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95화 (95/191)

# 95

30. 비선 (1)

어느덧 8월.

당명 변경 작업이 마무리에 다다랐다.

후보군 중에 ‘보수‘라는 글자가 들어간 것들을 쳐 내니, 네 개의 당명이 남았다.

원로 의원 몇이 ‘보수‘라는 글자에 아쉬움을 보이긴 했으나, 그런 걸 받아줄 생각은 없었다.

지금은 정치 환멸의 시대였다.

이념 같은 단어는 대부분의 국민이 피부로 느끼기 힘든 것이었다.

정치사상으로 총부리를 겨누던 냉전 시대는 교과서나 역사서에 나오는 단어가 됐다.

지금은 남북의 대립이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상보다는 먹고 사는 일이 절실하게 느껴지는 게 당연한 때였고.

나조차도 생필품 물가와 수도세, 기름값 등을 따지면 셈하지 않았던가?

아니, 보통 사람이라면 다 그랬다.

50원의 휘발유 가격 차이와 여행용 티슈 증정 때문에 주유소를 옮기는 게 지금의 상황이었고.

그렇게 전국상임위원회와 최고위원회의에서 최종 당명이 의결되었다.

행복한국당.

정해놓고 보니 조금 웃겼다.

전생에서도 마지막까지 당명 후보에 들었던 게 행복한국당이었다.

역사가 바뀌긴 해도 세상 굴러가는 건 결국 거기서 거기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원형의 로고에 붉은색, 흰색, 금빛을 섞어 만든 디자인이 PI로 선정되었다.

조컨설팅의 조양준 대표와 강북구의 디자인 업체, 인쇄 업체가 힘깨나 쓴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는 당연히 강북구의 업체가 당의 로고 출력을 책임지고 발주 받았다.

전국에 뿌려진 PI 잉크값만 해도 어마어마했으니, 내게 돌아올 리베이트 금액도 적지 않았다.

그 비율이 발주 금액의 7퍼센트로 작긴 했지만,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정당이니 들어가고 나오는 돈의 크기가 상당했다.

그렇게 당명 변경 작업이 끝나고.

당대표가 된 조성현 대표가 나를 은근히 불렀다.

“윤 최고, 나 도와준 것도 고맙지만…… 이제는 당무에 집중합시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요?”

더 이상의 일감 몰아주기나 리베이트는 없다는 뜻.

그도 나름 고심한 모양이었다.

당비와 혈세가 빠져나가는 걸 숫자로 보고 있자니 마음이 바뀌었을 수도 있고.

어쨌든 예상하고 있던 것이었다.

조 대표를 통해서 돈 빼먹는 것은 한 번이면 족했다.

이번 당명 변경은 그의 빚을 덜어 주는 척하면서, 동시에 공범자로서의 빚을 지우는 상징성이 있는 행위였다.

이거 말고도 돈 버는 방법은 많았다.

강북구의 사업이나 행사를 유치하면서 리베이트를 받거나, 관련 사업의 연구용역을 발주하면서 금액을 부풀리면 그만이었다.

사람만 매수하면 증거도 남지 않는 일이었다.

“이해합니다, 당대표님.”

“고마워요, 앞으로 윤 최고는 더 큰 그릇이 될 사람입니다. 괜한 오점 남기지 말고, 해 왔던 대로 쭉 갑시다.”

“말씀 고맙습니다.”

“진심입니다, 윤 최고 정도 되는 사람이면 앞으로 할 일이 무궁무진합니다.”

그가 내 어깨를 짚으면서 굳은 눈빛을 해 보였다.

“그럼 믿겠습니다.”

“예, 믿으셔도 됩니다.”

***

9월, 가을에 접어들었다.

윤수혁의 보좌진이던 5급 비서관 한 명이 결혼 소식을 알렸고, 친형인 윤재혁도 식장을 잡았다.

윤수혁을 마주한 윤재혁이 딱딱하게 말했다.

“결혼식 전에 퇴직하기로 했다.”

“잘 생각했어.”

“너…… 아니다.”

윤재혁이 말을 이으려다가 말았다.

눈앞의 동생은 대학시절의 친동생이 아니었다.

국회의원이나 최고위원, 사업가라는 바뀐 직업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었다.

한마디로 너무했다.

저번의 만남 이후로 자신을 친형이 아니라, 청문회 증인 다루듯 대했기 때문이었다.

윤수혁이 보낸 변호사가 통장과 주식, 보험 내역을 탈탈 털어 갔고, 회사로는 법적 대리인이 와서 개인 업무부터 부서 업무와 제반된 사항을 샅샅이 살폈었다.

윤재혁이 알기로는 그 대리인이 회사 대표이사와 독대까지 했었다.

감사원에서 근무했다는 경력자라고 했던가?

이윽고 분위기를 알아차린 윤수혁이 입을 열었다.

“형.”

윤재혁이 대꾸하지 않고 눈만 맞췄고, 윤수혁이 말을 이었다.

“어떻게 보면 형 인생에 개입한 것 같아서 미안해.”

이렇듯 달래 줘야만 했다.

윤재혁이 탈선해서 좋을 게 없었다.

가족의 실수나 일탈로 타격을 입은 정치인이 얼마나 많던가?

대통령 일가부터 그랬다.

마약을 했던 박통의 아들과 소통령으로 군림했던 YS의 아들 등등.

그 외에도 가족 때문에 기자회견하거나 고개 숙인 정치인은 쌔고 쌘 곳이 바로 대한민국이었다.

그런 정치인의 전철을 밟지 않겠노라고, 윤수혁이 생각을 다잡았다.

그사이, 윤재혁이 딴 말로 대답했다.

“……약속이나 지켜.”

신변 정리를 마치면 윤수혁이 건물을 준다고 약속했었다.

마포구 망원동 소재의 6층짜리 빌라.

약혼자와 함께 공사 중인 현장에 다녀왔기에, 윤재혁은 건물이 어떤지 잘 알았다.

후려치기로 진행되는 게 아니라, 시설도 준수했고 외관도 번지르르했다.

그사이, 윤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꼭 진행할게, 근데…… 결혼 날짜가 10월 12일이었나?”

윤재혁이 고개만 끄덕였다.

“신혼여행은 다 준비했어?”

“뭐, 대충.”

이번에는 짧게나마 대답한 윤재혁의 눈이 은근하게 바뀌었다.

윤수혁이 뭐라도 하나 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섞인 것이었다.

“준비 아직 안 됐으면 여기 전화 한 번 해 봐.”

동시에 테이블 위에 종이가 하나 놓였다.

여행사 대표 명함.

“말은 해 놨어, 비용도 내가 처리할 거야.”

윤재혁이 침을 꿀꺽 삼켰다.

동생인 윤수혁이 자산가이고 국회의원이지만, 친형인 자신은 막상 뭔가를 제대로 누려 본 적이 없었다.

차 한 대, 부모님을 통한 용돈이 전부였다.

애초에 사이가 좋지 않아서 기대할 게 없었지만.

이제는 받고 싶었다.

이름 팔아서 챙겨 먹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윤재혁이 슬그머니 명함을 집어 갈 무렵.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윤수혁이 목소리를 냈다.

“형, 필요한 거 있으면 그냥 말 해.”

“……그래.”

윤재혁의 대답이 전보다 고분고분해졌다.

변호사와 건물, 신혼여행이 만들어 준 작은 효과였다.

그 모습에 윤수혁이 쓰게 웃었다.

***

9월 중순.

드디어 권 팀장이 왔다.

인화된 사진과 녹취록, 쓰레기 더미에서 꺼냈을 각종 영수증과 우편물까지.

몇 개의 박스를 보여 준 권 팀장이 서류철을 내밀었다.

“현장 상황 개요, 증거물 목차입니다.”

결재 서류라도 올리듯 잘 정리된 보고서.

보고 있자니 미소가 나왔다.

당 실무자, 보좌진뿐만 아니라 나경호 의원의 이름까지 담겨 있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잘해 주셨어요.”

“의원님 덕분입니다.”

그 말의 의미는 말하지 않아도 알만했다.

내가 물심양면으로 도와줬었다.

따져 보면 정신적인 면으로는 별 게 없겠지만.

장비 구입에만 수천만 원을 태웠으니 물질적인 면에서는 큰 도움이 됐을 것이었다.

아마 2,000만 원짜리 망원렌즈를 일본에서 직수입했다고 했었지?

나는 꽤 두툼한 보고서를 훑은 뒤 권 팀장을 바라봤다.

“이렇게 나온 거 보면 웬만한 건 다 나왔다는 거 같은데, 맞아요?”

“맞습니다만…….”

“근데요?”

“장세룡 의원이 걸립니다.”

내가 언급하지 않았던 이름이었다.

애초에 증거 확보가 불가능하다고 여겼었다. 내가 누구보다 잘 아는 인간이 그였으니까.

“증거 있습니까?”

“도청 내용에서 파악한 정황이라 법적 효력은 없습니다. 하지만…… 청와대나 사정기관 도움을 좀 받는다면…….”

말하던 권 팀장이 스스로 말꼬리를 지워 버렸다.

“죄송합니다, 지금 드린 게 전부입니다. 장세룡 의원까지 엮는 건 욕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재빠르게 판단했는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감시 업무만 계속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거 받으세요.”

금빛 바탕에 흰색의 무늬가 새겨진 보자기였다.

안에 든 건 1++등급의 한우.

“다음 주에 추석이라서 마련해 봤습니다.”

“고맙습니다, 의원님.”

권 팀장이 꾸벅 고개를 숙여 왔다.

현금도 좋지만, 현물도 좋은 위로 수단이었다.

돈은 지갑에서 나오지만, 소고기는 직접 사 와서 들고 와야 하는 정성이 있어야 했다.

나는 보좌진과 안 위원장 등의 내 사람들에게 나눠 주기 위해서 전화 한 통 해서 주문한 것이었지만.

어쨌든 축산물 대표와 직접 통화하면서 준비하긴 했었다.

“그리고 이건 따로 드리는 겁니다. 사모님께 챙겨 주세요.”

두툼한 흰 봉투를 내밀었다.

“아, 괜찮습니다.”

권 팀장이 거절했으나, 내 눈짓에 결국 받아 들었다.

500만 원 한 뭉치.

보통 실무자들이받는 수준의 뇌물과 비슷한 액수였다.

별로 부담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말단은 수십만 원, 그보다 윗선은 천만 원대.

더 윗선인 행정부 요직이나 중진 국회의원, 대기업 사장이나 군 장성 이상은 억 단위로 주는 게 관례였다.

어느덧 그가 고개 숙였다.

“감사합니다.”

“일만 열심히 해 주세요.”

격려로 들은 것일까, 경고로 들은 것일까?

그가 단단한 표정을 지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말씀만 들어도 든든하네요, 그럼 이만 일어나죠.”

“알겠습니다.”

나는 그 말고도 일일이 만나서 추석 선물을 전해 주고 위로를 해 줘야 했다.

일부러 시간 내서 하는 일이었다.

일하고 돈 받는 것에 익숙해지면 딴 데 눈 돌리는 게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 심리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겸사겸사해서 좋은 이미지도 만들 겸 움직이는 것이었다.

공짜 마다하는 사람도 없으니.

더욱이 국회의원이 직접 수고를 더해 가며 한우 선물과 보너스를 챙겨 준다면?

금상첨화였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이 한 가지가 더 있긴 했다.

재선 준비.

이제 슬슬 움직여야 했다.

2013년이 벌써 하반기에 접어든 상황이었고, 16년 총선도 먼 일이 아니었다.

바로 자산관리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따르릉.

신호 한 번이 넘어가기도 전에 변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정기 변호사입니다.

“수고 많으십니다, 부탁 좀 드리려고 하는데요.”

- 말씀만 하십시오.

“세입자하고 관리인들한테 추석 선물 좀 돌렸으면 하는데, 준비하실 수 있겠습니까?”

내 건물의 임차인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전국의 알짜배기 땅을 매입해서 지자체에 무상으로 빌려 주기도 했으나, 상가와 빌라도 꽤 지은 상태였다.

세를 받아서 돈 벌게 아니니, 월세나 전세가를 주변 시세에 비해 아주 저렴한 수준으로 주고 있었고.

어쨌든 내 건물의 임차인들을 통해 좋은 이미지를 만들 생각이었다.

요즘은 모바일, SNS 시대라서 몇 줄의 문장이 선행이나 마녀사냥으로 둔갑하는 때였다.

써먹을 만한 건 써먹을 것이었다.

변호사가 알아들었다는 듯 곧장 대답했다.

- 물론입니다, 선물 규모나 일자는…….

“변호사님께서 잘 판단해서 진행해 주세요. 참, 댁 주소도 문자로 하나 보내 주세요.”

- 알겠습니다, 그런데 주소는……?

“변호사님도 추석 선물 받으셔야죠.”

- 아, 감사합니다.

“제가 추석 전에는 바빠서 일찍 드리니 양해해 주세요.”

- 양해랄 게 있겠습니까? 하하, 큰일하실 분이니 괘념치 마십시오. 마음 써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아, 문자도 보내세요, 안 보내면 또 전화할 겁니다.”

- 알겠습니다, 의원님.

뚝.

전화를 끊자마자 주소지가 적힌 메시지가 칼같이 도착했다.

한우 세트가 얼마나 남았더라?

배송 목록에 그의 주소를 추가하다가 피식 웃었다.

각종 단체에서 준다는 추석 선물을 마다하고, 한우를 직접 보내 주고 있으니 웃음이 난 것이었다.

당대표라도 되면, 청와대 실세라도 되면 더 하겠지?

아직 먼 날의 상상에 웃음이 길어졌다.

***

10월, 국회 본관 국방위원회 회의실.

오전 11시 6분.

회의실을 둘러본 국방위원장 임청학이 목소리를 냈다.

“의석을 정돈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원이 되었으므로 제 320회 국회 정기회, 제3차 국방위원회를 개의하겠습니다.”

땅, 땅, 땅.

타봉에 이어서 진행지로 시선을 내린 그가 말을 이어 갔다.

“오늘 회의는 먼저 우리 위원회의 2013년도 국정감사계획서를 의결하고, 최근에 열린 한미 안보협의회의에 대한 결과 보고와 2012회계연도 국방부, 병무청 및 방위사업청 소관에 대한 결산 및 국방부 소관 예비비지출 승인의 건 등에 대한 심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국정감사 준비와 동시에 작년 예산 집행에 관한 보고였다.

장관과 청장, 혹은 소관부처의 실장급 이하 실무진의 보고에만 수십 분이 걸릴 일이었고, 이후 의사진행발언이나 질의응답으로 저녁까지 이어질 일이었다.

국정감사 준비로 피곤한 의원들이 이어지는 임청학의 회의진행 발언과 안건 상정을 들었다.

“……먼저 국정감사 및 조사에 관한 법률 제2조2항의 규정에 따라서 상임위원장인 제가 국회운영위원회와 협의해서 작성한 국장감사계획서로 실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현재 위원님들께 배부된 국정감사계획서는 위원장이 양당 교섭단체 간사위원님들과 협의한 내용을 기초로 작성한 것으로 이 계획서가 채택되면 국회운영위원회와 협의할 예정입니다. 배부된 우리 위원회의 2013년도 국정감사계획서의 주요 내용을 말씀드리자면…….”

임청학의 말이 길어지는 사이.

윤수혁이 조용히 스마트폰을 꺼내서 확인했다.

무심한 눈길.

그러나 화면을 확인한 동공이 움찔했다.

[러시아 군 간부하고 연결 됐습니다. 로만 라브로프, 국가 간 군 교류와 파병 관리를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도움이 되겠다고 했던 안드레 한의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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