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79화 (79/191)

# 79

25. 봄이 가기 전에 (2)

결혼은 해야 했다.

구시대적이고 꼰대적인 대한민국 국회에서 만큼은, 남자라면 결혼을 해야 했다.

자식도 낳아야 했다.

그래야만 어른이 못 돼도, 최소한의 사내 대우는 받았다.

이 바닥이 그랬다.

전직 대통령의 40대 아들에게도 ‘어려서 미숙하다‘라는 말을 했던 게 바로 보수신당의 몇몇 의원들이었다.

지금 4선이나 된 인간이었나?

하여튼 그런 이유에서 초재선이나 일부 의원들이 나를 따르긴 했어도, 3선 이상의 웬만한 나이 든 의원들은 말을 들어먹질 않았다.

돈이 많아도, 초선의원들을 이끌어도.

나이 어리고, 결혼도 하지 않은 데다가, 자식도 없으니 무시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 나이는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만, 결혼과 자식은 내 의지 아니면 해결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결혼하기 더 힘들어 질 것이었다.

상황이 그랬다.

네 개의 정당들.

그리고 여소야대 판국.

이것만 봐도 더 바빠질 예정이었다. 이제 협상을 해도 세 정당과 정부와 해야 했고, 싸움도 마찬가지로 네 번은 해야 했다.

그리고 안 위원장.

그를 민간문화혁신위의 위원장에 앉혔고, 전 정권의 블랙리스트조사까지 시켜둔 상태였다.

거기서 MB의 흔적을 훑고, 친MB계의 위상을 떨어트릴 생각이었다.

다음 선거에서 모두 낙마하게끔.

또 다른 파동이 일어날 예정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나도 결혼해서 아내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다.

내 삶의 비타민? 내조?

그딴 게 아니라, 정치력이나 금력, 국제 외교력 등의 힘.

집안이 가진 그런 힘을 얻어 쓸 생각이었다.

그게 나이 먹은 의원들이 허리 숙이게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어린놈‘을 입에 달고 사는, 배알 꼴린 나이 든 인간들을 진심으로 감복시킬 방법은 원하지도 않았다.

힘으로 눌러야 했다.

그리고 가급적 이르면 이를수록 좋았다.

어차피 재선도 해야겠지만, 16년도 총선까지 내다본다면 늦지 않게 당권을 휘어잡아야 했다. 18년도에는 대선까지 있었다.

그 전에는 내 사람들을 앉혀야 했다.

그럼 방법은 하나.

이르면 이를수록 좋았다.

말 그대로 쇠뿔은 단김에 빼랬다고, 당장 결혼 준비하는 게 괜찮은 방법이었다.

그것도 중매.

애초에 연애결혼 같은 건 생각도 안 했었다.

내 위치와 자리, 힘.

그게 연애하게 가만둘 리도 없었고, 매일 바빠 죽겠는데 무슨 연애를 한단 말인가?

그렇게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사이.

띵-동.

벨 소리와 함께 인터폰이 오피스텔 입구에 선 강 사장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 강희준 사장입니다.

“예, 문 열겠습니다.”

60대, 그리고 마른 체격.

내가 봤었던 예전의 가물가물한 모습과 같았다.

2013년인가, 14년인가 장 의원을 보필 할 때 그를 직접 봤었다.

마담뚜라는 건 나중에 알았지만.

어쨌든 나는 인터폰의 정문 열림 버튼을 눌렀다.

오래지 않아 집으로 온 그는 코트 차림에 서류 가방을 챙겨들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윤수혁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희준입니다. 화면보다 실물이 미남이십니다, 의원님.”

“고맙습니다, 들어오시죠. 음, 커피 좀 드릴까요?”

“네, 블랙으로 마시겠습니다.”

“블랙이요. 소파 아무데나 앉아계세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강 사장이 거실로 가고, 몇 번 쓴 적 없는 주방으로 가서 커피머신을 조작했다.

아메리카노 두 잔이 나온 뒤.

컵을 들고 가는데, 구형 가방에서 어울리지 않게 태블릿 PC가 나오고 있었다.

“두꺼운 서류가 나올 줄 알았는데요.”

“요새 의원님들도 다 이런 거 쓰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서류가 더 많죠. 자료도 서류 기본이라…… 자. 드시죠.”

“고맙습니다.”

호록.

짧게 커피 한 모금을 마신 그가 다시 나를 바라봤다.

“취미는 따로 없으신 모양입니다. 미술품은 전혀 없고, 가구, 가전도 최소화로 구비된 상태던데요.”

“가끔 골프 칩니다.”

“골프백이나 용품은 차에 두고 일적으로 치시는 거겠죠? 내부에는 골프 관련 서적도, 용품도 없던 것 같습니다.”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맞습니다.”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되네요.”

강 사장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속칭 마담뚜다웠다.

최상위층과 극소수의 특정계층의 연분을 이어 주는 직업.

내가 그런 마담뚜를 부른 이유도 결혼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중매업체는 숱하게 많았다.

내게 연락한 유명 결혼정보업체만 해도 열 손가락을 채웠고, 그 중에는 유력가와 연이 닿는 곳이 있었다.

그럼에도 강 사장을 부른 이유는 하나였다.

그는 가려진 실세까지 알았다.

단순히 직업, 연봉, 가문, 외모 등을 따지는 게 아니라, 권력과 뒷배까지 아는 이었다.

물론 그것도 완전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는 어쨌건 내 선에서 가장 적당한 이었다. 내가 가진 명함 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군부독재 정권 때부터 아버지가 하던 걸 가업으로 물려받아서 나름 정통성까지 있었다.

믿고 맡길 만했다.

그리고 그건 소문이 아니라 내가 내 귀로 직접 들은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장 의원 보필했을 때.

이윽고 그가 내게 태블릿 PC 화면을 보여 주었다.

“간단한 설문 양식입니다. 확인해 주시고, 체크해 주시면 됩니다.”

터치용 펜까지 받았다.

설문은 쉬웠다.

객관적으로 확인 가능한 자료의 확인 유무를 묻는 것이었다.

초혼인지, 재혼인지.

내 재산 규모가 천억 대 이상인지 등등.

그런 것들을 3, 4분간 체크했고, 그다음부터는 짧지 않은 인터뷰가 이어졌다.

그 중에는 이상형 고르기도 있었다.

좌우에 사진이 있고,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고르는 시스템.

예능 프로그램에서 곧잘 한다던 이상형 월드컵.

“제가 눈이 꽤 높은 편입니다, 그대로 고르겠습니다.”

“네, 마찬가지로 체크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수십 장의 사진을 클릭했고.

강 사장이 엷게 웃었다.

“아주 대중적이십니다.”

“제가요?”

“20대 초반, 쌍커풀, 큰 눈, 갸름한 얼굴형, 높은 콧대, 글래머러스…… 모든 남자의 이상형입니다.”

“흐흐, 그래서 눈이 높다고 생각했는데요?”

“여성 외모가 중요하십니까? 아까 말씀하셨던 정치력이나 국제 외교력보다…….”

“음…….”

내가 고민하자, 강 사장이 놀란 듯 멈칫했다.

“외모와 동순위라고 봐도 되는 겁니까?”

“저 룸도 안 갑니다. 그렇다고 의원실 여직원들 데려다 술시중 시키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같이 사는 여자는 아름다웠으면 좋겠습니다. 그것도 아주.”

“……대단히 솔직하시군요.”

약간 놀란듯한 대답에 윤수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가톨릭대 신학생처럼 살고 있습니다. 이 정도 고민과 솔직함은 강 사장님께서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최대한 고려하겠습니다. 비용은 당연히 관계 없으시겠ㅈ……?”

“예.”

“…….”

대답이 너무 빨랐나?

강 사장의 대답이 한 박자 늦게 들려왔다.

“네, 최대한 고려하겠습니다.”

그렇게 대화를 이어 갈 때.

안 위원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 좀 받겠습니다.”

강 사장을 놔두고 방을 옮겨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어, 윤 의원. 자는 거 아니지?

“예, 말씀하세요.”

- 다름이 아니고, 혹시 윤 의원 남는 손 있나?

“저요?”

- 부리는 사람들 있을 거 아닌가? 좀 필요해서 그래.

“무슨 일 있으세요?”

- 민혁위에 뿌락치가 하나 있는 거 같아, 내 말 안 듣고 딴 데로 새는 놈인데…….

그 말에 미간이 구겨졌다.

어디든 프락치든, 끄나풀이 있기 마련인데, 이번 건 그래선 좋을 게 없었다.

완전한 비밀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노출되지 않은 상태에서 블랙리스트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어느새 안 위원장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중늙은이 쫓자고 돈 버리면서 금 사장을 쓸 순 없잖은가? 걸려도 탈만 나고 말이야. 그래서 쓸 만한 사람 없는가 싶어서 묻는 걸세. 나도 사람이 있긴 했는데…… 옛날 얘기 아닌가?

이어진 말에 가장 먼저 영석이가 떠올랐다.

믿고 맡길 수 있고, 똘똘한 놈.

그러나 보낼 순 없었다.

신분이 너무 명확했고, 당장 주말인 내일도 운전과 보좌 일을 시켜야 했다.

딴사람을 보내는 게 순서였다.

그러나 생각나는 건 의원실 식구들뿐.

뒤늦게 떠오른 생각에 물었다.

“꼬리붙이고, 감시하고…… 그런 일이죠?”

- 그래, 그렇지. 뿌락치 오야붕을 찾아야 될 거 아닌가? 나도 젊었으면 쓸 만한 놈들 여럿 알 텐데…… 지금은 금 사장 정도가 다야.

“그럼 제가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금 사장한테도 준비해 두라고 일러 주세요.”

- 그래, 알겠네.

전화를 끊고 난 뒤.

턱을 좀 긁었다.

아는 이름, 사람들이 떠올랐는데 당장 연락할 전화번호가 없었다.

장 의원 밑에 있을 때 뒷일하면서 알아 둔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이면 안 고문이 쓰기에도 적절했다.

나하고 같이 일해 봤던, 신의와 실력이 다 있는 인간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나도 그들이 필요했다.

정치판 돌아가는 상황도, 국내 정세도 예측하기가 힘들어진 상태였다.

쓸 만한 비리 내역도, 내가 아는 의원들도 많이 바뀌었다. 애초에 바뀔 만한 굵직한 일들이 싹 다 바뀌었고.

내게도 이리저리 부릴 만한 인력이 필요했다.

조폭처럼 연장을 챙기고 다니진 않더라도, 비법을 넘나드는 일을 하는 이들이 필요했다.

미행에 감청, 감시하는데 의원실 직원을 쓸 순 없잖은가?

그렇게 관련자들과 연관된 이름들을 천천히 헤집다가, 아는 번호가 떠올랐다.

“……강석배.”

* * *

이튿날 아침.

중앙당에 출근했던 강석배가 열렬한 진동에 스마트폰 화면을 확인했다.

모르는 개인 번호.

그러나 중앙당 당직자로서, 그리고 숱한 비리 청탁을 받던 사람으로서 모르는 번호를 무시할 순 없었다.

짐짓 목소리에 힘을 준 강석배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새한국당 인사부장 강석배입니다.”

- 비례 출신 국회의원 윤수혁입니다.

“…….”

입이 차츰 벌어졌으나 아무소리도 내지 못했다.

- 저 기억하시죠?

이어진 윤수혁의 말에 강석배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새한국당 청년대책위 부위원장직을 1,500만원에 팔았던 그 당사자.

그리고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재력가였다.

“아아! 물론입니다, 의원님.”

강석배가 뒤에 붙은 ‘의원님‘은 황급하게 고개를 수그리면서 말을 이었다.

“어쩐 일로 전화를 주셨습니까?”

- 신상명세를 알려 드릴 건데요, 연락처를 찾아서 좀 알려 주시겠어요? 아, 기록에는 남기지 마시고요.

“네네, 물론입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강석배가 저자세로 나갔다.

청년정책위 부위원장 줄 때와는 직업이 다르지 않은가?

국회의원이면 중앙당의 핵심 당직자로 부임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장 윤수혁이 상관으로 올 수도 있다는 뜻이었고, 윤수혁의 동료 의원이 상관이 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한마디로 어쨌든 상관이나 다름없다는 뜻.

그사이, 윤수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이름 권창훈, 나이 서른여덟 내외고, 거주지는 수도권 안에 있을 겁니다.

잠깐 끊어진 말, 눈을 껌뻑거리던 강석배가 얼른 물었다.

“……아, 그게 전부입니까?”

- 데이터베이스에 있을 자료는 그게 답니다. 외모를 좀 설명드릴까요?

“증명사진도 있긴 하지만, 검색인데 외모 설명으로는 좀…….”

- 그럼 그게 전부입니다.

“죄송합니다! 외모 설명도 부탁드립니다!”

강석배의 다급한 말에 윤수혁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마치 기억을 떠올리듯.

- 스포츠머리를 즐겨하고요, 눈이 좀 작은 편이고, 광대가 튀어나온 상입니다. 전체적으로는 다부진 인상을 줍니다. 기억나는 게 그 정도네요.

“알겠습니다, 의원님. 저 죄송하지만, 정말 이거 말고 다른 건…….”

- 제가 기억나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언제까지…….”

- 오늘 오전 안에 알려 주세요. 보수는 섭섭지 않게 드리겠습니다.

중간에 나온 ‘보수‘라는 단어에 강석배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기대를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