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83화 (83/191)

# 83

26. 번거롭게 (3)

위장과 완전군장은 소위 ‘가라’였다.

얼굴 옆면과 목, 손등에도 크림을 바르기만 하면 됐다.

막사 복도에 붙여 놓은 국군포스터의 모델처럼 칠하는 게 아니라, 살색만 가리면 되는 것이었다.

완전군장도 마찬가지였다.

들어가는 내용물이 달랐다.

모포, 포단, 판초우의, 전투화, 침낭 등등.

생활관마다 배정된 조교들이 일제히 나눠 준 것들이었다. 군장의 무게 보다는 모양에 중점을 둔 것이었고.

크게 무겁지도 않았다.

그래선지 예비군들도 짜증을 곱씹긴 했으나, 시키는 대로 꾸역꾸역 완전군장을 쌌다.

애초에 짜증과 된소리를 버릇처럼 흘리면서도, 시키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게 바로 예비역들이었으니.

그래서 신경이 쓰이긴 했으나, 크게 걱정이 되진 않았다.

이윽고 총기 수령 방송안내가 나올 무렵.

“저기…… 수혁아?”

차리 행보관의 목소리.

그가 찾아온 이유가 훤히 보였다.

총기 불출하고, 장구류 확인하려면 그도 차리 포대에서 바쁠 게 뻔한데, 친목이나 도모하려고 찾아올 리가 없었다.

직책도 포대 살림을 책임지는 행보관이 아니던가?

아마도 상급자의 지시로 움직였을 확률이 컸다.

나는 눈치껏 고개를 끄덕였다.

“나갈게요, 잠시만요.”

“그래, 옆에 계단참에 있을게.”

그렇게 차리 행보관이 조용히 나가고.

“간부랑 아세요?”

옆 자리에서 위장크림을 바르던 예비군 하나가 말을 걸었다.

“예, 여기서 전역했어요.”

“그래요? 그럼 훈련 왜 이런대요?”

“……글쎄요.”

그렇게만 대꾸했다.

규정대로 하라는 내 말을 부대에서 곡해 했다고 대답하기는 좀 그랬다.

여기선 튀어서 좋을 게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예비군의 시선이 돌아간 틈에 생활관을 나가서 차리 행보관을 찾아갔다.

계단참에서 담배를 빼물던 그가 씩 웃었다.

“한 대 펴.”

“저 담배 안 핍니다.”

“어? 피지 않았어?”

“선임한테 갈릴 때 몇 번 펴봤는데, 몸이 안 받아서요.”

“아, 그렇구나. 그냥 뭐 좀 물어보려고.”

“말씀하세요.”

“별 건 아니고…… 훈련 이대로 쭉 가도 괜찮겠어?”

“왜요?”

“예비역들 욕하는 소리가 1층 대대장실까지 들리나 봐, 그래서 물어보라는 거 같은데? 사실 대대장도 조용히 넘어가고 싶은데, 너 때문에 하는 거니까.”

“저는 그냥 규정대로 하라고 했었는데요?”

“아, 그건 그런데…… 하여튼 어떻게 할래? 아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병무청 국장급한테도 규정대로 하라고 했는데, 일개 육군 상사한테 청탁을 하랴?

“앞으로 이런 거 물어보지 마세요. 저 국회의원이고, 국방위 소속입니다. 여기서 저보고 부정 청탁이라도 하라는 말씀이세요?”

그러자 담배를 물고 있던 차리 행보관이 움찔했다.

정확히는 국회의원, 국방위, 부정청탁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눈을 껌뻑거리며 떤 것이었다.

“아, 아니…… 그건 아닌데.”

“이거 대대장 지시예요?”

“아, 아니…… 저기, 수혁아.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물어보라고 해서…….”

그가 손을 내저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편하게 물고 있던 담배는 입이 아닌 손에 들려 있었다.

“오해야, 오해. 그런 말 하지 마. 무섭다, 무서워. 나 알잖아?”

“그냥 규정대로만 하세요. 아시겠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규정대로.”

“어, 어. 그럴게.”

내가 몸을 돌리려는 순간, 행보관의 목소리가 조심스레 따라붙었다.

“저기 근데, 기분 불편하면 존대로 할까? 우리가 알던 사이라도 신분이 있으니까…… 아무래도…….”

“그건 됐어요.”

내 대답에 행보관이 멋쩍게 웃었다.

“어, 고맙다. 어여 들어가, 나도 가봐야 되겠다.”

* * *

“몇 년 만에 싹 바뀌었네, 어우.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차리 행보관이 급하게 계단을 올라가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가는 사이.

차리 행보관은 윤수혁의 말투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역시 국회의원은 국회의원인 모양인지 생각보다도 위압감이 대단했다.

그때, 작전과장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 어, 행보관.

“작전과장님. 방금 따로 불러서 물 봤는데, 그냥 규정대로 하랍니다.”

- 규정대로?

“네, 그리고 이런 것도 물어보지 말라고…….”

- 알았어요, 일단 끊어요.

뚝.

통화가 종료되자, 행보관이 미간을 찌푸렸다.

지시에 관한 건 수행했고, 결과를 말해 줬지만, 아직 말하지 않은 게 있었다.

윤수혁의 은근한 위압과 압박.

그건 사람을 움찔하게 만들 만한 것이었다.

20대의 운 좋은 국회의원이라고 생각했고, 복무 시절 부하라고 여겼는데도 불편할 정도였다.

다시 전화를 걸까?

행보관은 고개를 저었다.

작전과장이 알아서 하겠거니 한 것이었다.

그도 할 일이 많았고, 무엇보다 방금 통화한 것처럼 작전과장과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 * *

총기 수령하고, 군장 매고, 옆구리에 방독면까지 차고 포대별로, 포반별로 연병장에 모여 섰다.

증편 신고식 때문이었다.

5월 말의 뜨끈한 햇볕에 방탄모 안이 금방 덥혀졌다.

“한 팔 간격으로 서겠습니다, 선배님들. 앞 사람 방탄 보시면서 줄 맞추겠습니다.”

조교 완장을 찬 상병장들이 예비군을 통제했고, 간부들은 입소식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마이크에 음향 장비, 연설대까지 세팅한 게 꽤 많았다.

그때, 연병장 옆의 도로가 눈에 들어왔다.

차가 올라오고 있었다.

지붕에 빨간색 경광등을 단 군용 레토나와 까만 준중형 승용차.

저게 뭔가 싶었는데, 빨간색 바탕의 번호판이 슬쩍 보여서 알았다.

여단장이었다.

그 차가 올라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증편 신고식이 시작되었다.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등등.

이어서 구령대에 선 장교가 마이크를 잡았다.

예비군들 몇이 짜증을 견디며 투덜대는 사이.

“여단장님 입장하십니다, 부대 차렷.”

빠라바라밤- 빠라바라밤-

독립대대에 여단장까지 올 줄이야.

여단본부가 있는 부대는 어디에 팔아먹고?

헛웃음이 났다.

여단장이 직접 온다는 게 말이 안 되거나 불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웃긴 건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장성급 부대 지휘관들이 훈련 중인 부대를 찾는 경우가 있긴 했다.

09년도에는 사단장이 M16을 들고 직접 훈련을 받기도 했었고.

다만 이번 건 속내가 뻔히 보였다.

여단 밑에 부대가 몇 갠데, 굳이 여기까지 온단 말인가?

그사이에 여단장이 연설대 앞에 섰고, 포대장이 뒤돌아서서 목청을 돋웠다.

“여단장님께 대하여 받들어, 총!”

이어진 경례 구호와 총기 제식.

여단장이 절도 있게 경례를 받자, 포대장이 다시금 뒤로 돌았다.

“쉬어!”

포대장의 긴장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사이, 여단장이 마이크에 입을 댔다.

“동원예비군훈련에 바쁜 시간 쪼개어 참석해 준 예비군 전우들에게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올해는 예비군 창설 45주년으로, 아주 뜻 깊은 해이며…….”

다행히 여단장의 연설에 내 이름은 없었다.

대신에 진부하고도 식상한 연설이 이어졌다.

자신이 이렇게 열심히 한다는 걸 보여 줄 생각이었나?

그렇게만 생각하고 말았는데.

증편 신고식이 끝난 뒤, 생활관에서 휴식을 취할 때였다.

정확히는 곧 있을 점심 식사를 기다리고 있는데, 웬 목소리가 들렸다.

“윤수혁 선배님?”

예의 그 당직 완장을 찬 병장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예.”

“행정반 호출이십니다.”

“……갑시다.”

지우지 말라고 해서 여전히 위장 크림을 바른 채, 행정반으로 갔다.

이번에는 소령 계급장이 나를 맞이했다.

“작전과장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지휘관 면담이 있으신데…… 잠깐만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그 말에 쉽게 사람 하나가 떠올랐다.

여단장.

굳이 여기까지 와서 연설만 하고 갈 것 같진 않았다.

아무래도 나를 보러 왔겠지.

그럼 어떻게 할까?

* * *

포병여단장은 대대장실 자리에 앉아 별 하나가 박힌 베레모를 고쳐 썼다.

곧 대면할 윤수혁 때문이었다.

새한국당의 국회의원이자, 국방위원회의 위원.

비록 초선이고 나이가 어리긴 했지만, 재력이나 영향력이 꽤 있는 인사였다.

그래서 여단장이 직접 예비군 교육을 확인하고 결재했으며, 오늘 단번에 달려온 것이었다.

이건 기회였다.

국회의원, 그것도 국방위라면 군에 끼치는 영향이 어마어마했다.

이미 경험한 적이 있지 않던가?

어느 부대의 연대장이었을 때.

지역구 국회의원과 신한은행 은행장, 준정부기관 기관장과 함께 연대 내 문화쉼터를 건립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여단장은 그때 체감했었다.

국회의원이 왜 국회의원인지.

신한은행 은행장과 준정부기관 기관장의 명함을 받을 수 있던 것도, 연대 내에 문화쉼터를 지을 수 있던 것도 모두 국회의원 덕분이었다.

정확히는 생색내기 공약 한 줄이 만든 결과물이었다.

그때의 지역구 국회의원은 12년도에 낙선해서 줄이 끊어졌으나, 어쨌든 국회의원이란 존재는 생각보다도 영향력이 대단했다.

하물며 국방위가 아닌가?

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무렵,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작전과장입니다.”

“들어와.”

여단장이 말하자, 문앞에 다가갔던 대대장이 얼른 문고리를 당겼다.

윤수혁이 들어오자마자, 여단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단장 이명관 준장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윤수혁입니다.”

“일단 여기 앉으실까요? 같이 식사 하시면서…….”

미리 도시락이 세팅된 회의 테이블을 가리키자, 윤수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식사입니까?”

명백히 불편한 음색.

뒤에 서 있던 작전과장도, 서 있던 대대장도, 막 움직이려던 여단장도 움찔했다.

뒤늦게 여단장이 윤수혁의 시선을 쫓았다.

회의용 테이블.

정확히는 그 위에 세팅된 점심 식사를 확인했다.

광어, 장어, 새우 등 열두 가지 초밥과 전복 및 대하구이에 게살튀김, 갖가지 절임류와 과일, 국물까지 있는 인당 10만 원짜리 도시락.

초밥을 싫어하는 건가? 아니면 접대를 거절하는 건가?

여단장이 채 갈피를 잡지 못할 때, 윤수혁이 닫히던 문을 잡았다.

문을 슬쩍 당기던 작전과장이 움찔했다.

“죄송하지만, 이런 비싼 밥은 못 먹겠습니다.”

여단장이 아차 싶을 때, 대대장이 변명이라도 하듯 얼른 목소리를 냈다.

“그래도 일단 도시락 세팅 다 했으니까, 같이 식사를…….”

“저 도시락을 개인 사비로 구입하셨으면 접대로 의심되는 상황이고, 부대운영비로 샀다면 사용이 잘못된 거 같습니다만.”

“…….”

윤수혁이 칼같이 대꾸하자, 대대장은 차마 뒷말을 못 달고 입을 닫았다.

대대장실 문짝에 손을 대고 있던 작전과장이 입술을 씹었다.

부속실에 있던 여단장 부관과 대대장의 당번병까지 이 말을 듣고 있던 탓이었다.

침묵만 도는 가운데 윤수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여단장님.”

“아, 네.”

어정쩡하게 서 있던 여단장이 긴장하면서 똑바로 섰다.

얼굴에 위장크림을 바르고, 전투복을 입었다고 해도, 윤수혁은 국방위 위원이었다.

만약 오늘 일이 국회의 국방위에서 부정적으로 언급된다면, 상급부대인 군단이나 경기 지역을 총괄하는 제3야전군사령부까지 털릴 가능성이 높았다.

그도 아니라면 병무청장이나 국방부 차관, 장관이 업무 보고 자리에서 까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상급자가 망신을 당하게 된다면, 앞으로의 군생활은 어떻게 될지.

여단장의 속이 타들어 갔다.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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