닷없이 찾아오고, 주요 인사 한 명 왔다고 쪼르르 달려와서 묻기나 하고. 정말 그게 답니까?"

엄경식은 대꾸조차 못했다,

그 말 그대로, 청와대가 본격적으로 움직인 건 행사 유치 확정 이후였고 따로 아는 것도 없었다.

그러나 엄경식도 입만 꾹 다물진 않았다.

그도 윤수혁이 걸음마 할 무렵에 외무고시에 합격해서 외무부에서 근무했던 경력자였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적극 협조하도록 하겠습니다, 의원님."

"협조? 방금 내가 한 말 못 들었습니까? 할 줄 아는 거 없는 정부가 뭘 도와요?"

윤수혁이 굳은 얼굴로 묻자, 엄경식이 한풀 꺾여서 대답했다.

"······그래도 정부입니다. 아직 임기도 절반이나 남아 있습니다."

임기가 끝나는 건 18년 2월 24일이었다.

앞으로 2년 5개월 정도가 남은 상황.

윤수혁이 고개를 저었다.

"절반 밖에 안 되는 거겠죠."

그 말에 엄경식이 눈을 껌뻑거렸다.

임기 말년에 레임덕이라고 떠들면서 차기 대통령에게 들러붙는 이들이 나온다고 하지만, 대통령은 자리를 내려놓을 때까지 합법적인 권한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퇴임 직전까지 중요한 인사 발령을 하고, 시행령을 개정하며, 각종 사업에 개입할 수 있었다.

하물며 임기가 반 정도 지난 대통령은 쉽게 봐선 안될 일이었다.

"근데 그 임기, 절반 남은 건 확신하십니까?"

"그게 지금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대통령······, 과장 조금 보태서 저 같은 새파랗게 어린놈하고 비교당하잖습니까?"

"의원님께서 그만큼 유능한 걸로 치겠습니다."

"말은 잘하시네요."

윤수혁이 웃자, 엄경식은 굳은 얼굴을 간신히 풀었다.

안 그래도 스무 살은 어린 윤수혁의 비위를 맞추느라 고생 중이었다.

무슨 재주를 가졌는지는 몰라도 이고르 그레프라는 요인과 아는 건 확실했고, 접촉까지 했었으니까.

그러나 이어진 윤수혁의 말에 엄경식이 발끈했다.

"하여튼 협조 같은 거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괜히 고춧가루 뿌릴 생각 말고 각자도생합시다."

"의원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자, 윤수혁의 얼굴이 굳었다.

"반도 안 남은 임기로 큰소리 한 번 내보겠다는 겁니까?"

"······."

날 선 말에 엄경식의 입이 절로 닫혔다.

잠깜의 침묵 뒤.

윤수혁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고춧가루 뿌리려면 역풍에 되돌아올 것까지 견뎌야 할 겁니다. 비서관님, 내가 걸어온 길과 갈 길을 잘 생각해보세요. "

* * *

11월 초.

[한러 중소기업 무역박람회 성공적으로 끝나]

[윤수혁 중소기업진흥협회 주최한 박람회 총 방문객 100만 명 돌파해]

[국회의원 윤수혁, 중소기업진흥협회 설립 후 박람회 개최까지···그의 끝은 어디까지인가?]

조컨설팅의 조양준 대표가 준 기사들이었다.

기사와 칼럼 따위를 짜깁기하고 요약해서 만든 일종의 홍보 자료.

확인하는 와중에 조 대표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보고 계시는 거 의정보고서에 넣을 겁니다, 어떻습니까?"

"좋네요."

전적으로 맡겼지만, 그가 종종 확인을 요청하거나 결재를 받곤 했었다.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나였고.

그사이 조 대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의원님 사무실에 외교부에서 다녀갔다면서요."

"외교비서관이요?"

"아, 그게 외교비서관이었습니까? 청와대에서 나왔다고요?"

"그랬겠죠."

"문전박대 하셨다면서요?"

조 대표가 놀란 듯 묻기에 고개를 저었다.

"그냥 할 말 한 겁니다."

"적어도 비서실장 귀에는 다이렉트로 들어 갈 텐데, 살살하시지······."

내가 대꾸 대신 웃자, 조 대표가 턱을 긁적거렸다.

"하긴······, 총선이 있으니까요. 4월에 판 휘어잡으면 함부로 하긴 힘들겠죠. 하나, 둘 봐주다 보면 기어오르겠고······. 역시, 판단 잘하셨습니다."

총선을 염두에 두진 않았지만, 조 대표의 말이 맞긴 했다.

여소야대가 심각해지면, 정부는 야당 눈치를 전보다 많이 봐야 했으니까.

다시금 조 대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참, 제일 중요한 거 물어볼 거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모셨던 겁니다."

"뭔데요?"

"백화점에 태교 수업 받으러 가셨다면서요? 그것도 세 번이나."

"태교 빼고 출산 전반적으로 관련된 건데, 뭐 그렇긴 합니다. 어떻게 아셨어요?"

"백화점에서 의원님 봤다는 사람들이 제보해서 알았는데, 말씀하시지 그랬습니까?"

"아······."

그의 말을 바로 이해했다.

아내와의 출산 수업은 이미지 메이킹하기 좋은 수단이었다.

다정한 남편, 자상한 아빠.

홍보용으로 아주 적절한 문구 아닌가?

내가 왜 말하지 않았을까, 첫날에는 그랬다고 쳐도 조 대표랑 상의했어야 했는데.

멋쩍은 웃음이 절로 나는데, 조 대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러면 목격자 제보 더해서, 인터뷰 한 번 하시죠. 여성 잡지에 깔리면 효과 좋을 겁니다."

역시 홍보 전문가다웠다.

"그러죠."

"그리고 다음에 가실 때는 셀카라도 한 장 남겨주세요."

"셀카요?"

"SNS에 살짝 티 나게 올려두면 그것도 반응 좋습니다. 이러면 젊은 층부터 중장년층 여성 지지도를 어느 정도 확보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결론을 냈던 그가 아, 하면서 다시 목소리를 냈다.

"요새 젊은 세대가 꽃길만 걷자는 말 쓰던데, 코너 타이틀로 쓰겠습니다?"

"······그러세요."

그렇게 대답했지만, 괜히 딴 생각이 들었다.

걸어온 길은 꽃길이 아닌데, 앞으로 갈 길은 과연 꽃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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