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94화 (94/191)

# 94

29. 어서 오십시오 (3)

중앙일간 케이블 채널.

중년 남성 MC가 전 국회의원 패널에게 새한국당의 전당대회 결과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패널이 기다렸다는 듯 제스처를 취해 가며 대답했다.

- 딱 두 글자면 됩니다! 이변, 이변이었어요! 초선의원이 순위권에 드는 경우가 없거든요? 아주 이례적인 일이죠, 아! 물론 불가능한 것도 아니긴 하지만…….

말을 흐리던 그가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검지와 중지.

V자로 만든 손을 강하게 흔들었다.

- 2등! 2등을 했다는 게 더 엄청난 거죠! 전직 장관이나 국무총리면 모르겠는데, 초선에 불과한 윤수혁 의원이 3만 표가 넘게 득표했어요. 3천표만 더 얻었으면 당대표가 될 뻔했다는 겁니다! 이게 말이에요, 저는 새한국당도 이제 구태에서 탈피한다는…….

패널은 열과 성을 다해서 7.15 새한국당 전당대회 결과에 관한 의견을 쏟아 냈다.

곧이어 다른 패널들도 끼어들면서 전당대회 이슈의 중심에 있는 윤수혁에 관해서 떠들어댔다.

비례대표 출마했을 때보다 더 한 관심이었다.

윤수혁의 성장 배경, 사업, 국회의원 활동까지.

패널들은 직접 기사를 프린트 해 오고, 정리한 자료를 보여 주면서 서로 떠들어댔다.

그리고 그 반응처럼 7.15 전당대회의 이슈는 오롯하게 윤수혁 한 명에게 몰려 있었다.

애초에 신경배라는 유력한 당대표 후보가 중도 사퇴하고, 조성현과 친MB계가 뒤섞인 바람에 전대는 아수라장이었다.

유력 후보도, 양강구도도 없었다.

재선의 여성 의원만이 여성계 할당 때문에 당선이 확실시 됐을 뿐, 남은 4석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3선의 조성현과 4, 5선의 친MB계 의원들.

누가 당대표가 돼도 이상할 게 없었다. 현장 정견발표 내용이나 목소리로 소수의 표심이 움직이기도 했으니까.

다만 그 안에 윤수혁은 없었다.

운 좋게 4등, 아니면 5등.

그마저도 여성계 할당 때문에 6등으로 밀려난다는 게 정치권의 판단이었다.

전무한 정치 경력, 초선이라는 위치, 어린 나이.

그 모든 게 감점 요소였다.

물론 윤수혁에게는 초선에 어울리지 않는 능력이 있긴 했다.

돈과 인지도, 준수한 능력.

그리고 시민단체나 복지기관 등에 몇 년 전부터 후원하고, 강북구의 유지들을 꽉 쥐고 있기도 했었다.

그래서 출마 자체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전국의 권리당원과 대의원, 당직자와 보수 단체를 아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이 땅에서 먹히는 건 능력이 아니라 관계였다.

그걸 모르면 전당대회 나가서도 물 먹는 것이었다.

- 그런데 윤수혁 의원이 2등을 차지했잖아요? 뭐, 3, 4등과의 차이도 적게 나긴 했지만 이게 어딥니까? 조성현 당대표도 마찬가집니다. 당의 쇄신과 비계파를 주장하는 분이잖아요? 이거는 이제 새한국당이 한 번 뒤집어진다는 전조가 확실하다는…….

예의 그 패널이 본인의 지론을 풀었다.

그렇게 조성현이 당대표로 선출된 소식과 함께 윤수혁의 득표율 2위 기록이 발 빠르게 언론매체로 퍼져 나갔다.

그 덕에 윤수혁의 최고위원 수락연설 편집 영상은 이미 지상파 3사 방송사와 주요 케이블에서 몇 번이나 송출했었다.

-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당원 동지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하여 당의 쇄신을 이뤄 내고, 올바른 정권 교체에 앞장서도록 하겠습니다!

화면 속에서 윤수혁은 양팔을 뻗치며 열성적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마치 당대표라도 된 듯.

***

종로구.

손 지검장의 연락을 받고 도착한 곳은 예상외로 으리으리한 호텔도, 한식당도 아니었다.

불법 주정차된 골목을 따라서 점점 낮아지는 빌딩 틈으로 들어갔다.

종로구에서 흔히 볼법한 몇 층 안 되는 사무실 건물.

심지어 신축 건물도 아니고, 빗물 자국과 페인트 덧칠, 방수 자국이 곳곳에 나 있는 곳이었다.

왜 여긴가 싶었는데.

지하주차장에 들어가면서 알았다.

흔한 빌딩과 느낌이 달랐다.

최고급 아파트나 주요 빌딩의 보안시설을 보는 듯했다.

입구에는 무인 차단기가 있었고, 주차장에서 건물로 들어가는 널찍한 로비에 경비원이 또 있었다.

그것도 퇴직 후 경비복을 입은 노인이 아닌 30대의 건장한 사내.

그가 엘리베이터로 안내해 주고는 ‘F층‘을 눌렀다.

“그대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누르지 말라는 말일까? 눌러도 소용없다는 뜻일까?

두 개가 전부 해당되는 것일 터, 조용히 4층에 도착하길 기다렸다.

이윽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잔잔하게 깔린 클래식풍의 음악이 들렸다.

이어서 눈에 들어온 건 은은한 조명이 깔린 복도.

이거 식당 같은데?

사무실로 예상했데에 사방을 살피며 발을 내딛는데, 옆에서 누군가 꾸벅 허리를 숙여 왔다.

“어서 오십시오, 예약룸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단아하게 생긴 웨이트리스였다.

그녀의 인사와 복도 안에 있는 여러 개의 방을 보고 뒤늦게 깨달았다.

식당이 맞았다.

그것도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곳.

특정 인원과 예약자만 올 수 있는 그런 식당이었다.

주요 관공서와 대기업 본사가 있는 서울 한 가운데.

접근성이 용이하고, 비밀스럽게 들어올 수 있으니 호텔이나 대형 식당 같은 공개된 장소 대신에 쓸모가 많을 만한 장소였다.

비밀스러운 만남이 종종 이뤄질 것이었다.

장 의원의 기사 노릇을 하면서 비슷한 곳에 가 본 적이 있었다.

물론 입구에서 내려 주고 차 안에서 대기하는 신세에 불과했지만.

어느새 웨이트리스가 걸음을 멈췄다.

“손님 오셨습니다.”

문에 설치된 스피커에 말하자, 딸칵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풀렸다.

밥 먹는 룸에 이런 것도 설치하다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윤 의원…… 아니. 윤 최고. 어서 오세요.”

정무수석 박우식이었다.

이어서 손 지검장이 악수로 나를 맞이했다.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악수를 나누자마자, 몸을 일으킨 박 수석이 테이블 쪽을 향했다.

“인사들 나누시죠.”

6인용 식탁.

앉아 있는 다른 세 명.

드디어 월요회에 들어왔다는 사실 때문인지, 묘한 감정이 가슴 한편에서 꿈틀거렸다.

나도 국회에서나 사회에서나 위치가 꿀릴 게 없는 놈인데, 내심 떨리기까지 했다.

“대한민국의 시작, 월요회와 함께 할 윤수혁 최고위원입니다.”

말이 끝나고, 가볍게 고개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윤수혁입니다.”

흐뭇한 얼굴의 박 수석이 테이블에 앉아 있는 이들을 내게 소개시켜 주었다.

“자, 이 분은 우리 대선 캠프 때부터 경제자문위원 맡아주셨던 현정길 특보, 대한의사협회 부회장이신 김정섭 원장님, 그리고 치바그룹 대외협력단장 주명규 총괄사장님입니다.”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고개 인사를 했다.

대한의사협회의 김 원장을 빼고는 내가 아는 얼굴들이었다.

현 특보.

그는 대선 캠프 때부터 대통령의 밑을 닦았던 사람이었다.

재작년까지는 외환은행의 론스타 헐값매각 의혹 시비로 법정 공방 을 펼치다가 무죄 판결을 받았었고.

제 버릇 개 못줘서 그런 것인지, 결국 금융권의 각종 의혹에 휘말려 18년도에 옥살이를 했었고.

한마디로 감옥에 갈 사람.

그리고 치바그룹의 주 사장은 더한 인간이었다.

현재로서는 치바의 총수일가를 제외하고 그룹의 대소사까지 손에 쥐고 있는 실세지만, 3년 뒤에 죽을 사람이었다.

2016년에 경기도 양평의 산 어귀에 차를 대놓고 연탄을 태웠었지?

그게 그룹 경영권 확보를 위한 부회장들의 아귀다툼인 ‘형제의 난‘이후, 검찰 수사망이 좁혀져 올 무렵이었다.

쉽게 말해 주 사장은 죽을 사람.

지금은 정권이 바뀌었고, 역사도 비틀렸으니 어떻게 굴러 갈진 모르겠지만.

자리한 인물의 면면으로 보자면, 월요회는 오래가지 못할 조직이었다.

그 사이 앉아 있던 이들도 내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최고위원님.”

“젊으신 분이 대단하네요, 초선에 최고위원까지 달고.”

현 특보와 김 원장이 한 마디씩 던지기에 눈으로 답하며 빈자리에 앉았다.

언제까지 써먹어야 할까?

대통령이 레임덕에 휘청거리기 전에 먼저 빠져나와야 했다.

만남도 가급적 줄이고, 정말 필요한 때에만 써먹어야 했다.

어쨌든 지금은 실세 모임이니까.

전 선거캠프 공동위원장인 박 수석은 자타공인의 대통령 최측근이었다.

국회의원이라고 해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이들이 아니었다.

이제는 아니지만.

이윽고 입을 닫고 있던 주 사장까지 내게 고개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윤 의원님.”

***

7월 말.

새한국당 중앙당사 대회의실.

최고위원회의가 열렸다.

새 당대표가 된 조성현이 모두 발언에서 당선 소감과 앞으로의 각오를 낭독했다.

그리고 이어진 정책 논담.

평소 실용과 당내 혁신을 언급하던 조성현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왔다.

“지난 김정환 의원의 대선 후보 사퇴와 보수신당의 창당, 그리고 신경배 의원의 전대 포기까지. 우리 당은 쇄신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러 흙탕물을 뒤집어썼습니다. 이제 깨끗하게 씻고 새로 나아가기 위해서, 당명(黨名) 변경을 건의하고자 합니다. 최고위원님들, 동의하십니까?”

당명 변경은 흔한 일이었다.

당대표나 정권이 바뀌고, 큰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교체된 게 바로 당명이었으니까.

다만 조성현의 입에서 듣기는 쉽지 않은 말이었다.

비대위원장 시절부터 꾸준히 제기된 당명 변경을 거부한 게 바로 그였기 때문이었다.

들어가는 비용에 비해 실속이 없다면서, 허위허식이라면서.

실제로 당명을 바꿀 때마다 들어가는 돈이 수억 원을 가뿐히 넘었다.

로고 디자인과 인쇄 비용, 간판과 명패, 명함, 각종 당 비품 값을 바꿔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 모든 게 돈이었다.

전국에 깔린 새한국당의 사무소도 벽의 페인트를 바꾸고, 광고물을 교체해야 했다.

그 인력과 시간도 마찬가지로 돈이었다.

그것도 당원과 의원들이 납부한 당비이자, 국고에서 충당한 혈세를 빼 쓰는 일이었다.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이 주춤한 가운데, 4위로 당선된 친MB계 의원이 퉁명스레 말했다.

“진즉에 바꿨어야죠.”

그의 말 대로였다.

김정환이 대선 후보에서 사퇴했을 때나 보수신당이 창당됐을 때 바꿨어야 했다.

당명은 이미지 변경을 위한 흔한 일이었다.

지도부 사퇴와 비대위 체제로 전환하는 것처럼.

“그래서 지금이라도 실천하려 합니다, 그럼…… 이의 없으십니까?”

“없습니다.”

윤수혁이 가장 먼저 대답했다.

이미 뒤에서 말을 맞춘 상황이었다.

애초에 당대표인 조성현에게 몇억이나 되는 자금을 무상으로 지급한 게 아니었다.

‘저도 지출을 보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명 변경 권한을 제 쪽으로 푸시해 주십시오.’

수 억 이상이 들어가는 사업이다 보니, 자연적으로 남게 되는 이익금이 있었다.

쉽게 말해 비자금.

디자인 비용을 부풀리거나 사무집기 수량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수백에서 수천만 원의 불법적인 차익이 생기는 것이었다.

윤수혁이 원래 갖고 있던 100억의 돈처럼.

조성현도 그 사실을 알았다.

그랬기에 선뜻 그러겠다고 대답하진 못했지만, 결국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자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정당의 쇄신이기 때문이었다.

친일, 수구, 구태 같은 오명을 탈피하고, 당을 헤치는 계파 정치의 뿌리를 뽑는 일.

그게 조성현이 지향하는 바였다.

그래서 윤수혁에게 자존심을 굽혀가면서 자금을 지원 받고 전당대회에 나온 것이 아니던가?

그사이, 지도부의 일원들이 대답했다.

“이의 없습니다.”

“없습니다.”

그 중에는 지명직 최고위원으로 임명된 호남출신의 재선 의원 남병기도 있었다.

여태 눈에 띄지 못한 사람이었으나, 윤수혁이 당비 납부를 조건으로 걸고 지명직 최고위원으로 임명한 사람이었다.

물론 표면상 이유로 지역 분배를 말하긴 했지만, 호남출신이 어디 한둘이던가?

그 탓에 돈이 꽤 들어가긴 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정당이란 건 돈으로 휘어잡기에는 무리가 있는 단체였다.

그랬기에 돈으로 할 수 있는 만큼은 적어도 최선을 다해야 했다.

이윽고 조성현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번에 당비 지원한 윤수혁 최고의원님이 사무총장님과 합의 보셔서 진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의 없으시죠?”

“없습니다“

대답한 윤수혁이 빙긋 웃었다.

자존심 상한 친MB계 의원 한 명은 회의에 참석하지도 않은 데다가, 당대표인 조성현과 옆 자리의 남병기가 본인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당연직 최고위원인 사무총장도 당비와 자금 때문에 자신의 발언을 무시할 수 없었고.

지금의 최고위원회의는 온전히 그의 뜻대로 굴러가고 있었다.

윤수혁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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