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134화 (134/191)

# 134

41. 벌써 (3)

2015년이 됐다.

본회의에서 1월 12일까지 휴회하기로 의결했으나, 나는 쉬질 못했다.

그 사이에 서민주거복지특별위원회가 신설되어 나도 위원에 포함 됐고, 각종 신년맞이 모임에 참석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정당과 연계된 각종 단체와 유력 시민단체들, 그 외에도 출신 학교와 파평 윤씨 종친회도 나를 불렀다.

가야만 했다.

그들이 유권자라서, 그리고 내 힘이 될 사람들이라서 가야 했으나, 딴 이유도 있었다.

아니면 실망하고 욕했다.

심지어 단체나 관계자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알게 된 수많은 주위 사람들까지.

뱃지 달더니 배가 불렀다고.

그래서 박 보좌관이 약속 선별을 신중하게 했고, 취소나 변경은 마지막에 마지막으로 미뤘다.

당연하게도 연말과 연초가 국정감사 뺨치게 바빴고, 1월 말 즈음 되어서야 초과 근무가 끝났다.

2월에는 임시회가 개회했으나, 상대적으로 느슨했다.

물론 설이니, 뭐니 오갈 곳은 많았지만.

시간이 흘러서 3월이 됐다.

보통은 봄이나 새싹, 푸름, 아니면 개교 같은 것을 떠올리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이제부터 제대로 된 15년도가 시작되는 셈이었다.

3월부터 일이 많았다.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일명 김영란법의 본회의 통과와 주한 미 대사 피습, 상반기 재보궐 선거, 제일섬유와 오성물산의 합병 등등.

죄다 굵직한 것들이었고, 그 시작이 바로 3월이었다.

그렇게 찾아온 3월 3일, 화요일.

오후 5시가 좀 넘은 시각.

다른 법안의 전자투표가 끝나고, 가결을 선포한 다음, 국회의장이 목소리를 냈다.

“다음은 의사일정 제 32항을 상정할 순서입니다만, 한 가지 양해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각 교섭단체대표의원과의 협의를 거쳐서 오늘 의사일정에 제71항부터 제79항까지 모두 9건의 안건을 추가하였습니다.”

제71항.

그게 바로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안, 바로 김영란법이었다.

원내대표가 최종 합의 전에 조성현 당대표를 비롯해 최고위원에게도 마지막으로 의견을 구했기에 나도 잘 알았다.

이건 발의하고 수정을 거친 이후부터는 더 이상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법안 자체가 부패에 반대하는, 청렴한 척 할 수 있는 내용이었고, 정무위에서 법안을 수정하여 관련 공직자에서 국회의원을 제외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이루어진 전자투표.

결과를 보고 받았을 국회의장이 입을 열었다.

“……재석 247인 중 찬성 231인, 반대 2인, 기권 14인으로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안은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경쾌한 세 번의 타봉.

이후 국회의장이 다른 법안과 다르게 끝에 소회를 달았다.

“조금 전 동료 의원님 여러분들께서는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안에 대해서 의결하셨습니다. 의장으로서 한 말씀 올리려 합니다. 이 법은 탄생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요, 그러나 그 우여곡절이 대한민국을 진정한 선진국으로 만들어 주리라 저는 믿습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가로 나아가려면 지금처럼 세계 46위의 부패지수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보다 투명하고 맑은…….”

본회의 때마다 의원들의 반발과 진행 방해, 각종 억지요구로 지쳤을 국회의장이 원고도 내려다보지 않고 줄줄이 소감을 발표했다.

그도 지금 이 순간이 역사의 중요한 때이고, 이 법안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인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또한 기자들의 카메라가 본인을 향한다는 것도 잘 알 테고.

그렇게 법이 통과됐다.

전생보다 반대 인원도 줄고, 기권자도 줄어든 걸 보면, 이 법안은 오늘 통과될 운명이었던 것 같았다.

대통령과 여당이 바뀌었는데도 찬성의 비율이 압도적이니.

그리고 이틀 뒤.

그만큼 중요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국가적으로 쪽팔릴 만한 일이었다.

***

3월 5일, 세종문화회관.

권창훈이 내심 긴장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존 패터슨 주한미국대사 초청 강연회 - 한반도 평화와 통일, 그리고 한미관계 발전방향-]

전면에 걸린 큼지막한 플래카드와 바닥을 꼼꼼하게 채운 흑갈색의 카페트, 그리고 환한 조명.

이곳은 자신이 있을 장소가 아니었다.

경찰 생활을 청산한 뒤, 새한국당 시절부터 당의 잡무와 궂은일을 도맡던 권창훈은 이런 공식 석상에 참석한 적이 없다시피 했었다.

출입한다고 해도, 지시와 업무를 위해 잠깐 드나들 뿐.

참여자로 명단에 서명한 뒤 원형 식탁 앞의 의자까지 차지한 건 처음이었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나름 한 자리 한다는 사람들.

그래선지 권창훈은 더욱 긴장했다.

안 그래도 바짝 신경을 써야 하는 상황이었다.

혹시 모를 긴급 사태에 반응하라는 윤수혁의 지시가 있던 탓이었다.

미국대사가 있는데 무슨 사건이 있겠냐마는, 권창훈은 윤수혁의 지시대로 강연장 내부 구조를 파악하고, 참석자의 몽타주를 훑었다.

경찰이었을 때, 그리고 흥신소 업무를 하면서 나온 직업적 습관이었다.

그렇게 강연장의 원형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채워지고, 수프까지 세팅이 끝날 무렵.

권창훈이 멈칫했다.

시선을 돌리다가 윤수혁과 눈이 마주친 것이었다.

그것도 평범한 눈길이 아니었다.

잔뜩 긴장한 느낌.

‘무슨 일 있나?’

스마트폰을 확인했지만 윤수혁에게 온 연락도, 메시지도 없었다.

그러다 문득, 권창훈은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혹시 모를 일.’

그게 무엇인진 몰라도 곧 벌어질 것 같다는 직감이 느껴진 것이었다.

윤수혁이 설마 무당에게 점지라도 받고 오진 않았을 터.

현장에 변화가 생겼으리라.

권창훈의 시선이 다시 강연장 내부를 확인했다.

동시에 권창훈의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의자에 닿아 있던 엉덩이와 허벅지가 슬그머니 떨어졌다.

수상한 게 있었다.

직선거리로 약 8미터가량 떨어진 6번 테이블.

거기 앉아 있던, 기억에 남는 독특한 몽타주의 사람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들어서면서 봤던 사람이었다.

노란색 생활한복을 안에 입고 자주색 겉옷을 걸친 차림.

거기에 턱수염까지 길러서 분명하게 기억한 사람이었다.

‘설마?’

저 사람이 무슨 난동이라도 부린다는 말인가?

저렇게 튀는 차림으로? 그것도 이 강연장에서? 미국대사며 행복한국당 최고위원까지 있는데?

온갖 물음 끝에 권창훈도 결국 의자를 빼고 일어났다.

턱수염이 헤드 테이블을 향하고 있었다.

바로 존 패터슨 미국 대사와 윤수혁이 앉아 있는 곳.

권창훈의 눈이 동시에 사복 경호원으로 예상되는 사람을 찾았다.

그는 옆 테이블에 앉아 막 수프를 떠먹고 있었다.

결국 권창훈도 움직였고, 동시에 턱수염의 몸을 다시 확인했다.

맨 손.

당장 보이는 건 없었다.

그러나 윤수혁의 눈빛과 직감이 이상해서 권창훈이 결국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만약에 아니라면 조금 난감할 순 있겠지만, 대충 말을 둘러 댈 생각이었다.

그러나 턱수염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아차 싶었다.

‘뭐야?!’

턱수염의 손이 옷 안으로 들어갔고, 동시에 윤수혁이 벌떡 일어났다.

존 패터슨의 통역사 옆자리.

이어서 턱수염의 손에서 뭔가가 나오는 순간, 권창훈이 확 뛰쳐나갔다.

잘 보이지도 않았고, 흔들려서 알아보기 힘들었으나 그건 분명 칼이었다.

형사 생활 하면서 숱하게 본 흉기.

크기나 날의 예기는 모르겠지만, 문구점에서 가져올만한 1,000원짜리 칼은 아니리라.

‘시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지금 뛰어도 이미 일은 벌어질 게 분명했다.

권창훈이 더욱 급하게 뛰는 순간.

“윽!”

단발성의 신음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카펫 위로 구르는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이 강연장을 채웠다.

상황 파악할 겨를도 없었다.

턱수염이 윤수혁을 깔고 앉은 상황.

권창훈은 일단 발부터 휘둘렀다.

퍼억-

달려오던 힘 그대로 권창훈이 싸커킥을 날리듯 턱수염의 옆구리를 걷어찬 것이었다.

“미군은…… 으악!”

뭔가를 외치던 턱수염이 옆으로 나자빠지자, 권창훈이 재빠르게 어깨 관절을 꺾었다.

“이거 놔! 놓으라고!”

턱수염이 고함을 지르며 버둥댔다.

권창훈이 무릎으로 등짝을 내리찍을 새도 없이 사람들이 몰려들어 팔다리를 부여잡았고, 뒤통수를 밟았다.

완전하게 제압된 것이었다.

권창훈이 윤수혁을 본 건 그다음이었다.

“ㅇ, 의원님…….”

그의 입이 떨렸다.

피였다.

단추를 푼 스트라이프 정장 안의 흰색 와이셔츠에 피가 한가득 배어 있었다.

가슴팍을 만진 윤수혁의 손에도 피가 묻었다.

“이거 뭐야?!”

“의원님! 괜찮으십니까!”

“윤 의원, 뭐, 피, 피야!? 병원! 119! 119불러!”

그리고 소란이 번졌다.

턱수염의 등짝을 누르고, 어깨 관절을 꺾고 있던 권창훈은 윤수혁의 고갯짓에 입을 닫았다.

괜찮다는 의미.

마치 이 사건이 벌어질 것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했다.

피를 봐도 당황하지 않았고.

가쁘게 뛰는 맥박에 호흡을 고르던 권창훈은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연평도에, 영원호까지 겪으신 분이니…….’

해마다 굵직한 사건에 엮여서 고생했던 이가 바로 윤수혁이었다.

더구나 국가의 중대사를 다루는 원내 제1야당의 지도부.

이런 사건에 화들짝 놀라진 않으리라.

재수 없게도 이런 사건마다 얽히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당장은 상처가 심해 보이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사이, 가슴팍을 꾹 누른 윤수혁이 주위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윤수혁의 표정이 담담했다.

기자들의 질문이 소란보다 더 시끄러워질 때.

윤수혁은 119를 마중 나가기 위해 사람들과 함께 나갔고, 권창훈도 사복 경찰에게 턱수염을 인계하고 몸을 일으켰다.

툭툭 손을 털었는데, 권창훈이 벌겋게 변한 손아귀를 바라봤다.

얼얼한 것이었다.

얼마나 세게 잡고 있던 건지.

권창훈은 원래의 색으로 변하는 손바닥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기자의 질문에 급하게 윤수혁의 뒤를 따라 나갔다.

일단은 윤수혁의 곁에 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

가슴팍이 아릿했다.

욱신하는 통증에 그 순간이 다시금 떠올랐다.

원래라면 미 대사는 안면을 비롯해 손목과 팔부위 등 다섯 군데에 자상을 입게 될 예정이었다.

흉기는 칼날 길이 12.5cm의 과도.

그래서 대신 몸을 날렸다.

사시미칼이나 더 위험한 흉기였다면, 앞에서 경찰을 통해 미리 검문검색했으리라.

애초에 미국을 좋아하거나, 미 대사인 패터슨과 깊은 친분이 있어서 몸을 던진 게 아니었다.

이 일로 얻을 게 있었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 국민의 긍정적인 시선, 그리고 미 대사와의 개인적인 친분.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었다.

또한 우방국에서 대사가 피습을 당하게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얼마나 쪽팔린가?

앞으로 내 것이 될 나라.

그래서 몸을 던졌다.

해 볼만 하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그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나를 찌를 줄은 몰랐지만.

남을 위해서 언제든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 그런 정치인이 되어야 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래야만 일종의 ‘까방권’이라는 게 생길 테니까 뛰어든 것이었다.

그건 정치인이 가지기 힘든 것이었다.

물론 그런 이미지 말고도 미 대사와의 면담도 아주 좋았다.

그가 나를 찾아온 건 사고 직후, 응급실에서 자상 부위를 꿰매고 1인실에 있을 때였다.

사실 병실에서 쉴 정도는 아니었는데, 기자들을 위한 배포 자료 구성과 언론 응대, 존 패터슨 미 대사와의 대면 때문에 따로 병실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도 스케줄이 촘촘한 사람이니 따로 시간을 내지 않고 위로한다는 명분하에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통역은 없었다.

러시아 회화 공부하면서 영어도 같이 공부한 게 벌써 1년이 넘은 덕분이었다.

물론 매번 영어 공부하지도 못하고, 주마다 들여다봤기에 말은 짧았다.

인사도 그렇고, 대답도 그렇고.

“I met you when you were a member of the National Defense Commission, Mr. Yoon. (당신이 국방위원회 위원이었을 때 만났었죠, 미스터 윤.).”

그 말에는 짧게 ‘Yes.’라고만 답했다.

이어진 대답도 그랬다.

“I‘m okay.”

“Thank you.”

“You‘re welcome.”

이런 말들.

괜찮냐고, 덕분이라고 늘어놓는 물음에 이런 식으로 대꾸했었다.

말귀는 거의 알아듣지만, 공부가 부족하니.

이후 대화 끝 무렵에 나온 패터슨의 말에는 미소로 대답했다.

이게 내가 듣고 싶은 말이었다.

“I will never forget your kindness. I‘ll repay you Mr. Yoon.(당신의 친절을 잊지 않겠습니다. 보답할게요, 미스터 윤.).”

그리고 나온 명함.

패터슨의 개인 번호가 쓰인 사적인 연락처였다.

핫라인이라고 보면 될까?

“Feel free to contact me whenever you want.(원할 때는 언제든 연락하세요.).”

여자를 유혹하는 멘트 같기도 했지만, 대상이 다름 아닌 미 대사였다.

세상에 이런 인맥이 또 있으랴.

국방위에 있을 때도 공적인 연락처 말고는 개인적인 명함을 받지 못했는데, 이제야 받았다.

저절로 웃음이 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