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34. 갚아줄 겁니다 (2)
이틀 뒤.
안순익이 다른 약속을 미루고 보수신당의 사무총장, 우희준을 찾아갔다.
약속 장소는 여의도의 일식당.
정치인들이 자주 찾는 곳으로 안순익도 중앙정계에 나오면서 근래에 몇 번 들렀던 곳이었다.
직원의 안내로 방에 들어서자, 좌식 탁자를 두고 앉아 있던 사내가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위원장님.”
우희준이었다.
그가 웃는 낯으로 손을 내밀어서 악수를 나누었다.
“이렇게 뵙고 말씀 나누는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전에 국회에서는 바빠서 인사를 못했습니다.”
“총장님이면 공사가 다망하지요. 압니다.”
“이해해 주셔서 다행입니다, 아. 오늘 코스요리로 주문했는데, 괜찮으십니까?”
은근한 저자세, 안순익은 그 이질감을 인식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가리지 않습니다, 다 먹지요.”
도대체 뭘 하려고 이렇게 어른 대접을 해 줄까?
안순익은 대답을 마치며 우희준을 뜯어 봤다.
당연하게도 잘 차려입은 정장과 금배지가 눈에 띄었고, 그 외에는 가방이나 서류 같은 것도 없었다.
오로지 몸만 왔다는 뜻.
‘뻐꾸기나 날릴려고 부른 게야?’
안순익이 그렇게 생각할 무렵.
음식이 나왔고, 테이블이 금방 채워졌다.
찬 돌에 얹어진 회 몇 점, 정성스레 플레이팅된 초밥들.
한 끼에 20만원이 넘어가는 비용 임에도 우희준이 웃으며 말했다.
“드시고 모자라면 더 시키세요.”
“늙어서 그렇게까진 못 먹지요, 말이라도 고맙습니다.”
“하하, 자. 일단 이거 받으시죠.”
우희준이 흰색 자기로 된 술병을 쥐었고, 안순익이 잔을 들었다.
쪼로록.
술을 따르고, 마시고, 요리를 한창 집어 먹을 무렵이었다.
근황이나 일상 얘기만 나오던 중.
“전화 좀 받겠습니다.”
우희준이 양해를 구하며 전화를 받았고, 안순익을 앞에 둔 채로 통화를 했다.
“네, 의원님. 그렇습니까? 아…… 네. 네네, 저도 여의돕니다. 식사 중인데……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금세 전화를 끊은 그가 안순익을 바라봤다.
“죄송합니다.”
“뭐 그런 걸로…… 괜찮습니다.”
안순익이 말을 마치며 다시 젓가락을 쥐자, 우희준이 묘한 웃음을 띠었다.
“혹시 장세룡 의원님 아십니까?”
“당연히 알지요.”
보수신당 당대표, 대권후보로 손꼽히는 이가 아니던가?
더구나 최근에는 무서운 소문까지 있어서 모를 수가 없었다.
장세룡이 윤수혁을 겁박하다가 봐줬다는, 그런 말이 정계 관계자들 사이에서 파다하게 퍼진 상황.
우희준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 분께서 좀 만나야 된다고 하시는데, 합석해도 괜찮으시겠지요?”
“안 될 게 뭐 있겠습니까.”
대답을 마친 안순익이 혀로 입술을 닦아 냈다.
‘이거였어?’
장세룡이 직접 움직인 것이었다.
애초에 우희준과의 약속은 위장일 뿐, 장세룡과의 만남이 이 자리의 목적이었다.
무슨 제안을 하고, 말을 하려는 것일까?
태연하게 회를 간장에 찍으면서도 안순익이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헤또가 안 도네, 안 돌아…….’
장세룡이 중요한 건 잘 알았지만, 무슨 말이 나올지 조금도 예상하기 힘든 탓이었다.
정치판에서 오랫동안 구르고, 아직까지도 정치질로 삶을 연명했기에 사리분간은 잘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의 생각은 삼천포로 빠질 뿐.
‘일단은 윤 의원한테 언질이라도 줘야지, 이거…….’
잘하면 해답도 들을 수 있었다.
윤수혁은 그런 사람이었다.
정보력, 정치력, 자금력 등등이 항상 예상보다 웃돌아서 뭐든 앞섰고, 뒤처지는 경우가 없었다.
안순익이 슬쩍 몸을 일으켰다.
“뒷간 좀 다녀오겠습니다.”
“네, 다녀오십시오.”
화장실로 향하며, 안순익이 바로 스마트폰을 빼 들었다.
곧장 통화 연결을 한 뒤.
“어, 윤 의원!”
- 여ㅂ…… 예. 위원장님.
“내가 우희준이랑…….”
말을 하다 말고 화장실을 재확인한 안순익이 얼른 목소리를 냈다.
“만나기로 했잖나? 그거 보니까 장세룡이가 시킨 걸세.”
- ……아마도 위원장님을 회유하려고 할 겁니다. 협박할 수도 있고요.
“나를? 뭣하러…… 윤 의원 때문에 말인가?”
설마하는 얼굴로 묻자, 담담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 예.
“아니, 왜? 겁박질하다가 봐줘서 넘어갔다는 소문이 퍼졌는데, 또 그 지랄을 한단 말인가?”
- 버릇 고치겠다는 1회성 사건이 아닙니다.
“……윤 의원 무슨 죄 지었나? 아니면 숙적이라도 된다는 소린가?
-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 같네요.
“안다니?”
- 숙적 말입니다.
“……무슨 소린지 원, 그래도 내가 넘어갈 리는 없잖은가? 돈도 윤 의원이 많아, 파워도 좋아, 장래도 유망해. 안 그런가?”
- 흐흐, 저도 압니다. 오늘은 장 의원하고 자리 일찍 파하고 끝내십시오.
“일찍?”
- 예, 장단만 좀 맞춰 주고 앞으로 독대하거나 따로 통화하지 마십시오. 이 이상 만나서 좋을 거 없습니다.
더 나쁠 것 같은 단호한 어감.
안순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알겠네.”
전화를 끊은 안순익이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조용히 요리 몇 점을 먹을 무렵.
장세룡이 등장했다.
“반갑습니다, 장세룡입니다.”
자신보다 십수 년은 어린 사람이었으나, 안순익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강자와 약자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장세룡은 명백한 강자였다.
돈도 인맥도 모든 게 그보다 앞섰다.
“민간문화혁신위 안순익입니다, 처음 뵙습니다.”
안순익과 악수를 나누고, 장세룡이 우희준의 옆자리에 착석했다.
그렇게 수저를 받고, 술 한 잔을 받은 뒤였다.
장세룡이 안순익을 지그시 보며 입을 열었다.
“위원장님.”
“네.”
“윤수혁이가 잘 해줍니까?”
안순익이 움찔했다.
담담하게 묻는 것치고는 분위기가 굉장히 강압적이기 때문이었다.
‘사람마다 기운이 있다더니.’
안순익이 장세룡의 강렬한 안광을 받으며 되물었다.
“……하시려는 말씀이 뭐요?”
“이렇게 합시다, 안 위원장님 뭐하고 싶습니까?”
안순익이 대꾸하지 않고 바라보기만 하자, 장세룡이 말을 이었다.
“이번 지방선거도 좋고, 재보궐 선거도 좋습니다. 시장, 아니면 국회의원. 뭐하고 싶습니까?”
보수신당에서 당선이 확실시되는 지역구가 몇 개 있었다.
우파 중에서도 극우세력이 있는 지역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건 하납니다. 윤수혁이 공사할 거, 그거면 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생각도 좀 해 봐야 될 말씀인 거 같고…….”
안순익이 말끝을 흐렸다.
오늘은 가급적 무탈하게 넘어가고, 다음에 만나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윤수혁도 그렇게 하라고 당부하지 않았던가?
“들어서 아실 겁니다, 내가 윤수혁이를 겁박했다느니…….”
“…….”
“아, 내가 고발장 준비한 숫자가 몇 인 줄 아십니까? 100명이 넘습니다. 다 윤수혁한테 줄 댄 놈들입니다.”
구체적인 숫자를 처음 들은 안순익이 장세룡을 쳐다봤다.
약간 긴장이 서린 눈.
뒷말이 이어지지 않았음에도 안순익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거기에 왜 안 위원장이 없겠습니까?”
아, 탄식이 목구멍 안으로 꺼져 들어갔다.
이미 예상은 했었다.
많은 사람들이 윤수혁과 엮여서 고초를 겪을 뻔했었는데, 그 안에 자신의 이름은 없었다.
모를 리가 없으니 알면서 빼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지금 드러난 것이었다.
“100명은 과하다고 막혔는데, 위원장 하나는 내가 충분히 영장 받아 냅니다. 아니, 쉽습니다.”
각종 접대가 한두 건이 아니었다.
모른 체 뇌물을 받기도 했고, 가끔은 주기도 했었다.
“위원장, 잘 생각해야 됩니다. 내년부터 수의(囚衣) 입고 배식 받으실 겁니까?”
명백한 협박.
죄명을 말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접대와 뇌물 등등.
이미 100명을 윤수혁과 엮어서 법정에 세우려하지 않았던가?
안순익은 짧게 한숨을 뱉었다.
장단만 맞춰 주라던 윤수혁의 말이 떠올랐지만, 지금의 말에 장단을 맞출 수는 없었다.
배신하고 주는 거 받아먹으라는 말이 아니던가?
그럴 생각은 없었다.
중앙정계로 나가게 해 준 사람이 윤수혁이어서,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모든 게 달랐다.
자신을 쓰려던 윤수혁의 태도가, 대우가 달랐으며, 윤수혁이 가진 것도 장세룡과는 달랐다.
더욱이 말도 안 되는 정보가 있었다.
안순익은 그걸 믿었다.
장세룡이 뒷배도 있고, 힘도 센 강자라면 윤수혁은 그걸 초월하는 인간이었다.
무슨 수단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과가 그랬다.
이윽고 안순익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년이면 내 나이 팔순이요. 가만히 둬도 강산 한 번 바뀌기 전에 수의(壽衣) 입을 겁니다.”
“위원장, 나 장세룡입니다.”
“압니다, 나도 안순익이요.”
바로 받아치는 대답에 장세룡의 눈가가 구겨졌다.
“선배 대접 하려 했더니…… 말장난 하자는 거요?”
“장세룡 의원님, 그만 합시다. 오늘 얘기는 못들은 걸로 할 테니 조용히 헤어집시다.”
돌연 안순익이 일어나자, 장세룡의 눈이 커다래졌다.
‘뭘 믿고? 내 앞에서 감히?’
아무리 장관까지 했다지만, 안순익을 은퇴한 원로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물론 국회와 청와대를 오가며 이곳저곳에 얼굴을 비추고 인맥을 넓히고는 있었으나, 하는 것이라고는 혁신정부의 민혁위 위원장이 전부.
한 당의 당대표인 자신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후회할 겁니다.”
“다른 거 골랐어도 후회했을 거요.”
안순익이 퉁명스레 대꾸하고 방을 나갔다.
적막.
옆자리의 우희준은 입도 벙긋하지 못한 채 장세룡의 눈치를 살폈고, 장세룡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 개 같은…….”
동시에 안순익은 한숨을 토해 냈다.
복도를 걷는 그의 발이 뒤늦게 움찔했다.
명실상부한 강자 앞에서 꼬리를 말지 않고, 뻗댄 후유증이 오는 것이었다.
나이가 많든, 경력이 많든, 누구든 강자 앞에서는 고개가 조아려지는 법이 아닌가?
더구나 그가 내뿜던 기운도 어마어마했다.
심지어 명백한 협박까지 있었고.
그리고 내년부터 수의를 입게 한다는 건, 당장에 전화 한 통으로 수사하고 구속시키겠다는 뜻이었다.
견디기 쉽지 않은 것들 뿐.
안순익의 손이 급하게 스마트폰을 들고, 연락처를 찾았다.
수신자는 행복한국당 최고위원 윤수혁.
통화 버튼을 누르자, 오래지 않아 윤수혁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 여보세요.
“지금 자리 끝내고 가는 길일세.”
- 벌써요? 시간이…….
“어쩌다 보니 박차고 나왔네, 협박질을 견딜 수가 있어야지.”
- 괜찮으세요?
“대통령 독대한 기분이야, 장세룡이 기가 아주 세.”
- 압니다, 그런 인간이죠. 회유하고 협박 다 했을 거 같은데, 뭐라고 하던가요?
“아, 그렇지. 자네 공사할 거 정보 들고 오면, 선거에 공천해 주고 아니면 감옥 보낸다, 그러더만.”
- 그래서 그냥 나오셨다고요?
“이걸 어떻게 장단을 맞추겠는가? 장단 맞추다가 뒤돌면 분노만 살 일 아닌가?”
- 그렇긴 한데…… 알겠습니다. 감옥 가는 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 자네만 믿겠네, 근데 내년부터 수의 입힌다던데, 이미 준비된 거 같지 않나? 날짜라도 앞당기면…….”
은근한 불안감.
윤수혁이 걱정하지 말라곤 했으나, 장세룡은 권력자였다.
- 더 큰 게 있습니다.
“큰 거라니? 언론 플레이 같은 걸로 막으려는 생각인가? 그러면 법정도 서야 할 텐데…….”
안순익의 근심이 늘어지는 사이.
단호한 대답이 스마트폰을 넘어왔다.
- 아뇨, 장 의원 일입니다. 이제 터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