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86화 (86/191)

# 86

27. 만남 (2)

식사 시간은 길었다.

접시 비워 내는 속도에 맞춘 것인지, 대화가 끝나고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을 때마다 음식이 등장했다.

디저트인 쁘띠푸르까지 나오는데 걸린 시간이 한 시간.

냅킨으로 입을 닦고, 화장실을 다녀온 한사랑이 싱긋 웃었다.

“여기 맛있네요.”

“다행입니다, 추천받은 보람이 있네요. 원래는 전경 좋은 데로 가려고 했었거든요.”

“풍경이요?”

“예, 야경 보이는 곳이나 바닷가나…….”

“저 야경 좋아해요.”

“잘 됐네요, 이제 야경 보이는 곳으로 가려고 했는데.”

“좋아요.”

그녀가 싱긋 웃는데 내 목덜미가 움찔했다.

약간의 중저음.

청순하고 아리따운 외모와는 다른 그 음성에 저절로 목울대가 반응한 것이었다.

고백 받은 것만 같아서, 나도 좋아한다고 대답할 뻔했다.

더구나 입술에 립스틱은 언제 바른 것인지, 윤이 흐르는 입술이 유독 돋보였다.

사람을 말 한 마디로 움찔하게 하다니, 이게 말의 힘인가?

우스운 생각을 하면서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호텔 정문처럼 만들어진 지하주차장은 대리석과 조명으로 내부 마감까지 고급스럽게 만들어진 모습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로비에서 대기 중이던 도어맨과 레스토랑 지배인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좌우로 의전하듯 서 있던 모습이었다.

이윽고 허리를 편 지배인이 정자세로 서면서 입을 열었다.

“레스토랑 지배인 김성우입니다. 저희 레스토랑을 이용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식사는 만족스러우셨습니까?”

“예, 잘 먹었습니다.”

“다음에도 이용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성공적인 의정활동을 기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의원님. 행복하시고 즐거운 밤 되십시오.”

“고맙습니다.”

고개 인사로 답해 주고, 회전 유리문을 지났다.

그러자 들려오는 배기음.

올해 나온 벤츠의 AMG 쿠페 모델이었다.

영석이한테 맡겨 놓다시피 한 E클래스 대신에, 개인적으로 타고 다니기 위해 구입한 차였다.

마침 서초구 아파트와 전시장이 가까워서 들러서 산 것이었다.

그래서 부모님차도, 형 차도 벤츠의 로고를 달고 있었고.

그사이, 도어맨이 운전석과 조수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마지막까지 정중한 인사를 받고, 액셀을 밟았다.

한강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바.

레스토랑 같은 별채는 아니었으나, 회원제로 운영했기에 제법 조용한 곳이었다.

예약한 창가에 앉자, 한사랑이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찰칵.

후면 카메라로 야경을 촬영했고, 스마트폰을 뒤집다가 나를 바라봤다.

“저 사진 몇 장만 더 찍을게요. 너무 예뻐서…….”

“그렇게 해요.”

보고 있는 것 자체가 좋았다.

사람을, 그것도 여자를 단순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나?

청와대에 있을 때, 웬 고참 보좌관은 여자는 품어야 맛이라고 했었는데.

나도 그 말처럼 육체적 관계에 제법 신경 쓰긴 했다만, 전부 헛소리였다.

아름다움과 별개로 싱그러움까지 넘쳐 났다.

스물한 살의 나이.

파릇파릇하기에는 차고 넘쳤다.

그녀가 좌측의 마포대교와 우측의 서강대교를 배경으로 셀카까지 찍고는 픽 웃었다.

“같이 찍으실래요?”

전생에도 몇 번 해 본 적이 없던 커플 셀카였지만, 대답이 얼른 나갔다.

“그래요, 같이 찍어요.”

자리를 옮겨 옆자리에 앉자, 그녀가 카메라 어플에 내 얼굴을 담았다.

배경으로는 한강과 서울의 야경이 반 정도 들어왔고.

찰칵.

그렇게 두어 장의 사진을 더 찍자, 그녀가 생긋 웃었다.

“사진빨 잘 받네요.”

“정치인이라서 그런가 봅니다.”

내 농담에 그녀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 농담이에요?”

“반은 농담이고, 반은 진담이고…….”

“으음, 진짜 정치하는 아저씨 같았어요.”

“정치하는 아저씨 맞잖아요, 저 국회의원이에요. 어제도 국회에서 회의했어요.”

“어제 사진 봤어요.”

“사진?”

“네, 군복 입었던데요. 훈련 받았다고 인터넷 뉴스로 나왔던데요?”

“그것도 정치였어요. 원래 안 받아도 되는 훈련인데…… 아, 나도 하나 물어봐도 돼요?”

“네.”

“사랑씨는 장래희망이 뭐예요?”

“많았어요, 원래는.”

“그럼 많았던 얘기부터 해 봐요.”

“음, 통역관? 외교관…….”

나직하게 대답이 이어졌다.

그렇게 칵테일을 몇 잔 마시면서 잡담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사랑이 양 볼에 홍조를 띄운 채 나를 바라봤다.

“이제 또 어디가요?”

“집에 가야죠, 더 마시고 싶어요?”

“으음, 좋아서요.”

갑자기 훅 들어온 말에 주춤했다가 대답했다.

“저도 그러면 좋겠는데…… 다음에 더 먹어요. 해산물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해산물 살게요.”

“그럼 집에는 데려다 주실 거예요?”

“그래서 무알콜로 마셨어요, 제가 직접 데려다 줄 게요. 집이 어디예요?”

이미 노원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모른 채 물었다.

그녀가 싱긋 웃더니 파우치에서 신분증을 꺼냈다.

“이거 러시아어잖아요.”

“아, 죄송해요.”

다시 꺼낸 신분증.

서울시 노원구로 시작하는 주소가 아파트 주소가 적혀 있었다.

“강북구 바로 옆이네요, 내 사무소가 근처인데.”

“사무소도 있어요?”

“재선이 목표라서요. 미리 출마할지역구에 사무소 구해놓은 거예요.”

“가는 길인데, 구경시켜 주면 안 돼요?”

“……거긴 별로 멋 없어요. 촌스럽고, 좀 그래요. 오늘 갔던 레스토랑이나 이런 바하고는 달라요.”

강북구 사무소는 7층짜리 빌딩에 세놓은 사무실 하나를 빌린 게 전부였다.

따로 내 돈 들여서 사무실을 리모델링하지도 않았고, 흔한 사무책상에 캐비닛, 책장, 소파 따위를 구비해 놓은 게 전부였다.

업무를 볼 전자제품만 고가로 사줬을 뿐.

“저 아빠가 일하던 공장도 가 봤어요, 괜찮아요.”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못 갈 이유도 없었다.

“잠깐만요, 보좌진 일하는지 확인해 볼게요.”

사무장에게 퇴근했냐고 카톡을 보내자, 몇 초 만에 답장이 돌아왔다.

[필요하신 거 있으십니까? 바로 사무실로 가겠습니다.]

평소에 묻지 않던 걸 물어서 그런가, 사무장이 바짝 긴장한 게 느껴졌다.

[아닙니다, 경리 직원은요?]

[퇴근했습니다만, 경리 필요하십니까?]

[괜찮아요. 평소에 보좌진 퇴근 늦길래 한 번 확인해 본 겁니다. 무리하지 마세요.]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의원님.]

칼같이 날아온 답장에 스마트폰을 품에 넣고 한사랑을 바라봤다.

언제 또 단장을 마쳤을까?

조금도 번지지 않고, 선이 분명한 입술이 반짝거렸다.

“가도 된대요?”

“제 사무소예요, 당연히 가도 되죠.”

강북구 사무소에 도착했을 때는 밤 10시 무렵이었다.

빌딩 대부분의 불이 꺼져 있었는데 야근 중인지 몇 곳의 창문이 환했다.

지하주차장으로 쑥 들어가자, 차창 바깥을 내다보던 한사랑이 나를 불렀다.

“이 건물이에요?”

“예.”

“원래 국회의원은 현수막 같은 거 걸어 놓던데.”

“선거철에만 그래요. 자, 다 왔습니다.”

사무실 지정 주차라인에 차를 대자, 그녀가 파우치를 챙겨들었다.

먼저 운전석에서 내려서 조수석으로 돌아가자, 내리던 한 사랑이 가볍게 손을 저었다.

“괜찮아요, Я не был пьян.(나 안 취했어요.)“

“뒷말은 욕 아니죠?”

“푸흐, 그런 거 좋아해요?”

그녀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가벼운 농담임이 분명한데도, 풍기는 건 요염한 분위기였다.

살짝 낮은 목소리 때문인가? 아니면 아름다워서 그런가?

뭐가 됐든 고혹적이었다.

“그런 건 안 좋아하는데, 사랑 씨가 하는 러시아어가 좋네요.”

“왜요?”

“발음도 그렇고 느낌이 다르잖아요. 생소해서 그런가?”

“Разве я не хороша?(내가 좋은 게 아니에요?)“

“좋네요.”

“어? 내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음, 아는 단어 같긴 한데 모르겠어요. 아니, 사실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우스개소리를 하며 사무실로 올라갔다.

이윽고 사무소의 닫힌 문앞에 도착해서, 번호키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윤곽이 흐릿하게 보였다.

창문 너머에서 들어오는 가로등과 앞 건물의 불빛에 의지하며 벽을 더듬는 순간.

“아!”

놀란 소리와 함께 한사랑이 휘청했다.

허공을 휘젓는 손을 얼른 잡자, 그녀가 움찔하며 나를 바라봤다.

“괜찮아요?”

“저, 하이힐…….”

창피한 듯한 소곤거림에 바닥을 내려다봤다.

뾰족한 굽이 문틈에 걸린 것인지, 하이힐 한 짝이 입구에 널브러져 있었다.

하이힐을 그녀의 발치에 놓고 잡아주자, 그녀가 조심스레 발을 넣었다.

“됐어요?”

일어나며 묻자, 돌연 달짝지근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동시에 내 양 뺨으로 부드러운 촉감과 온기가 느껴졌다.

허둥대며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가 내 앞에 마주서서 얼굴을 붙잡은 것이었다.

잠깐 주춤했으나, 내 손도 움직였다.

재킷에 가려져 있던 잘록한 허리를 휘감았고, 동시에 매끄러운 촉감이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입맞춤.

다른 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끌어안았고, 서로의 호흡을 섞었다.

얼마만의 키스인가, 그런 가벼운 생각 따위는 금세 지워졌다.

심장 펌핑이 바빴다.

달음박질이라도 한 것처럼 코와 입으로 날숨이 뿜어졌다.

그렇게 키스를 하던 중.

치솟던 격정이 주춤하고, 딴생각이 훅 들어왔다.

누울 자리를 찾지 못해서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호텔을 잡았을 텐데, 아니면 간이 침대라도 마련 해둘 걸.

그런 생각 끝에 어느새 닿아 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좀 우스웠다.

관계에 안달이 난 스무 살 청년도 아니고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그사이, 어둑한 가운데 한사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요?”

“갑자기 곤란하게 만들어서요, 제가 무례했던 것 같아요.”

입술을 앗아 갈 정도로 요염한 여자는 어디가고, 다시금 쑥스러움을 타는 소녀가 됐을까?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대꾸했다.

“아니에요. 아, 불 켤게요.”

“아뇨, 입술 번졌을 거 같아서…….”

“그럼 이렇게 대화할까요?”

“네, 저는 괜찮아요.”

“그러면…… 궁금한 거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네, 말해 주세요.”

그녀가 어느새 응대용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내가 찰나의 순간에 누울만하다고 여긴 유일한 장소.

아쉽게도 유리가 깔린 딱딱한 테이블이라서 눕진 못했었지만.

나는 잡생각을 날려 보내고, 조심스레 물었다.

“이렇게 예쁘고 어린데, 왜 이런 자리에 나왔어요? 부친께서도 사업가라서 생활이 괜찮을 거 같은데.”

강 사장에게 이유를 듣긴 했었다.

러시아의 결혼 평균 연령이 20대 초반이라서 스물한 살이 어린 건 아니라고.

그러나 오늘 만난 한사랑은 러시아 사람이 아닌, 한국 사람이었다.

한국말도 잘했지만, 대화나 행동에서 보여 주는 습관이 한국인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사이, 한사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러시아에서는 일찍 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게 다예요?”

“다른 건 윤수혁 씨가 말했잖아요.”

“무슨…… 아!”

생각이 번쩍하는 사이,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예쁘고 어리고, 아빠는 사업가잖아요.”

정략적이라는 뜻인가?

말이 되긴 했다.

안드레 한은 사업가로서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퇴직한 공무원의 딸인 아내를 이용해서 러시아에서의 무역 사업을 성공적으로 확장한 이였고.

다만 이런 고운 딸을 도구처럼 썼을 것 같진 않았다.

애지중지 키웠으니, 좋은 사윗감을 선별하려는 게 아닐까?

“그럼 이런 자리에 나오기 싫었어요?”

“질문 하나 아니었어요?”

“……그러네요.”

“대신에 다른 대답할게요, 윤수혁 씨가 싫은 건 아니에요.”

피식 웃음이 났다.

예쁜 데다가 머리까지 똑똑했다.

나는 그녀의 흐릿한 윤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사랑 씨, 집에 들어가기 싫은 건 아니죠?”

“집에 갈 거예요. 저 엄마하고 아빠하고 사이좋아요.”

그녀가 웃는 듯했다.

미소가 어렴풋하게 눈에 들어왔다.

나까지 웃음이 났다.

고혹적이고, 영리한 것 같다가도 스물한 살의 소녀 같은 모습에 마음이 움직인 것이었다.

반하기라도 한 건지.

한사랑을 지그시 바라보자, 그녀가 엷게 웃었다.

사람을 매료시키는 웃음.

그런데 뒤에 이어진 말은 또 맑은 소녀 같았다.

“깜깜한데 눈싸움 하려구요?”

피식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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