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26. 번거롭게 (1)
그렇게 강 사장이 보내 준 카톡을 전부 읽은 뒤.
운전 중인 영석이를 쳐다봤다.
“영석아.”
“네, 의원님.”
“러시아 강사 좀 알아 봐줄래?”
방금 카톡으로 보내온 이름만 해도 알파벳이 수십 개였다.
영문 발음으로 적혀 있는데, 읽기도 힘들었다. 아니, 내가 읽는 게 맞기나 한 건가?
예카테리나 안드레예브나 한.
이 기다란 이름 말고, 내가 읽을 수 있는 한글 이름도 있긴 했다.
한사랑.
생각해 본 적도 없었지만, 새삼 어울리는 한글 이름.
그러나 그게 다였다.
설명에 정확한 체류 일까지 나오지 않아서 알 순 없었으나, 대충 봐도 한국권 문화보다는 러시아권 문화에 더 익숙해 보였다.
외모부터 러시아의 피가 더 많아보였다.
그래서 러시아에 대해서 최소한은 알아 둘 생각이었다.
뭘 공부하겠다는 건 아니었지만.
“러시아어요?”
“그래, 이왕이면 러시아 체류 경험도 있고, 발음도 네이티브로 되는 사람이면 좋겠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영석이가 대답하는 사이.
카톡이 다시 왔다.
이번에도 웬 여성의 증명사진이었다.
눈 화장이 짙은 한국여자.
예쁘장하긴 했으나, 외모로는 그게 전부였다.
이미 러시아 혼혈 미인을 봐서 그런가,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질 않았다.
세 번째로 온 재일교포 사진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내 기억 속에는 한 사랑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새하얀 피부가 머릿속 깊이 각인된 상태였다.
거의 압도적이었다.
러시아 이름인 예카테리나라는 글자가 더디게 뒤따르는 기분.
그만큼 강렬한 외모였다.
대신에 내심 걸리는 게 없지 않았다.
집안 배경, 직업, 재산 등등.
그런 게 부족해 보였다.
외모에 너무 많은 비중을 둔 탓인가?
부친은 러시아의 한인 무역상으로 큰 영향력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물론 그게 강 사장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 재산과 직업에 걸맞은지 의심될 정도였다.
결론적으로 예카테리나, 아니, 한사랑의 실물을 봐야 이 고민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게 사진빨이라면 혼자 쑈 한 셈이었으니까.
그 사이, 강 사장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몇 번 분으로 진행하시겠습니까?]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답장을 적었다. 이건 정해진 것이었다.
[1번이요.]
[알겠습니다. 미팅 일자 정해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문의사항은 메시지로 전달해 주시면 답장 작성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의원님.]
다른 미사여구 같은 건 전혀 없는, 간결한 대답.
이게 마담뚜의 자신감인가?
괜스레 웃음이 났다.
***
서울 종로3가 대형 룸살롱.
룸 입구에서 대기 중이던 웨이터가 인이어를 만지작거렸다. 귀에서 소음과 함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3번 룸, VVIP 갑니다. 문 오픈 해 주세요.
말을 듣자마자 웨이터의 시선이 복도가 꺾이는 코너 부분으로 향했다.
뚜벅- 뚜벅-
묵직한 구두 소리.
이어서 등장한 사람은 정장 차림의 장세룡이었다.
웨이터가 100도가 될 정도로 허리를 숙인 뒤에 문을 열었다. 웨이터의 인사를 무시하듯 걷던 장세룡은 자연스레 안으로 들어섰다.
양주와 갖가지 안주가 세팅된 어둑한 내부.
자리에 앉아 있던 장년의 사내가 벌떡 일어났다.
장세룡이 씩 웃었다.
“반갑네, 홍성우 전무.”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의원님.”
힘 있고 짧은 악수.
장세룡이 맞은편에 털썩 앉았고, 홍성우도 원래의 자리에 앉았다.
잽싸게 양주 병을 쥔 홍성우가 정중하게 빈 잔을 채웠다. 아이보리 컬러의 양주가 얼음 틈으로 파고들며 잔을 채웠다.
이윽고 술을 따르던 홍성우가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오늘은 보좌관 통하지 않으시고, 어떻게 직접 찾아주셨습니까?”
“오랜만에 얼굴 볼 겸 왔지. 자네 생활은 어떤가?”
“의원님께서 챙겨 주신 덕분에 잘 살고 있습니다. 이번 가을에 신사동에도 가게 낼 준비하고 있습니다.”
“신사동? 내 한 번 가야 되겠네.”
“아무렴요, 개장하고 풀서비스로 제대로 모시겠습니다.”
홍성우가 비스듬히 고개 숙이며 대꾸하자 장세룡이 술잔을 들면서 대꾸했다.
“그럼 이제 홍 사장 되는 건가?”
“네, 덕분입니다. 의원님.”
“돈 많이 태웠겠어?”
“좀 썼습니다. 대출도 꼈고…….”
“내가 좀 더 챙겨 주겠네, 동네 구멍가게도 아니고 돈 한두 푼으로 되겠나? 나도 학원사업 해 봐서 잘 알아.”
“아! 감사합니다, 의원님.”
그러자 술로 목을 축인 장세룡이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홍 전무가 할 일은 별거 없어. 하던 거 하면 돼.”
“네, 말씀만 하십시오.”
그 말에 장세룡이 잠깐을 생각하다가 은근한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술장사로 바가지 씌우는 거 있잖은가?”
“아, 네.”
“거기 히로뽕 같은 걸로 엮을 수 있겠지?”
“……가능은 합니다만, 그럼 업장도 같이 엮여 들어갈 겁니다. 마약은 취급이 좀 무겁습니다.”
업장은 조사 대상에서 빼달라고, 혹은 마약은 껄끄럽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홍성우는 딴 말은 하지 못했다.
상대가 장세룡이었다.
이 바닥에서 생활하며 저급한 꼴을 본 관계자도 아니고, 한 번 기어 오를 만한 급 낮은 정치인도 아니었다.
보수신당의 당대표,
그리고 보수 정당의 대권 후보인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보좌관을 통해 종종 일을 시켰던 일종의 고용주가 아니던가?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애초에 직접 얼굴 보기가 힘든 거물이었다. 여태 몇 년 동안 수발을 들면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게 대면했었고.
그래서 더 긴장하고 있던 차였다.
어느새 장세룡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 가게 차린다면서?”
“아, 네.”
“그것만 신경 써, 일 처리 깨끗하게 하고. 그럼 알아서 다 해결 될 걸세.”
“알겠습니다, 그럼 공사 대상이 누굽니까?”
“윤수혁, 아나?”
헉.
홍성우가 헛숨을 뱉었다.
그도 알고 있는 국회의원이었다.
젊고 돈 많고, 간간이 스타 의원으로 TV에도 나오던 유명한 국회의원이 아닌가?
홍성우의 목울대가 꿀렁였다.
“…….”
대답하지 못하자, 장세룡이 차가운 시선으로 눈짓했다.
“못하겠나?”
부탁조의 말과는 다른 싸늘한 시선과 말투.
명백한 협박이었다.
홍성우가 시선을 느끼고서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 아닙니다, 의원님.”
못한다는 대답은 할 수 없었다.
어찌 됐든 고용주는 장세룡이었다.
더구나 장세룡이 갖고 있는 인맥이나 세력 앞에서는 윤수혁도 비교할 수준은 아니었다.
명색이 보수 정당의 대권 후보가 아닌가?
장세룡이 인심 쓰겠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그래, 뒷수습은 내가 할 걸세.”
“알겠습니다. 의원님.”
“신경 써야 될 걸세, 내가 찾아온 이유…… 알겠지?”
장세룡이 도장 찍듯 말했고, 홍성우가 마음을 다잡았다.
‘해야 돼.’
대상만 조금 다를 뿐, 종종 하던 일이었다.
마주하고 있는 사람도 장세룡이었다.
빽이나 위협이 될 수도 사람.
‘……이왕이면 빽이 낫지.’
고민과 다르게 홍성우가 지체 없이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
5월 말.
종이 쇼핑백을 펼쳤다.
안에서 새 옷 냄새가 나는 예비군 전투복이 나왔다.
박 보좌관이 며칠 전에 군장점에서 사 온 예비군 복장이었다. 전투모와 요대, 고무링, 전투화까지.
싹 다 있었다.
내가 전역할 때 입었던 게 집안 어딘가에 있긴 하겠지만, 그건 입고 다닐만한 게 되질 못했다.
오바로크 때문이었다.
특히 전투모가 만화 속 일본 폭주족의 가죽조끼처럼 화려했다.
포병대대의 알파포대를 뜻하는 ○○○FA-A라는 부대 명칭에, 당시 포반 후임들 이름과 응원 문구 같은 게 문신 자랑하듯 새겨져 있었다.
부대 관례처럼 늘 있던, 일종의 전역 선물이었다.
당시에 맞후임이 휴가 나가서 십시일반 걷은 돈으로 해 줬었고, 마냥 기쁘게만 받았었다.
고작 스물다섯이었으니.
그때는 내가 금뱃지를 달았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시절이었다.
그런 만큼 당연히 입고 나갈 순 없었다.
품위를 지켜야 했다.
그건 국회법 제4장 25조, 품위유지의 의무로 법제화한 사항이었다.
더구나 예비군 훈련 받는다고 기자회견까지 하지 않았던가?
기자들도 올 텐데 통을 줄인, 몸에 딱 맞는 전투복을 입을 순 없었다.
품위를 유지해야 했다.
그렇게 새 전투복을 꺼내 입고, 고무링을 차고, 끝이 뭉툭한 전투화까지 신을 무렵.
어느새 오피스텔까지 찾아온 박 보좌관이 예비군 훈련에 대해서 브리핑했다.
입소시간부터 각종 절차 등등.
마치 예비군 1년차가 들어야 할 말처럼 들렸다.
나는 브리핑 중인 박 보좌관의 말을 잘랐다.
“다 압니다, 그만 하셔도 돼요.”
“동원 훈련은 처음 하시는 거 아닙니까?”
“……아, 예. 계속 말씀하세요.”
다른 대답이 나오지 않아서 순순히 인정했다.
저번 같은 말 실수는 한 번으로 족했다.
“그럼 훈련 일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입소 후 일정 고지하고, 생활관 배정, 장구류 지급한 뒤에 점심 식사하고…….”
각이 다 죽은 속칭 빵모자를 만지는 순간.
나도 모르게 시선을 들었다.
이어지던 박 보좌관의 브리핑 중에 웃긴 말이 있던 탓이었다.
“위장이요?”
“네, 안면부, 목, 손등 전부다 군용크림으로 위장해야 하고…… 주특기 교육하고 안보 교육 번갈아 받는데, 아마 전반야도 받으실 거 같습니다. 흐흐흐.”
박 보좌관의 웃음이 경망스러웠다.
모든 걸 다 겪은, 관망하는 입장에서 나온 즐거운 웃음소리였다. 그의 웃음에 나도 쓴웃음이 지어졌다.
그와 마찬가지로 동원 훈련에, 동미참에, 민방위까지 다 겪은 사람이 바로 나였다.
그런데 위장크림?
거기에 더해서 자정무렵까지 시간을 소모하는 전반야 훈련이라니.
이게 박 보좌관이 후회한다던 진짜 FM인가?
물론 못할 일은 아니었다.
현역 군인들의 훈련에 비교할 수준도 아니었고.
다만 귀찮을 뿐이었다.
국회의원이 돼서 회견문까지 읽었지만, 예비군의 본성이 사라지진 않는 모양이었다.
전투복만 입으면 늘어지게 되는 말도 있듯, 나도 그랬다.
뭐, 이 정도면 양반이지.
나는 생각을 다잡았다.
그나마 내게 두 가지의 위안거리가 있었다.
2박3일의 동원예비군이 끝나면, 예비군 5년차가 돼서 동미참 훈련을 받는 다는 사실.
그리고 한사랑과의 미팅 일정이 정해졌다는 것.
그것도 예비군 훈련 직후였다.
힘이 나진 않아도, 그런 기대 땜문에 늘어지는 기분이 좀 무마됐다.
그래, 그거면 됐다.
나는 슬슬 웃는 박 보좌관을 돌려보냈다.
“아침 일찍부터 고생하셨어요, 이만 가보세요.”
“네, 훈련 잘 받으시고 무사히 퇴소하십시오. 일 생기면 바로 달려가겠습니다.”
“최 비서는요?”
.”주차장에서 대기 중입니다.”
“예, 그럼 진짜 갑니다. 참, 보좌관님 먼저 나가야 되는 거 알죠? 여기 내 집입니다.”
박 보좌관이 웃는 얼굴로 집을 나갔고, 나도 전투복 차림으로 따라 나갔다.
대기하고 있던 영석이가 뒷문을 열었고, 멀리 훈련이라도 나가듯 박 보좌관의 인사까지 받았다.
예비군 훈련이 뭐라고.
차 뒷자리에 오르는데 괜스레 영석이의 뒷모습에 시선이 갔다.
“너는 훈련 언제 받아?”
“저는 전반기 작계 훈련 받았습니다.”
“작계? 너 동미참이야?”
“네, 의원님.”
“……그나마 다행이네, 나 눈 좀 붙일게. 도착 전에 깨워 줘.”
“네, 의원님.”
그 대답을 듣고 난 지 얼마나 됐을까?
영석이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의원님.”
뭐지, 이 살짝 불안한 소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