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92화 (92/191)

# 92

29. 어서 오십시오 (1)

윤수혁이 한사랑과의 데이트를 마친 다음 날, 일식집.

저녁 늦게 예약룸에 들어선 윤수혁이 테이블 앞에 앉았다.

참치 코스회가 기다렸다는 듯 세팅 되었고, 이윽고 투박한 생김새의 권창훈 팀장까지 들어섰다.

자리를 권한 윤수혁이 돌돌 말린 물수건을 펴면서 운을 뗐다.

“진척은 얼마나 됐어요?”

룸살롱 마약 사건을 뜻하는 말.

권창훈이 정중하고도 조심스런 태도로 설명을 시작했다.

최근의 일과에 이은 결과물이 곧 그의 입에서 나왔다.

“……이미 꼬리를 끊은 거 같습니다. 머리 역할을 했던 홍 전무라는 사람은 해외로 뜨다시피 해서 더 이상 파악이 어렵습니다. 그래도 홍 전무라는 사람의 신상명세는…….”

“홍성우 전무, 압니다.”

놀란 눈이 된 권창훈이 뒤늦게 물었다.

“……아십니까?”

“예,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무심한 듯한 대답.

권창훈은 놀란 감정을 수습했지만, 이어지는 윤수혁의 말을 납득할 순 없었다.

아직 보고 하지도 않았고, 일이 끝난 것도 아니지 않던가?

“그것보다 홍 전무가 오더 받고 지시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과정이요?”

“예, 날짜, 장소, 기록, 사람…….”

윤수혁의 설명에 권창훈이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것도 일부 파악하긴 했습니다만, 아직 정리가 끝나지 않아서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제가 판단하겠습니다, 말씀하세요.”

권창훈이 주춤했다가 서류 봉투를 하나 건넸다.

받아드는 윤수혁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조심스러웠다.

불신의 표정이 아니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하는 호기심이었다.

윤수혁이 서류를 꺼내는 사이, 권창훈이 얼른 설명을 달았다.

“피의자가 사용한 대포폰의 발신지와 날짜, 장소를 대조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룸살롱 사건으로부터 약 사흘 반 정도 되는 행적을 파악했습니다.”

윤수혁은 그사이에 통화 내역과 포털사이트의 지도와 주소록 등을 확인했다.

그렇게 몇 장의 페이지를 넘기던 중.

윤수혁이 눈가를 찌푸렸다.

장소와 이름, 휴대전화 번호 몇 개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익숙한 것들이었다.

또한 윤수혁이 아는 것이기도 했다.

권창훈이 낌새를 느낄 무렵, 윤수혁이 목소리를 냈다.

“여기 황지훈, 최민혁하고 구로구로 된 주소지들 전부 조사하세요. 끝자리 4885 전화 번호도 확인하시고요.”

이들의 끝은 홍성우 전무가 아니었다.

장 의원 지인들이 부리는 간부급 조직원들이었다.

일명 외주 인력.

당내 인력이나 관계자가 아닌 전문 용역이었다.

실무진이기 때문에 수석 보좌관이나 당협위원회 사무장은 필수적으로 안면을 텄고, 업무 협조라는 명목으로 일도 나눠 하곤 했었다.

권창훈이 서류를 돌려받으면서 단단하게 대답했다.

“확인 하겠습니다.”

“파보면 증거 나올 겁니다, 형사 출신이니까 아시겠지만, 증거 확보 잘하셔야 합니다. 적당하게 말고, 동원가능한 모든 수단 쓰셔야 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추가 조사도 계속 이어서 하세요. 당연히 주력은 제가 말한 데 쏟으셔야 합니다.”

“네.”

간결하게 대답한 권창훈이 눈치를 살피고는 다시 목소리를 냈다.

“저, 하나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홍성우 전무요?”

권창훈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방금 말씀하셨던 황지훈, 최민혁, 구로구, 4885도…… 아닙니까?”

젓가락질을 하던 윤수혁이 가만히 권창훈을 바라봤다.

무거운 시선.

권창훈이 긴장하는 사이, 윤수혁이 입을 열었다.

“아셔야 합니까? 그게 조사에 도움이 되겠어요?”

담담하지만 힘 있는 말이었다.

분위기를 파악한 권창훈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그럼 계속 진행해 주세요. 권 팀장님 믿겠습니다.”

권창훈이 굳게 대답했다.

“기대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

다음 날, 337호 의원실.

리스트를 훑었다.

전국 시도당 위원회와 당협 위원회, 보수 단체 및 새한국당 지지 시민단체의 당직자와 간부들이었다.

주요 인원만 추렸는데도 이름과 사진, 나이따위로 만든 신상명세 서류가 수백 장이 넘어갔다.

그 중에는 내가 아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연락하며 알고 지낸다는 게 아니라, 어떤 인간인지 기억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돈을 줄만한지, 줘도 탈이 없는지, 믿을 만한지 등등.

그렇게 추려낸 사람이 80여 명.

전에 한두 번 시뮬레이션 해 본 거라서 판단하는데 오래 걸리진 않았다.

이미 국회의원, 주요 당직자, 고위공무원, 기자 등을 상대로 여러 번 기억을 되살려 접대했었고, 전국구로는 쓸 만한 복지 단체 등을 추려내서 후원하기도 했었다.

체크한 명단을 내려놓고, 인터폰을 눌렀다.

“박 보좌관님.”

- 네, 들어갑니다.

9급 비서의 대답 이후.

짧은 노크 뒤에 개인 사무실 문고리가 돌아갔다.

“찾으셨습니까, 의원님?”

“예, 문 닫고 들어오세요.”

내 눈치를 살핀 것인지, 박 보좌관이 얼른 사무책상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눈이 자동으로 쌓아둔 서류에 닿을 무렵.

“총알 많이 필요할 겁니다.”

나는 박 보좌관이 지나쳐 온 응대용 테이블로 턱짓했다.

도시락 업체명이 적힌 두꺼운 재질의 종이백.

안에 든 건 5만원 묶음 여덟 개였다.

“보좌진 사기 충전시켜 주고, 주위에 기름칠 하는데 쓰세요.”

“알겠습니다.”

그가 칼같이 대답했다.

묻지도 않고 응하는 걸보니, 역시 노련한 보좌관다웠다.

“그리고 이것도 보세요.”

손가락으로 리스트를 톡 치자, 박 보좌관이 수십 장의 종잇장을 집어 들었다.

그의 눈이 빠르게 종잇장을 확인할 즈음에 말을 덧붙였다.

“액수, 현물화 여부는 박 보좌관님 판단대로 진행하세요.”

“중복 여부는 상관없겠습니까?”

“중복이요? 보좌관님이 먼저 손쓰신 게 있어요?”

내 말에 박 보좌관이 슬쩍 미소 지었다.

“저도 이 바닥 생활 10년 넘었습니다.”

“그럼 그것도 박 보좌관님 판단대로 진행하세요. 금액은 일단 10억 준비해뒀습니다.”

노련해 보이던 그가 액수를 듣더니 움찔했다.

“……그건 좀 많습니다, 의원님.”

“넉넉하게 쓰시라고 준비했어요. 저기 쌓인 박스 보이시죠?”

이번에는 개인사무실의 한편으로 턱짓했다.

책장 아래에 상자들이 쌓여 있었다.

박 보좌관에게 준 것과 같은 디자인의 도시락 종이백과 참치캔 선물 세트, 목우촌 햄 세트 등등.

옛날처럼 티 나는 사과 박스 같은 건 쓰지 않았다.

잠시 멍해 있던 박 보좌관이 나를 쳐다봤다.

“아…… 전부 깨끗한 돈입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늘부터 당장 진행하실 수 있겠죠?”

내 물음에 정신을 차린듯, 그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네, 하겠습니다.”

***

6월 말.

국회 의원회관, 소회의실.

“신경배도 결국 나가리 된 것 같지요? BH(BlueHouse:청와대)하고 끈이라도 있는 것 같더니, 차암…….”

나경호의 말에 모여 있던 의원들 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이 안 퍼질 수가 없었다.

기사 확산과 검찰 수사가 합이라도 맞춘 듯 이뤄지고 있었고, 신경배는 모든 사태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중 장세룡이 나경호를 향해 되물었다.

“BH에선 조용하던데. 끈 있다는 말은 어디서 나왔나?”

일순 보수신당 주요 의원들이 입을 다물었다.

증거 없는 추측일 뿐이었다.

상임위 업무와 행정부 협조로 알게 된 1, 2급 상당의 고위공무원들도 마찬가지로 답을 주지 못하는 사안이었고.

장세룡이 나직하게 말을 덧붙였다.

“확인도 안 된 사항 떠들지 말고, 신 의원하고 자리나 마련해 봐. 거기 박 의원, 아직 사이 괜찮지?”

“신경배 의원이요? 아, 종종 연락하긴 합니다.”

대답한 이가 뒤늦게 움찔했다.

“혹시 탈당 권유하라는 말씀이세요?”

“갈라선 거 소문 파다한데 건너오겠어?”

“그렇죠, 아무래도…….”

“그래, 그러니까 그거나 물어봐. BH하고 어떤지, 당 분위기도 보고.”

“아, 알겠습니다.”

지목당한 이가 알았다는 듯 대답한 뒤.

장세룡이 몸을 일으켰다.

퇴장하겠다는 신호.

의원들도 따라서 우르르 일어나는 사이, 장세룡이 일어선 면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당협이든, 대의원이든 새한국당 표들 꽉 쥐고들 있게.”

자리해 있던 이들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새한국당에서 치러질 7.15 전당대회의 유권자를 관리하라는 뜻이었다.

당 지도부 중 하나라도 보수신당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한 작업.

이윽고 장세룡이 소회의실을 떠나갔다.

장세룡이 에쿠스 뒷좌석에 올랐을 때.

옆자리에 사람 하나가 앉아 있었다.

정장 차림의 커다란 체구.

예의 홍성우를 가로 막고 금속 탐지기로 스캔했던 사내였다.

장세룡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래, 뭐 알아본 거 있나?”

“권 팀장이라는 놈입니다. 아십니까?”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장세룡이 퉁명스레 내뱉었다.

“그걸 내가 어찌 알아?”

“윤수혁과 접촉했던 흔적을 찾았습니다. 새한국당 잡무 봐주던 사람이고, 전직 형사 출신입니다.”

“그래서? 걔들 뭐해?”

“양 부장 주위부터 뒤지고 있습니다. 행적 파악부터 시작한 걸로 봐선 홍 전무 비행기 탄 것도 아직 모를 겁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장세룡이 광대를 씰룩거렸다.

“그게 다인가?”

“네, 드러난 것도, 드러날 것도 없습니다. 홍 전무 비행기 태운 거 확인했고, 꼬리도 완전하게 끊어 놨습니다.”

그 말에 장세룡이 옆을 돌아봤다.

“새는 곳은 막았어?”

“아직 파악 중에 있습니다.”

“빨리 못하나?”

“죄송합니다.”

사내가 고개 숙이며 대답했다.

질책에 할 만한 대답은 그게 전부였다.

그의 대답대로 여전히 파악 중이기 때문이었다.

룸살롱 사건은 정황상 내부에서 정보가 샜다고 봐야 하는데, 나오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메일 기록, 통화 내역, 차량 네비게이션과 CCTV 등을 이용한 이동 경로까지 확인했지만, 내부 정보가 샜다는 증거가 없었다.

고문하다시피 취조한 조직원 하나가 고통에 못 이겨서 거짓 정보를 털어 놨을 뿐.

이윽고 에쿠스가 멈추자, 장세룡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네 입이라도 다시 확인해, 말실수 한 거 없는지. 알았나?”

“알겠습니다.”

“가 봐.”

“네, 의원님.”

사내가 내린 곳은 실내 주차장이었다.

에쿠스는 금세 도로로 향했다.

***

“그래, 자네 사정도 아는데…….”

신 의원이었다.

그가 전당대회를 코앞에 두고 나를 찾아와서 매달리고 있었다.

이유는 당연히 돈.

지명직 최고위원을 약속하면서 조건으로 내걸었던 자금을 바라는 것이었다.

“이미 낸 것도 있잖아? 거기다 조금만 더 보태라는 거야, 내가 되면 자네 지명직으로…….”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었다.

이미 박 보좌관 손에 들려 보낸 돈만 10억이었다.

여기서 무슨 돈을 더 쓰랴?

“의원님.”

“어, 어?”

“제 사정 아신다면서요?”

“그게…… 보험이라고 생각해, 그럼 되잖아?”

“낸 거 달라고 하진 않겠습니다, 대가도 바라지 않겠습니다. 다만, 더 이상 지원은 못해 드립니다. 아시잖습니까?”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었다.

침묵으로 전당대회에 임하는 신 의원에 대한 공격이 더 커지고 있었다. 그건 야당뿐만 아니라 여론도 마찬가지였다.

신 의원도 그건 아는지 곧장 대답하질 못하고 움찔했다.

월요회 얘기를 꺼내면 쉽게 끝날 것 같았지만, 지금 입 밖으로 꺼낼 생각은 없었다.

전당대회가 끝나고, 신 의원 이빨이 뽑힌 뒤여야 했다.

지금은 아직 그에게 동조하는 사람이 적잖았다. 유력가는 아니어도, 굳이 번거롭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

“의원님, 죄송하지만 여기까지입니다. 저도 의원님 말씀 한 마디 믿고 특별당비 납부했었습니다. 제 도리가 부족했습니까?”

“……그래, 자네는 잘했는데.”

“이번 사건 끝나면 다시 도와드리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고, 잠깐의 정적이 흐른 다음이었다.

생각이 많았는지 신 의원이 입을 열었다.

“……고맙네.”

체념한 말투였다.

새파랗게 어린 나한테 매달린다는 건 더 이상 기댈 곳도 없다는 뜻이 아니던가?

지지자들이 있긴 해도, 쓸 만한 사람은 없을 테니까.

“아닙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짧게 고개 숙이고 본 신 의원의 얼굴에 그늘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포기한 걸까?

아니면 그저 힘든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게 있었다.

이틀 뒤면 전당대회 후보 등록일이었고, 2주 뒤에는 전당대회 선거일이라는 점이었다.

뭐가 됐든 마무리가 된다는 얘기였다.

내 월요회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