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97화 (97/191)

# 97

31. 터졌다 (1)

경호업체 ‘무궁’의 대표.

정장 차림의 사내, 정대환과 악수를 나눴다.

쉰이 넘었을 그의 손바닥 굳은살이 거칠고도 딱딱했다.

아직도 현역으로 움직이나?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예상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의원님.”

목소리가 얄따랬다.

생긴 것과 다르게 변성기에 접어든 중고등학생 같았다.

생각해 보니 내가 무궁을 알긴 했어도, 대표와 만나서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었다.

실무자로서 실무자와 접촉한 게 다였다.

외모는 전혀 닮지 않았지만, 유명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이 이 사람과 비슷할까 싶었다.

“예, 반갑습니다.”

늦지 않게 인사를 받고, 브리핑룸의 가죽소파에 앉았다.

음료와 다과가 테이블에 놓이고, 정 대표는 스크린에 뜬 회사소개서를 이용해서 능숙하게 경호 서비스를 설명했다.

“대표님, 그만하셔도 됩니다.”

이건 일종의 의전이었다.

이미 여행사 대표로부터 받은 자료와 내 일정표도 실무자 간에 협의가 끝난 상황이었다.

마찬가지로 실무자들끼리 해결하는 게 기본이었다.

의뢰인의 급수에 맞춰 비슷한 직급이 대우했고.

지금은 내가 왔으니 부득이하게 대표가 직접 나선 것이었다.

“의전 받으러 온 거 아닙니다. 굳이 저한테 설명하실 필요 없습니다.”

정 대표가 주춤한 사이, 말을 이었다.

“푸켓 경호나 러시아 출장 경호는 대표님께 일임하겠습니다. 대신에 한 가지만 확실히 해 주세요. 그 대답 들으려고 온 겁니다.”

“듣겠습니다.”

“만전을 기해 주십시오, 중요한 일입니다.”

직접 사람 죽이는 게 장 의원이었다. 무슨 아마도 나 모르게 뒤로 사람을 쓰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예컨대 사학재단의 비서실 직원들.

몇 번 만나 봤는데, 보통 놈들이 아니었다.

재단의 뒷일을 주로 맡는 걸로 아는데, 같은 집안이니 장 의원의 일까지 해결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어느새 정 대표의 대답이 들렸다.

“알겠습니다.”

예의 특이한 목소리였으나, 눈빛 하나는 권 팀장보다도 강렬했다.

더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보좌진이나 변호사, 대리인이 아니라 내가 직접 온 것이었다.

***

2013년 10월 12일.

테헤란로 인근의 3성급 호텔.

“더 좋은 호텔도 많은데, 왜 여기로 오셨어요?”

뒤늦게 온 윤수혁의 말에 친모 김을자가 손을 내저었다.

“엄마 모임 있잖아, 거기 아줌마가 매달리는데 거절하기가 좀 그래서 왔어.”

“모임에서요?”

“으응, 아줌마 작은 오빠가 여기 사장이래. 그래서 그냥 왔어.”

고개를 끄덕인 윤수혁이 웨딩홀의 로비를 쓱 둘러봤다.

식이 시작되기 직전이어서 윤재혁도 자리에 없었고, 친부인 윤동현도 안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가까운 친척 두어 명, 부조금을 받는 친척들만 입구에 있었고.

물론 찾아오는 사람은 여전히 많았다.

신부 측 지인들과 김을자의 지인이 꽤 많았다.

윤수혁도 잠깐을 서 있다가 안으로 들어가려던 무렵.

일단의 무리가 단걸음으로 다가왔다.

“의원님!”

처음 보는 얼굴.

윤수혁이 반사적으로 웃는 낯을 하고, 묵례하는 사이에 김을자가 목소리를 냈다.

“언니 왔어?”

“응, 왔지. 어머, 큰아드님도 계셨네?”

방금 언급한 모임의 여성이었다.

“반가워요, 우리 작은아드님.”

그녀가 살갑게 인사하자, 곁에 있던 50대의 남성도 목소리를 냈다.

“아르모스 호텔 대표, 김충권입니다. 저희 호텔을 이용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인사와 동시에 대표이사가 꾸벅 고개 숙이자, 뒤에 있던 중년의 사내들도 허리를 접었다.

그렇게 대표이사와 인사할 때.

기다렸다는 듯 몇몇의 사람들이 다가왔다.

“의원님!”

구의원을 비롯한 몇몇의 5, 60대 사내들이었다.

“이제 들어가자, 얘.”

때마침 식 예정 시간이 다 됐기에 윤수혁이 양해를 구하며 자리를 떴다.

그렇게 들어간 신랑 대기실.

마지막으로 화장 점검을 받던 윤재혁이 시선만 움직여서 윤수혁을 바라봤다.

“형, 결혼 축하하고…… 얘기 들었지? 경호원 붙여 준다고.”

“오바는…….”

중얼거리듯 말한 윤재혁은 그렇게만 대꾸하고 말았다.

친모 김을자를 통해 윤수혁이 부조한 금액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10억, 증여세가 부과되는 큰돈이었다.

물론 윤수혁이 가진 재산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긴 했지만, 그게 줄 수 있는 적정액이었다.

그 이상은 과도한 금액이었다.

윤수혁의 목표는 형을 부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치권력을 움켜쥐는 것이었다.

작은 돈이라도 표심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쓰여야 했다.

그러던 중 웨딩홀 직원이 노크하며 들어섰다.

“신랑 입장 준비해 주세요.”

윤재혁을 가만히 바라보던 윤수혁이 짧게 눈짓만 하고 돌아섰다.

아직 생기지도 않은 위험을 말하려다 만 것이었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으리라.

윤수혁은 그렇게 생각하고 식장의 가족석으로 갔다.

***

형이 신혼여행을 간 지 이틀째.

영석이, 무궁에서 온 두 사람, 안드레 한과 함께 러시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경호원들이 안드레 한을 보고는 타 업체에서 데려온 인력인지 확인한 것 외에는 별다른 해프닝은 없었다.

굳이 얘깃거리를 찾자면, 전부 비즈니스 석에 태웠다는 것.

내 앞뒤로 경호원과 영석이가 앉았고, 옆자리에는 안드레 한이 앉았었다.

그래선지 안드레 한이 꺼낸 대화의 첫머리는 비즈니스 석이었다.

“수행하시는 분들도 전부 비즈니스석에 앉는 건 처음 봅니다. 전에 알던 차관은 항공사에서 업그레이드를 몇 번 받았다고 하던데, 수행원들까지는…….”

안드레 한이 대단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실제로 항공사 관례상 장차관급 이상의 주요 인사들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서비스가 나오곤 했었다.

주로 귀빈실을 이용할 수 있는 고위층 인사들.

기본적으로 좌석 업그레이드 되었다.

나도 몇 번 받아본 적이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공무도 아니고, 예약을 비즈니스로 해서 업그레이드를 받지 못했다고 대답해 주었다.

안드레 한이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원래는 받으십니까?”

“공무 때문에 보좌진이 예약할 때는 비즈니스로 종종 업그레이드 받긴 했었죠.”

그리고 대동한 보좌진은 내돈으로 클래스를 바꿔 주곤 했었다.

“이번 러시아행이 업그레이드 비용을 퉁 쳤겠습니다.”

비행 한 번에 거의 3,000만 원.

숙박 후 돌아오는 여정을 더한다면 마찬가지로 3,000만 원이 추가 될 것이었다.

왕복 교통비만 6,000만 원이니 그럴 수도 있었다.

내가 받았던 업그레이드 서비스는 국내선에 해당되는 얘기였으니까.

그렇게 직항하는 9시간 동안 가벼운 농담과 대화를 나눴다.

중간에 사무장이 찾아와서 편의를 물으며 서비스를 제공할 때를 제외하고는.

그 중에는 본인 얘기보다는 딸인 한사랑의 얘기가 많았다.

어렸을 때부터 예뻐서 인기가 많았다는 둥, 엄마한테만 애교를 부린다는 둥…….

그러던 중 안드레 한이 제공 받은 와인을 홀짝이다가 입을 열었다.

눈빛이 주저하는 듯 보였다.

“이거 원래 카챠가 묻지 말라고 했지만…….”

무슨 말을 하려고?

시선도 그렇고, 말도 뜸을 들이고 있었다.

“혼인 얘기는 나누셨는지……?”

아, 하는 소리가 나왔다.

선을 봤으니, 당연히 결혼 얘기가 나와야 했다.

마찬가지로 나도 결혼을 목적으로 만난 여자가 한사랑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싶어서 내가 되물었다.

“혹시 아버님께서 생각하시는 게 있으십니까?”

“딴 건 없고, 저는 좀 일찍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일찍이라 하시면…….”

“내년 5월 전에…… 그거면 됩니다.”

5월 전이면 만난 지 1년도 안 된 시점이었다.

나도 봄에 결혼을 하겠다는 가벼운 생각을 갖고 있긴 했지만, 막상 여자를 만나니 결혼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하는 행동이나 말은 그렇지 않아도, 어쨌든 93년생이 아니던가?

너무 어려서 좀 걸리는 것이었다.

당연히 어린 게 좋긴 하지만, 사회적인 시선을 감내해야 하는 결혼에는 긍정적인 요소가 아니었다.

“카챠가 만 22세 전에 한국과 러시아 중에 한 곳을 선택해야 됩니다. 사실 국적 선택이 무슨 관계가 있겠냐고 할 수도 있지만…….”

투박한 손으로 와인잔을 쥔 안드레 한이 망설이듯 말을 이었다.

“가정도 꾸려야 하고, 미래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이었다.

그사이 안드레 한이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내게 조심스레 말을 건네 왔다.

“의원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선을 세 번이나 본 건가?

“아버님 말씀 유념하겠습니다.”

“그래주시면 감사합니다, 의원님. 사실 우리 카챠가…….”

인사 뒤에 안드레 한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유아시절, 초중고 학생 생활을 넘나드는 얘기는 모스크바에 도착할 때까지 이뤄졌다.

***

태국, 파타야.

흰색 크라이슬러 리무진 한 대가 속도를 줄였고, 뒤로는 무궁의 경호업체에서 렌트한 승용차가 조용히 멈췄다.

도착한 곳은 윤재혁과 아내가 머물 장소였다.

잘 가꾸어진 정원, 수영장, 그리고 해변가와 함께 있는 대규모 리조트.

윤재혁이 먼저 차에서 내리는 사이.

멀찍이서 예리한 눈으로 상황을 주시하던 사내가 전화를 꺼내 들었다.

“목표물 확인했는데, 뒤에 차 한 대 붙었습니다.

- 차?

“네, 까만색에 차종은 도요타 비오스고, 차번호 뒷자리는 6808번입니다.”

- 경호원인가? 권 팀장 애들 아니야?

“얼굴까지 보진 못했습니다. 가까이 가서 얼굴 확인합니까?”

- 됐어, 흥신소 애들 경찰밥 먹던 놈들이다. 거리 봐가면서 윤재혁만 주시하고, 걸리면 라오스로 뛰어.

“알겠습니다.”

- 한 시간 안에 도착한다, 특이사항 생기면 보고해.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통화를 마친 뒤.

여행객 차림의 사내가 태연하게 리조트로 걸음을 옮겼다.

이틀 뒤.

리조트 기본 객실.

사내가 한쪽 눈을 번갈아 문지르면서도 스마트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윤곽과 색감만 잡히는 저화질의 영상으로 화면에 나타난 것은 리조트의 복도였다.

그것도 리조트 최상층에 위치한 윤재혁의 객실 앞.

사내가 체크인과 동시에 복도에 설치한 크기 20㎜에 불과한 초소형 무선 카메라였다.

양면테이프로 복도 벽과 천장 사이에 부착한 카메라는 사내의 스마트폰으로 영상과 음향을 전달 중이었다.

그러던 중.

“조식은 왔다갔어?”

다른 덩치 큰 사내가 멀티탭에 전자 장비를 꽂으며 물었다.

각종 배터리와 무선 카메라, 도청기였다.

외출복 사내는 화면에 집중한 채 대답했다.

“온 사람도 없고, 나간 사람도 없습니다. 비 그칠 때까지 가만있을 거 같습니다, 오늘 저녁에 비어가든에서 낚을 수 있겠습니까?”

아직 건기로 접어들기 전이어서 소나기 같은 빗방울이 쏟아지고 있었다.

덩치가 바깥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오늘 안 되면 안 돼, 내일 요트장 다녀오는 길에서라도 년놈 다 잡아야지. 아, 권 팀장 애들은?”

“안 보입니다. 리조트 도착했을 때만 노출됐고, 보이지도 않습니다.”

덩치도 스마트폰을 꺼내다가 미간을 좁혔다.

“신혼여행이라고 풀어 둔 모양인데…… 이상하다.”

외출복이 덩치를 잠깐 쳐다봤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차는 있는데 객실 파악이 안 되잖아, 여태 한 번도 노출 안 된 것도…….”

“윤재혁 성격이 좃 같아서 흥신소 새끼들 짱박혔을 수도 있습니다. 윤수혁도 왕래 안 하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감이 별론데.”

“지금이라도 객실 찾아봅니까?”

영상을 보던 사내가 슬쩍 묻자, 스마트폰으로 날씨를 확인한 덩치가 대꾸했다.

“아냐, 비 금방 멎는다. 준비나 해 둬. 혹시 모르니까 연장 챙기고.”

“알겠습니다.”

외출복이 단단히 대답하는 사이, 빗줄기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뒤, 빗소리가 완전히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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