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124화 (124/191)

# 124

39. 한여름날의 선거 (1)

전생의 국회에서 여야가 합심하여 만들었던 영원호 특조위는 없었다.

대신에 정부가 일을 해결했다.

영원호를 운항했던 영광해운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고, 당시 우선 탈출한 선장을 비롯해 항해사를 일부 구속했으며, 해경과 중대본 소속 공무원 몇 명을 징계성 인사조치 했다.

탑승객들의 피해 보상에 대한 얘기가 있긴 했으나, 내가 우선 지불한 걸로 어느 정도 불씨를 잠재웠다.

그다음이 진짜였다.

곧 5월.

지방선거 후보자의 공천과 등록, 선거 운동이 있는 달이었다.

지방시도당에서 공직후보자추천심사위원회, 일명 공심위에서 공천 후보자를 선별하여 중앙당으로 보내면 중앙당의 공심위에서는 후보자의 공천을 검토하게 되어 있다.

물론 전략 공천이 아닌 이상, 대의원과 당원, 여론조사 같은 경선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었고.

그중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중앙당의 공심위 특별위원이라는 직책을 맡았다는 점이었다.

원래는 없는 자리.

당헌‧당규에도 기재되지 않은 것이고 우리 당 역사에도 없는 것인데, 최고위원회 회의와 공심위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해서 공심위 특별위원이 임시직으로 만들어졌다.

목적은 하나였다.

우리 당의 언론플레이 수단.

윤수혁이라는 내 네임 밸류를 우리 당의 이미지 전환과 이번 선거의 승리에 써먹겠다는 것이었다.

조성현 당대표가 최고위원회의 뿐만 아니라, 번거로운 실무자 회의까지 가져가면서 만들어 낸 아이디어였다.

그것도 당헌‧당규에 맞게 만들어진 자리라서 공천을 위한 실권은 없었으나, 감시와 조언 등의 수단이 있어서 상관없었다.

그것도 내게는 실권이었다.

내가 공심위에 간섭하게 되는 순간부터, 공심위 위원들이 알아서 의견을 구해 왔다.

내가 누군가?

허울만 있는 과거의 빛바랜 스타가 아니었다.

외부 위원과 당내 위원 대다수가 웬만하면 내 눈치를 봐야만 했다.

굳이 안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지금의 나는 대권주자에 맞먹는 인지도를 가진 의원이었다.

조컨설팅의 조 대표는 선심성 공약 없이도 진보 우세지역에서 재선이 가능하다고 분석할 정도였다.

공약만 더해지면 유력이 아니라, 당선 확신을 예언했고.

무엇보다도 공심위에도 내 사람들이 있었다.

하여튼 그것 때문에 나도 갑작스럽게 일이 늘었다.

단순 업무뿐만 아니라, 이번 6.4 지방선거 관련해서 줄 서고 싶은 사람들의 전화가 하루에 백 통은 족히 걸려왔기 때문이었다.

이제 병실이 아니라, 바깥에서 제대로 일해야 됐다.

여기서는 한계가 있었다.

병실에서 환자 코스프레 하는 건 오히려 독이었다.

내 병실 얘기도 미디어에서는 한물 간 얘기로 취급되는 게 대부분이었고.

더구나 집에 안 가고 남아서 종종 침대로 올라오는 한사랑에게도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다.

나는 보조 책상에서 업무를 보던 박 보좌관을 불렀다.

“보좌관님.”

“네.”

“아무래도 일이 많아서 안 되겠는데요. 퇴원 일정 밟아주세요.”

“그럼 이틀만 더 있다가 퇴원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일이 좀 많은데, 괜찮겠어요?”

“바로 나가는 것보다는 검사 받고 의사와 협의를 거쳐서 나가는 그림이 낫지 않겠습니까?”

퇴원까지 짜 놓은 준비성에 웃음이 났다.

“요새 일 처리가 더 좋아진 것 같습니다.”

“같이 일 해 보셨으면서…… 저 원래 이만큼 했습니다. 전에 모시던 영감님들이 제 수준을 못 따라와서 그랬던 거죠.”

“흐흐, 저는 잘 따라 갑니까?”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까 제가 모시고 있었습니다.”

슬쩍 눈치를 본 그가 얼른 말을 이었다.

“제가 봤을 때는…… 아마 우리 의원님게서 역사를 새로 쓰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슨 역사요?”

은근히 묻자, 박 보좌관이 씨익 웃었다.

“제가 비서실장이 된다던가 뭐…… 그런 것도 역사 아니겠습니까? 흐흐.”

박 보좌관이 능청스레 웃고는 담당 의사와 얘기한다며 자리를 떴다.

나는 박 보좌관의 말에 엷게 웃었다.

비서실장.

그 직함이 쓰는 곳은 많으나, 정치권에서 그 직함 다는 건 많지 않았다.

원내대표나 시도지사, 당대표, 국회의장, 대통령 등등…….

다들 끗발 날리는 자리였다.

내가 해먹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이었다. 그걸 얼마나 단축하느냐가 관건인데, 지금 내가 해 놓은 걸 보면 그다지 오래 걸릴 것 같진 않았다.

나이가 좀 걸리겠지만, 그걸 무색하게 만드는 게 내 목표였다.

***

4월 말.

국회의사당, 국방위원회 회의실.

“의석을 정돈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원이 되었으므로 제 324회 국회 임시회 제1차 국방위원회를 개의하겠습니다.”

국방위 위원장 임청학이 세 번의 타봉을 한 뒤, 다시 원고로 시선을 내렸다.

“위원님들 보고사항은 배부해 드린 유인물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난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발생한 여객선 침몰사고에 휘말렸던 윤수혁 위원이 병원에서 퇴원하여 이틀 전부터 국회에 등원했습니다. 대한민국 국회의 위상을 드높인 윤수혁 위원에게 위원장으로서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복귀 인사 한 말씀 해 주시기 바랍니다.”

임청학이 윤수혁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위원장으로서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친절로, 보좌관이 원고를 집필할 때 일부러 윤수혁의 이름을 거론하게 했었다.

완전히 줄을 서기로 작심했기 때문이었다.

조성현 당대표와 사이가 가깝긴 했지만, 애초에 조성현은 사람을 관리하고 인맥을 형성하는 부류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독불장군이었다.

지금은 당대표라는 직에 얽매여 순화됐을 뿐.

그래서 조성현에게는 계파도 없었어서 줄을 대는 건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윤수혁은 달랐다.

선수 우대라는 국회의 관례를 무시할 만한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국가의 영웅이 아닌가?

영원호 전원 구조가 조금은 부풀려졌다고 생각하지만, 과거의 이력까지 더해진 윤수혁은 명실상부한 국회의 아이콘이었다.

그래서 공심위 특별위원까지 되었고.

그 덕에 민주당 전통 강세 지역인 호남에 가도 이름을 낼 만하다는 분석까지 있었으니, 더 이상의 평가는 필요 없는 정도.

그 중에서도 업계 관계자들만 아는 얘기가 있었다.

정부도 눈치를 본다는 것.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이번 영원호 사건을 계기로 정부가 윤수혁의 말에 가만히 있었다.

해경, 중대본, 안행부와 정부를 줄줄이 까는데도 별 반응이 없었다.

말인즉슨, 윤수혁에게 뭔가 있다는 소리였다.

그런 이유에서 윤수혁과는 적당히 친하게 지내는 게 아니라, 아예 같은 계파가 되어야 했다.

계파의 수장이 윤수혁이 될지라도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 가면 어중간하게 3선이나 한 자신은 중요한 순간에 밀려날 게 뻔했다.

장세룡이나 김정환이 있었다면, 아예 눈 밖으로 나서 탈당을 감행했을지도 몰랐다.

더구나 국회 전반기도 끝나가고 있었고.

이윽고 윤수혁이 마이크에 입을 댔다.

“병원 의료진 여러분과 걱정해 주신 선배, 동료 의원 여러분. 그리고 간호해 준 제 아내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그러나 아직 많은 영원호 사건의 피해자 여러분들께서 병상에 계시고,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선배, 동료 의원 여러분과 정부가 기억해 주시고 조속한 대책 마련을 위해 힘을 모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곧장 박수를 치려던 의원들이 무겁게 바뀐 내용에 점잖게 손뼉을 쳤다.

윤수혁에게 발언이 있음을 알리지 않았던 임청학도 움찔했고, 분위기 수습을 위해 얼른 목소리를 냈다.

“귀중한 말씀 감사합니다. 저 또한 정부가 신속하게 대책을 마련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먼저 법률안심사소위원회와 청원심사소위원회에서 심사가 완료된 안건들을 위원님들 의결정족수 되실 때 심사한 다음에 북한의 4차 핵실험 관련사항을 비롯한 최근 북한의 동향과 한미 정상회담에서 논의되었던 사항, 영원호 지원 대책 등 국방 현안에 대해서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보고를 듣고 위원님들의 질의답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법률안을 심사하겠습니다.”

곧 임청학이 의사일정을 진행했다.

법률안심사소위원장의 법률안 심사결과 보고가 있었고, 의결 의사를 묻고 동의 과정을 거쳐 가결 선포를 했다.

인트라넷 결재를 말로 설명한 것과 다름없는 과정이었다.

31개의 법률안이 20여분 만에 통과되었고, 국방부의 현안 보고가 이어졌다.

그로부터 다섯 시간 뒤.

국방부의 현안보고에 관한 질의가 끝났고, 임청학이 산회를 선포했다.

그렇게 윤수혁이 일어날 때.

미처 인사하지 못했던 의원들이 일어나서 악수를 건네 왔다.

“전치 6주라더니 다행히 멀쩡해 뵈네, 고생 많았어. 윤 최고.”

“6주나 받았어? 그럼 거 몇 주 더 있어야 되는 거 아냐? 정말 영화 히어로도 아니고, 이렇게 몸 혹사하면 어째.”

전보다 더 친절해진 목소리.

윤수혁이 웃으면서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걱정들 감사드립니다.”

임청학도 보좌진을 뒤에 달고 와서 윤수혁과 포옹을 했다.

“병문안 갔을 때보다 훨씬 낫네요, 같이 식사나 한 번 합시다.”

“예, 위원장님.”

윤수혁이 만족한다는 듯 웃었다.

***

6월 2일, 월요일.

제 6회 지방선거가 이틀 밖에 남지 않았다.

마지막인 만큼 스퍼트를 올려서 더욱 빡센 선거 운동에 들어가야 했다.

이미 선거운동기간 내내 광역단체장 후보들과 기초단체장, 주요 광역의원과 기초의원 홍보를 위해 소형버스를 타고 전국을 돌다시피 했으나 아직 모자랐다.

사흘 전인 5월 30일, 그리고 31일에 이뤄진 사전투표 결과가 썩 마뜩잖았기 때문이었다.

투표율이 12퍼센트가 넘은 상황인데, 보수성향의 노년층보다 진보성향의 청년층의 투표율이 더 높았다.

그 탓에 신민주당이나 새정치당 등에서 좋아하는 상황.

전생에서도 신민주당이 광역단체장에서 당선자를 한 명 더 냈었다.

아마 이번에도 크게 달라질 것 같진 않았다.

내가 유명 인사이긴 해도, 지역 연고주의로 얽힌 후보자에게 큰 영향을 주기는 어려운 탓이었다.

나 같아도 인물과 당을 보고 뽑지, 응원하러 온 사람을 보고 뽑진 않을 테니까.

그래도 바쁘게 움직이긴 했는데.

갑작스레 걸려온 전화에 눈을 가늘게 떴다.

[아버지]

스마트폰 액정에 표시된 뜬금없는 글자에 급히 통화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이 있나 싶었는데.

- 음…… 아들. 지금 많이 바쁘나?

생각보다도 목소리가 여유로웠다. 아니, 뜸을 들이는 듯했다.

“통화 돼요. 무슨 일이신데요?”

오히려 불안한 듯한 느낌까지 있어서 되묻자, 아버지의 목소리가 더디게 넘어왔다.

- 그…… 아는 선배가 한 명 있는데.

“선배요?”

- 어어, 회사 다닐 때…… 그 선배가 이번에 구청장에 나왔다는데…….

“아버지.”

익숙한 상황이었다.

이런 식의 청탁은 수도 없이 많아서 잘 알았다. 그래서 이전부터 가족에게 단단히 일러뒀었다.

아무것도 받지 말라고.

받을 만한 청탁이면 나한테 직접 오기 마련이라고.

그러나 아버지의 변명이 곧장 뒤를 이었다.

- 그래, 알지. 네 말마따나 여태 오는 전화 다 거절했는데…… 애비가 회사 다닐 때 실수를 좀 했어. 장부 기입하다가 비용 메우고 고생도 하고…….

“그래서요?”

- 그걸 내 선에서 해결을 봤는데, 따지면 법적으로 문제가 좀 있더라. 너도 회사일 해 보고 국회일 해 봐서 알잖아, 그걸 선배가 도와줘서 잘 덮었는데…… 그때 인연도 있으니까 네가 가서 한 번…….

고개가 저어졌다.

예전의 인연 때문에 나한테 이런 청탁을 할 아버지가 아니었다.

안 그래도 내가 성공하는데 아무것도 보태주지 못했다면서 미안해 했던 사람이 아버지였다.

그래서 내게 오는 청탁도 없다시피 했다.

이건 아버지의 의도가 아니었다.

“아버지.”

- 어어, 그래.

“선배란 사람이 협박이라도 해요?”

대답이 늦었다.

한참이나 기다린 끝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 ……내 흠이 너한테 누가 될 것 같아서 그랬다, 그래도 그때 연을 봐서 네가…….

“그 사람 이름하고 번호, 지역구 알려 주세요.”

- 미안하다, 아들. 살면서 먼지 묻을 짓 잘 안 했는데, 이건 회사 공금이랑 관련된 거라 애비가 어쩌기가 힘들다…….

“괜찮습니다, 문자 하나만 넣어 주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 ……그래.

그렇게 전화를 끊은 뒤.

한숨을 뱉는 사이, 문자가 하나 왔다.

우리 당의 후보자.

서울의 어느 구청장에 출마한 사람이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한 손에는 태블릿 PC, 다른 한 손에는 스마트폰을 들고 업무를 보던 박 보좌관이 묻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선거운동 해 달라고 청탁 같은 걸 받아오셨네요.”

“네? 누굽니까?”

“이 사람이요.”

스마트폰을 보여 주자, 박 보좌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리고 순간.

“구청장? 이런 시발, 좃도 없는 새끼가 감히 뒤질라고……! 아, 죄송합니다.”

헛웃음이 나왔다.

일부러 오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충심은 절절히 느껴졌다.

물론 화가 났기도 했을 것 같았다.

스마트폰을 돌려준 박 보좌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의원님께서 오더 내린 걸로 해 주시면, 제가 이 새끼 탈탈 털어서 이틀 내로 수갑 채우겠습니다.”

상당히 결연한 표정.

내가 결정을 고민하는 사이, 박 보좌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의원님, 시의원이나 하던 구청장 후보입니다. 이런 건 의원님께서 대면하실 필요 없이, 제 선에서 해결 됩니다. 오더만 내린 걸로 하고, 확인 전화만 받아주시면 됩니다. 제가 깔끔하게 일 처리 하겠습니다.”

내가 자신을 못 믿는다고 여긴 건지, 박 보좌관이 열을 올렸다.

화가 나긴 난 모양이었다.

호가호위하는 여우가 호랑이 그림자를 제 힘으로 아는 것과 같은 이치인지는 모르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박 보좌관이 일을 잘하긴 했고, 믿을 만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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