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87화 (87/191)

# 87

28. 네가 감히? (1)

이튿날, 국회 의원회관.

의원실로 들어서던 윤수혁이 가까이 있던 9급 비서에게 손을 흔들었다.

“오셨습니까, 의원님.”

비서가 정중하게 고개 숙이자, 사무실에 있던 보좌진도 얼른 몸을 일으키며 인사했다.

그중 개인 사무실 앞까지 따라붙은 4급 보좌관 박민표가 빙긋 웃었다.

“오늘 얼굴 좋아 보이십니다. 좋은 일 있으셨습니까?”

“있었죠, 좋은 일.”

윤수혁이 씩 웃으며 개인사무실 문을 열자, 박민표가 뒤따라서 들어갔다.

“좋은 일 있으셨다고요? 누구 만나신 겁니까?”

약간 당황한 얼굴.

여름 정장 상의를 벗던 윤수혁이 시선을 돌렸다.

“개인적인 겁니다, 왜요? 무슨 일 있습니까?”

“요새 접대하려는 민원인이 많아서 여쭤봤습니다. 그런 건 아니죠?”

“접대는 해도 안 받는 거 아시잖아요?”

박민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금배지를 단 이후로, 윤수혁이 접대 받은 경우는 없었다.

부득이한 자리에서도 윤수혁은 자신이 먹은 값은 냈고, 여의치 않으면 식사비용을 전부 지불하기도 했었다.

재산이나 위치로 따져도 얻어먹을 이유는 없지만, 세상에 공짜 마다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가진 사람일수록 특혜를 좋아했다.

마중이나 배웅 같은 작은 의전부터 정중하고 공손한 대우, 물질적이고 실질적인 접대까지.

더욱이 가진 사람을 떠받드는 게 사회 풍조였다. 가진 사람은 당연한 게 많은 나라였다.

그랬기에 박민표는 윤수혁이 왜 그렇게까지 자기 관리를 하는지, 완전하게 이해하질 못했다.

더 많이 받아도 될 텐데, 더 많이 누려도 될 텐데.

물론 최소한으로 흠을 만들려는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마음과 행동은 언제나 다른 법이었다.

특히 정치인은 앞뒤가 다르지 않던가?

그런 점에서 윤수혁은 높게 쳐줘야 할 국회의원 중에 한 명이었다.

속내는 몰라도 행동 만큼은 앞뒤가 거의 비슷한 사람이었다.

이윽고 사무 책상에 앉은 윤수혁이 박민표의 시선을 마주했다.

“하실 말씀이 그거예요?”

“아, 아닙니다. 6월 임시회 일정 알려 드리고, 이번에 다녀오신 예비군 훈련 토의하고 좌담회가 있어서…….”

그렇게 설명이 급하게 이어지던 와중.

박민표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정말 무슨 일 있으셨던 겁니까?

“왜요?”

“들어오시는 순간부터 웃는 얼굴을 하고 계시길래…… 업무 얘기도 보통 그런 표정으로 안 들으시잖습니까?”

“흐흐,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혹시 만나시는 분이……?”

박민표의 설마 하는 물음에 윤수혁이 피식 웃었다.

“역시 보좌관님입니다.”

“맞아요?”

“예.”

“아! 축하드립니다. 혹시 언론에 공개하실 예정이십니까? 예정이라면 언제 즈음…….”

보좌관답게 빠릿하게 물었으나 윤수혁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그 정돈 아니고요. 제가 나중에 때 되면 말씀드릴게요.”

“알겠습니다, 대신에 꼭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기사로 먼저 보면 의원실 대응도 그렇고, 저희 식구들도 많이 섭섭할 겁니다.”

“기사 나기 전에는 말씀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파이팅 하십시오!”

박민표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과장된 표정을 지었고, 윤수혁이 손을 내저었다.

“소문만 내지 마세요.”

“에이, 저 박민푭니다. 입 무거운 거 아시잖습니까?”

박민표가 믿음직스럽게 웃었다.

자신이 윤수혁에게 받은 게 얼마나 많은가?

단순히 돈이나 보좌관이라는 직책이 다가 아니었다.

존댓말, 의원실 내에서의 대우, 실질적 총괄 업무 등등 사소한 것까지 더하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물론 밥값이나 간식비, 교통비 등 사비로 챙겨 주는 돈과 최근의 1억이라는 축의금이 단연 압도적이긴 했지만.

어쨌든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그렇게 박민표가 사무실을 나간 뒤.

윤수혁에게 문자 메시지가 한 통 왔다.

[출근했습니까?]

비대위원장인 조성현 의원이었다.

간만에 온 연락에 윤수혁이 얼른 답장을 적어 넣었다.

[예, 지금 방에 있습니다.]

[그럼 내 방에서 좀 봅시다. 긴히 할 말 있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답장을 적은 윤수혁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질이 왔구나.’

조성현이 자신을 부를 만한 이유는 없었다.

단 하나, 전당대회.

그것뿐이었다.

지금의 조성현이라면 최소한 최고위원에 당선될 것이었다.

비대위원장이라는 자리를 하면서 언론을 타고, 수십 명의 같은 당 동료의원들을 고발하면서 이름이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조성현은 쉬이 얻기 힘든 인지도가 있었고, 정직과 청렴이라는 이미지까지 있었다.

의원실을 나가던 윤수혁이 짧게 웃었다.

최고위원은 따 놓은 당상이고 운이 좋다면 당대표를 해먹을 수도 있었다.

신경배라는 거물이 살아 있고, 친MB계가 있긴 했으나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이윽고 윤수혁이 조성현의 의원실로 들어갔다.

“아, 윤수혁 의원님.”

보좌진들이 주춤하며 일어났고, 윤수혁은 자연스레 개인사무실 앞까지 다가갔다.

“윤수혁입니다, 위원장님.”

“들어오세요.”

“안녕하십니까. 아, 보좌관님도 계셨군요.”

“오랜 만에 뵙습니다, 의원님.”

조성현의 보좌관이 일어나서 윤수혁을 맞이했다.

이윽고 셋이 모두 소파에 앉은 뒤, 조성현이 운을 뗐다.

“윤 의원, 전에 했던 말 기억합니까? 전당대회 나가라고 했었죠, 돕겠다고도 했고요.”

“예, 기억합니다.”

“그럼 염치 불구하고 부탁하겠습니다, 도와주세요, 윤 의원.”

조성현의 머리가 숙어졌다.

곁에 있던 보좌관은 시선을 피했고, 윤수혁도 멈칫했다.

3선에 비대위원장까지 하고 있는 사람이 자존심을 버려 가면서 고개까지 숙였다.

겉으로는 이미지와 인지도를 위해 뭐든 다 한다고 해도, 국회의원의 속에는 그것과 상반된 자존심이 있었다.

그래서 특혜와 대우에 더 목매는 것이었고.

윤수혁은 새삼스런 눈으로 조성현을 바라보다가 늦지 않게 대답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돕겠습니다.”

어차피 지명직 최고위원은 약속 받은 상태였다.

거기에 자신의 손으로 만든 사람이 당 지도부가 된다면 손해 볼 게 없는 장사였다.

윤수혁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말을 덧달았다.

“돈 걱정 하지 마십시오. 대선도 열 번은 치르고 남을 돈입니다.”

수천억을 가진 윤수혁의 확신어린 말에 조성현의 고개가 들렸다.

“고마워요, 윤 의원.”

“고민 많이 하셨을 걸로 압니다, 제가 드렸던 말씀 기억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안 그래도 말 들어 주는 3선 의원이 몇 없었다.

아무리 돈이 많고, 인기 의원이라고 해도 고집스런 다선 의원들은 여전히 윤수혁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사이, 조성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그의 말에서 결연한 각오가 돋보였다.

* * *

며칠 뒤.

6월의 첫 주말.

오전 행사 일정에 맞춰 움직였다.

위치는 강북구 내의 지역아동복지센터 주차장.

‘강중약‘창단식과 동시에 봉사활동이 예정되어 있었다.

‘강중약‘은 ‘강북구의 중산층을 위한 약속‘이라고, 강북구청에서 공모전까지 열어서 뽑은 단체명이었다.

내가 보기엔 부장님 유머 같았지만, 어쨌든 강중약은 내 관리 대상이었다.

강중약의 회원들이 강북구에 주소지와 기반을 둔 유지들이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서 유권자 중에서도 한 끗발 하는 사람들.

나는 활동하기 좋은 기능성 트레이닝복을 챙겨 입고 벤츠 E클래스 뒷좌석에 올랐다.

사진 촬영과 보좌 업무를 위해 영석이가 대기 중이었다.

“토요일 아침부터 고생이다.”

“아닙니다, 의원님. 이게 제 일 아니겠습니까?”

“말은 참…… 밥이나 맛있는 거 먹자, 아, 소고기 어떠냐? 내가 아는데 가면 손질한 거 포장도 해 주거든, 몇 근 가져가서 챙겨 먹어.”

“고맙습니다, 출발하겠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지역아동복지센터.

주차장에는 이미 많은 게 준비되어 있었다.

흰색 천막, 피켓, 플래카드 등등.

주차된 고급 차량도 많았고.

“의원님!”

내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60대 사내 하나가 뛰어왔다.

성강건설의 김한수 사장.

강북구 사무소 개소식할 때 화환을 보낸 사람이었고, 몇 달 전까지 치근거리던 이었다.

강중약에서는 총무라는 직책을 맡은 사람이기도 했고.

“안녕하세요, 김 총무님.”

“으하하, 일찍 오셨네요. 자, 이쪽으로 오시죠.”

“예.”

안내인이라도 된 듯 김 총무가 나를 이곳저곳에 소개시켜 줄 무렵.

회원 대다수가 도착했고, 약식으로 창단식이 진행되었다.

모임 회장, 부회장, 총무 취임식도 동시에 이뤄졌고, 내 축사까지 중간에 들어갔다.

강북구의 미래, 희망 그런 단어를 넣은 원고를 낭독했고, 오래지 않아서 창단식이 끝났다.

한 20여분 걸렸나?

김 총무가 나서서 소리쳤다.

“이제 봉사활동 하시죠!”

별거 없었다.

지역아동복지센터가 있는 건물 청소와 창고 정리, 기부 물품 증정 등이 순서대로 이뤄졌다.

주말에 복지센터에 나왔던 아이들이 사진에 담겼고, 센터장과 자원봉사자들도 같이 사진 촬영을 도왔다.

그건 조금 길었다.

두어 시간?

점심시간에 맞춘 것인지, 11시가 되자마자 정리가 시작됐다.

“식사는 총무가 쏘겠습니다, 얼른 정리하고들 가십시다!”

별 감흥 없었다.

애초에 나부터가 표 관리를 위해 온 만큼, 이런 보여 주기식 봉사 활동을 타박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한심할 뿐이었다.

내가 이렇게 좋은 사람이라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졸부라고 자위라도 하고 싶은 걸까?

신경 쓸 표나 유권자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들은 왜 골프웨어 차림으로 왔을까?

모를 일이었다.

다만 김 총무가 쏜다던 점심 자리는 내가 갈 곳이 아니었다.

강남구의 룸살롱.

어이가 없어 김 총무를 쳐다봤다.

“대낮부터 이런 데를 가십니까?”

“오, 여기 아세요?”

그러나 돌아온 건 긍정적인 반응.

“요새 대낮에 와야 돼요, 그래야 집에 가면 딱 퇴근 시간 되지요. 그리고 밤에는 단속들 하잖아요?”

김 총무가 자랑스럽다는 듯 떠들어댔다.

그러다 뒤늦게 내 표정을 본 것인지, 그가 바쁘게 손을 내저었다.

“아이, 참. 생각하시는 그런 거 아니고, 오늘은 축하주 먹으려고 낮에 온 겁니다.”

그 말도 썩 마뜩잖았는데.

“안 들어가고 뭐 하세요?”

“의원님, 바쁜 일 있으세요?”

강중약 회원들이 한두 마디씩 던져댔다.

오늘 참석자만 대략 스무 명.

이미 식사까지 예약한 마당에 그냥 돌아갈 순 없었다.

더구나 조 의원이 전당대회에 나가겠다고 한 이상, 하나라도 표를 더 만들어 놔야 했다.

이 중에는 새한국당 대의원도 몇 명 있었다.

결국 정상 영업 시작과는 전혀 상관없는 오전 11시 50분, 지하에 자리한 룸살롱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는 입구는 다른 룸살롱과 비슷했다.

어둑한 실내나 조명, 커다란 타일 등등.

방문해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기시감을 느낄 무렵이었다.

눈에 익은 게 보였다.

이건 비슷하거나 익숙한 느낌과는 다른 것이었다.

명백히 내가 알고 있는 기억이었다.

양 부장.

이 바닥에서 잔뼈 굵은 인간이 아니던가?

뚜렷하게 생각 났다.

10년간 밑바닥부터 박박 기어 올라가면서 뒤처리를 했었으니, 이 바닥 인간들을 모를 수 없었다.

더구나 저 양 부장.

장 의원 밑에 있을 때, 같이 일해 봤던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장 의원의 수족인 홍 전무가 부리던 사람이었다.

쉽게 말해서 실무자.

왜 저 인간이 여기 있을까?

우연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 우연일 리가 없었다.

내가 뒤처리를 했듯, 양 부장도 그런 일을 하던 인간이었다.

탈 없이 부정을 저지를 때 쓰는 도구랄까?

그런 게 양 부장이었다.

그리고 그 양 부장이 웨이터를 흉내 내며 내 옆에 서 있었다.

헛웃음이 났다.

내 옆에 붙어 있는 꼴을 보고 있자니 가당치도 않았다.

양 부장의 목표가 나라는 뜻.

이 많은 강중약 회원들을 어쩌고 나를 공사하겠다는 걸까?

선뜻 방법이 떠오르진 않았지만, 어찌 됐든 수단과 방법이 보통은 아닐 것이었다.

배후에 장 의원, 계획에 홍 전무가 있을 테니.

그렇다고 당해 줄 생각은 없었다.

역으로 공사를 망치고, 부도라도 내 줄 생각이었다.

장 의원과 관련된 증거가 없을 테니, 직접적인 타격을 주기는 힘들겠지만.

나는 양 부장에게서 시선을 떼고, 조용히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오랜 만에 공사 엎는 걸 눈으로 보게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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