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36. 최고의 결혼 (2)
입술이 잘 떨어지질 않았다.
쉽게 말하자고 생각했는데, 머뭇거려 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심호흡하다가 결국 품에 있던 것을 먼저 꺼냈다.
천연 가죽과 순금으로 장식된, 누가 봐도 프러포즈용처럼 보이는 반지 케이스였다.
탁-
뚜껑을 열어 반지를 꺼내고 한사랑을 바라봤다.
그녀는 미소만 짓고 있었다.
이게 뭐예요, 같은 말이나 놀라는 기색도 없이 은은한 웃음을 입가에 띠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다 안다는 듯한 미소.
이윽고 한사랑이 왼손을 내밀기에 전에 언급한 10호 사이즈의 반지를 끼워 주었다.
가늘고 긴 손가락과는 알맹이가 굵은 5캐럿의 다이아가 별로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었다.
다이아 값어치가 있어서 이상하진 않았지만, 차라리 테가 얇고 심플한 디자인이 더 낫겠다 싶었다.
그래도 예물 전문가가 골라 줬으니 내가 직접 고른 것보다는 낫겠지.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천천히 목소리를 냈다.
설명도 없이 느닷없이 반지만 줄게 아니라, 프러포즈 하는 티라도 내야 하지 않겠는가?
힘이 들어가 있던 입술을 간신히 열었다.
“……내가 무드가 없어서 이렇게 밖에 못합니다만, 청혼하는 겁니다.”
내 말에 반지를 바라보던 한사랑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에 어느새 생기가 어렸다. 푹 젖는 듯한 감정이 살아난 것 같기도 했고, 장난스러워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곧 입가가 살며시 올라갔다.
“무드요? 푸흐흐, 단어 선택이 삼촌 같아요.”
3, 40대의 오랜 미소처럼 보이던 게 금방 아이의 웃음으로 바뀌었다.
하여간 보통 매력이 아니었다.
“음…… 나이가 조금 많긴 하죠.”
“수혁 씨, 아직 서른이잖아요. 사람들은 서른을 아직 애라고 하던데요?”
한사랑이 눈을 깜빡이며 물어 왔다.
“뭐…… 애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남자 나이 서른이면 이제 막 사회물 먹었을 때였다.
대기업만 가도 총수 일가나 특권층이 아니고서야 대리 직함 다는 게 전부였다.
정치판에서는 더 심해서 원내 30대의 의원은 나를 포함해서 네 명이 전부였다.
얼마 전까지 있던 20대의 국회의원은 더 이상 없었고.
“그럼 저도 애처럼 보여요?”
내가 묻자, 한사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어른처럼 보여요.”
싱긋 웃는 모습을 보며 따라 웃다가, 마땅히 할 말이 없었으나 입을 열었다.
하던 프러포즈는 끝내야 하니까.
“……음, 그럼 결혼 하는 겁니다?”
“풋, 네.”
그녀가 짧게 웃고선 금방 답했다.
목에 걸려 있던 한숨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스크린에서나 나오던 절절한 사랑의 프러포즈 없이 쉽게 넘어간, 안도의 감정이었다.
오글거려서 장문의 고백이나 이벤트 같은 건 차마 할 수 없었다.
유권자들 앞이나 정치판 인간들 앞에서 헛소리를 남발할 자신은 있었지만, 이건 별개였다.
전생에도 해 본 적 없던 일이기도 했고.
그사이, 한사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혼 허락 같은 건 안 받아도 돼요? 우리 아빠는 허락했다고 해도, 저는 시부모님 만나 뵙지도 못했는데.”
그녀가 애교라도 부리듯 서운한 기색을 비쳤다.
생각해 보니 허락이나 상견례 같은 건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결혼은 내가 추진하면 그만인 걸로만 여겼었다.
그게 틀린 것도 아니겠지만.
조금 아쉬워하는 한사랑의 얼굴을 보면서 말해 주었다.
“이번 주 저녁 식사 같이 해요. 이렇게 된 김에 안드레…… 아니, 사랑 씨 부모님도 같이 모셔요. 어때요?”
“어머니는 지금 러시아에 계세요. 3월에나 오실 걸요.”
“그럼 아버님 먼저 저희 부모님 뵙고, 3월에 다 같이 만나는 자리 마련하는 걸로…… 그건 되겠어요?”
내 말에 한사랑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
“사위 될 사람한테 존대 안 하셔도 됩니다. 지가 밖에 나가야 국회의원이지, 여기선 아들이고 사위 아닙니까?”
말 끝에 웃음이 따라붙었다.
윤수혁의 친부, 윤동현의 말이었다.
“예, 말씀 편히 하셔도 돼요.”
옆에 있던 윤수혁도 거들었으나 안드레 한은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여태 존댓말을 써서 그런 게 아니었다.
윤수혁은 사위 이상의 존재였다.
애초에 중매 상대의 대다수가 열댓살은 많은 사업가나 사짜 돌림의 직업을 가진 이들이었다.
한마디로 그저 그랬다.
인맥이나 집안 면에서 일반인들보다 좀 더 낫긴 했으나, 그게 다였다.
그 중에 오직 윤수혁민 달랐다.
몇 년 만에 수천 억의 돈을 벌었고, 국회의원이 됐으며, 최고위원까지 되었다.
집안 인맥이나 학벌이 없긴 했으나, 재산이나 능력이 논할 만한 수준을 넘어섰다.
한마디로 중매 대상들과는 급이 달랐다.
더구나 나이도 서른에 불과하니 앞으로 더 성장하고 성공할 여지까지 있었다.
갖고 있는 토지와 건물, 주식이 상승하는 것뿐만 아니라, 권력 또한 상승한다는 의미였다.
명백한 강자가 아닌가?
체격 좋은 안드레 한이 절로 굽을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의 변두리에 무역업으로 성공하면서 배우고 는 건 눈치뿐이어서 당연한 것이었다.
윤수혁은 대우 해 줘야 마땅한 사람이었고,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됐다.
딸인 한사랑이 아니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
“그래도 아직 결혼을 안 했으니…….”
“하하, 사돈께서 배우신 분이라 상당히 예의가 바르십니다.”
“아닙니다,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윤 의원님은 충분히 대우 받을 만한 분입니다.”
“사돈께서 아들 자랑 해 주시니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사실 자랑일수도 있겠지만, 얘가 지가 잘나서 알아서 돈 벌고, 뺏지 달긴 했지요.”
이번에는 좀 더 큰 웃음이 뒤를 따랐다.
그렇게 윤동현과 안드레 한이 대화 나누는 사이, 친모 김을자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시선이 윤수혁과 한사랑을 향해 있었다.
“너희들 식은 어떻게 하기로 했니?”
“제가 준비하고 있어요.”
윤수혁이 바로 대꾸하자, 사전에 얘기를 들었던 한사랑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김을자가 눈초리를 내리며 윤수혁을 바라봤다.
“너 혼자? 그래도 인생에 한 번 뿐인 결혼식인데, 아가하고 같이 해. 너 이런 거 모르잖니, 감수성도 없어서…….”
“전문가들이 다 준비 해 줘서 괜찮아요.”
“저도 괜찮아요, 어머니.”
윤수혁의 말끝에 한사랑이 얼른 말을 덧달았다.
윤수혁이 뭘 해도 해가 되는 게 아니라면 지지해 줘야 했다.
결혼식도, 집도, 차도 전부 윤수혁의 돈으로 하는 것이었다.
비용을 부담하라면 할 순 있겠지만, 그런 얘기가 아예 없었다. 애초에 윤수혁이 꺼냈던 말도 ‘내가 알아서 해도 되겠지?’였다.
한사랑도 결혼에 대한 로망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염원에 불과했다.
현실은 달랐다.
원하는 걸 고집하는 것과 지향하는 건 다른 것이었다.
한사랑은 그 정도 사실은 잘 알았다.
애초에 눈치 빠른 부모 밑에서 성장한 게 바로 그녀였다.
친모인 율리아는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인맥을 배경으로 삼아서 결혼을 했고, 친부인 안드레 한은 그 인맥으로 사업을 확장시킨 사람이었다.
크면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가장 많이 익힌 건 그런 센스와 계산이었다.
그래서 중매도 봤고, 윤수혁 외의 남자들을 쳐 낸 것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아가, 프러포즈 얘기도 다 들었어. 딸랑 반지 주고 끝냈다며?”
윤수혁이 슬그머니 껴들었다.
“반지 디자인이나 품질 제일 좋은 걸로 했어요, 어머니.”
“풀반지를 줘도 분위기가 있고 그런 건데, 어휴. 수혁이가 그런 게 참 모자라, 우리 며늘아기가 이해해 줘.”
그 말에 한사랑이 싱긋 미소 지었다.
“네, 어머니.”
그 미소를 가만히 응시하던 김을자가 더디게 입을 열었다.
“……웃는 게 천사 같구나.”
같은 여자임에도 한사랑의 미모를 칭찬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이성을 꼬드길 정도로 예쁜 게 아니라, 그림이나 인형이라고 할 만큼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옆에서 윤수혁이 픽 웃었다.
“제가 훌륭하고 좋은 신붓감 데려온다고 했었죠?”
“데려오긴, 이거 도둑질 아니니? 이렇게 예쁘고 어린 아가씨를 네가 뭐라고…….”
“네?”
“사돈께서 도둑질 당한 줄 아셨겠다.”
“아니에요, 어머님. 수혁 씨도 젊고 잘생겼잖아요. 능력도 있구요.”
한사랑의 천연스러운 대답에 김을자가 웃음을 흘렸다.
예쁘고 어린 줄로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눈치도 있고 사교성도 좋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윤수혁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박민표 4급 보좌관이었다.
[스케줄 1개 변경됐습니다. 사흘 뒤에 조컨설팅 대표와 미팅 있으십니다.]
***
여의도, 조컨설팅 사무실.
“이 부분에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조 대표가 그러면서 잘 정리된 서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정치 자금이나 개인 자산으로 써도 되고, 의원들이 낸 금액으로 대강이나마 속내도 짐작할 수 있으니까 좀 그랬는데…….”
그의 손이 프린트 된 활자를 툭툭 짚었다.
[축의금]
아주 흔한 단어지만, 내게 있어서는 다른 의미에서 익숙한 글자였다.
원래의 축의금은 결혼식 같은 축하의 날 주는 돈이겠지만, 조 대표가 말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정치 자금을 받는 한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출판 기념회.
거기서 주는 국회의원이나 지지자, 각종 관계자의 축의금은 순식간에 정치 자금이 되곤 했었다.
1억 5천만 원의 법정 한도가 있는 국회의원 후원과 달리, 축의금은 따로 제한도 없었다.
애초에 국세청이나 선관위도 관례처럼 눈감아줬고.
그게 바로 축의금이었다.
그래서 국회의원이라면 한두 권의 저서는 기본으로 쓰곤 했었다. 대필 작가를 쓰든, 시간을 내어 글을 쓰든 간에.
국회의원은 돈 때문에 작가가 되곤 했었다.
이윽고 조 대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무래도 언플용으로 쓰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후원금 돌려쓰는 건 돈 없는 일반 의원들이나 하는 거고, 돈으로 사람 마음 가리는 건 실수가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예, 계속 말씀하시죠.”
“그래서 생각한 건데…… 후원금 전액을 기부하는 게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즉각 대답했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아무리 많이 받는다고 해도 축의금으로는 반지 값 마련도 하기 힘들 것이었다.
물론 그것도 일반적인 국회의원이라면 큰돈이라고 하겠지만, 나한테는 푼돈이었다.
19대 국회의원 평균 재산이 18억에 불과했다.
물론 상당 부분 축소된 것으로 실제로는 그 두 배가 넘겠지만, 그것도 나와 비교하면 턱없이 적은 돈이었다.
안그래도 재산이 더욱 불어나고 있었다.
정확히는 혁신정부의 부실한 부동산 관리 덕분에 땅값이 몇 퍼센트가 아니라 곱절로 뛰고 있는 것이었다.
전생의 김정환 정부와 다를 게 없는 현상이었다.
그사이, 조 대표가 내게 다른 서류철을 내밀었다.
“제가 선정한 기부 업체입니다. 검토해 보십시오.”
유명 복지단체를 비롯해 전국 각지의 주요 사회단체가 들어 있었다.
한마디로 유권자들이었다.
역시 기부도 그냥 하는 게 아니었다.
철저하게 계산해서 준비까지 마친 모양이었다.
이런 것 때문에 한사랑과 같이 결혼을 준비하질 않았고, 웨딩업체를 찾아가지도 않았었다.
결혼식도 정치적인 계산으로 진행해야 했다.
내 목표는 단순히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니라, 정치인으로서 정치권력이 끝에 서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혼식도 수단으로 써야 했다.
애초에 결혼하는 목적도 마찬가지였다.
한사랑을 절절히 사랑해서, 같이 살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 같아서 혼인하는 게 아니었다.
물론 아름답고 사랑스럽긴 했지만, 정치적 목표가 주였다.
나는 리스트의 남은 기부 업체명을 읽어 내려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전국구로 가는 모양새긴 하지만…… 이것도 좋습니다.”
“차기 전당대회하고 총선도 염두에 둬야 해서 조금 무리했습니다만, 재선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흐흐, 재선도 대비 됐어요?”
웃으며 묻자, 그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내비쳤다.
“몇 개월만 줘도 하는 걸 1년 넘게 하고 있습니다, 과장급한테 시켜도 당선증 안겨 드릴 수 있습니다.”
“듣고 싶은 말이네요.”
“아,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다 준비 됐는데…… 이번 달 안에 신라호텔에 방문하셔야 합니다.”
금세 진중한 표정으로 돌아 가길래 그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대표님 선에서 안 되는 게 있습니까?”
어쩌면 내 압력이 필요할 경우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것 때문에 종종 전화기를 붙들고 국회의원 윤수혁이라는 자기소개도 여러 번 했기에 잘 알았는데.
조 대표가 눈을 껌뻑거렸다.
“제가 드레스까지 고르기는 좀…….”
“아.”
짧은 감탄을 뱉고 웃었다.
조 대표가 엷게 웃고서는 테이블 위의 서류를 넘겼다.
“이제 이것만 확인해 주시면 됩니다. 식 일정과 청첩장 디자인이고…… 결혼식 일정은 미리 기사 내겠습니다. 축의금 기부한다는 내용 달아서 보도하면 식 올릴 때 더 이슈 될 겁니다.”
“그건 제가 아는 기자한테 줄게요. 이번에 도움을 좀 받아서 소스 줄 차례라서요.”
“물론이죠, 가이드라인 준비해서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역시 조 대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