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29. 어서 오십시오 (2)
전당대회 합동연설회 이틀 전.
기사가 터졌다.
[신경배, 전당대회 포기 선언]
[새한국당, 신경배 후보 사퇴 유감…… 투명한 전당대회 운영할 것]
[보수신당 대변인, “신경배 의원 혐의 사실상 인정한 꼴, 새한국당은 이 사태를 책임지고 사과하라.”]
후보 등록까지 하더니, 결국 신 의원이 사퇴한 것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이미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다른 이들에게 없는 월요회, 자금 지원 등이 내가 쥐고 있던 카드여서 예측이 쉬웠다.
그게 아니어도 후보 사퇴할 여지가 많긴 했다.
검찰이 산기평 정부출연금의 불법 지원 여부와 횡령, 18대 총선의 자금 여부까지 수사하는 중이었고, 수사 진전의 성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걸로 봐서는 뭔가를 쥐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대리 명의로 걸려 든 신 의원의 가족과 지인들도 탈탈 털리고 있었다.
참고인 조사까지 더하면 그 범위는 더 넓었다.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더구나 신 의원은 전당대회까지 챙기고 있었다.
업무 과다가 아니라, 스트레스 과다로 쓰러진다 해도 이상할 게 하나 없었다.
나였다면 꾸역꾸역 버텼을까?
발악깨나 했을 것 같았다.
아마 신 의원도 뒤에서 이리저리 움직였겠지만, 안 되니 결국 물러선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손기택 서울중앙지검장]
화면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손기택입니다, 통화 가능하십니까?
“예, 말씀하세요.”
곧 원외당협위원장들과의 회동이 있긴 했지만, 여유 시간이 좀 있었다.
금세 손 지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전당대회 준비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시지요?
“바쁘긴 합니다. 지금도 원외당협위원장님들 모시고 호텔 와 있습니다.”
- 그렇군요,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해 봐야 알지 않겠습니까?”
- …….
짦은 숨소리.
“무슨 일 있으세요?”
- 전에 말씀드린 모임에 관해서인데…….
월요회 얘기였다.
그런데 나오는 숨소리가 짐짓 불안했다.
잠깐을 기다리자, 손 지검장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전당대회 결과를 보자더군요, 인사는 그다음에 하자고…….
아, 하는 소리가 짤막하게 나왔다.
그걸 탄식으로 들은 걸까?
지검장의 말이 변명처럼 따라붙었다.
- 압니다, 법무법인 설립 도와주신 거…… 그거는 제가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모임 건이 잘못돼도, 제가 의원님은 따로 모시겠습니다.
슬쩍 웃음이 났다.
내가 뱉은 소리는 불리함을 인지한 가벼운 말이었다.
표면적으로 나는 초선인 데다가 나이까지 어린, 정치경험이라고는 전무한 후보자였다.
내 이름을,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표를 주지 않을 것이었다.
쉽게 말해 떨어질지도 몰랐다.
그 말인즉슨 내게 패배자 낙인이 찍힌다는 것이고, 월요회 입장에서는 반가울 리가 없었다.
사조직의 고위직이 아니던가?
쓸데없는 인맥과 자존심으로 얼룩진 사람들.
그들이 반기는 건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수준의 유력 인사들이었다.
이러나저러나, 나는 손 지검장의 말에 별로 반감은 없었다.
그저 알고 이해했을 뿐.
- 저도 윗선의 지시를 받는 입장이다 보니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수석 한 마디면 제주도로 발령나기도 하니까…….
법무법인 세우는데 들어간 돈이 억 단위다 보니 그도 조금 당황한 모양이었다.
손 지검장이 처음으로 절절 매듯 말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 아, 네?
“아무나 들어갈 자리라면 제가 가지 않았을 겁니다.”
- 그렇군요, 이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러면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 뭐든지 물어봐도 됩니다.
“신 의원 일은 어떻게 마무리 되는 겁니까?”
- 원로 우대해서 조용히 마무리하기로 했습니다. 임기 말년에 집행유예 확정 받고 의원직 상실 처분 받게 될 겁니다.
예상대로였다.
합의까지 마쳤고, 검찰은 확실한 물증까지 쥐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딴생각이 들었다.
설마하는 의구심이었다.
일부러 신 의원의 약점을 쥐고서 좌지우지하기 위해 월요회로 불러들였을 가능성도 있었다.
신 의원을 내쫓은 게 아니라, 써먹다 버렸다면?
“지검장님.”
- 네.
“대답 안 하셔도 됩니다만, …… 저도 그럴 만한 게 있습니까?”
- 그럴 만하다니요?
“신 의원처럼 걸릴 게 있는지 궁금해서요.”
없을 것이었다.
만들고 부풀려도 벌금 수십만 원에 불과한 처벌이 전부일 것이었다.
지검장의 목소리가 금세 들려왔다.
- 눈치가 좋으십니다만, 그건 아닙니다.
“그래요?”
- 그래서 전당대회 결과를 보자는 말이 나온 겁니다. 만약에 흠 잡을 게 있었다면, 오늘 저녁에 인사 나누셨을 겁니다.
피식 웃음이 났다.
“좋은 얘긴데, 좋은 결과는 아닌 것 같네요.”
- 죄송합니다.
다시금 주춤하는 대답.
내가 당선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손 지검장은 내가 10억 넘게 쏟아부은 사실을 모르니, 충분히 그럴만 했다.
스타 의원이라고 해도 20대의 초선은 낙선하는 게 정론이었다.
조컨설팅의 조 대표도 처음에 그렇게 말했었고.
“지검장님, 너무 그러지 마세요.”
자존심이 좀 상할 뻔했다.
내 지난 10년의 경험이, 지금의 내 위치가 나이따위에 가려진 꼴이 아닌가?
내 당 내 파워는 센 편이었다.
따로 사모임을 가지진 않았지만, 이미 한 계파를 가진 것과 다름없었다.
물론 그것 때문에 나를 월요회로 불러들이긴 했겠지만.
목소리에 좀 더 힘을 줬다.
“아까 제가 겸손하게 대답한 거 같은데, 가능성 물어보셨죠?”
그에게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
내가 최고위원에 당선된다면, 그건 운이 아닌 실력이라고.
약간 움찔한 손 지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 네.
내가 무슨 소리를 하나, 당황스런 느낌이었다.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높습니다.”
의무적으로 뽑아야 하는 여성 후보가 한 명만 출마했고, 모든 후보자 숫자는 일곱 명에 불과했다.
평균 10명 내외의 국회의원들이 도전하는 것에 비하면 적은 숫자.
임기 1년짜리 당지도부라서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눈치 보던 후보자들 중에 결단을 내린 사람들만 참여한 게 작금의 상황이었다.
아무리 당 내에서 치러지는 전당대회라고 해도 수천만 원에서 억 단위의 돈이 우습게 깨지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이, 경력 따위의 감점 요소 때문에 좀 오버한 경우였고.
어쨌든 뱃지 달기 전부터 뿌려 둔 돈도 있고, 새로 뿌린 돈도 있으니 이번 전당대회는 가능성이 높았다.
밑으로 3명만 깔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안 위원장이 가져온 최종 결과물에 웃음이 나왔다.
양지회 로고가 워터 마크로 박힌 인쇄물이 내 손에 뭉치로 들려 있었다.
일명 문화계 블랙리스트.
가수, 배우, 감독, 작가 할 것 없이 좌파 및 인보 인사로 분류된 인사 명단이었다.
그리고 관리하는 외곽 팀장 신상까지.
아쉽게도 국정원 내부 자료는 없었지만, 양지회만 해도 대단한 성과였다.
국정원 퇴직자 단체인 양지회는 ‘음지에서 일한 보람, 양지에서 이어 가자.’라는 말처럼 국정원의 모토를 이어받은 단체였다.
한마디로 국정원의 보조 기관이나 다름없는 곳.
이윽고 마주 앉은 안 위원장이 빙긋 웃었다.
“좀 늦긴 했는데, 괜찮지 않나?”
“예, 좋습니다. 위원장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행이네, 내일 모레 선거일인데 영향을 얼마나 끼칠지 모르겠어. 친MB계가 둘 올라왔던가?”
전당대회 후보를 말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지금 쓰기는 아깝네요.”
“아니, 전당대회 전에 가져오라며? 거 MB계 낙마 시키려고 시한 정해 준 거 아닌가?”
안 위원장이 약간 놀란 눈을 해 보였다.
내가 요구한 게 전당대회 전이긴 했었다. 그래서 안 위원장도 사람 구해 달라고, 총알 달라고 바쁘게 움직였었고.
“맞습니다만…….”
전당대회가 코앞이었고, 이 서류 뭉치 없이도 5위 안에 들 자신이 있었다.
물론 여성계 지도부 할당 의석 때문에 4위는 해야 하지만, 충분히 할 만했다.
돈 몇억만 있어도 떡을 치는 선거에 10억이나 쏟아부은 상태였다.
그 외에도 될 이유가 숱하게 많았고.
나는 놀란 눈의 안 위원장을 바라봤다.
“이번 지도부, 임기 1년짜립니다. 지방선거까지 맡고 물러나게 되겠죠.”
“……아, 지방선거에서 쓰겠다?”
“예,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말씀인데?”
“청와대와 국정원 자료도 준비해 주십시오. 현장 증거, 증인 최대한 많이 확보하시고요.”
내 말에 안 위원장이 멈칫했다.
“이보게, 윤 의원.”
“예.”
“그거 하나 얻으려고, 양지회 친구한테 쥐어 준 게 세 장이야. 세 장.”
“더 쓰셔도 됩니다.”
“사실 그 친구도 내가 알고 지내니까 그걸로 된 거지, 청와대하고 국정원 들어가려면…… 열 배는 더 있어야 돼.”
“30억이요?”
“땅 속에서 꺼내온 거 다 쓸 셈인가? 그런 돈 흔치 않아, 이 사람아.”
맞는 말이었다.
지하경제를 떠돌던 돈은 흔적이 남질 않았다.
출금하든, 이체하든, 금고에서 가져다 쓰든 간에 거래 내역이 남고 증거가 남는 내 자산과는 달랐다.
쉽게 쓰기 아깝긴 했다.
기업이나 정부의 고위 인사들이 비자금 10억을 마련하기 위해서 100억 짜리 사업을 말아먹곤 하지 않던가?
그런 면에서 내 100억은 1000억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사업을 말아 먹는 실패 이력과 부정적인 시선, 소모되는 시간 같은 곁가지도 없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돈.
“그러면 제가 힘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윤 의원이?”
“민혁위 권한 강화하는 쪽으로 협의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최고위원이라는 자리, 월요회라는 사모임.
그 두 개면 VIP에게 의견 전달도 충분히 가능했다. 독대하는 건 어렵겠지만.
***
2013년 7월 15일, 월요일.
잠실실내체육관.
중위권의 갑론을박 싸움이 예상되기 때문일까?
지지자와 대의원들이 모인 체육관 내부에 열기가 끓었다.
신경배의 후보자 사퇴로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했던 머릿수는 오히려 더 늘어나 있었다.
체육관 바깥의 전세버스도 주차장을 가득 메울 정도로 많았다.
이윽고 전당대회 행사 시작에 앞서 7명의 당권주자들이 피켓을 들고 행진하자, 대형 스피커에서 ‘거위의 꿈’이 흘러나왔다.
익숙한 대중가요.
저마다 후보 이름을 외치던 지지자들이 목청 높여서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행사가 시작되었다.
개회사, 국민의례, 축사와 같은 일련의 순서가 지나고.
오래지 않아 정견발표의 때가 왔다.
순번대로 이어진 발표의 끝에 윤수혁이 무대에 올랐다.
새한국당 로고가 새겨진 커다란 배경을 등지자, 전면의 조명이 뜨거울 정도로 얼굴을 비췄다.
마킹된 위치에 선 윤수혁이 꽉 쥐고 있던 마이크를 올렸다.
“여러분의 아들! 조카! 동생! 기호 7번 윤수혁, 당원동지 여러분께 인사 올립니다!”
힘 있는 목소리.
이어서 숙어진 허리가 천천히 올라왔다.
마이크를 입가에 대던 윤수혁이 미소를 머금었다.
무대에 올라와 인사했을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반가운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지지자들.
그것도 예상을 웃도는 숫자였다.
살포하다시피 나눠 준 피켓을 든 지지자들이 열성적으로 환호하고 있었다.
곧 윤수혁이 운을 뗐다.
“여러분! 무엇이 중요합니까? 제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나라와 당, 그리고 당원 여러분입니다! 저는 바로 그 세 가지를 위해 나아가겠습니다. 먼저 첫째로 저는 취업하지 못한 자녀들과 군대 간 아들들을 대신해서 일하겠습니다. 필요한 정책을 만들고, 보완하며, 젊은 혈기로 여당과 국가를 상대로 당당하게 권리를 주장하겠습니다! 20대의 체력으로…….”
젊고 힘 있는 목소리가 체육관을 채웠다.
지지자들이 환호했고, 스피커는 윤수혁의 목소리를 점점 키웠다.
그렇게 정견발표를 마칠 무렵.
와아아아아-
“윤수혁! 윤수혁!”
윤수혁은 들려오는 환호에 치아를 보이며 웃고 말았다.
이러다 당대표가 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큰 함성이었다. 단독 출마한 기호 6번의 여성의원과 극명하게 대조될 정도였다.
윤수혁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이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