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146화 (146/191)

# 146

45. 밥값 (2)

정계에도 상도가 있었다.

이는 배신과 야합 따위의 단어가 정치면을 차지할 때도 지켜지는 것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게 있었다.

바로 가족, 여자, 돈.

이 세 가지 문제는 서로가 암묵적으로 봐주곤 했다.

청와대도, 검경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통신 수단이 발전하고, 배운 사람들이 늘어나 통제되지 않는 게 보도될 뿐.

정계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고위직은 위와 같은 사항을 지켰다.

이유는 하나.

모두가 다를 바 없이 같은 처지이기 때문이었다.

가족이 있고, 룸에서 여자를 품기도 하며, 돈 문제로 신음하는 건 모든 고위 인사의 공통 문제였다.

만일 그게 하나, 둘 까발려지기 시작하면, 그 끝은 공멸이었다.

적잖은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나고, 분노가 보복으로 연결되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정치판은 아수라장이 될 터.

더구나 그 과정에서 거금이 돌았다면 상황은 더 좋지 못했다.

돈에 눈이 뒤집어 지거나, 더 큰 돈을 요구해서 기존의 질서까지 무너질 가능성이 있었다.

물론 그 안에 해당되지 않는 고고한 사람도 있긴 했다.

서울중앙지검장 손기택은 마주 앉은 윤수혁 바라봤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나직하게 물어오는 말에 손기택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새삼 의원님이 대단해서······."

윤수혁이 태운 비자금만 추정하기로 수백억에서 천억 대였다.

그것도 장세룡을 잡기 위해서 쓴 돈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누가 사람 하나 잡자고 그만한 돈을 쓴단 말인가?

아무리 재벌이라고 해도 그렇게 할 순 없었다.

수억 원의 세금을 피하고, 수십억 원의 사업비를 절감하기 위해 갖은 수를 쓰는 게 보통의 재벌들이었다.

애초에 비자금 만들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체사업비의 15% 미만.

그게 평균적인 비자금 규모였다.

그러나 일의 규모나 형태에 따라 비자금 비율이 10%이하로 떨어질 수도 있고, 관계자들 수수료로 쓰다보면 고작 5% 남짓 남는 경우도 있었다.

100억짜리 사업을 진행해야, 5억이 남는다는 소리였다.

윤수혁이 태운 돈은 그렇게 10배, 20배의 가치가 있는 비자금이었다.

구체적인 내용을 알지 못해 감히 추측하진 못했지만, 손기택은 대강 짐작하기만 했다.

비자금을 위해 바닥에 깔았던 돈은 수 조 원에 달할 것이라고.

고작 6,000여만 원으로 시작한 가상화폐가 바닥에 깔았던 돈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채.

그사이, 윤수혁이 잘 포장된 종이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얼마 안 되지만, 받아두세요."

안에 들어 있는 건 유명 베이커리 브랜드의 케이크 박스.

그러나 내용물이 케이크일 리는 없었다.

저건 위장이었고, 실제로 주는 것은 돈이었다.

케이크 박스 크기를 고려하면, 들어갈 5만 원 권은 대략 60다발 정도.

3억 원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수당을 더한 손기택의 연봉이 1억 내외인 점을 감안하면, 3년 치 연봉이 케이크 박스에 들어 있다는 소리였다.

손기택은 종이봉투를 받으면서도 윤수혁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증인도 있는데 굳이······?"

그 말처럼 김정환이 건넸다던 장부 외에도 현장을 목격했던 증인까지 있었다.

윤수혁이 보호 중이라고 하니 확실할 터.

그 모든 걸 더하면 수 년의 유죄 선고는 이미 예정된 일이었다.

떡값은 필요하지 않다는 게 손기택의 판단이었는데, 윤수혁이 말을 이었다.

"삐그덕 거릴 때마다 기름 치듯 쓰세요. 이번 일은 가급적 잡음 없이 제대로 처리 했으면 합니다. 이제 장세룡하고는 그만 했으면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손기택이 두 손으로 봉투를 받아 자신의 옆자리에 놨다.

일찌감치 정치 검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윤수혁과 함께 하기로 작정했으므로 주는 돈을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애초에 거부할 생각도 없었고.

곧 윤수혁이 자리에서 일어날 무렵.

손기택이 입을 열었다.

"저도 이번 사건만 맡고 발령 날 것 같습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경기 이남으로 내려갈 것 같습니다. 대전지검장이 가장 유력한데, 정확하진 않습니다."

"서울 일은 어떻게, 제가 부탁드릴 수 있겠습니까?"

"제가 현역이니 웬만한 일은 회사 통해서 해결됩니다. 그래도 쓰고 믿을 만한 친구가 필요하시면······."

말을 흐리던 손기택이 품에서 명함집을 꺼내 뒤적였다.

"진도환 검사라고, 특검 팀장까지 했던 능력 있는 놈입니다. 저번에 한 번 얼굴도 보셨는데, 기억하십니까?"

"예,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 나눴죠."

"아, 이게 그 친구 명함입니다. 제 라인 중에 제일 믿을만한 놈입니다. 편하게 연락하시고, 데려다 쓰십시오."

윤수혁이 명함을 받아 챙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그럼 수고 해주십시오."

"아닙니다, 들어가십시오."

손기택이 정중하게 배웅했다.

머리가 겸손할 정도로 숙어지는 것이었다.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든 손기택의 시야에 윤수혁의 뒷모습이 보였다.

몇 걸음 가지 않았는데도, 거리가 멀어보였다.

아니, 심적인 부담이었다.

처음에는 사윗감으로, 이후에는 동업자로 보였던 윤수혁이 지금은 다르게 보이고 있었다.

상관, 혹은 고용주.

처음부터 윤수혁은 그 높이에 있었을지도 몰랐다.

지금도 윤수혁이 뭘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디까지 가려나.’

* * *

대화투자자문의 오 대표가 사직서를 냈다.

내 위임장을 받은 변호사를 비롯해서 주주 몇이 모여 형식적인 회의록을 남기고, 새로운 대표이사를 선출했다.

새 CEO는 대기증권사 출신의 증권전문가.

2010년도에 오 대표의 연줄로 들어왔던 사람이자, 내 정보력을 아는 초창기 설립멤버 중 하나였다.

그도 오 대표나 내 말을 잘 듣는 이였기에 크게 신경 쓸 건 없었다.

다만, 오 대표가 아까웠다.

내 진가를 알고 수 년 전부터 납작 엎드리던 사람 아닌가?

더군다나 투자자문회사 대표직을 수행하면서 만난 VIP들과 기관 책임자들과의 관계도 아까웠다.

좀 더 공고하게 만들고, 더욱 영역을 넓힐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내 이름값 때문에 덩달아 오 대표까지 유명해진 탓이었다.

내려오지 않고 버텼다가는 투자자문회사에 유치된 수천억의 돈이 움찔할 수도 있었다.

그래선 안 됐다.

대화투자자문은 내 보험 중에 하나였다.

거기서 벌어들이는 선취수수료만 해도 연간 수십억이었다.

그 외에 상담 및 자문 비용이나 초과 수익에 대한 성과보수까지 더하면, 실질적으로 만질 수 있는 돈은 백억 대가 넘었다.

회사 명의로 돌리는 부동산까지 더하면 자산은 더 많았고.

그래서 내 보험이었다.

가상화폐로 1,000억을 태웠듯이 이 회사도 이용할 수 있을 것이었다.

취업 청탁이 됐든, 개인적으로 운용하든.

이어서 전화 한 통이 왔다.

장세룡이 양평에서 말했던 안순익의 권력 남용까지 드러난 모양이었다.

- 오늘 민혁위 임시감사 결과에서 짤렸네.

안 위원장의 연락이었다.

- 감사 일정 잡고 심사 하느라 오 대표보다 늦어진 모양일세.

"그간 고생하셨습니다. 형사처벌은요?"

- 예끼, 이 사람. 내가 줄을 잘못 타긴 해도, 이 나이 먹을 때까지 감옥 간 적은 없어.

"흐흐흐, 알겠습니다. 그럼 강북으로 넘어 오시죠."

- 강북으로?

“예, 아직 일 하실 수 있죠? 여기서도 장(長) 한 번 해주세요.”

- 강북에서 내가 할 게 뭐가 있는가?

"겨울 오기 전에 러시아하고 교류 행사 열겁니다, 진행 위원장 같은 거 하나 맡아주세요."

- 러시아?

"예."

- 뭐, 박람회처럼? 협약서 들고 사진 찍고, 체육관 빌려서 부스 짓고 말인가?

"싫으십니까?"

- 싫기는! 견적 내본 게지. 보드카는 요새 입에 안 댔는데, 몸뚱이가 받아줄지 모르겠으이.

"행사만 부드럽게 진행해주세요."

- 유야무야 넘어가는 게 내 전공이야, 그리고······.

말하던 안 위원장이 목소리를 깔기에 귀를 기울였다.

- 화이트리스트 챙겨뒀네.

"현 정부 말입니까?"

- 그래, 혁신정부 말이야. 사업자 선정도 그렇고, 공문도······. 서류 몇 장만 봐도 합이 맞아.

현 정부의 화이트리스트.

MB정부의 블랙리스트보다 더 나은 성과였다.

전 정권의 블랙리스트가 단순한 정치 혐오를 일으킨다면, 이 화이트리스트는 현 정부에 대한 실망과 분노로 이어질 확률이 컸다.

"그거 좋네요, 언제 한 번 집에 오세요. 식사 한 끼 대접하겠습니다."

집에서 같이 밥 먹은 사람은 여태 없었다.

바깥에 식당도 많을 뿐더러, 한사랑이 있는 집으로 굳이 초대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것이었다.

안 위원장도 잘 아는지 놀라서 되물어왔다.

- 응? 자네 집사람이 차려준다고?

"아뇨."

- 그러면?

"한식 자격증 있는 이모님 한 분 씁니다. 그 분 솜씨 좋아요."

- 끄흐흐흐, 알겠네.

그가 좋다는 듯 웃었다.

그래서 안 위원장을 초대한 것이었다. 작은 호의로 충심을 다독여 줄 수 있었으니까.

이건 돈과는 다른 개념이었다.

사람들이 안부 챙겨주는 말 한마디에 흔들릴 때가 있지 않던가?

그것과 내가 주는 밥은 차이가 크긴 하겠지만.

* * *

장세룡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한 손에는 스마트폰을 부서져라 꽉 쥔 채, 눈을 질끈 감은 모습이었다.

"······염병."

욕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불안을 감추기 힘들었다.

윤수혁이 푼 비자금이 최소한 수백억 원은 될 것으로 보였다.

돈을 받아먹고도 돌아갈 자리를 마련해두기 위해서, 혹은 받지 않고 충심을 증명하기 위한 사람들 때문에 알게 된 것이었다.

장세룡은 배신을 용서하지도 않았고, 충심을 치하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그 쪽으로 신경을 쓸 수도 없었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바로 뇌물.

그것도 통상적으로 주던 뇌물보다 2배에서 10배가 많은 어마어마한 액수.

전체적으로 보면 수백억에 달했다.

장세룡의 추측과 예상은 스마트폰을 들고, 통화를 한 뒤에 확신이 됐다.

측근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전부 뇌물을 받은 것이었다.

부인하고 해명했지만, 모르기가 더 어려웠다.

한 정당의 대표까지 올라가게 만들어준 관록과 직관은 생각보다도 예리한 것이었다.

물론 그들이 전부 털어놨을리는 없었다.

증거를 털어 놓는 자신들의 죄가 되기도 할 테니까.

하지만 그만한 돈이면 뭐가 됐뜬 한두 마디 떠들 만했다.

그리고 김정환.

그가 한국을 떠나버렸다.

미국에서 유학 중인 손녀를 보러 갔다고 했는데, 어찌 그 말을 믿으랴?

피했다고 봐야 했다.

곧 어지러워질 사태를 예상하고 자리를 뜬 것이었다.

타이밍이 그랬다.

그렇다면 얼마나 받아 먹었을까?

줏대 있는 정치 원로라서 한두 푼에 흔들리진 않았을 텐데.

장세룡은 액수를 헤아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 돈이 얼마가 됐든 자신은 주기 어렵고, 줄 생각도 없는 금액이었다.

수백억이라니.

차라리 1, 2억에 살인교사를 시키는 게 훨씬 효율적이었다.

이윽고 장세룡이 눈을 떴다.

핏발이 선 눈으로 스마트폰을 보면서 메시지를 적었다.

[들어와]

채 1분도 되지 않아서 건장한 사내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직 학원재단의 비서실 출신 직원들로 수용(收容) 생활까지 각오한 인력이었다.

그리고 음지의 외국인이나 조선족보다 믿을 수 있는 이들.

장세룡의 입이 열렸다.

"차에 실어도 좋을 공구만 챙겨서 대포차 한 대 구해놓고 대기해."

"알겠습니다."

"며칠 안으로 움직일 거야."

말을 마친 그가 두툼한 봉투 두 개를 내밀었다.

뒷짐 진 두 사내가 바라보자, 장세룡이 봉투로 턱짓을 했다,

"잘만 해결되면 그 돈 100배로 쳐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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