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133화 (133/191)

# 133

41. 벌써 (2)

201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지만, 나는 국토위의 330회 임시회 마지막 상임위 회의에 참석했다.

오전 열 시가 갓 넘은 시각.

국토교통위원회의실에 위원정수 31명 중 24명의 위원들이 참석했고, 2명의 전문위원과 64명의 정부측 및 기타 참석자가 좌석을 채웠다.

의사일정은 1개의 폐지법률안과 15개의 일부개정안 상정 및 의결로 굉장히 짧은 일정이었다.

한 30분 걸릴까?

16개의 법 문항이 바뀌는 일이지만, 같은 법에서 문장을 추가하거나 수정한 것들이 대부분이라서 묶어서 심사할 수 있었다.

재건축초과이익 환수에 관한 법률은 1번부터 3번까지, 주택법은 4번부터 5번까지, 그 외에도 같은 일부개정법률안은 서로를 묶어서.

이후 한꺼번에 이의 없냐고 묻고, 없다고 하면 위원장이 곧장 가결을 선포했다.

그렇게 쉬운 일이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의원실에서 공청회를 열고 보좌진이 사방팔방을 뛰어다니며 만들었고, 국토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축조심사를 마친 뒤 3당 간사와 위원장의 합의까지 거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작 열 몇 개의 법안은 30분만 있으면 가결되곤 했다.

물론 반대 의견이 있음에도 묵살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있는 게 문제였지만.

다수를 위한 민주주의 체제니 뭘 어쩌랴?

억울하면 교섭단체에 소속 되고, 그 중에서도 원내 1당이 되며, 여당이 되어야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저마다의 의견을 피력했는데, 반대급부하고는 성격이 달랐다.

상임위 회의가 국회방송으로 생중계가 되다 보니, 의원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던지는 것이었다.

일종의 언론플레이.

비록 국회방송의 평균 시청률이 0.1퍼센트 이하라고 해도 기삿거리 한 줄 되기는 쉽기 때문이었다.

말이라도 많이 하면 친한 기자가 한두 마디 건져 쓰기도 했고.

그래서 64명이나 참석한 정부측 관계자를 향해 물음을 던지거나 충고를 하기도 하면서 떠들어댔다.

나도 그런 언론플레이를 많이 했지만, 이런 건 별로였다.

능력도 없고, 효과도 없는 일이라서.

그래서 마뜩잖았다.

더구나 그런 유형의 말은 제출한 법률안 서식의 한 부분인 ‘제안이유 및 주요내용’에 실리는 말처럼 추상적이었다.

발의연월일부터 발의자, 의안번호, 신‧구조문대비표 따위가 적혀 있는 문서.

거기에 제안이유 및 주요내용이 있었고, 그건 마치 뜬구름 잡는 듯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읽어도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기업의 설립 이념 같은 느낌이랄까.

예컨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함, 혹은 안전에 대한 불안감이 증폭되어 사고 우려가 큰 상황임, 같은 문장.

지금 새정치당 소속의 여성 의원이 그랬다.

“……재건축을 통해 시장에서의 어떤 심리를 부양하겠다라는 거잖아요. 그런 심리를 부양하겠다, 이 의미가 뭔지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과연 이게 시장의 정상가격만 올라가는 것인지, 아니면 왜곡된 가격도 존재하게 되는 건지. 지금 이게 정부에 과연 도움이 되느냐 같은 문제도 중장기적으로 인지 해야 하고, 우리 장관님이나 국장님들도 이걸 진정성 있게 고민 해 보셔야 해요. 지금 시장 자체가 재건축 가격과 수익성의 향상을 바라지만, 임시방편으로 경기 부양만 바라고 반짝하면…….”

개소리가 아주 길었다. 요새 대통령도 저걸로 욕을 먹었는데.

어쨌든 지금 저 발언을 하는 새정치당의 여성 의원은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대국민 사과를 했었다.

원래라면 앞으로 2년 반 뒤에 벌어질 일.

쇼핑몰 여성 청소부를 비하하는 통화 녹취가 공개 됐었다.

기자가 사적인 통화를 공개한 것인데, 의원으로서는 아마도 뒤통수 맞았다고 느꼈을 터.

그러나 내가 봤을 때는 기자가 사적인 통화 내역까지 풀었다는 건 보통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사주를 받았을 수도 있겠지만, 아주 좃 같아서 그랬을 것 같았다.

더구나 정치부 기자가 아닌가?

국회와 상부상조 해야 하는 사람인데, 오죽하면 그랬을까?

지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저런 헛소리를 장관을 포함한 62명의 정부측 관계자에게 훈계하듯하고 있지 않은가?

기자도 몇 번이고 들었을 게 뻔히 보였다.

그 덕에 21대 총선에서는 공천 가능성이 없는 걸로 알았다.

총선이 진행되기 전에 죽어서 나도 그 뒷일은 모르지만, 어쨌든 가망이 없는 여자였다.

그렇게 간사들이 나갔다가 들어오고, 괜히 언성을 높이며 말다툼까지 했다.

한 두 시간 즈음 됐을까?

드디어 국토위 위원장이 법률안 심사가 끝났음을 알렸다.

국토부 장관이 나와서 지적 사항과 제시한 대안을 언급하며, 하위법령 정비와 법령 운영의 목표를 말하고, 꾸벅 허리를 숙이며 감사하다고 매듭지었다.

12시가 조금 넘은 시각.

배가 고픈지 위원장이 꼬리 물듯 얼른 목소리를 냈다.

“국토교통부 장관님 수고하셨습니다. 이상으로 오늘 예정된 의사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여러 위원님들, 그리고 국토부장관과 산하 공공기관장을 비롯한 관계자 여러분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산회를 선포합니다.”

땅, 땅, 땅.

바쁜 타봉 뒤에 위원장을 비롯한 의원들, 정부측 관계자들이 일어나 서로 인사를 나눴다.

그렇게 2014년의 국회 일정이 평범하게 마무리 됐다.

물론 본회의가 한 차례 남았고 크리스마스며 각종 송년회, 망년회와 온갖 모임이 수두룩 빽빽했지만.

크리스마스라이브라서 그런지, 아니면 오늘 오후에 쉬기로 해서 그런 건지.

마음이 좀 풀렸다.

더구나 국회에도 이래저래 싸울 만한 것도 없고, 적당히 대립하는 게 전부여서 더 그런 것 같았다.

***

그날 저녁.

윤수혁은 장인인 안드레 한의 집으로 향했다.

식사 자리에 초대한 것이었는데, 윤수혁의 친모와 친부까지 오기로 해서 준비하는 음식이 다양한 데다가 양까지 많았다.

그것도 장모인 율리아가 직접 만든 것들.

주방으로 가서 율리아에게 인사를 올리려던 윤수혁은 낯선 광경에 주춤했다.

인덕션 위의 두부찌개와 직접 떠낸 방어회, 각종 나물무침에 손수 뭉쳐서 굽는 고기산적까지.

가히 한정식 메뉴가 아닌가?

“와…….”

윤수혁이 놀란 눈을 하자, 율리아의 곁으로 갔던 한사랑이 웃었다.

“많이 신기해요?”

윤수혁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 들어서 가장 놀란 거 같은데…… 와, 정말 맛있어 보입니다, 장모님.”

“고마워, 사위.”

율리아의 능숙한 한국어 발음에 윤수혁이 꾸벅 허리를 숙인 뒤 식탁에 앉았다.

나중에 도착한 윤수혁의 친모 김을자와 친부 윤동현도 마찬가지였다.

윤수혁과 같은 전철을 밟았다.

안드레 한의 환대에 웃으며 들어오다가, 주방에 놓인 6인용 식탁에서 입을 떡 벌리고 놀라는 것이었다.

크리스마스라는 기념일에 러시아 장모가 해 주는 한국식 요리.

러시아 음식이나 흔한 빵조각도 하나 없었다.

겉옷만 벗은 김을자가 식탁에 놓이는 음식과 안드레 한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어머, 안사돈 너무 힘들겠네. 저라도 좀 도와드릴게요, 찬 내올 게…….”

“괜찮습니다, 안사람이 요리에 취미가 있어서 학원도 다니고 그래서 일부러 혼자 했어요, 작년에는 한식 자격증도 땄습니다.”

안드레 한이 웃으며 말하자, 김을자가 호들갑을 떨면서 자리에 앉았다.

윤동현도 과한 차림에 놀랐는지,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다음에는 저희가 자리 마련하겠습니다. 너무 대접이 감사해서…….”

“괜찮습니다, 사돈어른.”

안드레 한의 인사에 윤동현이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고, 칭찬을 늘어놓던 김을자는 결국 주방에 들어가 율리아를 보조했다.

그렇게 대리석 식탁에 각종 음식이 올라오고, 맥주까지 한 순배 돌았다.

회와 고기, 찌개, 각종 반찬과 밥이 바닥을 드러내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대략 한 시간.

이런저런 덕담을 주고받으며 얘기를 나눈 다음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윤수혁과 안드레 한은 커피잔을 하나씩 들고 테라스로 향했다.

외부창이 닫혀 있지만, 찬 기온이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공간.

거실로 향하는 문을 닫고, 안드레한이 조심스레 목소리를 냈다.

“전에 러시아 투자 건 준비가 다 됐다고 합니다.”

장인이 하기에는 어색한 존댓말에 보고하는 듯한 말투.

식탁에서 하던 반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윤수혁도 이상한 게 없다는 듯 태연하게 대꾸했다.

“투자 자료 있습니까?”

“네, 요청해서 팩스로 받아 뒀습니다. 최초 투자금 300만 달러, 추가 예정액이 550만 달러 정도로 추산됩니다.”

“거의 100억이네요.”

“그렇습니다.”

안드레 한은 계속해서 존댓말을 썼고, 조심스런 태도를 취했다.

윤수혁이 사위임에도, 남들 앞에서는 편하게 말을 하면서도, 맥주까지 마셔서 얼굴이 불그스레해졌음에도 선을 넘지 않는 것이었다.

윤수혁의 위치와 재산 때문에 그런 것만이 아니었다.

바로 윤수혁이라는 사람 자체가 이유였다.

안드레 한이 느끼는 윤수혁은 일반인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직업을 글자로 적는 것처럼, 재산을 수치화하는 것처럼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니었지만.

윤수혁은 특별했다.

안드레 한은 그렇게 믿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고, 권력과 재산 같은 것이 그 사람의 힘이 된다는 것하고는 별개였다.

미신을 믿고, 종교를 가진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고.

일종의 직감.

윤수혁을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낀 그 감정이 점점 확고해져서, 보통 사람이 아님을 확신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사랑이라는 연결고리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두렵기도 했었고.

이윽고 안드레 한이 보고를 이어 갔다.

“그리고 의원님의 상임위가 달라져서 국방시설 사찰과 어학장교 추가 파견 건은 킵한다고 알렸습니다.”

“그건 괜찮은 소식이네요. 그럼 행사나 하나 하죠, 서울에서.”

“행사라고 하면…….”

“문화 교류나 대학 간의 교류로 추진해 보시죠. 단발성 행사도 좋고요.”

“알겠습니다.”

“지역은 강북구에 한 해서 하는 겁니다.”

덧붙인 ‘강북구’라는 단어에 안드레 한이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재선을 위한 준비였다.

“……저 그런데 의원님.”

“예.”

바깥을 내다보며 커피를 마시려던 윤수혁이 멈칫했다.

안드레 한이 그만큼 진지한 어조로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윤수혁이 내심 긴장한 사이.

“외람되지만, 아이는 언제 즈음……?”

“아…….”

장인으로서의 질문에 윤수혁이 멈칫했다.

“……기간을 좀 맞추고 있었습니다.”

“기간이라면……?”

“재선 기간 즈음이 어떤가 싶어서요.”

“아, 그럼 16년 4월에 출산을 염두에 두신 겁니까?”

“예, 괜히 일찍 낳으면 한 살배기 아이 안고 유세장 돌아야 하는데…… 차라리 조리원에서 쉬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저도 유세하면서 임신했고, 출산했다고 자랑할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라고 생각했고…….”

윤수혁의 말꼬리가 흐려지자 안드레 한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임신 기간을 계산했다.

임신 기간은 약 9개월, 16년 4월에 출산하기 위해서는 15년 7월에 임신을 해야 했다.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지만, 시험관 아기 시술이 있으므로 원하는 때에 아이를 가질 가능성이 높았다.

나중에 크다가 조기 출산할 수도 있지만, 그건 재수 없는 소리이므로 안드레 한은 고개를 흔들어서 잡념을 떨쳐 냈다.

윤수혁의 자식이지만, 자신의 손주이기도 했으니까.

아직 생기지도 않은 아기를 떠올리면서 안드레 한이 조심스레 목소리를 냈다.

“혹시 아기 이름은…….”

“족보 따라서 돌림자를 쓸 생각이 있기도 한데, 아직 정하진 않았습니다. 아니면 장인어른께선 생각해 두신 게 있으십니까?”

그 말에 안드레 한이 엷게 웃었다.

“그러면 아들 이름은…….”

그렇게 망설이듯 나온 이름만 열 개가 넘었다.

아직 딸도 언급하지 않은 상황.

듣고 있던 윤수혁이 웃고 말았다.

격투 선수 같은 얼굴과 체구를 가진 안드레 한이 손주바보인 할아버지처럼 싱글벙글하고 있던 탓이었다.

그러던 윤수혁의 웃음은 이윽고 쓴웃음이 되고 말았다.

안드레 한이 할아버지라면, 자신은 아버지이기 때문이었다.

전생에는 겪지 못한 일.

그리고 막연하게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나아야 한다고만 했기에 막상 깊게 생각하지 못한 것.

‘아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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