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39. 한여름날의 선거 (2)
국회에는 보좌관 10년이면 초선 의원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만약 십수 년동안 의원 여럿을 보좌하고, 상임위만 스무 번을 넘게 바꾸었다면?
대기업에서 대관팀 임원으로 스카우트해 가거나 기초의원, 혹은 보좌하던 의원의 정치 진로에 맞게 더 높은 급수의 공무원 직함을 받는 게 일반적이었다.
의원이 다음 총선에서 떨어지면 잠시 다른 기관에 가기도 했다.
능력이 있다는 조건하에.
바로 박민표가 그런 사람이었다.
경력만 십수 년.
나이는 마흔.
종종 대기업 대관팀에서 연락을 해 왔으나, 그의 꿈은 그게 아니었다.
대기업 대관팀은 정년이 짧았다.
정치는 길었고.
물론 보좌관의 정치라는 게 보필하는 상관이 성공해야 하는 것이었지만.
박민표가 하려는 것도, 바라는 건 그런 것이었다.
초선 의원부터 시작해 대통령이 된 ‘영감‘을 모시는 것.
상상만 해도 전율이 이는 일이 아닌가?
물론 꿈이라서 현실과 다르긴 했다.
모시는 영감이 이계진이었다.
간신히 초선 비례나 된 무능력한 노인.
결국 박민표는 관계자의 서포트를 받아 기초의원에 출마할 생각을 했었다.
나중에 별정직이든 선출직이든 뭐든 할 수 있었고, 그러다보면 더 높은 시도지사나 국회의원이 될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면 청와대 고위 공무원이 되거나.
그래서 박민표는 12년 초순에 아는 의원과 기초의원 업계 관계자에게 연락을 했었다.
자리 하나 마련해 달라고.
당장 기초의원 출마는 힘든 일이니 미리 들어갈 길을 닦으려는 생각이었다.
그래야 14년 초 기초의원 선거에서 공천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게 잘 되면 기초단체장에 도전해서 당선될 여지도 있는 것이었고.
자신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때, 윤수혁이 왔었다.
어느 한우 전문점에서.
숯불 위로 고기를 뒤적이면서 ‘같이 일합시다.’라고 말한 것이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당시에는 어차피 기초의원 선거까지 2년은 국회에서 있어야 하니 윤수혁과 일하기로 마음먹은 게 전부였다.
하지만 어느 샌가 바뀌었다.
원래 나가려던 6.4지방 선거가 내일 이었지만, 더 이상은 상관없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길은 기초의원이 아니라, 윤수혁에게 있었다.
보좌할 가치가 있었다.
윤수혁을 보필하는 것만으로도 바빴고, 열기가 끓어 올랐다.
앞으로 무엇을 할지, 어떻게 변할지, 얼마나 성공할지 감도 잡기 힘들었다.
윤수혁은 그의 생각보다도 대단했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지금 윤수혁이 가진 단순 권한만 놓고 봐도 당 내에 견줄만한 사람이 없었다.
최연소 국회의원, 최연소 최고위원, 공심위 특별위원까지…….
긴 생각 끝에 박민표가 눈앞의 구청장 후보, 김철순을 쳐다봤다.
윤수혁의 부친 윤동현을 통해서 선거운동 한 번 해 달라고 청탁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것도 청탁보다는 협박과 다름없는 방법으로.
박민표의 입이 열렸다.
“김철순 씨.”
쌀쌀한 말투에 앉아 있던 김철순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아, 네.”
“바쁘니까 요점만 말합니다. 잘 들어요.”
그 말에 김철순은 쌀쌀한 것 이상으로 감정이 차갑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그거 좀 압박했다고?’
김철순은 그렇게만 생각했다.
압박을 주긴 했지만, 말은 오히려 부드러웠기 때문이었다.
‘이렇게까지 구차하게 안하려고 했는데, 우리 옛 정도 있잖나?’
그 말에는 자극적인 단어도 없었다.
그저 유추할 수 있게끔 말한 게 전부였다.
회사 장부를 허위로 기재하고, 사비를 들여서 최종 금액만 어설프게 맞춘 것을 ‘옛 정‘으로 표현한 건 부드러운 편이었으니까.
물론 이게 언론을 탄다면, 공금 횡령, 운용 같은 자극적인 언어로 바뀌긴 할 터였다.
그 일이 벌어진 건 아직 10년도 되질 않았고, 회사는 여전히 건재했으며, 종이든 파일이든 증거는 뒤지면 나올 테니.
그래서 김철순이 윤동현에게 압박을 준 것이었다.
잘난 아들 생각하라는 뜻으로.
그런데 눈앞에 선 4급 보좌관 박민표의 태도는 생각보다도 너무나 냉랭했다.
청탁을 거부하는 태도 이상으로 반감을 갖는 모습이었다.
움찔했던 김철순도 얼굴을 굳혔다.
거부하려면 돈이 됐든 뭐든 들고 와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은연중에 떠오른 탓이었다.
어디까지나 치부가 있는 건 윤동현이었고, 그의 아들인 윤수혁이었으니까.
이윽고 박민표의 입이 열렸다.
“첫째, 후보 사퇴하고 하수처리장 공사 중 뇌물수수로 수사 받아서 기소유예 처분 받는다.”
갑작스런 말.
김철순이 화들짝 놀라서 말을 뱉었다.
“뭐요?!”
“말 끊지 말고 다 들어, 확…….”
손을 반쯤 들던 박민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 의원님이 스무스하게 넘어가라고 하셔서 이렇게 하는 거야, 감사하게 생각해.”
“아니, 이게 지금…….”
“쓰읍, 아가리 잠그고 들어. 둘째는 수갑 먼저 차고 경찰서로 직행하는 건데, 재판 질질 끌다가 결국 추징금 물고 징역까지 사는 거야.”
말을 마친 박민표가 찌푸린 표정으로 고갯짓을 했다.
“골라봐, 이 새끼야.”
김철순의 눈가가 바르르 떨렸다.
방금 언급한 하수처리장 공사 뇌물수수가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걸 어디서 들어서…….’
속으로 이를 갈던 김철순이 놀란 목소리를 냈다.
“증거! 증거 있나?!”
“꼭 죄 지은 새끼들이 증거 타령하더라.”
“무, 무슨 죄?!”
김철순은 박민표가 반말에다가 욕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너 같은 새끼가 하수처리장 공사하면서 뇌물 먹은 걸 어떻게 알겠냐? 전화 몇 통 돌리면 다 나오니까 안 거야.”
“……전화?”
“왜, 아닌 거 같아? 더 말해 줄까?”
김철순의 숨이 꼴깍 넘어갔다.
‘더‘라는 말 때문이었다.
김철순은 하수처리장 공사 말고도 각종 토목 사업 이권에 개입해서 리베이트를 꽤 받았었다.
대부분 관례였고, 그 중에는 고위공무원들과 나눠먹은 것도 있었다.
그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기껏해야 1, 200만 원하는 시의원 월급으로 의정 활동은커녕, 생활하기도 벅찼기 때문이었다.
회사 퇴직금도 이리저리 쓰는 바람에 동이 나니, 뇌물을 받아야만 했다.
더구나 면전에서 돈을 주는데 어찌 거절하랴?
이윽고 박민표의 입이 열렸다.
“자, 의원님 지시대로 스무스하게 설명을 해 줄게. 내가 거쳐 간 상임위가 스무 개가 넘어. 그럼 소관부처 공무원들하고 인사하고, 안면 트고, 술 먹는단 말이야? 그러다보면 행정부 포함해서 시청이고 구청이고 다 내 손바닥 안이라는 소리야. 알겠어?”
과장된 말이었다.
윤수혁의 이름을 빌리면 가능하지만, 일개 보좌관이 나라 행정부나 시청 같은 기관을 주무를 순 없었다.
그러나 김철순은 말의 진위여부를 분간할 정신이 아니었다.
국회의원 보좌관이 이렇게 강하게 압박하는 게 처음인 데다가, 입에서 나온 뇌물수수도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의정 활동하면서 서로 소리치고 비난하긴 해도, 이런 적은 없었다.
다시금 박민표가 삿대질을 했다.
“너 같이 좃도 모르는 새끼들 잡아넣는 건 일도 아니야, 어디 비빌 데가 없어서 감히 의원님한테 비벼?!”
손찌검하듯 휙 올라갔던 손이 다시 허리로 내려오고, 박민표가 화를 가라앉히듯 길게 숨을 뱉었다.
“후…… 골라, 첫째하고 둘째.”
“저, 저기…….”
김철순이 일단 목소리를 냈다.
무엇을 덥석 골라야 하는지 판단이 안 섰기 때문이었다.
물론 징역과 추징금이라는 글자보다야 앞선 선택지가 나았지만, 후보 사퇴도 말만큼 쉬운 게 아니었다.
후보에서 물러난다면 위에 줄을 대준 관계자와 허락한 국회의원, 지역시도당과 중앙당의 눈 밖에 날 게 뻔한 일이었다.
한마디로 정치인생 끝나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김철순의 머릿속에 윤동현의 이름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가 윤수혁의 아버지니까 이 상황을 타계할 수 있을 것이었다.
청탁 대신에 없던 일로 무마 하는 건 쉽겠지.
그가 얼른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일단 전화라도…….”
“이런 씨발! 기회를 줘도 대가리를 굴려? 그냥 둘째로 가, 이 새끼야!”
벌컥 화를 낸 박민표가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번호를 누르는 사이.
김철순은 둘째라는 말에 움찔했다.
일단 수갑을 차는 걸로 시작해서 징역을 사는 선택지였다.
“처, 첫째!”
시간을 벌어야 하니까 급하게 말을 뱉었다.
“첫째로 하겠소.”
당장 수갑을 찰 순 없었다.
김철순이 이내 눈치를 살피는데, 앞의 테이블에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고작 한 장짜리에 불과했지만, 김철순의 얼굴이 굳고 말았다.
[별지 제15호 서식]
[후보자 사퇴신고서]
심지어 형식도 간략해서 보기 편한 6.4지방선거 사퇴신고서 서식이었다.
종이에서 시선을 뗀 김철순이 박민표를 쳐다봤다.
“저 그래도…… 내가 한 말도 악의가 있는 건 아니었는데, 이건 경우가…….”
“미친놈, 국회의원 협박해놓고 경우를 따져?”
그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존댓말이 급하게 튀어나왔다.
“혀, 협박이라니요. 아닙니다, 저는 사실만 말한 거고, 협박한 적도 없…….”
“사실? 누가 그래?”
방금처럼 위협적인 어감이 아니라 칼처럼 예리한 말투였다.
차라리 욕이 나았다.
김철순이 덜덜 떨면서도 가만히 있자, 박민표가 말을 이었다.
“아니면 주영진 의원을 최고위원 회의에 호출할까? 당신 우리 의원님 위치가 어느 정돈지 몰라?”
김철순이 펄쩍 뛰었다.
가장 중요한 인맥이 바로 주영진 의원이었다.
이번 구청장 공천도 그 덕분에 얻어 낸 것이었고.
박민표가 마침표를 찍듯 나직하게 물었다.
“주 의원한테 수갑 찬 꼴 보여 줄래? 아니면 조용히 사퇴할래?”
***
6월 4일, 늦은 밤.
거실 소파에 기대어 앉아 선거 개표 방송을 보는데, 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듯 보였다.
애초에 양강구도로 진행되었던 전생과 다르게 당이 4개나 있으니 차이가 있겠지만, 상황이 상당히 달랐다.
“수혁 씨가 유리한 거 맞죠?”
어느새 곁에 다가온 한사랑의 말처럼 우리 당이 유리했다.
“네, 그래요.”
“좋은가 봐요?”
“당연히 좋죠, 우리가 이기는데.”
“푸흐, 하루에 와이셔츠 세 장씩 갈아입으면서 그 고생을 했는데요?”
“그래서 더 좋아요.”
할로겐 조명과 TV만 켜진 어둑한 거실에서 한사랑이 내 품에 안겨 왔다.
더더욱 기분이 좋았다.
한사랑이 안겨 와서 그렇기도 했으나, 개표 방송이 한사랑이 알아볼 정도로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17개 광역자치단체장 개표 결과 중 접전지역은 고작 3개.
나머지 14개 중 우리 당에게 유리한 곳이 무려 6개였다.
나머지 8개를 3당이 갈라먹는 상황.
한마디로 행복한국당이 최고였고, 나머지는 떨거지 수준에 불과했다.
개표가 늦긴 하지만, 변함없이 이대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바뀌어도 시도 한 곳 정도.
교육감 선거도 성적이 훌륭했다.
전생에선 17석 중 보수가 고작 2석 밖에 따내지 못했는데, 벌써 6곳 정도가 승리 예측이었다.
성공적이었다.
나머지 시의원 같은 기초의원은 볼 것도 없이 우리 당이 압승이었고.
웃음이 났다.
이건 내 승리이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의 힘이었고, 세(勢)였다.
내 고김을 받아서 출마한 사람이 적잖았기 때문이었다.
나하고 말을 섞은 후보자만 해도 백 명이 넘었고, 같이 식사한 사람도 수십 명이 넘었다.
그중 동료 의원이나 공심위 위원을 통해 내게 도움을 구한 사람까지 포함하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더구나 다음 달에는 재보궐 선거도 있었다.
그것도 의원석만 열다섯 개라서 미니 총선이라고 불릴 정도로 사이즈가 큰 선거.
지방선거 직후라서 광역단체장이나 기초단체장에 지원하겠다고 의원을 그만둔 사람들이 꽤 많은 탓이었는데, 거기에는 내 외삼촌과 손 지검장의 아버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정도면 우리 당을 휘어잡는 것도 가능했다.
아예 계파를 만들 수도 있었다.
웃음이 쉬이 사라지질 않았다.
윤수혁계라니.
애초에 우리 당은 초계파(超系派)를 주창한 조 대표 때문에 당에 뚜렷한 파벌이 없던 상황이었다.
물론 기존에 있던 친MB계가 아직 잔존했고, 굵직한 상임위 위원장들이 힘을 쓰긴 했지만.
대놓고 계파 흉내를 내는 이들은 없었다.
그 와중에 드디어 내 계파가 생기는 것이었다.
물론 어느 조직의 보스처럼 앞장설 생각은 아니었고, 지금처럼 반 발자국 정도 뒤에 물러나 있을 생각이었다.
괜히 조 대표와 부딪힐 것도 아니었으니까.
나는 아닌 척하면서 해먹을 만큼 해먹을 생각이었다.
지금 보고 있자니 뭐가 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지사와 시장 후보자 중에 내 사람이 적잖았다.
그 밑에 있는 구청장이나 기초의원은 말할 것도 없었고.
아주 굿 스타트였다.
그럼 이제 다음 달의 미니 총선을 대비해야 했다.
외삼촌한테 국회 사무총장 시켜 주겠다고 약속했으니, 이뤄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다 웃음소리까지 났는지, 품에 안겨 있던 한사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좋아요?”
아무렴, 좋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