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
46. 꽃길만 걷자 (2)
모 백화점 강남점.
한사랑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참이나 올라갔다.
도착한 곳은 11층.
옥상 테라스가 있는 최고층수였다.
뒤늦게 안내 전광판을 확인하려고 했는데, 도착 알림음이 금세 울렸다.
이윽고 문이 열린 다음에야 깨달았다.
[베이비 컨시어지]
한 번도 와본 적 없고 비슷한 곳조차 가본 적도 없었지만, 어떤 곳인지는 알 것 같았다.
출산, 임신, 육아 관련된 곳이리라.
안쪽으로 언뜻 보이는 제품도 유모차 같은 유아용품이었다.
장모님이나 가사 도우미하고 같이 방문해 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한사랑은 자연스레 안쪽으로 걸었다.
향한 곳은 VIP라운지였다.
들어서자마자 데스크에 있던 정장 차림의 사내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여기요.”
한사랑이 곧장 카드를 한 장 내밀었다.
나는 구경만 했다.
베이비 컨시어지라는 공간에서는 내가 할 말도, 할 행동도 알지 못했으니까.
그러다 컴퓨터를 다루던 직원이 시선을 확 들었다.
미소가 스민 사무적인 눈이 아니라, 웃다가 경직된 눈이었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한사랑 사모님,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신원 확인이 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저런 VIP회원 카드는 언제 만들었는지, 괜히 쓴웃음이 났다.
한사랑의 일거수일투족이 아니더라도, 생각보다 관심이 적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한 감정이 좀 들었다.
그사이, 안에서는 모시겠다는 사람이 한 명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매니저 김인영입니다. 이용하실 서비스가 있으십니까?”
“수업 들을게요.”
수업이라니?
내가 돌아보자, 한사랑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같이 들어야 좋대요.”
육아용품 사러 온 줄 알았는데, 수업이라는 소리에 눈만 껌뻑거렸다.
반면에 매니저는 단번에 알아듣고는 앞장서서 안내했다.
백화점 베이비 컨시어지에서 받을 수업이라면······.
예상하는 사이, 복도를 따라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방 안에는 고풍스런 소파와 티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전지만한 유화 따위가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수업 받는 회의실이 아니라, 귀빈 응접실에 가까운 모습.
도대체 무슨 수업을 받길래?
매니저가 자리를 비운 뒤에야 한사랑의 입이 열렸다.
"출산 수업이에요."
"아······."
처음에 수업이라고 했을 때 예상하긴 했었다.
다만 장소도 그렇고 내가 같이 듣는다는 게 의아했는데, 한사랑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수업 듣는 거 싫진 않죠?"
"아, 그럼요. 저 공부 많이 해봤어요."
"근데 표정이 왜 그래요? 공부 많이 한 거 치고는 친구따라 도강하러 온 학생 같잖아요."
"공부를 잘하진 못해서?"
"푸흐, 그래도 들어야 돼요. 왜 그런지는 알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무관심하긴 해도, 무식한 남편은 아니었다.
"우리 애인데, 우리가 키워야죠. 나도 다 압니다."
당황했던 티를 날리고 대답했는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헐, 정말요?"
"예······?"
"으흐흣, 정말······. 평소에는 계산적인 대답 잘만 하면서, 오늘은 교과서 같이 대답하네요?"
"내가요?"
"네, 당신이요."
여전히 얼떨떨해하자, 한사랑이 아리따운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부모들 지지 얻는 데 도움 되잖아요. 그리고 언론에 임신한 거 그렇게 자랑 해놨으면서, 누가 질문이라도 하면 어떡하게요?”
아, 입이 벌어졌다.
오늘의 백화점 나들이는 순수하게 한사랑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한사랑은 나를 위해서 백화점에 왔었다.
그것도 의류나 육아용품 구입이 아닌 출산 수업.
내가 무뎌진 것일까, 아니면 한사랑이 나 못지않은 정치적 감각을 가진 것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둘 다 맞지 않을까 싶었다.
한사랑은 나 때문에 행실을 더 조심하고 계산이 늘어난 반면에, 나는 한사랑이나 콜리에 대해서는 정치적 계산을 덜 하고 있었다.
머리 굴릴 일이 원체 많아서 그렇기도 했지만, 왜 그렇게 됐는지.
하긴, 나도 사람이니.
"안녕하세요."
웬 중년 여성의 온화한 목소리에 상념이 깨졌다.
"출산 육아 강사 김영미입니다. 저희 베이비 컨시어지 VIP 라운지를 찾아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리며, 오늘의 수업에 대해 우선 오리엔테이션 먼저 진행하려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말과 동시에 최초 응대한 매니저라는 사람이 팜플렛처럼 제작한 수업 설명서를 줬고, 교구재를 꺼내고 롤 스크린을 내리며 수업을 준비했다.
그 외에도 다과를 내오고, 나와 한사랑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서 수행비서 버금가는 노력을 했다.
그러나저러나, 나는 많이 새로웠다.
2000년대 초반, 고등학생 때의 성교육 이후로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것들을 배우고 있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임신과 출산의 과정은 물론이고 각종 태교 방법과 산모 고관절 오일 마사지까지.
이 수업만 두 시간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최소 3회의 수업이 더 있었고, 심지어 태어난 이후에 대한 교육은 그 모든 게 끝난 다음이었다.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이런 수업이면. 본격적인 육아는 얼마나 더 할까?
헛웃음이 났다.
자식을 가진 많은 동료의원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언뜻 알 것 같기도 했다.
임신했을 때가 가장 좋을 때라고 그랬었지.
특히나 아이가 성장할 때마다 난이도가 올라간다고들 했고.
물론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실감이 나진 않았다. 강의 한 번 듣는다고 내가 아빠 자격증을 따는 건 아니니까.
와 닿는 거라고는 몇 개 없었다.
아이에 관해서는 질문할 꺼리도 많고, 대답할 것도 많다는 사실들.
"같이 오길 잘했죠?"
강의가 끝나고 한사랑이 물어 왔다.
그런데 웃고 말았다.
정치적 계산까지 할 줄 아는 여자가 어느새 아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는가?
사랑스러울 수밖에.
"흐흐흐. 네, 잘했어요."
"아? 그 웃음······. 임신 초기에는 안 돼요. 노!"
"그거 빼고 다 하면, 예스?"
* * *
2015년 10월 말.
강북구 신일고등학교에 플래카드가 걸리고 입식 패널이 세워졌다.
[한러 중소기업 무역박람회]
큼지막한 글자 아래에 주최 및 후원, 참여 단체가 나열되어 있었고, 러시아어로 된 플래카드도 같이 매달려 있었다.
태극기와 러시아 국기는 교문 좌우 기둥에서 펄럭인 지 오래.
넓은 운동장도 꽉 찼다.
절반은 부스였고, 절반은 주차된 차량.
그마저도 관계자 차량이었다.
홍보를 위해 서울시 전역에 포스터를 배부하고 주요 관공서마다 부착을 요청한 바람에 방문자 차량은 담을 마주한 서울사이버대학 캠퍼스를 채우고 있었다.
"윤 의원! 아니지, 협회장! 첫판부터 일을 이렇게 벌였어? 내 행사, 기대해도 되겠나?"
말을 마친 안순익이 끌끌거렸다.
윤수혁이 전에 언급했던 문화교류를 말한 것이었다.
"겨울맞이 기념해서 러시아 공연단 데려오기로 구두 합의 봤습니다. 이번 무역박람회 사이즈 보고 확답할 겁니다."
"보고 확답해? 그럼, 러시아에서 이게 온다는 소린감?"
안순익이 엄지를 치켜세우며 묻자, 윤수혁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바빠서 개회식 때는 못 오고, 내일 잠깐 오기로 했습니다."
안순익이 입을 벌렸다.
"허······, 이제 아주 국제적으로 노는 구만."
"아직 그 정돈 아닙니다, 이거 좀 오래된 거라서요. 국방위 있을 때부터 끌던 거 이제 해결 보는 겁니다."
"그 때는 또 어떻게······, 아니지. 내가 물어서 뭣 하겠는가? 흐흐흐, 그냥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야지."
"아, 그 전에 문화단체 하나 설립하세요."
"자네가 아니고, 내가?"
"예, 문화는 문화 전문가가 맡아야죠. 그리고 국가 왕래하면서 행사 잡는데, 개인으로 가긴 좀 그렇잖습니까?"
"암, 그렇지. 그럼 돈은? 중기협처럼 자네가 댈 건가?"
"아뇨, 돈 나갈 데가 많아서 다 대긴 어렵습니다. 발기인에 이름 올리고, 개인적으로 이사 정도 하겠습니다."
부정적인 대답에도 안순익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다 아는 얼굴이었다.
"그래, 요샌 땅 파도 10원 한 장 안 나오니 그래야지. 어차피 자네보고 쫓아와서 돈 대줄 놈들 천지니까. 안 그런가?"
"잘 보셨습니다, 중기협에 줄 섰던 사람들 거기로 보내놓겠습니다."
협회 창설을 생각하는 듯 진중해진 안순익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럼 바라는 단체명이라도 있나? 오야지 스타일 좀 들어봐야지."
"입각(入閣) 경력으로 좋은 호칭이면 됩니다. 필요하시면 조컨설팅에 연락하세요."
그렇게 둘의 대화가 마무리 되는 사이.
"협회장님, 저 들어가겠습니다."
오준범이 등장했다.
실질적으로 실무를 총괄하는 바람에 바쁜 모습이었다.
"어, 선배님도 벌써 오셨습니까?"
"그럼, 일찍 다녀야지. 감투도 없는 놈이 늦게 다녀서 쓰겠나?"
"하하, 여전하십니다. 아! 협회장님, 방금 외교부 차관하고 대통령비서실에서 몇 명 찾아왔습니다."
그 말에 안순익의 눈이 동그래졌다.
"여기 정부 간섭 일절 안 받았다면서?"
윤수혁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서 온 겁니다. 아까 여쭤보신 거 기억나십니까? 이거 오냐고 물어보셨던 거 말입니다.“
윤수혁이 엄지를 내밀며 말하자, 안순익이 짝 소리가 나게 손뼉을 쳤다.
"그럼 초대도 안 했는데 달려왔다는 말인가? 이게 오니까?"
안순익도 다시 엄지를 세웠다.
"러시아와 우리나라의 접점이 워낙 적어야죠. 거기 폐쇄성 알아줍니다."
"그렇게 외교 창구가 부족하단 말인가? 민간단체에 찝쩍거릴 만큼?"
"그렇기도 한데······, 내일 오실 손님이 좀 세거든요."
"세다니?"
"사연은 좀 복잡한데······, 아. 극동지역 행사 정도는 말 한마디로 열어줄 사람입니다."
"허, 실세란 말이지?"
"비슷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실 건가? 외교부 차관하고 청와대비서실 직원들 왔는데."
안순익의 물음에 윤수혁이 씨익 웃었다.
"써먹어야죠."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오준범이 곧장 물었고, 윤수혁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단체사진 찍고, 협회 이사들하고 개인사진 찍고, 기자들도 이리저리 돌리고. 외교부 차관하고 청와대비서실에서 왔다고 소문 한 번 쫘악 냅시다."
안순익이 옆에서 끌끌거리며 웃는 사이, 오준범은 수첩에 간략하게 메모하며 물었다.
"그럼 내일 오실 손님은······?"
"높으신 분 번거롭게 해서 좋을 거 없습니다. 외교부든 청와대든 오늘까지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오 이사님 재량으로 처리하시면 됩니다."
"네, 그럼 말씀 나누십시오."
오준범이 꾸벅 고개 숙인 뒤에 물러가자, 여전히 웃고 있던 안순익이 입을 열었다.
"대통령 임기 아직도 반이나 남았는데, 자네가 불편하진 않겠어?"
"정부도 정부 나름이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안순익이 과장되게 몸서리를 쳤다.
"사람 무섭기는······."
"저보다 무서운 놈도 많이 만나봤습니다."
"그래도 이럴 때 상부상조해야 나중에 입각했을 때 돌려 받는 게 있는 법이야. 자네도 기왓집 들어가면 알겠지만, 거기 골치아픈 일 수두룩해."
"압니다."
"어? 자네가?"
"모르셨습니까? 이거 두 번째 인생입니다."
“······?”
대꾸를 못하고 눈을 껌뻑이던 안순익이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하! 요새는 조크를 그런 식으로 하나?!”
안순익의 웃음 사이로 윤수혁도 엷게 웃었다.
"박 보좌관도 웃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