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34. 갚아줄 겁니다 (3)
2013년 12월 말.
연말 기념회, 행사, 각종 모임이 예정된 가운데.
띠리리링-
전화가 울리기 시작하더니, 보좌관이 급하게 뛰어들어왔다.
“의원님!”
장세룡의 시선이 보좌관이 내민 태블릿PC 화면에 닿았다.
4대 일간지의 메인 뉴스였다.
[(속보)나경호 폭력조직원 사주…… 게이트로 확대 조짐]
[나경호 게이트, 연루된 전현직 국회의원만 수십 명?]
[서울중앙지검, 나경호 게이트 확인 중…… 필요하다면 특별수사팀 구성해 수사 진행 할 것]
“뭐야?!”
가파른 억양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보좌관이 채 말도 못하는 사이, 장세룡의 스마트폰은 계속해서 벨소리를 울려댔다.
이어서 인터폰까지 울리면서 표시등이 깜빡거렸다.
황급히 태블릿PC를 조작하는 장세룡을 보며, 보좌관이 조심스레 목소리를 냈다.
“……프린트해서 추가 보도된 내용도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시팔!”
장세룡의 욕에 보좌관이 꾸벅 고개 숙이고 얼른 물러갔다.
금세 인터폰 벨소리가 끊어지고, 장세룡은 태블릿PC 대신에 스마트폰을 들었다.
검찰 인맥으로부터의 연락이 없었다.
전직 검찰 출신은 정보가 늦다고 쳐도, 현역 검사들까지 연락이 없다니?
그러다 부장검사 직급의 전화가 하나 걸려왔다.
“날세.”
- 의원님, 기사 보셨습니까?
“기사는 봤지. 자네는 뭐 하길래 이제야 전화하나?”
- 죄송합니다. 저번에 나경호 의원 때처럼 전혀 내부 언급 없이…….
“김 부장! 그걸 말이라고 하나?! 전에 그랬으면 방도를 찾아놔야 할 것 아닌가!”
- 죄송합니다만, 이번 건 지검장 선에서 막은 거라…….
“지검장? 손 지검장?”
-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자네는 아무것도 못했다?”
- ……솔직히 마음먹고 숨기려고 하면 알아내기 힘듭니다.
당연한 말이었다.
작정하고 하면 웬만한 것은 통했다.
당장 자신만 해도 지명한 사람을 수사하게 하고, 법정에 세울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걸 막는 건 사전에 알고 있는 게 아닌 이상 불가능했다.
“변명 듣자고 하는 말 아니니까, 뭐가 됐든 말 해.”
- 지금은 정보가 너무 없습니다만, 소문으로는 특수팀 꾸린다고 하니 명단이나 상황 확인하는 대로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손 지검장 아랫사람들은 없나?”
- 아, 있습니다. 공안부장이랑 형사3부 부장인데…… 왜 그러십니까?
“왜, 알면 도와주려고?”
나직하지만 따가운 어투.
부장검사는 채 대답하지 못했다.
장세룡이 할 일을 알기 때문이었다.
조사와 압박, 그리고 회유. 자신이 당한 일이 아니던가?
결국 회유와 압박에 넘어가 그의 끄나풀 노릇을 하고 있었고.
그사이, 장세룡의 말이 이어졌다.
“손 지검장 윗선도 알아 봐, 그건 되잖나?”
- 네, 알겠습니다.
“그래, 다시 연락하지.”
전화를 끊고 난 뒤, 장세룡은 다시금 걸려오는 전화를 끊고 연락처를 뒤졌다.
아직 아는 게 없는데 전화를 받아서 무엇하랴?
무슨 충고라도 하기 위해서는 정보라도 알거나, 조치라도 취해놔야 했다.
잠깐 동안은 그 일을 해야 했다.
***
기사를 확인했다.
손 지검장과는 통화로 특수팀 구성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픽 웃음이 났다.
장 의원을 이렇게 보낼 줄이야.
이제야 빚을 덜어 내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거치기간 동안 이자만 갚느라 대출 원금에는 손도 못 댔던 격이었다.
원금이 오죽 많아야지.
이제 걱정 한시름 덜어 놓고, 미뤄 뒀던 내 개인사를 챙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일단은 한사랑.
그녀를 만나야 했다.
한사랑의 미모 때문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좀 애틋한 마음이 있기도 했고, 중요하게 할 말도 있었다.
바로 결혼.
정치를 시작하면서부터 이미 마음먹고 있던 것이어서 얼른 해결해야 했다.
이 정치판에서,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사내는 장가를 가는 게 당연한 것이었다.
모름지기 자식도 낳아야 했고, 그 중에서도 아들을 낳아야 유리했다.
구시대적인 사상이 생각 외로 많이 퍼져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말 안 듣는 다선 의원이나 50대 이상의 일부 유권자들.
그 부류와 대화라도 하려면 얼른 혼인하고, 아이까지 낳아야 했다.
국회에서도 그게 어른 취급을 받는 빠른 길이었고, 정치판에서는 보수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는 지름길이었다.
그 일부를 위한 게 아니더라도, 결혼은 정치 인생에 유익한 것이었다.
애초에 부인의 내조와 자식의 존재는 정치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정확히는 이미지 형성이겠지만, 가정을 이뤘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괜찮은 평가를 받곤 했었다.
그런 이유에서 선거철마다 자식이나 부인이 나와서 함께 피켓을 흔들고, 춤추고, 노래 부르며, 응원 구호를 외쳐 대질 않던가?
어쨌든 결혼을 해야 했고, 한사랑과 이와 관련한 얘기도 나눠야 했다.
다행히 둘 다 결혼을 목적으로 하니 과정만 조율만 하면 되겠지.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인중이 간지러워졌다.
흔히 말하는 프러포즈.
나도 해야 하나?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전생에 연애하면서도 별로 신경 써 본적이 없던 단어였다.
그때도 대화중에 결혼 얘기를 꺼내는 정도가 전부였고.
다만 이번에는 상대가 달랐다.
마음을 혹하게 만드는 미인인 데다가 나이도 스물한 살 밖에 되지 않는 어린 여성이었다.
왠지 뭔가가 필요할 것 같았다.
촛불을 깔아두거나, 무슨 이벤트를 한다던가…….
몇 번 들어 봤고, 어디서 본 기억이 나서 떠올려 봤는데, 손가락이 말려들어가는 게 도저히 내가 할 짓이 되질 못했다.
오글거렸다.
반지 정도야 사서 끼워 줄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오늘 저녁, 갈만한 곳을 새로 예약했다.
그날 밤.
베이지 컬러의 코트에 청바지, 목티를 입은 한사랑이 약속 장소로 나왔다.
옷차림이 어울렸고, 아름다웠다.
대학생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직장인처럼 보이기도 하고.
“수혁 씨.”
간만에 듣는 내 이름에 웃음이 났다.
“빨리 왔네요.”
“아빠가 데려다 줘서 빨리 왔어요.”
“아버님이요? 얼굴 뵙고 가시지, 그냥 가셨어요?”
“푸흐…… 저 만나기로 해 놓고, 아빠까지 보고 싶어서 그래요?”
한사랑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매력적인 웃음에 나도 편하게 대답했다.
“정치인이라서 그런가 봐요.”
“맞다, 정치인이지. 이렇게 보면 정치인처럼 안 보여요. 음…… 스웨터랑 면바지가 캐주얼해서 그런가 봐요.”
“오늘 처음 입은 건데, 어울려요?”
“음, 멋있어요. 그런데 정장이 좀 더 멋진 거 같아요. 정치인이라서 그런가 봐요.”
그녀가 내 말을 흉내 내며 미소 지었다.
그렇게 가벼운 얘기를 나누고, 주문한 음식을 먹을 무렵.
“저번에 아버님께서 말씀하셨던 거 들었어요? 결혼 관련해서…….”
원래는 바로 결혼 준비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직설적으로 말하려 했는데 그렇게 되질 않았다.
기껏 한 말이 안드레 한을 걸고넘어진 것이었다.
웬만한 다선 의원 앞에서도 뭐든 말할 자신이 있었는데, 왜 이럴까?
해 보지 않은 결혼이라서 그런가.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미뤄 두고 한사랑의 대답을 듣고, 다시 대화를 나눴다.
아버님은 가급적 빠르게 결혼하길 바라는데 어떠냐, 혹은 생각해 둔 결혼이 있는지 등등.
그런 내용들이었는데.
한사랑이 윤이 흐르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목소리를 냈다.
“저, 이거 프러포즈예요?”
“그건 아니지만…….”
그렇게만 말하고 아무 말도 못했다.
프러포즈는 아니지만, 결론적으로 결혼하자는 내용이 아니던가?
그럼 최소한 반지라도 줘야 할 텐데.
잠깐을 생각하다가 식탁에 올라온 그녀의 손을 바라봤다.
“손가락 몇 호예요?”
“반지 호수 말하는 거예요? 저 10호예요.”
고개를 끄덕이는데, 돌연 한사랑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풉 하는 소리.
“반지라도 끼워 주면서 말하려고요?”
뜨끔했다.
가끔씩 보면 속 안에 연륜있는 노파라도 들어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내 속을 잘 알았다.
행동도, 말도 어린 부분을 찾기가 더 힘들었고.
다행히 나는 당황한 걸 그대로 티 내는 20대의 청년이 아니었다.
국회에서 다선 의원들과 입씨름 해 가면서 얼굴에 철판도 깔 줄아는 당의 지도부였다.
“음…… 그럼 무슨 반지 좋아해요? 탄생석? 아니면 다이아?”
“선물로 주려고요?”
“프러포즈가 될 수도 있고요.”
능청스레 말하자, 그녀가 다시금 웃었다.
약간 어이없다는 것 같긴 했지만, 어쨌든 썩 나빠 보이진 않았다.
원래 한사랑의 성격이 상당히 원만한 편이기도 했고.
“다 좋아요. 받을 거면 고르는 사람이 주는 걸로 받을래요.”
“그래요, 내가 잘 골라 볼게요.”
대답하면서 얼른 머리를 굴렸다.
뭘 골라야 할지.
그러나 답은 백화점 VIP실 밖에 없었다.
내가 무슨 반지를 알겠는가?
옆에서 품질이나 디자인이 어떤지 설명해 주는 전문가와 함께 골라야 했다.
그사이, 한사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좋아하는 거 맞아요?”
“아, 예.”
얼결에 대답했는데, 이어진 말.
“그럼 내가 먼저 프러포즈해도 받아 줄 거죠?”
움찔했다.
애초에 누가 프러포즈를 하느냐, 마느냐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것들이었는데.
막상 말로 들으니 느낌이 달랐다.
더구나 저 당돌한 말투와 중저음의 목소리.
사람을 휘청하게 할 만했다.
역시 보통은 아니구나.
새삼 그녀를 다시 보는 사이, 어느새 한사랑은 아이처럼 쑥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
“그래서…… 자리 마련도 못한다, 이 말입니까?”
흥분한 장세룡이 화를 참아가며 말하자, 스마트폰 너머에서는 담담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 아시지 않습니까? 시기가 시기인 만큼 정부 입장에서는 논란될 만한 사안을…….
“이봐요, 박 수석! 협박할 땐 언제고, 이런 식으로 나와?”
급기야 언성이 높아졌지만, 박우식 정무수석의 목소리는 높낮이가 없었다.
- 파타야 건은 깨끗하게 폐기했습니다.
“내가 그 얘기 듣자고 말 꺼냈소? 법무부 장관이든, 검찰총장이든 내가 보고 얘기하겠다는 거 아니요?!”
- 지금 시기가 시기인 만큼…….
“앵무새 흉내 그만 내고! 지금 나하고 척 지겠다는 소리인데, 이거 감당할 수 있겠소?”
- …….
대답은 없었다.
이미 나경호 게이트 특별수사팀이 만들어졌고, 특수팀의 사무실 입구에는 현판도 새로 걸렸다.
이제 제대로 시작된다는 소리였다.
“허…… 정말 막가자는 건가? 박 수석도 피를 봐야 정신 차리겠어?
반말로 바뀌었다.
거기에 더해진 명백한 협박조.
박우식과 관련된 일화나 뒷얘기, 각종 증언을 장세룡이 적잖게 알기에 나온 소리였다.
결국 박우식의 목소리가 더디게 넘어왔다.
- ……그럼 자리는 마련해 보겠습니다만, 뭘 하셔도 축소되진 않을 겁니다. 비난 프레임이 정부가 아니라 국회로 옮겨 간 상황이고, 대통령님께서도 그걸 원하셔서 웬만하면 그대로…….
변명처럼 덧붙는 설명.
입꼬리가 비틀린 장세룡이 말을 끊었다.
“그건 내 알아서 할 일이고, 김 총장하고 박 수석도 같이 나오시오.”
- 저까지 나갈 필요는…….
“아니, 나와서 입만 다물고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박 수석 것도 깨끗하게 폐기할 테니까.”
흔히 말하는 무언의 긍정.
대통령의 최측근인 박우식이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있는 사이, 검찰총장을 뒤흔드는 것.
장세룡이 원하는 게 그거였다.
- 이미 검찰총장과 민정수석이 독대했었습니다. 제가 있다고 해도 원하시는 효과는…….
“설명 안 해도 됩니다, 그럼 약속 정해서 연락 주시오. 최대한 빨리.”
뚝.
전화를 끊은 장세룡이 사무책상 위에 쌓인 인쇄물을 바라봤다.
대부분이 나경호 게이트를 메인에 걸고 있었고, 그러지 않은 곳도 꼭지에 나경호의 이름을 기재했었다.
분명 장세룡이 전화하고, 접촉했음에도 바뀐 곳은 몇 곳 없었다.
광고를 내는 두어 곳, 협박과 회유가 통한 서너 곳이 전부.
나머지는 이미 다른 사람과 접촉한 것처럼 빙 둘러가며 거절한 것이었다.
이윽고 장세룡의 시선이 다시 스마트폰에 닿았다.
띠리리리-
며칠 전 통화했던 부장검사의 전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