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33. 먹잇감 (2)
[(속보)보수신당 나경호 최고위원 구속]
[나경호 폭력조직원 사주 불법사찰…… 결국 구속영장 발부]
[검찰, “나경호 의원 구속은 정치적 탄압 아닌 증거 인멸 방지와 추가 수사를 위한 적법한 절차“]
국회 폐회일에 맞춰 일제히 쏟아진 기사들.
프린트 된 주요 일간지의 기사를 확인한 장세룡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 육시럴 새끼들이…….”
꽉 다물린 입에서 욕설이 갈려 나왔다.
나경호가 혈연은 아니었으나, 측근으로 수족처럼 부리던 사람이었다.
말도 잘 들었으며, 쓸 만하기도 했었고.
그런 나경호를 주인과 다름없는 자신의 허락도 없이 잡아채갈 수는 없는 법이었다.
불체포특권을 피해 합법적으로 움직였다고 해도, 폐회 중에 몰래 구속영장을 발부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최소한의 언질이 있어야 했고, 그게 아니어도 협조에 관한 합의가 우선적으로 있어야 했다.
구속영장은 물론이고, 압수수색 영장도 사전에 협의해야 했다.
그게 고위인사에 대한 예의였고, 관례였다.
이는 정관계뿐만 아니라, 재계나 종교계, 연예계에도 해당하는 사항이었다.
영향력과 파급력 때문이었는데, 특히 나랏일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정관계 고위인사는 더 그랬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류는 바로 정치인들이었다.
특히 국회의원들.
겉보기에는 정당이 다르고 지향하는 정치적 목적이 다르나, 실제로는 결국 하나와 같아서 검찰에서 신경 써야 하는 것이었다.
하나 된 피해 앞에서는 모두가 동지였다.
철새로 치부 받는 당적 변경 때문만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국회의원들의 관계가 여야 상관없이 가깝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지역구 사업, 예산, 상임위 업무 등은 국회의원 혼자 해먹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협조가 필요한 일이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양보하며 맞춰 주곤 했었다.
그리고 갖가지 부정.
접대와 향응, 여자 등의 비리가 국회 전반적으로 통용되고 있었다.
‘남자가 일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같은 구시대적인 발상이 기저에 깔린 곳이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만일 서로의 고발로 그런 사실이 하나, 둘 까발려지기 시작한다면?
국회를 통째로 들어 내야 할 수도 있었다.
웬만한 의원들이라면 그런 비리도 하나쯤은 갖고 있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래서 국회의원들끼리의 싸움은 칼부림 직전에 멈추곤 했었다.
서로를 윤리위에 제소해도 제명 같은 일은 벌어지지도 않았고, 고소해도 나중에 흐지부지되기 마련이었다.
의원직을 상실하고 형을 살아도, 언제 그랬냐는 듯 정치판에 복귀하곤 했었고.
물론 그 과정에서 티격태격하거나 쓴소리를 하기도 하고, 모른 체 하기도 하지만 직접 칼을 들고 휘두르는 이는 없었다.
그게 정치판이었다.
이윽고 장세룡이 입가에 힘을 풀고선 스마트폰을 들었다.
짧은 통화음이 끝난 뒤.
굳은 표정의 장세룡이 입을 열었다.
“못다 한 일 좀 해야겠다.”
* * *
장세룡이 움직이고 있었다.
늘어난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그 증거였다.
[빠른 시일 안에 연락 바랍니다. - 농해수위 박상일]
[장세룡이가 회까닥 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윤 최고 대책 좀 들어봅시다.]
[요새 뒤를 캐묻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경찰에 말은 안 했는데, 어떻게 할까요?]
겁먹은 이들의 문자였다.
그것도 현직 국회의원부터 고위 당직자 등등의 사람들.
그들은 단순히 나와의 접점이 있는 것 이상으로 나를 도와주거나, 내게 협력했던 이들이었다.
당연히 받아먹은 것도 적잖았고.
그래서 장 의원에게 타깃이 된 사람들이었다.
내 충직한 부하는 아닐지라도, 내 세력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장 의원이 노리고 움직이는 것이었다.
이유는 하나.
나 의원의 구속에 대한 반발.
그게 자신의 수족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인지, 아니면 관례를 무시한 나에 대한 분노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발단은 그거였다.
털어서 나오지 않는 나 같은 놈은 극소수니까, 어쩔 수 없이 방향을 선회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차차 늘어나는 문자 메시지를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래서는 좋을 게 없었다.
나도 그렇지만, 장 의원도 마찬가지였다.
신민주당이나 새정치당에서도 적대시할 가능성이 높았고,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부정을 먼저 일러바칠 수도 있었다.
상대가 장 의원이니 눈치를 보긴 하겠지만.
그리고 당한 이들을 적으로 돌려서 좋을 게 뭔가?
먼지 좀 묻었고, 흠집도 좀 있긴 했지만 능력깨나 있는 이들이었다.
오물로 범벅된 나 의원이나 보수신당, 친MB계 인사들과 비교하면 청렴하다고 봐도 무방했고.
이들을 일단 안심시키기 위해서 일일이 답장을 보내 주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리고 스마트폰을 들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려 놓을 생각이었다.
수신자는 안 위원장.
전화를 걸자마자, 그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 어! 윤 최고.
“네, 위원장님. 오늘 점심 어떠세요?
- 점심에? 아유, 내가 문화부 국장들 기름칠 시켜 주기로 했는데…….
“그거 때문에 연락드린 겁니다. 죄송하지만, 저하고 점심 같이 하시죠.”
- 음…… 장세룡이 때문에 그런가?
“맞습니다.”
- 그러면 내 바로 달려감세.
안 위원장이 깨달았다는 듯 대답했고, 금세 통화를 종료했다.
오늘로 안 위원장의 진면목을 볼 수 있을 것이었다.
지방을 전전하던 그가 중앙정계에서 물 만난 고기처럼 인맥을 넓히고, 사람을 만나며 일했던 그 모든 것,
그건 단순히 기름칠하는 게 아니었다.
피아를 구분하고, 내가 모르는 사람의 성향과 씀씀이까지 가려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거기서 추려낸 장 의원의 사람들을 내 손아귀에 쥘 생각이었다.
비어 있는 반대손에는 다른 게 필요했다.
권 팀장.
그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 권창훈입니다.
“조사한 거 점심 전에 봐야겠습니다, 가능하시죠?”
- 물론입니다, 의원실로 가져다드릴까요?
“예, 그렇게 해 주세요.”
- 알겠습니다, 바로 보내겠습니다.
이건 전에 했던 숱한 부정과 비리 조사였다. 노출만 멈췄을 뿐,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그리고 이걸 남은 손에 쥘 생각이었다.
양손도 가득해졌으니, 이제 자리도 마련해야겠지.
전화를 끊고, 마지막으로 박 수석에게 문자를 하나 보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 *
63빌딩 백리향.
흰색보로 싸인 4인용 원형 식탁에 세 사람이 둘러앉았다.
장세룡과 친구인 전직 대검 차장 출신의 현직 변호사 김상철, 그리고 정무수석 박우식.
그중 박우식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묵직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가벼운 어조로 목소리를 낸 것이었다.
“바쁘시다고 들었습니다.”
“많이들 매달리는 모양이요?”
장세룡이 비웃듯 입을 열었다.
속내를 빤히 안다는 눈에 박우식이 손을 내저었다.
“저한테요? 아유, 아닙니다.”
“식전에…… 아니. 음식 먹으면서 얘기 하십시다.”
식전에 얘기하라던 윤수혁이 떠올라, 장세룡은 입을 다물었다.
오래지 않아 중식 코스요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촛불로 달구는 찻주전자, 관자와 해파리, 새우 등의 냉채와 소스 몇 방울, 김이 오르는 게살스프 등등.
음식을 들고, 코스 요리의 간이 진해질 무렵이었다.
결국 장세룡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얘기 좀 들어 봅시다, 나 보자고 한 사연 말이오.”
“네, 차장님도 계시니 말씀이 쉽겠습니다.”
그 말에 변호사 배지를 단 김상철이 눈인사를 했고, 장세룡이 이죽거리듯 중얼거렸다.
“쉽기는…….”
“의원님, 그러지 마시고…….”
“일단 말해 보시오.”
장세룡도 잘 알기에 그 정도로 멈췄다.
정무수석이 하려는 건 정계의 파란을 가라앉히기 위한 일이었다.
당청의 관계를 조율하는 게 주 업무지만, 때로는 정계에 개입하기도 하는 게 정무수석의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야 나라가 부드럽게 운영됐다.
가만히 놔두면 어디 한 쪽이 터져 나갈 것이고, 이는 사회에 좋지 않은 현상을 야기할 게 뻔했다.
썩은 부분만이 아니라, 생살까지 파낼 위험이 크니까.
장세룡이 고발과 언론플레이를 준비하는 현직 의원만 스무 명, 그리고 관계(官界)는 서른 명, 재계와 언론인, 지역 유지들은 오십 명이 넘었다.
다해서 백여 명.
이건 선전포고 이상의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느새 박우식이 품에서 흰색 봉투를 하나 꺼냈다.
“한 번 봐주십시오.”
“허, 돈 봉투는 안 받습니다.”
장세룡이 웃는 듯 말하자, 박우식이 고개를 저었다.
무거운 표정이었다.
“엄밀히 따져서 제 건 아닙니다.”
“그럼…….”
말을 이으려던 장세룡이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윤수혁?”
박우식이 무언의 긍정을 표하자, 장세룡이 봉투를 확 낚아채갔다.
“당신은 정무수석이나 돼서는 일개 초선 의원이 시키는 심부름이나…….”
언성을 높이며 봉투를 열던 중.
장세룡이 멈췄다.
안에서 꺼낸 사진과 몇 장의 종이 때문이었다.
얼마 전 태국의 파타야에서 있었던 사건의 일부가 기록된 것들이었다.
학원재단의 전직 비서실 직원들의 신상명세와 사건 기록문, 그리고 경호원들이 액션캠으로 촬영한 화면.
장세룡이 굳은 얼굴로 내용물을 확인하는 사이, 박우식이 말을 이었다.
“지금 그게 터지면…… 학원재단이 소란스러워질 겁니다. 그럼 지금 하고 계시는 일에 들어가는 자금은 끊기고, 재단에 관련된 온갖 파생기사가 찌라시처럼 나돌 겁니다.”
“비서실 그만둔 놈들이야.”
장세룡이 칼같이 대꾸했으나, 박우식은 상관없다는 듯 대답했다.
“압니다, 기록 확인했습니다만, 학원과 꾸준히 연락했다는 기록하고 서류도 좀 확보했습니다.”
장세룡이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대꾸해서 좋을 게 없었다.
아니, 이미 나빴다.
손에 들린 사진은 일부러 촬영이라도 한 것처럼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화면이 이어진 걸로 봐서는 동영상임이 분명했는데, 그러면 사진이 주는 충격보다 더 강렬할 것이었다.
미디어를 타게 되면 보도탐사프로그램을 비롯한 음모론자들이 날뛸 게 뻔할 터.
그렇게 되면 지금 쏟아붓고 있는 자금이 끊기는 것 이상으로 타격을 입을 것이었다.
학원재단 이사장인 큰형은 또 어떻게 반응할지.
장세룡은 입을 꾹 닫은 채 머리를 굴렸다.
저번에도 막힌 것처럼 생각이 나지 않았다가도, 결국 해결책을 내놨었다.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장세룡은 눈앞의 박우식을 바라봤다.
타깃을 바꿔야 했다.
“그럼 박 수석은 윤수혁이랑 손 잡겠다, 뭐 그 소린가?”
“아닙니다, 저는 올해 정국을 조용히 넘겼으면 하는 겁니다. 작업하시는 분 중에는 공직자가 꽤 많습니다.”
“윤수혁 손바닥 위에 있는 것들 쳐 내겠다는데, 그게 불만인가?”
“어차피 욕 먹는 건 정부라서 그런 겁니다. 윤수혁 의원은 어디까지나 빽그라운드에 있지 않습니까? 요새 이미지 안 좋은 건 저희고…….”
“이제 1년차면서 엄살은.”
“그리고 처음에 거짓말을 했는데, 많이들 매달립니다. 저한테는 의원님만한 파워 가 없으니, 사람들이쉬질 않고 전화합니다.”
태도가 강경했다.
이대로면 꺾일 것 같은 태도가 아니었다.
본보기라도 보여야 되는가? 장세룡이 고민했다.
김상철을 통해 검사와 판사 몇을 구워삶아서 영장 청구하고, 각종 사건을 터뜨리면 아픈 만큼 접고 들어갈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은 예상하기 힘들었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
결국 장세룡이 결심을 잡지 못하는 사이, 전화가 걸려왔다.
나경호에게 붙어 있는 변호사였다.
“무슨 일인가?”
- 의원님…… 나경호 의원이 실수를 했습니다.
“무슨 실수?”
- 가만있으라고 했는데…… 구속 전에 불안한 마음에 뇌물을 좀 돌린 모양입니다. 무슨 협박 증거도 같이 해서…….
장세룡이 펄쩍 일어났다.
압수수색 영장이 발부되고, 집과 사무실이 털렸던 때가 떠오른 것이었다.
분명 구속 될 일도 없고, 시간 지나면 엎어질 문제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가만있으라고 했었다.
- 뇌물 전달 과정에서 출입 영상도…….
장세룡이 눈을 감았다.
어떻게든 강행하려고 했더니, 결국 안에서 발목을 잡힌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