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98화 (98/191)

# 98

31. 터졌다 (2)

러시아에 발을 디뎠다.

조금은 추운 날씨.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에서 한 시간가량 떨어진 숙소로 바로 움직였다.

원래라면 주 러시아 대한민국 대사관에 동행이나 안내 같은 도움을 청하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접선 장소가 호텔이었다.

그것도 모스크바 강을 끼고 있는 5성급 호텔.

물리적이든, 정치적이든 위험이 있기 힘든 장소였다.

크렘린궁이 코앞이고, 한국 대사관이 근처에 있었다. 무궁에서 온 두 경호원이 나를 지키고 있었고.

상황 봐서는 안드레 한도 힘깨나 쓸 것 같았지만, 어쨌든 리스크가 없다는 게 나와 경호원의 판단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호텔.

러시아 정교회 성당처럼 생긴 큼직한 호텔에 들어서자, 안드레 한이 자연스레 로비 데스크로 갔다.

거기서 한참이나 호텔리어 와 대화를 나눈 다음에 그가 돌아왔다.

“회의 테이블 있는 비즈니스 룸으로 잡았고, 로만 라브로프 이름도 방문자로 올려 뒀습니다.”

“한 시간 뒤, 맞죠?”

“맞습니다. 피곤하실 텐데 씻고 쉬는 게 어떻습니까?”

안드레 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곁에 있던 영석이도 좀 지친 기색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장장 아홉 시간을 비행했었다.

해는 진 지 오래여서 도시는 벌써 밤이 된 상태였고.

“그럽시다.”

그렇게 한 시간이 흐른 뒤.

로비에 내려가 있던 안드레 한이 사람 몇을 대동하고 올라왔다.

“이쪽이 로만 라브로프입니다.”

군제복 대신에 정장 차림을 한 흰 머리의 사내였다.

그에게 인사를 청하고, 악수를 나누었다.

한 5, 60대 즈음 되어 보였는데 외국인이라서 나이가 가늠되질 않았다.

자리에 앉아 다과를 들 무렵, 그가 안드레 한을 통해 말을 전해 왔다.

“한국에서 온 국회의원들을 봤었는데, 의원님처럼 젊은 의원은 처음이랍니다.”

한러 의원외교협의회에서 러시아 의회로 일종의 견학을 가기도 했었다.

그리고 이어진 러시아 말.

듣고 있던 안드레 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한국의 대통령과 연결이 되냐고 묻습니다.”

사전에 없던 얘기였다.

그래서 안드레 한의 표정이 어두워진 모양이었다.

“일단 연결되긴 하는데, 그런 거 묻지 말라고 하세요.”

“네?”

안드레 한이 움찔하며 되물었다.

내 뻣뻣한 태도 때문이리라.

지고 들어가도 모자랄 판에 내가 뻗댄다고 느낄 수도 있었다.

러시아 인맥과 정보를 얻고, 러시아의 채널이 되기 위해서 왔으니까.

그러나 내가 보여 줘야 하는 건 비굴함이 아니었다.

능력이었다.

“원하는 걸 말하라고 하세요.”

실권 없는 뒷배는 병풍일 뿐이었다.

지금 여기서 필요한 건 곧이곧대로 대답해 주는 입보다는 당돌한 힘이었다.

이윽고 안드레 한이 말을 전하자, 로만 라보로프의 입가가 찢어졌다.

쾌활한 웃음.

속내는 모르겠지만, 안드레 한의 반응은 괜찮아 보였다.

러시아어도 제법 유쾌한 느낌이었다.

“아시아권에서 의원님만한 사람은 본 적이 없답니다. 뭐든 되겠느냐고 묻습니다.”

그 말에는 나도 웃음이 났다.

내 생각대로라면, 안 될 게 없었다.

나는 다음 대통령은 내 손으로 정할 생각이었다.

***

저녁 무렵, 파타야.

“윤재혁 나갑니다.”

눈이 빠질 듯 스마트폰만 보고 있던 사내가 급히 외쳤다.

화면 속의 저화질 영상에서 최고층 리조트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담배를 피던 덩치 큰 사내가 훌쩍 일어났다.

“내가 잡아 올 테니까 너는 여자 섭외해놓고 있어라.”

“알겠습니다.”

“아, 연장은 챙겨 두고 있어. 권 팀장 새끼들 안 보이는 게 영 찜찜하다.”

스마트폰 어플을 새로 실행하던 사내가 시선을 들었다.

“저희가 노출 됐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쎄다, 공무원 실력은 좆밥이라도 눈칫밥은 존나게 먹은 새끼들이잖아. 객실은 몰라도 너나 나나 봤을 지 알아?”

“그럼 주의하겠습니다.”

“그래라, 여자 섭외도 손발 사이즈 잘 보고 골라와, 고추랑 힘겨루기 하기 싫으면.”

“알겠습니다.”

덩치가 전자 기기와 각종 장비를 챙기다가 멈칫했다.

“그리고…… 라오스로 뛸 준비도 끝내놔.”

일이 잘못될 경우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라오스로 도피할 계획.

임무에 차질이 생길 경우에 집합 장소도 따로 있었다.

“알겠습니다.”

대답한 뒤, 사내가 한쪽 귀의 이어폰을 만지작거리더니 곧장 말을 이었다.

“윤재혁 지금 홀로 내려갑니다, 곧장 비어가든 간답니다.”

“그래, 물뽕은 어디 있어?”

“빽에 있습니다.”

덩치가 허리 가방을 챙겨들고는 밖으로 향했다.

“준비 잘 하고 있어, 다녀온다.”

“다녀오십시오.”

비어가든.

파타야의 바다와 길거리의 야경이 어우러진 관광 명소.

붉은 조명이 흔들리는 유흥가와 마사지숍, 각종 식당들이 주변에 밀집해서 동양인, 서양인 할 것 없이 관광객이 많았다.

그 중에 윤재혁도 있었다.

여행사 대표가 준비해 준 덕분에 이름만 대고 근처에서 마사지를 받았고, 요기를 위해 걸음한 것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식당 한 곳.

파란 병의 맥주가 윤재혁과 아내의 테이블에 먼저 올라왔다.

“좀 살겠다, 오늘따라 더 덥네.”

윤재혁의 아내가 중얼거리듯 말하는 사이.

툭-

덩치 큰 사내가 지나가다가 의자를 쳤다.

아내가 슬쩍 돌아보고 말았고, 윤재혁도 한 차례 쳐다보기만 했다.

그냥 의자를 치고 간 게 전부였으니까.

그러나 그 광경을 지켜보던 30대의 두 남녀의 눈빛이 예리하게 변했다.

“쟤 맞는 거 같은데?”

남방 차림의 사내가 말하자, 줄무늬 티셔츠의 여성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선배님.”

“누가 듣는다.”

“……그래, 자기야.”

줄무늬 여성이 마지 못한다는 듯 대답하는데도 표정이나 행동에는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행복한 커플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 와중에 사내가 대화를 나누는 척 목소리를 냈다.

“아버지한테 전화 좀 해, 백만 원 용돈 보내드린다고.”

회사에서만 사용되는 암어였다.

아버지는 무궁의 정대환 대표, 백만원은 1급 상황, 용돈은 보고.

“그래, 자기야.”

줄무늬 여성이 태연하게 대답하면서 스마트폰을 조작했고, 남방 사내는 시선만 돌려 가며 윤재혁과 덩치, 그리고 주변을 확인했다.

그리고서는 연인끼리 머리를 맞대듯 줄무늬 여성에게 다가갔다.

마치 바람 소리처럼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거수자 1명, 키 180㎝ 중반, 몸무게 100에서 120㎏, 남색 반팔 티셔츠, 베이지 면바지. 검정색 허리가방.”

흡사 연인이 사랑을 속삭이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 와중에도 줄무늬 여성은 빠르게 스마트폰을 조작했다.

이내 스마트폰을 품에 넣은 여성이 웃는 얼굴을 섞어가면서 대답했다.

“용돈 보내드린다고 말했어, 시아버님이 자유 여행하래.”

“자유 여행? 그럼 자기가 기념품 사고, 나는 여기저기 둘러볼게.”

“응, 자기야.”

“기념품 잘 골라야 돼, 알았지?”

경호 대상을 잘 보라는 암어.

“잘 고를게.”

말이 끝남과 동시에 두 남녀의 시선이 더없이 날카로워졌다.

***

“러시아의 대통령이 즐겨 마신다는 벨루가 보드카입니다.”

안드레 한의 설명을 듣는 사이, 로만 라브로프가 기분 좋은 듯 말을 쏟아 냈다.

무거울 수밖에 없는 업무가 끝나서인지, 그가 쾌활하게 떠들었고 안드레 한은 바쁘게 그의 말을 통역해 주었다.

“냉동실에 넣어 놓고 다음 날 먹으면 더 맛있답니다. 얼음 넣으면 물이랑 희석되니…… 그런 요령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맛있게 마실 수 있도록 컵에 대해서도 설명을 하는데…….”

통역을 잇던 안드레 한도 계속 되는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저러나, 어쨌든 협상은 타결되었다.

내가 받아 낸 건 실효성보다는 언론플레이에 적합한 것들이었다.

러시아군 훈련 시찰 및 시설 방문, 러시아 어학장교 인원 100퍼센트 증가 파견 등.

그리고 내가 주기로 한 건 그보다 좀 더 돈이 많이 나가는 일이었다.

안드레 한을 통한 투자 지원, 사업 개척 등등.

한두 푼도 아닌 백억 이상이나 됐다.

나를 꿰고 있는 듯 돈 나가는 일만 언급한 것이었다.

그가 처음에 언급한 ‘대통령’은 그 과정에서 사진이나 좀 찍어 주라는 뜻이었다.

투자나 사업 홍보를 위해서.

구체적으로 협의를 봐야 하겠지만, 일단은 내 쪽에서 조금 손해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개인이 아닌, 국가 간의 권력 차이가 매우 큰 상황이었다.

우위에 있는 게 러시아였고, 반대편에서 군소리도 못하는 게 한국이었다.

공무원도, 공무도 마찬가지였다.

러시아 대통령이 각국의 수장들을 기죽이기 위해 공식 석상의 약속도 안 지키고 고의 지각하는 게 당연한 나라였다.

하물며 공무가 아닌 사적인 영역은 어떠랴?

내가 차기 대통령을 소치 올림픽에 데려오는 건 어떻겠냐고 물어보기도 했었는데, 그건 먹히지도 않았다.

나중에 대통령이 되면 데려오라나…….

나는 그의 말을 들어 준 뒤, 목석처럼 있던 영석이에게 말했다.

“영석아, 가져 온 거 꺼내봐.”

안동소주와 술 주전자, 술잔 세트였다. 안동소주를 제외하고는 전부 청화백자로 만들어진 값비싼 물건이었다.

내가 목함 뚜껑을 열자, 로만 라브로프가 관심을 보였다.

“오리엔탈 문화는 역시 아름답다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감사하다고 전해 주시고…… 제가 편히 모실 테니 이고르 씨와 함께 방한 해 달라고 전해 주세요.”

이고르 그레프, 대통령 경호대 출신의 현 내무군 간부.

그가 러시아의 실세인지는 파악할 순 없었으나, 실권이 있을 것 같긴 했다.

기사나 사진에서도 작지만 얼굴이 보이기도 했었으니.

대통령 경호대도, 내무군도 전부 대통령의 총애를 받는 기관이었다.

특히 내무군은 경호대와는 다르게 사회 치안을 목적으로 일반 전투나 특수전까지 소화하는 막강한 무력 조직이었다.

사령관이 차관급이라지만, 듣기로는 웬만한 장관급이라고 알았다.

결론적으로는 그 두 곳이 군경의 출세 지름길이라는 뜻.

또한 그 지름길을 타는 사람이 이고르 그레프였다.

나로서는 외교부와 대사관을 통해 그 사람을 좀 더 알아 봐야 했다.

그래서 내일 오전부터 대사관에 방문할 예정이었다. 오후에는 비행기도 타야 하니.

말이 잘 통하면, 대사도 내 쪽으로 회유 해 보겠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새벽.

몇 신지 가늠하기도 힘든, 피로로 눈이 뜨이지도 않는 때였다.

2시였던가? 3시였던가?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전화 걸어온 이가 다름 아닌 경호업체 무궁의 정 대표였다.

시차 때문에 뜨이지도 않는 눈을 찡그리며 번호를 확인했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만, 태국에 일이 생겼습니다.

그 순간, 잠이 달아났다.

형의 문제였다.

“무슨 일이요?!”

- 신원미상의 거수자가 접근했다는 보고입니다.

내가 그래서 비용을 따지지 않고 가장 뛰어난 경호원들만 고용했었다.

위장이 가능하게 남녀로 구성된 경호원을 넷이나 보내지 않았던가?

뒤늦게 드는 생각에 얼른 목소리를 냈다.

“어떻게 됐습니까?”

- 전면 대응하라고 지시한 상황입니다. 3분 전까지는 리조트로 복귀한다고 했는데, 거수자 미행이 점점 가까워지는 상황입니다.

“지금 미행 중이라고요?”

- 대사관이나 외교부에 미리 연락을 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저희 쪽에서는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야 하기 때문에 과정이 지체되거나 그 과정에서 불확실한 내용이 기사화될 우려도 있습니다.

피곤함에 머리가 잘 돌지 않았다.

내일 러시아 대사관에 갈 생각을 했는데, 느닷없이 태국 대사관이라니…….

“일단 알겠습니다.”

- 그럼 보고사항 생기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잠깐만요, 그놈들 잡아야 합니다.”

- 알겠습니다.

막판에 번뜩 든 생각을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화면을 보는데 다시금 손가락이 스마트폰 액정을 눌렀다.

이 와중에도 전화 걸만한 사람이 떠오른 것이었다.

이번에 경기도당위원장에 이름을 올린 3선의 고일준 의원.

그가 바로 외통위 위원장이었다.

대사관은 물론이고 외교부에도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끼칠만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십수억 원의 돈을 지원했었고, 경기도당위원장 자리를 주기도 했었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통화음이 꽤 오래 흘렀다.

새벽이라 그런지 부재중 전화가 되었다.

그렇게 두 번째 통화가 이어질 때.

고 의원의 잠긴 목소리가 스마트폰을 넘어왔다.

- ……누구, 윤 의원?

“네, 윤수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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