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30. 비선 (2)
상임위 회의가 끝난 직후.
바로 약속 장소를 잡았고, 안드레 한과 대면했다.
통화로 해결 할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도착한 강북구의 한식당.
VIP룸에 들어가자, 안드레 한이 몸을 일으키며 나를 맞이했다.
제대로 된 소개도 없이 만나는 두 번째 자리였다.
물론 호칭은 정해져 있었다.
“아버님.”
“아, 오셨습니까, 의원님.”
먼저 와 있던 안드레 한과 악수를 나눴다.
내가 아버님이나 되는 그를 불러낸 꼴이어서 살짝 낮춰 주었다.
“늦은 시간에 불러서 죄송합니다,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에…….”
“아닙니다,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보니…… 어떻게, 술이라도 한 잔 하시겠습니까?”
아직 술 먹고 자축할 때는 아니었다.
“얘기 듣고 마시는 걸로 하겠습니다.”
“아아, 그렇게 하시죠.”
자리에 앉으면서 바로 말을 꺼냈다.
“그럼…… 로만 라브로프, 그 사람은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내 말에 안드레 한이 지갑을 꺼냈다.
“처음에는 이 친구로 시작했습니다. 이 친구의 친척이 군대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의 손에 들려 나온 건 한 장의 명함이었다.
그것도 러시아 현지 명함.
국정감사 기간인 10월에 들어서는 과외도 못 받는 상황이라, 글자 몇 개만 알아보고 말았다.
마침 안드레 한이 알아서 설명해 주었다.
“아르카디라고, 입출항 관리하는 항만 공무원입니다. 그 친구가 다리를 놨고, 이제야 성사 된 겁니다.”
“그게 로만 라브로프라는 거죠?”
“네, 신분은 확실합니다.”
안드레 한이 확신어린 대답을 했다. 이어진 입에서는 다시금 러시아 말이 나왔다.
“генера́л-майо́р(소장), 아. 우리나라 말로는 원스타, 준장입니다.”
신분이 뭐가 됐든, 나는 모르는 정보였다.
국방위원회 위원이라고 해도 외국 군대의 일개 준장까지 알 순 없었다.
아무리 국회 안에 있다한들, 국방위원회 위원이라 한들, 딴 나라의 장성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것도 폐쇄적인 면에서는 손꼽는 러시아였다.
물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속칭 채널.
러시아 와 교류할 수 있는 사람이나 수단을 갖고 있으면 될 일이었다.
다행히 내게는 그런 채널이 안드레 한 말고 하나가 더 있긴 했다.
이번에 지명직 최고위원으로 임명한 남병기 의원.
그가 바로 한러의원외교협의회의 간사였고, 산업통산자원위원회의 위원이기도 했다.
물론 그가 가진 힘은 없었다.
러시아 상원의회로 걸 수 있는 직통 번호도 두어 개가 전부였고.
하지만 현재로서는 그만한 러시아 채널은 없었다.
외교라고 하면 미국과 일본, 중국을 놓고 가늠하는 게 대한민국 국회였다.
러시아는 신경 쓰면서도 우선순위에서 미뤄 두곤 했었다.
그래서 내가 남 의원에게 수십억을 투자하는 셈치고 당비로 태운 것이었다.
호남지역 재선의원이라는 표면적 명분도 있었고, 내 말도 잘 따라 주니 써먹기에 용이했고.
그러다 걸리는 게 하나 떠올랐다.
“현직 준장이 그만한 권한은 없을 텐데요?”
파병은 일개 장성이 선택할 문제가 아니었다.
의회의 의결이나 행정부 고위직의 승인이 필요한 일이었다.
“아, 그 사람한테는 Реальная власть(실권)이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저하고 같은 경우입니다.”
쉽게 말해 비선.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한 관계를 말하는 것이었다.
나로 따지자면 오 대표나 안 위원장, 권 팀장 같은 이들이 비선이나 마찬가지였다.
장인이 될 안드레 한까지 포함해서.
“그럼 테이블에는 어떻게 앉습니까? 제가 러시아로 나가야 됩니까?”
“나가야 됩니다.”
“기간은요?”
“날짜는 합의 보질 않았지만, 빨랐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제 신분은 말하신 겁니까?”
“그건 아직 말하지 않았습니다.”
한숨이 나왔다.
만날 사람도, 안드레 한의 대처도 괜찮았다.
외교부를 통해 러시아에서 의전 받으면서, 경호 받으면서 만나면 물리적인 위험도 없었다.
하지만 시기가 좋질 않았다.
국방위 감사 기간이었다.
질의서와 자료만 수천 페이지였고, 감사할 소관부처 중에는 군부대 특성상 현장으로 나가야 하는 곳도 꽤 많았다.
이 와중에 러시아를 간다니.
압박이 되긴 했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하루 정도는 빼도 괜찮았고.
다행히 내게는 유능한 보좌진이 있었고, 행복한국당에는 내 의견을 반영할 남 최고도 있었다.
내가 러시아의 채널이 되려면 어쩔 수 없었다.
대답을 기다리던 안드레 한을 쳐다봤다.
“일정 잡겠습니다, 자리 마련해 주세요.”
***
“준비 다 됐습니다. 실행해도 되겠습니까?”
장신의 사내가 정중하게 말하자, 장세룡이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뻐억-
연기가 연하게 퍼지며 환기 시설로 흘러들어갔다.
“얘기 풀어 봐.”
“듣지 않으시는 게 낫습니다. 모든 실행은 제 독단으로…….”
“영화 찍어?”
“……아닙니다.”
“말 해.”
사내가 짧게 고개 숙였다.
“목표는 윤수혁의 친형, 윤재혁입니다. 오는 10월 12일에 결혼식을 올리고 13일에 신혼여행을 간다고 합니다. 위치는 태국의 푸켓으로 인천공항을 통해…….”
“요점만 말해, 뭘로 엮을 거야?”
장세룡이 말을 끊었다.
룸살롱 사건에서도 히로뽕 투약을 뒤집어씌우는 것만 언급했던 게 바로 그였다.
사내가 재빠르게 머리를 굴린 뒤 입을 열었다.
“신혼여행 숙박시설에서 음주 과다, 마약 투여로 만들겠습니다.”
“그래서?”
“이후에는 사법처리와 언론플레이를 통해 윤수혁의…….”
장세룡이 고개를 젓자, 사내가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어느새 마주한 장세룡의 두 눈에서 안광이 시퍼렇게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차갑고 아득한 시선이었다.
“여자는 놔둬.”
사내가 말을 기다렸다.
“수면제 같은 거 태워서 여자는 재우고, 남자 새끼는 태국 여자 품는 걸로 가.”
“대표님, 하지만 성매매 여성이라는 제삼자가 개입하게 되면…….”
“그 정도 감수 못해?”
장세룡의 눈가가 가늘게 찢어졌다.
“이러면 홍 전무랑 너랑 다를 게 뭐야?”
“죄송합니다.”
사내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더 이상 고용주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순 없었다.
“내가 신혼부부 인생 조지라고 자네한테 일 준 거 같아?”
아니었다.
사내도 잘 알았다.
윤수혁의 정치적, 사회적 위신 추락과 영향력 감소가 주 목표였다.
그걸 실현하기 위해 계획에 가족을 끌어들인 것이었고.
“목적만 생각해.”
“알겠습니다.”
사내가 얼른 대답했다.
성매매 여성이 추가되면 결과가 바뀔 것이었다.
장세룡이 원하는 대로, 윤수혁은 더욱더 추락하게 될 것이었다.
단순 마약 투약으로 인한 검찰 조사 뿐만 아니라, 부부간의 이혼까지 언급될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자산가인 윤수혁이 위자료를 대신 내줄 가능성도 높았다.
“부모는?”
이어진 차가운 물음.
사학재단에서 궂은일을 도맡았던 사내가 주춤했다.
경외라고 해야 하나?
사내는 그런 감정을 느꼈다.
형에서 그치지 않고, 장세룡은 부모까지 언급하고 있었다.
또한 몇 날 며칠동안 세운 계획을 듣고서 단번에 방향을 뒤틀었다.
그것도 더 추잡한 수법이었다.
사내가 얼른 대답했다.
“친모는 사교 모임을 나가고, 친부는 골프장과 휴양 시설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계획은? 없어?”
“친부 관련한 계획을 준비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 계획 단계여서 보고드릴 게 없습니다.”
“하는 김에 같이 작업해.”
“친부도 말씀이십니까? 그럼 시간이…….”
탁.
담뱃재를 턴 장세룡의 행동에 사내가 말을 멈춘 사이.
“내가 사람 죽이랬나?”
“아닙니다.”
사내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뭐든 같이 처리하고, 애비는 공사하고 증거만 가져와. 터뜨리지 말고.”
한마디로 죄를 만들고, 증거를 챙겨 오라는 뜻이었다.
음주운전이 됐든, 불륜이 됐든.
“수단은 나중이야, 목표가 먼저. 알았나?”
툭툭 내뱉듯 나오는 장세룡의 말에는 서슬 시퍼런 분위기가 섞여 있었다.
악마가 사람 흉내를 내면 저럴까?
사내는 헛된 생각을 얼른 지워 버리고 장세룡의 말에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확실하게 해야 돼.”
“네, 대표님.”
사내의 단단한 대답에 장세룡이 문가로 턱짓을 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사내가 눈치껏 일어나서 나갔다.
그사이, 장세룡은 필터에 다다른 불씨를 보고는 담배 한 개비를 새로 꺼냈다.
이번에야말로 윤수혁을 눌러야 했다.
눈엣가시 같았던 놈이 어느새 당의 최고위원이 되었고, 안에서 세력까지 만들고 있었다.
정칫밥 먹고 눈치 늘기 전에 조금이라도 일찍 밀어내야 했다.
과거에 발목잡힌 일이 있긴 했지만, 장세룡의 본능이 그렇게 하라고 시키고 있었다.
뭔가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이게 안 되면 왠지 윤수혁이 자신의 길을 막을 것만 같았다.
단순히 걸리적거리는 수준이 아닌, 완전히 가로 막을 정도로.
***
행복한국당 중앙당사 회의실.
당에 들렀다가 권 팀장과 조용히 독대했다.
“외국을 나가신다는 겁니까?”
그의 얼굴에 심상찮은 분위기가 보였다.
“예, 무슨 일 있습니까?”
“제가 따라붙기가 힘듭니다.”
“괜찮습니다, 나가도 외교부 의전 받고 공식적인 장소만 방문할 겁니다.”
내 대답에도 그의 표정이 쉬이 풀리지 않았다.
단순히 경호가 어려워서 그런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왜 그러십니까?”
미간에 힘을 주던 권 팀장이 결국 입을 열었다.
“전에 보고 드린 이후로 느슨하게 감시만 하고 있었는데…… 형님 쪽으로 사람이 붙었습니다.”
“형님이라면, 제 형이요? 윤재혁을 말씀하시는 거죠?”
“맞습니다.”
권 팀장이 간결하게 대답하고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설명을 이어 가는 것이었다.
“저희 직원 눈에 보인 건 하루이틀 정도였는데, 상대가 급이 높았습니다. 흔한 흥신소 애들이 아니고…… 프로처럼 보였습니다.”
“프로요?”
“네, 거수자가 하루이틀 보였다고 말씀드렸지만, 제 판단에는 저희 직원들이 놓친 것 같습니다.”
“……언제 사단이 날 지 모른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내 말에 권 팀장의 고개가 떨어졌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경호 부분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알아서 하신다는 말씀은……?”
“돈 둬서 뭐하겠습니까, 써야죠.”
잠깐 한두 달 계약했던 경호원을 제외하고는, 경호 업체를 찾아간 적이 없었다.
국회의원이 경호원까지 고용하면 들을 소리가 뻔하기 때문이었다.
좋은 말이 나올 수가 없었다.
과잉보호, 귀족 흉내 등등.
그래서 음지에서 신뢰를 우선해서 권 팀장을 데려다 쓰고 있는 것이었다.
다만 지금의 경우라면 말이 달랐다.
위협이 가시화된 상황.
형의 피해가 내 피해가 될 것이었다. 상대는 장 의원일 확률이 컸다.
가족까지 건들만한 인성은 장 의원에게 가장 어울리는 것이었다.
밥 먹다가도 사람을 죽인 놈이니.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서 바로 번호 하나를 눌렀다.
- 네, 의원님. 박민표 보좌관입니다.
“역삼동에 주식회사 무궁이라는 경호업체 있습니다. 거기하고 연결해 주세요.”
전직 청와대 경호원 출신, 특작부대 출신이 세운 업체로 우리나라에서 손꼽은 곳이었다.
북한 측 요인을 보호한 적이 있다고 듣기도 했었고.
- 경호업체라니요? 무슨 일 있으십니까?
“저희 형이 해외로 신혼여행을 갑니다, 걱정돼서 그런 거니까 되도록 조용히 처리해 주세요.”
-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권 팀장을 쳐다봤다.
“해외 나가는 기간 동안은 무궁에 맡기겠습니다. 팀장님은 저희 부모님만 확실하게 마킹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이후로도 짧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금세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박 보좌관이었다.
- 의원님, 무궁 대표하고 미팅 일자 잡았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내일 뵐게요.”
전화를 끊고 난 뒤, 권 팀장과도 헤어졌다.
오피스텔에 돌아오니, 짤막한 생각들이 떠오르다가 지워지곤 했다.
장 의원 때문이었다.
나를 건드린 것보다도, 형을 건드린 게 묘하게 더 기분 나빴다.
욕을 해도 내가 하지, 딴 놈이 하는 건 마뜩잖기 때문일까?
뭔가 불쾌했다.
이번 일만 해결 되면 나도 장 의원 측에 폭탄을 하나 터뜨려야 할 모양이었다.
권 팀장이 힘들게 모은 것들.
시기가 안 맞아서 전략적 공격이 아닌, 보복성 공격이 되겠지만.
써야 할 때는 써야 했다.
아니, 쓰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