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109화 (109/191)

# 109

34. 갚아줄 겁니다 (1)

“윤 최고도 예산안 처리 기간이라 바쁘신 거 아니었나? 아아, 비례라서 아직 바쁘진 않겠네.”

온겨레일보의 편집인 고영균 전무가 말을 마치며 웃었다.

“흐흐, 나는 윤 최고 볼 때마다 자주 헷갈려. 재선인지, 아니면 재벌3세인지.”

그가 눈웃음을 흘리며 말하기에 나도 픽 웃었다.

“제가 그래 보여요?”

“아무렴, 윤 최고가 어디 일반적이요? 나이만 봐도 우리 회사 수습기자들하고 비슷한 걸로 아는데, 맞잖아? 크으, 나는 그 나이에 운동화 밑창 여러 개 바꿔가면서 뛰어 다녔는데. 흐흐흐흐.”

그가 농담처럼 추켜세우는 말을 했고, 빈 잔에 술을 따르며 다시금 얘기를 이어 갔다.

자신의 근황, 그리고 근래의 이슈.

가벼우면서도 묵직한 얘기들이 토막난 것처럼 툭툭 나온 뒤.

이윽고 고 전무가 눈을 빛냈다.

“그래서 윤 최고가 웬일이요?”

기자다운 눈빛에 웃으며 대답했다.

“부탁 좀 드리려고 왔습니다.”

“허허, 언론인한테 무슨 부탁을…….”

“아는 분이 국장급도 있고, 논설위원들도 있지만…… 고 전무님 아니면 힘든 일이라 말씀드리는 겁니다.”

“보수 정당에서 나 같은 진보 언론인한테?”

고 전무가 말과 다르게 상체를 기울이고 식탁에 팔을 올렸다.

앞에 놓인 한정식 그릇들이 툭툭 밀려났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그의 말과 시선에서 은근한 압박이 흘러나왔다.

평생을 기자로 살며, 온겨레일보의 서열 2위에 오른 사람다웠다.

고 전무 위에는 오로지 언론사 사주뿐이었고, 심지어 사주 일가와 혼인까지 맺어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쉽게 말해 고 전무가 온겨레일보를 대표한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래서 내가 만나고 있었고.

“알고 계실 겁니다, 장 의원하고 저하고…….”

웬만한 관계자라면 다 알만한 사건을 언급하자, 그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거. 장세룡 의원이 과했지. 그래서 그거랑 관련된 거요?”

수습기자부터 일을 배웠다던 고 전무의 급한 성미가 훤히 보였다.

눈빛이 거의 불탈 즈음.

“예, 저도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나도 그 생각했어요. 장 의원이 윤 최고 괴롭힌 거야 둘째로 쳐도, 첫째는 그거거든. 복수! 내가 봤을 때 윤 최고 같은 사람이 가만있지 않을 거 같았어, 그 나이에 그런 위치에 오를 정도면 이게 일반인하고는 비교가 안 되잖아, 그쵸?”

그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톡톡 치면서 말하더니 씨익 웃었다.

“……그럼 편들어 달라는 얘기구나, 맞아요?”

“예, 비슷합니다.”

“흐흐, 그럼 복수는 기정사실로 쳐도 되는 거요?”

내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자, 그가 웃는 얼굴로 다시금 물어 왔다.

“그럼 하나만 더 물을게요.”

“그러십시요.”

“둘째 이유가 뭐요? 왜 장 의원이 그 난리를 폈대?”

내가 장 의원을 매번 걸고넘어진 것도, 나 의원을 구속 시킨 것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 그거…….”

“그거, 뭐예요?”

궁금함으로 번들거리는 두 눈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부탁하는 입장이니 썰도 풀어 주고, 내 능력도 좀 보여 줄 생각이었다.

“나경호 의원 사건, 제보를 제가 했습니다.”

“뭐? 그거를? 아니, 어떻게? 윤 최고 무슨 기자 출신이요?”

“아닙니다.”

그의 놀란 목소리에 담담하게 대꾸해 줬다.

“어떻게 알고 그랬어요? 기가 막히네, 기가 막혀.”

장 의원 밑에서 수년간 구르고, 앞날을 겪다 보니 아는 것이었다.

기자들이 박수무당이라도 되지 않는 한 알아낼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참나, 그래서 장세룡 의원이 그 난리를 폈네.”

감탄하듯 말을 늘어놓은 고 전무가 나를 새삼스럽다는 듯 바라보고는 씩 웃었다.

“무섭네, 윤 최고.”

“무섭기는요.”

“흐흐흐, 그럼 자세히 드러나 봅시다.”

***

박물관장과 식사를 마친 안순익이 차에 올랐을 때였다.

70년대 대중가요 벨소리가 울렸다.

등록되지 않은 전화번호.

안순익이 화면을 잠깐 동안 바라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안순익입니다.”

- 위원장님, 수고 많으십니다. 저 국회의원 우희준입니다. 상임위 현안 보고에서 얼굴 한 번 뵀었는데, 아시겠습니까?

안순익의 시선이 백미러로 향했다.

주시하고 있던 기사가 눈짓을 받자마자 바로 차에서 내렸다.

“잘 압니다.”

대면하고 대화 나눈 적은 없었으나, 우희준을 모를 수가 없었다.

전 새한국당의 최고위원이자 현 보수신당의 사무총장으로 장세룡의 오른팔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우희준이었다.

한마디로 보수신당의 실세.

- 다행입니다, 다른 게 아니고 제가 미방위로 자리를 옮겨서 관계자 분들을 뵙던 중인데, 문화 부분에서는 안순익 위원장님이 대단하다고 들어서 이렇게 연락드렸습니다.

“거기까지 소문이 났을 줄은 몰랐습니다.”

- 위원장님께서 일을 워낙 잘하셔서 소문이 쫘악 돌았습니다.

“그래요? 하던 가락이 있으니 숨기질 못한 모양입니다, 그려.”

- 하하하, 재밌으십니다. 그래서 그런데…… 시간이 언제 즈음 되십니까? 한 번 뵙고 말씀 좀 나눠야지요.

안순익이 짧게 콧바람을 내뿜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인 데다가, 우희준의 속내를 예측하는 것조차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전화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국회의원 입장에서 전화는 하는 게 아니라, 받는 것이었다.

애초에 소속 상임위 사보임 시에 관계자들이 알아서 찾아가는 게 기본이었다.

공무원들부터 관계부처 인사들, 민간단체의 대표자들까지.

법안 청탁이나 협조를 구하기 위해 일찍이 인사하러 가는 것이 국회의 관례였다.

더구나 우희준은 일개 초선 의원도 아닌, 당의 사무총장이었다.

당의 자금 관리와 각종 행사와 공천심사 등을 총괄하는, 그야말로 핵심 세력.

흔히 일컫는 당3역의 일인이 아닌가?

당대표를 제외하고, 원내대표, 정책위의장과 함께 당의 중추 세력으로 일컬어지는 자리.

그런 그가 민간혁신위원회 문화부문 위원장에게 전화했다는 건 썩 자연스러운 게 아니었다.

실권도 많지 않아서 청와대도 몇 번 들어가질 못했고, 윤수혁이 말했던 블랙리스트 조사도 간신히하고 있던 차였다.

그게 지금의 민혁위였다.

문화부문을 제외한 나머지는 가시적이고 임시적인 미미한 결과물만 내놓는 상태.

안순익은 짧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확인은 해야 했다.

우희준이 뭘 원하는지, 하고자하는 말이 무엇인지.

“편한 시간대 정하고 만나면 되겠습디다.”

- 그럼 식사나 같이 하시죠, 내일 점심 어떻습니까? 약주 맛 좋은 데 있습니다.

“그럽시다.”

태연하게 대답하면서도 안순익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약속 시간이 너무 일렀다.

심지어 내일 점심.

당의 사무총장이자, 유력 국회의원의 점심이 저리 쉽게 비어 있을까?

일부러 자신을 기다렸거나, 아니면 있던 약속을 취소했다는 정황이 더 그럴듯했다.

갑작스런 약속 제안이므로 둘 중 후자가 더 자연스러웠다.

한마디로 원래의 약속을 취소하고 자신과 만나자고 한 것이었다.

가벼운 일로 보이진 않았다.

어쩌면 즉각적인 판단을 요할 수도 있었다.

일이 흘러갈지 조금도 예측할 수 없어서 안순익이 결국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다행히도 자신에게는 도와줄 이가 있었다.

그것도 정보 쪽에서는 한 발 앞서고, 이런 상황에 빠삭한 사람.

안순익이 바로 전화를 들었다.

- 여보세요.

“어! 윤 의원, 지금 바쁜가? 중요한 얘기가 있네.”

***

안 위원장과의 통화는 짧게 끝냈다.

다독이고, 당신의 생각대로 하라고만 해 주었다.

어차피 상황을 몰랐다.

일단은 안 위원장이 생각했듯 접근한 의도를 알아 봐야 했다.

물론 우희준 전 최고위원, 현 보수신당의 사무총장이 움직였다는 사실이 큰 정보긴 했다.

그는 나 의원과 함께 장 의원의 수족처럼 움직이던 사람으로, 새한국당에 있을 때부터 출세 가도를 달린 이었다.

그래서 당시에 최고위원을 했었고, 지금은 사무총장을 하지 않던가?

그런 이가 움직였다면, 장 의원의 허락이나 개입은 반드시 있는 것이었다.

아니, 단순 허락이 아닌 실행 지시를 장 의원이 내렸을 것 같았다.

원래 장 의원은 그런 사람이었다.

단순히 앞과 뒤가 예상하기 힘들 만큼 다르기도 하지만, 여러 방면으로 움직이면서 사람을 원하는 방향으로 잘 몰아가곤 했었다.

내가 그의 수족처럼 움직이다 죽어 봐서 잘 알았다.

아!

그러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장 의원이 안 위원장과 내 관계를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느닷없이 접근한 것이었고.

계산을 마치면서 여의도의 한 한식당으로 들어갔다.

한눈에 봐도 장지문과 마룻바닥, 천장의 보가 아주 값비싸 보이는 장소였다.

나무에 대해서 문외한인 내가 봐도 나뭇결이며 색깔이 고급스러웠으니까.

종업원을 따라 짧은 감상을 마친 뒤.

예약된 방에 들어가자, 먼저 와 있던 사람이 앉은 채로 나를 올려다봤다.

내 앞에서 이럴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3선 이상의 뻗대는 나이 먹은 의원들도 왔으면 왔냐는 인사는 해 주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앉아 있는 사람을 보면 충분히 이해는 됐다.

큼직한 체구에 펑퍼짐한 몸매.

먼저 와 있던 이가 바로 신민주당의 상임고문이자 전직 당대표와 대권후보였던 황택근 의원이었다.

이 사람은 앉아 있을 만했다.

다음 대선의 유력한 후보.

매번 벌어지는 책임론 때문에 당대표에서 물러났다지만, 결국 제자리를 찾고 다시 대선에 나올 인물이었다.

그리고 당을 장악한 사람이었다.

계파싸움으로 경쟁구도를 만들던 이들이 새정치당으로 많이 빠져나간 덕분이었다.

내가 먼저 고개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의원님.”

“사람을 이렇게 기다리게 해도 되나?”

대뜸 나온 말에 가볍게 묵례를 했다.

“의원님께서 이렇게 일찍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원래 다선일수록 늦게 오시지 않습니까?”

나도 5분이나 일찍 왔는데, 그가 먼저 와 있었다.

거기다 음식까지 깔린 상태였고.

황택근의 팔자주름이 크게 움직였다.

“허, 농까지 해? 너 내가 독대해 줬다고 대단한 줄 아는 거야?”

진보 정당의 거두라고는 해도, 역시나 전형적인 대한민국의 늙은 국회의원다웠다.

초면부터 나오는 반말과 헛소리.

여기서 농담을 하거나 대들어서 좋을 게 없었다.

한 수 접어줘야 했다.

내가 황 의원과 만난 이유는 오직 하나, 장 의원을 완전히 수장시키기 위함이었다.

비위를 맞춰 줘야 했다.

“죄송합니다.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의원님.”

꾸벅 허리까지 숙였다가 고개를 들자, 황 의원이 다시금 태연하게 음식을 집어 먹었다.

“할 말이나 꺼내봐.”

자리도 권유하지 않는 심술.

슬그머니 움직이며 정중한 척 물었다.

“예, 그 전에…… 저도 앉아도 되겠습니까?”

황 의원이 고개를 까딱거렸고, 소리 없이 의자를 꺼내 앉았다.

벌써 코스 요리의 절반이나 먹은 그가 나를 재촉하듯 쳐다봤다.

얼른 말이나 하라는 눈빛이었다.

“근래에 장세룡 의원과 트러블이 있었다는 거는 아실 겁니다.”

“그래, 그게 궁금해서 나왔다. 같은 뱃속에서 난 것들이 왜 싸움질인가 싶어서 말이야.”

“그렇진 않습니다, 의원님. 보수신당과 저희 행복한국당은 노선이 다릅니다.”

“허, 말은.”

“도와주십시오.”

“뭘?”

“저도 갚아줄 겁니다.”

황 의원이 코웃음치듯 웃더니 젓가락을 내려놨다.

“너 참 당돌하다? 젊은 놈이 능력도 있고 세력도 있고, 자리까지 있대서 한 번 만났는데…… 대뜸 도와달라고?”

“예.”

“네가 헛수고하는 동안 편을 들어 달라, 이런 말이야?”

“그렇게 해 주시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거 압니다. 법과 도덕, 정의에 편에 서주시면 됩니다.”

그러자 황 의원의 눈이 바뀌었다.

이런 도움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너는 뭘 도와주려고?”

“12월 예산안, 최대한 편의 봐드리겠습니다.”

“네가 그거까지 돼?”

그의 눈이 놀란듯 커다래졌다.

나를 조금 과소평가 하고 있던 건지, 아니면 궁금한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단호하게 대답해 주었다.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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