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40. 후반기 (3)
며칠 뒤.
서울 중구 치바그룹 본사.
대외협력단 사장실에서 한 차례 소란이 일었다.
주명규가 소리를 내지른 것이었다.
스마트폰을 들고 있던 주명규가 붉어진 얼굴로 다시 언성을 높였다.
“정신 차려! 이 개새끼야!”
- …….
“그딴 정보나 전달하라고 대관팀 시켜 준 줄 알아?! 의원들 구워삶는 게 네 일이야!”
- 죄송합니다.
“죄송? 이 병신이 아직도 주둥이를 나불대네. 가서 일 하라고! 증인 명단에서 회장님 이름 빼, 이 새끼야!”
- 아, 알겠습니다.
뚝.
전화를 끊은 주명규가 응어리진 화를 토하듯 욕설을 읊조렸다.
걸려온 전화는 국토교통위원회 국정감사 출석 명단에 치바그룹 회장 천기윤이 포함되었음을 알리는 소식이었다.
그룹 오너 일가를 비롯해 사장단이 막고자 했던 회장의 출석.
그게 코앞까지 당도했다.
아직 국정감사 증인 등 채택의 건이 논의되는 국토위 회의까지 시간이 남긴 했지만, 해 봤자 고작 며칠.
그 안에 재협의를 이끌어 내지 못한다면 회장 앞으로 국정감사 출석 통보서가 오게 될 것이었다.
피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힘들었다.
만약 국토위의 부름을 거부한다면 잠실 한 가운데 짓는 초고층 빌딩, 치바월드타워의 건설이 난항을 겪을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국토위가 관리하는 항목 중에 하나가 바로 건설이었다.
부지 선정부터 착공, 준공의 과정까지 모두.
그 말인즉슨 단순히 하도급을 문제 삼는 것 이상으로 안전, 기술, 자재, 인력 등등 각 부문별로 감사관을 보내 규정에서 벗어난 게 없는지 매일 같이 괴롭힐 수 있다는 뜻이었다.
주명규는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치바월드타워를 생각하니, 국토위의 출석 요구를 무시하기가 더 힘들어졌다.
치바월드타워 가 어떤 건물인가?
국내 최고 높이의 빌딩으로 초호화 객실과 사무실 등을 구비하고, 그룹의 회장실을 비롯해서 주요 사장실의 이전까지 예정된 곳.
그게 바로 치바월드타워였다.
실적 이전의 상징성, 자존심 따위가 얽힌 문제.
그것도 일반인과 다른, 지독한 심성을 가진 재벌가의 일이었다.
만일 치바월드타워의 건설에 차질이 생기거나 준공 기일이 지연되는 등의 문제가 생긴다면 사장단이고, 실무자고 간에 모든 관계자는 중징계 이상의 벌을 받게 될 게 뻔했다.
천기윤 회장의 수족으로서 부회장직이 내정된 자신도 마찬가지였고.
이윽고 주명규가 말아 쥐고 있던 스마트폰을 바라봤다.
이 불편한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 있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이가 떠오른 것이었다.
그의 손이 얼른 연락처를 뒤졌다.
[행복한국당 최고위원/국토위 윤수혁]
화면에 뜬 글자를 보던 주명규가 통화버튼을 눌렀다.
부회장이자 재벌 3세인 천의찬과 마주친 이후로 처음 하는 전화였다.
긴 통화음이 울린 뒤.
윤수혁의 목소리가 스마트폰 스피커를 넘어왔다.
- 여보세요.
“저 주명규입니다. 지금 통화 가능하십니까?”
- 지금 실무자 교육 중이라 바쁩니다. 저번처럼 만날 약속을 하시죠?
윤수혁의 담담한 물음에 인상을 쓰고 있던 주명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럼 급한 용건이라 오늘…….”
- 아, 제가 야간까지 할 일이 있어서요. 19일부터 될 거 같네요.”
“19일…….”
날짜를 읊조리던 주명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전날인 8월 18일이 국토위의 1차 회의가 예정되어 있고, 그날 국정감사 증인 등 채택의 건이 의결될 예정이었다.
이후 위원장의 재량 하에 간사 간에 재합의가 가능하지만, 회의 이후에 변동되는 사항은 아주 극소수였다.
한마디로 19일은 너무 늦었다.
“의원님, 아주 급한 건입니다. 그 전에 봬야 될 문제인데…….”
- 그럼 잠깐 통화하죠, 말씀하세요.
“네, 다름이 아니고…… 오늘 국토위 간사 간에 증인 명단을 협의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거기 회장님 성함까지 들어가서…….”
- 그게 저랑 무슨 상관입니까?
“아니, 분명 며칠 전에 협의를 도와주시기로…….”
- 제가요?
모른다는 반문.
말이 끊긴 주명규는 며칠 전 대면했던 기억을 되새김질했다.
1, 2, 3지망이라는 말을 써가면서 윤수혁이 자리를 뜰 때, 치바그룹 3세 천의찬이 들어왔었다.
그 뒤 조금은 불편할 수 있는 시선과 말투, 행동을 보였지만, 그게 다였다.
더 엇나갈 일은 없었다.
윤수혁이 나갈 때, 2지망까지 가면 큰일 나겠습니다, 라고 하긴 했지만.
그것도 다행이었다.
최후에도 회장의 이름은 빠진다는 의미가 아닌가?
부회장의 이름이 들어가는 것까지는 대비하라는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윤수혁이 보이는 태도는 그게 아니었다.
조금도 연관 없다는 말투.
“의, 의원님. 그때 분명 2지망까지 언급을…….”
- 제가 도와드린다고 한 적은 없었던 거 같은데.
“의원님! 월요회 회칙까지 언급하지 않으려 했는데…… 같은 회원끼리 좀 도와주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의 말대로 월요회는 작은 사모임이지만, 명문화하길 좋아하는 고위직이 여럿 있어서 회칙도 있었다.
일명 오계명(五誡命).
그중 하나가 ‘월요회의 존속을 위해 상호 간에 협조한다.’였다.
주명규가 인상을 찌푸리는 사이.
- 월요회가 치바 회장이랑 무슨 상관입니까?
“의원님!”
- 아, 저 이만 바빠서 끊습니다.
“이러시면 저도 박 수석이랑 얘기하는 수밖에…….”
- 그러세요, 끊습니다.
조금의 여지도 없이 전화가 끊어졌다.
통화 종료된 스마트폰 화면을 보던 주명규가 얼른 손을 움직였다.
스마트폰 연락처를 뒤져 문자를 보냈고, 인터폰을 눌러 비서진과 대관팀을 호출했다.
윤수혁에 대한 분노 이전에 일 처리를 해야 한다는 샐러리맨의 습관이 그를 움직인 것이었다.
일단은 대외협력단 총괄사장으로서의 직무를 다 해야 했다.
물론 화가 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오히려 몇 시간 뒤에는 분노가 더해졌다.
국토위 증인 선정에 관한 내막을 알아버린 탓이었다.
‘최고위원회의에서 윤수혁 의원과 조성현 당대표가 회장님의 국감 출석을 주장했다고 들었습니다.’
재차 확인을 요구하자 올라온 대관팀의 보고.
주명규는 곧장 박우식 정무수석에게 월요회의 소집을 요청했다.
***
“미안합니다, 과장님. 저 때문에 고생이 많으시네요.”
내 사과에 국토부에서 실무자 교육을 위해 파견 나온 김 과장이 손을 내저었다.
“아휴, 아닙니다. 이게 제 일 아니겠습니까?”
이번 교육을 대가로 그의 모교에 방문하기로 약속해서 그런지, 김 과장이 신나서 나를 가르쳤다.
뇌물을 주거나 다른 특혜를 주기 힘들어서 차선을 선택한 것이었다.
김 과장의 나이가 이제 마흔,으로 슬슬 명예욕이 오를 때여서 선택한 방법이었다.
자존심 세워 주는 악수나 사진 촬영.
그 정도면 중소 단체장들 알아서들 넙죽 기는데, 하물며 공무원이야.
그렇게 김 과장한테 국토위와 예산결산기금심사소위원회 관련 교육을 받는 사이.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들어오세요.”
맞은편에 앉아 있던 김 과장이 눈치를 보며 움찔 하길래 앉아 있으라고 했는데.
함께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조성현 당대표가 들어오는 것이었다.
“윤 최고, 시간 좀 됩니까?”
“예, 들어오세요.”
내 대답에 김 과장이 눈치껏 자리를 비켰고, 조 대표가 웃는 낯으로 들어섰다.
“바쁜 데 미안해요, 잠깐 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저를 오라고 하셔도 되는데.”
“하하, 국정을 위해 이렇게 애쓰는 분을 내가 오라가라 할 수 있겠어요?”
그러면서 응대용 테이블 위에 쌓여 있는 교육용 자료로 눈짓했다.
이게 무슨 상황일까?
갑자기 찾아와선 대뜸 칭찬이라니.
“일단 앉으십시오, 대표님. 차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윤 최고도 앉아 봐요.”
“예, 그럼…….”
앉아서 응대용 테이블을 대강 정리하는데, 조 대표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깔렸다.
“천 회장을 증인으로 출석시켜야 한다고 했을 때만 해도…….”
갑작스런 말.
그것도 며칠 전에 있었던 최고위원회 얘기였다.
치우는 걸 멈추고 바라봤다.
“국감스타가 되고 싶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곳에서 청탁이라도 받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 맞는 얘기였다.
국감스타도 되고 싶고, 다른 기업의 청탁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내게 이익이었다.
어차피 나자빠질 치바그룹 대신에 다른 것을 취하자는 계산이었다.
그래서 최고위원회의 자리에서 상임위별 스탠스를 논의할 때, 아예 치바그룹의 천 회장을 증인으로 출석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물론 조 대표도 책임이 있다면 오너 일가라도 출석시켜야 한다고 해서 말이 통했고.
그런데 왜 그걸 당일이 아니라 며칠 뒤인 지금 말하는 걸까?
칭찬하자고 찾아온 것은 아닐 텐데.
지난번에 칼을 뽑아야 할 수도 있다고, 홀로 마음 먹었던 게 떠올랐다.
설마 그건가?
하지만 무슨 역심이라도 품은 것치고는 시선이 너무 따듯했다.
아니, 대견한 친구라도 보는 듯했는데.
조 대표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랬는데……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나도 윤 최고처럼 할 수 없는데 그런 의심이 가당찮은지, 말입니다.”
짧은 한숨 뒤에 조 대표가 나를 바라봤다.
“내가 윤 최고였다면…….”
정리도 멈춘 채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흐린 말꼬리 뒤로 다시 목소리가 났다.
“과연 지금까지의 업적을 이룩해 낼 수 있었을까?”
가벼운 칭찬의 수준이 아니었다. 과찬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이건 결단이었다.
“아니, 못했을 겁니다.”
굳은 자세로 여러 가지 상황을 염두에 둔 채 듣고만 있었는데, 조 대표가 상체를 기울여 왔다.
그의 손도 제스처를 취하듯 앞으로 나왔다.
“내 한 몸 던져서 사람을 구해 내고, 수십, 수백억을 기부하고, 부정한 동료선배 의원을 고발하고, 기업에도 덤벼드는 건…… 최고위원이 감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나도 전당대회 후보 때에나 싸우려고 들었지, 당대표가 돼서는 눈치나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미래를 알기에, 충분히 계산적으로 움직였을 뿐인 과거.
그가 그 끝에 말꼬리를 흐렸다
마치 고백할 것 같은 타이밍.
만일 여자라면 이 때에 결혼하자고 하지 않을까?
헛웃음이 나올 무렵, 조 대표가 입을 열었다.
“나하고 같이 합시다, 아니. 나보다는 윤 최고가 잘난 편이니, 나를 쓰세요.”
“예?”
“힘이 닿는 데까지, 내가 윤 최고를 돕겠습니다. 앞으로 같이 합시다.”
갑작스러웠지만, 마냥 어색한 일은 아니었다.
비슷한 사람이 많았다.
나를 쓰고 싶어 하는 사람, 혹은 내게 쓰이고 싶은 이들.
물론 조 대표는 그들보다 급이 높기도 했고,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훅 찔러들어와서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그도 그 나름대로 사정이 있울 터.
나는 조 대표의 진중한 시선을 받으면서 목소리를 깔았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말씀하세요.”
“그동안 저를 의심하신 걸로 아는데…….”
“그랬지요.”
“그럼 앞으로는 의심 없이, 믿는다는 말씀이십니까?”
조 대표의 성정을 고려해서 묻는 것이었다.
당대표가 되면서 이런저런 장신구가 많이 달리고, 칼집에 칼을 넣어 두는 시간이 늘어났지만, 그는 태생적으로 칼잡이었다.
까딱 잘못하면 아군도 다치게 할 사람.
질 게 뻔한 전당대회에 돈을 날려 가면서 출마할 정도면 신념이 대단하다는 것이고, 그 신념이 어긋나면 내게 칼끝을 겨눌 수도 있어서 물은 것인데.
조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은 이미 충분히 했습니다. 윤 최고를 만났을 때부터 쭉…… 가끔 달리보이기도 했지만, 이제 더 이상은 없을 겁니다. 당신이 남들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가 결연하게 대답했다.
충분히 믿을 만했다. 다른 의원이면 몰라도, 조 대표는 그럴 가치가 있었다.
더구나 그는 내가 같이 가기로 마음 먹었던 사람 중에 하나.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모른 척, 진중한 척 짓던 표정을 풀었다.
“좋습니다, 대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