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31. 터졌다 (3)
파타야, 리조트.
“시차 때문에 그런가, 피곤하네.”
리조트로 돌아가는 길에 윤재혁이 중얼거리듯 말했고, 아내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도 좀 그래, 괜히 나가자고 했나 봐. 괜찮아?”
“좀 자면 되겠지.”
술이라고는 맥주만 마셨던 윤재혁이 난데없는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잠이 쏟아지는 듯했고, 속이 울렁거리는 등의 이상 현상을 느끼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몸에 힘이 없었다.
눈만 감으면 죽은 듯이 잘 것 같았다.
그렇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순간.
윤재혁이 휘청했다.
탁-
그 몸을 잡은 건 남방 차림의 사내였다.
“괜찮으세요? 많이 드셨나 봐요.”
그의 얼굴을 확인한 윤재혁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신의 경호원들이었다.
“멀쩡해요.”
“객실까지 부축해 드릴까요?”
거절하려 했으나 몸에 힘이 없었다.
“뭐…… 그래요.”
경호원에게 없는 것처럼 있으라고 했었지만, 이미 관광은 끝난 상태였다.
윤재혁이 마지못해 대답한 뒤, 넷이 엘리베이터 올랐다.
마침 경호원들의 객실도 최상층에 있었다.
방의 규모와 편의 때문에 객실이 복도 좌우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어차피 내리는 복도는 같았다.
그렇게 도착한 최상층.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동남아풍의 화려한 복도로 들어섰을 때였다.
남녀 경호원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줄무니 티셔츠의 여성 경호원이 태연하게 목소리를 냈어.
“참, 우리 청소했어?”
“청소 내가 할게. 자기는 기념품만 잘 챙겨.”
경호와 제압을 분류한 암어였다.
동시에 줄무늬 여성이 슬쩍 위치를 바꾸었고, 남방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분위기가 더없이 싸늘했다.
다가오는 이들이 있었다.
맞은편에서 한 명, 뒤에서 한 명.
뒤에서 오는 사내는 손을 감추고 있었고, 맞은편의 덩치는 유독 걸음걸이가 무거웠다.
윤재혁도, 그의 아내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미 극소량의 약물 섭취로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비어가든에서부터 노출된 상황.
두 경호원만 경계심을 높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리조트의 최상층이었고, 객실이 있는 복도였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었다.
복도에는 CCTV도 없었고, 호텔리어도 없었다.
무슨 사달이 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애초에 사고는 예기치 못한 곳에서 터지곤 했었다.
해외 파병부터 특수전 훈련을 받았던 두 경호원은 그 사실을 잘 알았다.
생사는 어느 한순간에 결정되는 것이었다.
띠링-
문 앞에 선 윤재혁이 카드키를 접촉했을 때.
윤재혁 부부와 경호원 남녀를 사이에 두고, 두 사내가 시선을 교환했다.
서로 간의 신호였다.
예상치 못한 두 명의 남녀가 더 있었지만, 계획을 그대로 실행하자는 의미.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날씨나 장소, 상황에 따라서 실행하기 힘든 일이 더 많았다.
두 남녀의 존재가 변수긴 했지만, 그 둘마저 제압하고 같이 엮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곧 카펫을 박차는 두 사내의 발에 힘이 들어갔다.
보폭이 확 커졌고, 뒤편에 있던 외출복 차림의 사내가 재빠르게 손을 꺼냈다.
휙-
내지르듯 나온 손에는 검은 물체가 들렸다.
전기 충격기.
피부가 훤히 드러나서 제압에 효과적인 도구였다.
피를 볼일도, 소음을 유발할 일도 없었다.
마주오던 덩치 큰 사내 역시 마찬가지로 팔을 내 뻗고 있었다.
목표는 목덜미.
이미 전기 충격기 사용 방법은 빠삭한 두 사내였다.
사학재단 비서실 수행팀 출신으로 안 해 본 일이 없는 두 사람은 3, 4단봉이나 대검, 각종 영상기기 따위도 잘 다뤘다.
하는 일이 그런 것들이었다.
불법 사찰하거나 협박, 폭행, 미행 하는 일.
사학재단이 할 수 있는 더러운 일은 모두 도맡아 온 것이었다.
이번에도 같은 방식으로, 늘 하던 대로 움직였는데.
예상치 못한 소리가 퍼졌다.
빠악-
강렬한 타격음이었다.
덩치는 동시에 관자놀이의 고통을 느꼈다. 불에 댄 듯 화끈거리는 통증.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럴만한 시간도, 경황도 없었다.
갑작스러웠고, 아프기만 했다.
찰나의 판단 끝에 덩치의 주먹을 휘둘렀다.
본능이었다.
위험을 몸으로 인지하고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행동.
그러나 그것마저 끊겼다.
그의 시야에 딴 게 들어온 것이었다.
팔꿈치.
사각에서부터 올라온 남방 사내의 팔꿈치가 안면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뻑!
복도에 깔려 있던 카펫이 덩치의 시야를 잠식했다.
덩치의 인상이 찡그려질 틈도, 중심을 잃은 몸이 허우적거릴 힘도 없었다.
이미 뇌가 타격을 입은 상황.
쿠웅-
육중한 몸뚱이가 바닥에 고꾸라진 뒤.
“씨ㅍ……!”
뒤에서 달려들던 사내는 욕설을 채 잇지 못했다.
퍼퍽!
연이은 주먹 소리가 상황을 종결시킨 것이었다.
쿵-
마찬가지로 보통 체격의 사내마저 쓰러졌다.
순식간이었다.
네 사람이 맞붙은 지 10초 밖에 지나지 않았다.
***
- ……알았어. 내가 태국 쪽에 연락 해 볼 테니까, 윤 의원은 일단 기다리고 있어 봐.
상황 설명을 들은 고 의원이 나를 달래듯했고, 금방 전화를 끊었다.
두통 때문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인상을 찌푸리는 와중에도 스마트폰의 연락처가 눈에 들어왔다.
외통위 위원장인 고 의원 다음으로 연락할 사람을 저절로 찾고 있는 것이었다.
몇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국회의원이고, 최고위원인 덕분에 저장된 번호가 적잖았다.
태국 국방부와 선이 닿는 국방기술품질원 원장, 동남아 출장 공무에서 만났던 태국의 상원의원 등등.
그러나 연락하기에는 망설여졌다.
지금 연락하면 오히려 독이 되지 않을까?
내 난처함과 다급함을 광고하는 꼴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도와줄 사람을 늘리면 늘릴수록, 추측성 기사가 나올 확률이 높았다.
보도된 내용은 음모론으로 부풀려지거나, 내 이미지를 깎아먹을 가능성도 있었고.
그들한테 연락하는 건 최후의 수단으로 미뤄야 했다.
정말 위험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일단은 고 의원만 믿고 버텨야 했다.
값비싼 경호원도 넷이나 있으니, 형의 생명이 위험하진 않을 것이었다.
그 사이, 다시 무궁의 정 대표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 의원님, 현장 해결 됐습니다. 두 분 신변은 안전한 상태고, 거수자 둘을 제압했습니다.
“아…….”
탁 풀어지듯 막혀 있던 숨이 흘러나왔다.
다행이었다.
- 거수자들 얼굴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그래요, 한 번 보겠습니다.”
- 지금 이 번호로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거수자 송환 문제가 있는데…… 현지 경찰이나 여기 관계자하고 협조가 가능하겠습니까? 저희가 진행하면 절차가 있기 때문에…….
“될 겁니다.”
외교부를 감사하는 외통위의 수장이 고 의원이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이, 바로 문자 한 통이 왔다.
이미지 파일이었다.
살집이 있는 남성 얼굴과 광대가 불거진 젊은 남성의 얼굴.
유심히 봤지만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사학재단의 비서실 책임자 급과 대면하긴 했지만, 실무자까지는 알지 못했다.
내가 그들을 알게 됐을 때도 짬 좀 먹었을 때였다. 청와대에서 국장 소리 들었을 땐가?
그사이, 정 대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추가로 오해하지 마시고 들으십시오, 현재 두 분 신변은 안전하지만, 소량의 약물에 노출된 상태로 보입니다.
“……약이라면?”
- 네, 생각하시는 그런 종류로 보입니다. 두 분이 자발적으로 섭취하신 게 아니고, 거수자가 투입한 것으로 의심되는…….
“정 대표님, 경호원을 넷이나 보냈는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 윤재혁 씨께서 근접 경호를 거부하셨고, 일정 거리 이상 접근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저희로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의 사과에 말을 멈췄다.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그 정도는 이해해 줘야 했다.
작정하고 달려들면 막기 힘들었다. 그래서 나도 여러 번의 미행과 협박, 폭행 따위를 성공시키지 않았던가?
“그래요, 내가 다시 전화할게요. 무슨 일 생기면 연락 주세요.”
- 알겠습니다, 의원님.
통화를 끊고, 다시 고 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침이 될 때까지 바쁠 것 같았다.
***
‘정치인이 권력자라더니, 그 말이 맞긴 맞구나.’
출장 경호팀의 팀장, 이철원은 새삼 그런 생각을 했다.
경호팀의 에이스들로만 팀이 꾸려졌을 때도, 의뢰인이 행복한국당의 최고위원인 윤수혁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던 그였다.
경호 받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고위 인사나 유력가들이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국내외 탑 클래스의 가수나 배우들이 의뢰인이었고.
당연한 것이니 놀랄 것도, 감탄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습격 사건이 터진 지 30분 정도 됐을까?
눈앞에 현지 경찰 간부와 대사관 직원이 찾아왔다.
밤 10시가 되어가는 시각.
지지부진할 줄 알았던 일 처리마저 칼 같았다.
거수자가 머문 객실을 샅샅이 수색해서 각종 전자 장비와 마약류, 주요 소지품을 전부 수거했고, 경호원들이 상시 차고 있던 액션캠의 영상마저 복사해 갔다.
이윽고 일이 마무리될 무렵, 대사관 직원 하나가 경호 책임자를 찾았다.
“접니다, 팀장 이철원입니다.”
“안녕하세요, 영사과 김덕수입니다. 다름이 아니고…… 윤재혁 씨와 김지희 씨를 병원으로 모시려 하는데, 괜찮겠지요?”
둘이 기절한 것처럼 자고 있었다.
별 이상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이철원도 이미 병원 방문에 대해서 정대환 대표에게 의견을 묻기도 했었고.
“회사에 연락해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유, 그러시죠.”
이철원이 잠깐 몸을 돌려서 전화를 했고, 금세 대답을 받았다.
업무 협조에 충실하라는 말.
“허가 받았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여기는 경찰분들께 맡기고, 이동하시죠.”
“알겠습니다.”
“저 그런데…… 혹시 의원님하고도 통화를 하셨습니까?”
“제가 직접 하진 않습니다.”
“아아, 그래요. 하여튼…… 병원 치료비나 그런 건 신경 쓰실 필요 없으시고. 제가 여기 두 분과 경호원분들의 편의는 최대한으로 봐드리겠습니다.”
직원이 웃음까지 달면서 말했고, 이철원은 짤막한 대답 뒤에 팀원들을 소집했다.
병원으로의 이동, 경호 계획 변경을 알린 것이었다.
그때, 직원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저 말씀드릴 게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저희 대사님께서 병원으로 방문할 예정인데, 혹시 신체 검문 이런 거는…….”
“안 하겠습니다.”
“그렇죠? 아, 원하시면 현지 경찰들한테 협조라도…….”
“괜찮습니다.”
이철원의 대답에 직원이 머쓱한 웃음과 함께 돌아갔다.
***
형이 회복되는데 걸린 시간은 세 시간 정도.
러시아는 동이 튼 지 오래였다.
당연히 나는 그때까지 잠들지 못하고 정 대표와 고 의원을 통해 상황을 전해 들었다.
추가 위협도 없었고, 현지 상황도 정리되는 과정.
고 의원은 제 역할을 마치고 잠에 들었고, 정 대표만이 내게 틈틈이 보고를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형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조용히 넘어가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지만, 형이 제대로 기억하질 못했다.
약물 때문이겠지만, 리조트를 나갔다가 돌아온 사실도 알지 못했다.
병원으로 이송되어서 병원 시트에서 눈을 뜨긴 했겠지만, 그것도 피로 때문이라고 대강 둘러 댔을 테니 상관은 없었다.
오늘의 일은 이대로 묻어 둘 예정이었다.
형은 계속해서 신혼여행을 이어 갈 것이고, 오늘 새벽 비행기로 출발한 경호원들도 곧 태국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내가 걱정할 건 없었다.
형을 습격했던 두 사람의 신변과 각종 증거물도 한국에서 수사할 것이고.
이미 손 지검장의 아랫사람에게 언질을 준 상태였다.
동시에 폭탄도 하나 터뜨릴 예정이었다.
그것도 온갖 음모론과 의혹을 야기할 만한, 언론과 여론이 좋아할 얘깃거리였다.
내가 아는 장 의원과 친인척의 비리, 그리고 권 팀장이 파온 것들까지.
나는 기사로 쓸 만한 것들을 추려냈고, 가장 적합한 걸 하나 골랐다.
성 추문.
그것도 장 의원의 여성 편력에 관한 얘기.
터뜨리기 좋은 것들이었다.
추잡하긴 하지만.
이미 흙탕물에 끌려들어간 상황이 아니던가?
여기서 나오려면 상대를 진흙 바닥에 처박고, 엎어진 등을 지지대 삼아 밟고 올라와야 했다.
그게 당연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