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뱃지-77화 (77/191)

# 77

24. 될놈될 (3)

의원회관 2층 정론관.

웅성거리는 소음이 내부에 퍼져 있었다.

참석한 기자들이 제법 많았다.

내 이름빨도 있고, 그동안 들인 밥값도 있겠지만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바로 국방부 장관 후보자의 사퇴.

그게 엊그제 터졌었다.

그랬다고 굳이 나한테 올 이유가 있겠냐마는, 원인 제 공자가 나였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어떤 의혹과 증거보다도 직접적이고 자극적인 걸 공개했었다.

녹취록.

그 여파로 발생한 게 사퇴였고, 때문에 기자들이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물론 정론관 기자회견 참석 협조에 응한 이들도 많긴 했으나, 그들도 김 후보자와 연관 지어서 질문할 것 같았다.

뻔한 수순이었다.

그러나저러나, 연설대 앞에서 회견문을 검토하고 있자니, 헛웃음이 날 것 같았다.

꼭 중대 발표 하는 꼴이 아닌가?

법안 개정도 하고, 헌정 사상 최초의 사건을 언급하니 영양가가 없는 건 아니겠지만.

어쨌든 그냥 예비군 훈련이었다.

내 직업이 국회의원이라도 특별해지는 것이었지, 비서였을 때는 동미참에 민방위까지 짜증 나게 받았었다.

그래선지 브리핑까지 해 가며 예비군 훈련을 받는다는 게 꽤 우스웠다.

내 위치를 알기에 밀려오는 쓴웃음을 삼키긴 했지만, 민방위 훈련까지 받았던 기억 때문인지 창피한 감정이 쉽게 사라지질 않았다.

괜스레 전생의 기억이 났다.

불법 사찰하다가 싸이카의 경찰관에게 붙들렸었나?

그때는 속된 말로 쪽팔려서 식은땀이 났었다.

전화 몇 통으로 금방 풀려나긴 했었는데, 감정까지 풀리진 않았었다.

지금도 많이 다르지만, 비슷했다.

물론 그때하고는 다르게, 수많은 기자들 앞에서 당당한 척 목소리를 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당원동지 여러분! 저는 최근의 인사청문회를 경험하고, 고위공직자의 의무와 권리에 대해 근원적인 의문을 가지게 됐습니다. 국민을 섬기고, 국가에 봉사해야 하는 공직자로서…….”

길지 않은 서두.

나는 원고를 최소한으로 내려다보고, 정면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이에 제1야당과 안보정당의 국회의원이자 고위공직자로서 특혜와 폐단을 없애기 위해 앞으로 당연한 의무에 동참하고자 합니다.”

원래 말을 끊어야 할 포인트였지만, 얼른 뒷내용을 이었다.

기자들이 궁금해 하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회견문 내용을 손 안에 쥐고 있었다.

보좌진이 정론관 입구에서 나눠 준 것으로, 내 브리핑 내용과 예비군법 일부개정법률안의 주요 골지가 전부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기자들 몇 명은 내 브리핑 내용과 상관없이 노트북에 타이핑을 해 대고 있었다.

“저는 국회 설립 이래로 특혜 시비에 휘말렸던 예비군법과 민방위기본법을 개정하여, 국회도 법아래 평등하도록 만들겠습니다.”

워딩도 조금 신경 썼다.

웬만한 전역자라면 다 받는 예비군 훈련을 생색내서 받는다면, 기껏 훈련 받고도 욕먹을 게 뻔했다.

내 이야기는 곁가지로 끼워 넣어야 했다.

중요한 것은 법안 개정과 특혜 없애기에 앞장선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다.

“저 또한 당연히, 예비군 훈련을 모두 소화할 것을 말씀드립니다. 이는 국민의 당연한 의무이며…….”

정론관 기자회견이 길어서 좋을 건 없었다.

촘촘하게 예약된 시간을 지켜야 했고, 기자들의 질문이 길어지면 예약 시간이 넘어갈 수도 있었다.

나는 억양 조절만 하며 회견문 뒷부분까지 물흐르듯 읽어 내려갔다.

“……앞으로 국회의원으로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특혜 없는 깨끗한 사회를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수 같은 건 없었다.

정론관에서 타이핑하고, 국회를 출입하는 기자들답게 자연스럽게 질문 의사를 표시했다.

“예, 제일일보 기자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안면이 있는 기자를 짚었다.

“예비군 훈련은 동원 훈련을 받으시는 겁니까?”

“예, 병무청에 문의한 결과 전역한 부대에서 2박3일의 동원 훈련을 받게 됐습니다.”

주특기도 까먹어서 가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가게 됐다.

물론 전역한 부대로 가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이렇게 쌩쇼를 하면서 꼼수를 부릴 순 없었다.

꼼수는 티 나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부려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어서 다른 기자들을 짚었다.

“지금까지는 예비군 훈련을 어떻게 받으셨습니까?”

“개정법률안에 해당하는 의원은 총 몇 분이나 되나요?”

“김인태 후보자가 사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상대로 질문들이 줄줄이 나왔고, 거기에 해 줄 말은 뻔했다.

짧게 답변을 마친 뒤.

나는 퇴장 인사를 하고 정론관을 나왔다.

그 공간에 있던 기자들이 먹은 식대만 수천만 원 즈음 되니, 기사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올 것이었다.

물론 더치페이를 하고, 만나지도 않는 기자들이 제법 있긴 했지만.

그 정도는 괜찮았다.

어쨌든 좋은 일이 아닌가?

죄 짓는 것도 아니고.

나오는 길에 박 보좌관이 내게 업무용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병무청 국장 전화입니다.”

“예, 주세요.”

약속된 전화는 아니었지만, 일단 받았다.

분명 예비군 훈련은 얘기가 끝난 걸로 알았지만.

국장이 직접 찾는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다.

“전화 바꿨습니다, 윤수혁입니다.”

- 안녕하십니까? 입영동원국 김승찬 국장입니다, 의원님.

“말씀하세요.”

- 다름이 아니라…… 전역하신 부대에서 동원훈련 받으시는 걸로 아는데 밑에 보좌관 말로는 규정대로 하신다고…….

“예, 문제 있습니까?”

- 아니오, 그게 아니고. 의원님 의견도 보좌관이랑 같은 건지 확인하는 겁니다. 보좌관 말이 그렇다고 해도…… 아무래도 실제 규정대로 하게 되면 불편한 부분이 있잖습니까?

“양해해 주신 건 감사드립니다만, 방금 정론관 회견까지 마쳤습니다. 규정대로 받겠습니다.”

- 진짜 괜찮으시겠습니까?

거듭 묻는 말.

피식 웃음이 났다.

국장이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걸로 4급 선임 보좌관의 확인 대답을 뛰어넘고, 국회의원에게 직접 묻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4급 보좌관이면 국회의원 대리라고 봐도 무방했다.

국장의 의지로 이럴 순 없었다.

호기심에 미쳤거나, 깡이 너무 좋은 게 아니라면.

공무원은 웬만하면 시키는 일을 했고, 이렇게 나서는 경우가 없었다.

한마디로 윗선의 지시일 확률이 높았다.

다시 한 번 알아보라고, 정확하게 물어보라고 시켰을 것이었다.

예를 들어 병무청장.

상임위 회의에 소관부처 업무보고로 자주 불려오고, 이런저런 사항으로 온갖 욕을 다 먹는 사람이 바로 병무청장이었다.

그라면 내 쌩쑈에 혼자 겁먹어서 움찔했을 수도 있었다.

“혹시 병무청장님이 재확인해 보라고 하십니까? 본인 의지가 맞냐고?”

- 아무래도 과장급이 결재서를 올리다 보니…….

“업무 보고 때 질책하려고 예비군 훈련 가는 거 아닙니다. 저도 국민의 일원이지 않습니까?”

- 아, 네.

“예비군 훈련을 받아야 되니까 받는 겁니다. 오늘 정론관 회견문도 병무청으로 넣어드릴까요?”

-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러면 걱정하지 마시고 그냥 진행해 주세요.”

- 네, 알겠습니다. 의원님.

“그럼 끊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국회의원 전에는 조용히 가서 졸다가 대충 교육 받고 PX나 갔엇는데.

이제는 알아서 수고를 자처해야 했다.

* * *

며칠 뒤.

청와대 대변인의 발표가 있었다.

갓 출범한 정부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언론사들이 일제히 기사를 뿌렸다.

[혁신정부, 5대 민간혁신위원회 추진 계획 발표…… 경제, 복지, 환경, 문화, 여성]

[청와대 대변인, “혁신정부의 주요 과제, 민혁위가 국민의 시선으로 보완할 것.”]

[보수신당, “아무 권한 없는 민간단체에 국고 지원, 혈세 낭비 뻔해.”]

새한국당에서 탈당한 보수신당의 적절한 비난까지 실려 있었다.

윤수혁이 신문을 툭 내려놨다.

“예비군 기사 다 묻혔네요.”

“어쩔 수 없지, 청기와집 주인이 바뀌었는데. 윤 의원이 더 바쁘게 움직이시게, 그래야 이름을 날리지.”

안순익이 끌끌대며 대답하자, 윤수혁이 순백색의 백자 찻잔을 쥐었다.

“이제 저보다 고문님이 더 바쁘셔야 합니다.”

“무슨 일 있는가?”

호로록.

가볍게 한 모금을 마신 윤수혁이 테이블에 올려 둔 신문으로 눈짓했다.

“예, 전에 말씀하신 자리 하나 구해놨습니다.”

“자리라니? 무슨…… 민혁위?”

“예, 설마 소박해서 서운하십니까?”

윤수혁이 웃으며 묻자, 안순익이 손을 내저었다.

놀란 얼굴이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아니, 민혁위는 여당 아닌가?”

“민간조직이긴 하지만, 그렇죠.”

“참…… 놀랄 노자구만.”

“싫으십니까?”

“나야 좋지! 저기 들어가려고 사람들 줄 섰을 거 아닌가? 투표용지에 잉크도 안 말랐겠다, 대통령도 제일 젊을 땐데 그걸 왜 싫어해?”

“흐흐,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그럼 새한국당은 어쩌고? 나도 명색이 보수 인사 출신인데, 청기와집 입맛대로 소설 쓸 순 없잖은가?”

“예, 그래서 하실 일이 있습니다.”

눈썹이 이리저리 휘어지던 안순익이 그제야 눈초리를 내렸다.

“그래그래야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지 여러 번 고민했네.”

그가 중얼거리는 사이, 윤수혁이 다시금 차를 홀짝였다.

쌉싸래한 맛을 입안에서 느낀 뒤.

윤수혁이 안순익을 향해 나직한 어조로 물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아시죠?”

“알다마다.”

태연하고 당연한 어투.

이번에는 윤수혁의 입에서 비슷한 어감의 말이 툭 튀어나왔다.

“그거 조사하시면 됩니다.”

“그런 건 뭐…….”

대답하던 안순익의 목소리가 주춤하더니 멈췄다.

뒤늦게 나온 황급한 목소리.

“잠깐, 전 정권 블랙리스트 말인가?”

안순익의 눈이 동그래졌다.

묵직한 윤수혁의 시선을 맞으며 직감한 것이었다.

“맞습니다.”

“윤 의원, 자네 무슨 생각이야?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네, 진심입니다.”

“제 살 파먹는 짓일세, 잘못하면 자네도 다쳐. 아니, 무조건 다치지. 같은 몸뚱이 아닌가?”

전 정권인 MB정부는 새한국당에 뿌리를 둔 보수 정권이었다.

지금도 친MB계가 남아 있었으며, 새로 만들어진 보수신당에도 친MB계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MB는 대통령 중에 당적을 바꾸지 않은,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한 대통령이었다.

그럼에도 윤수혁이 담담하게 물었다.

“겁나십니까?”

“……겁이 안 나겠어? 자네 MB가 누군지 몰라?”

“알죠, 전직 대통령.”

“허, 참. 윤 의원 돈 많고 실력 좋은 것만 알았더니, 간은 없는 모양이야.”

“흐흐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BH(Blue House:청와대)하고 얘기 끝냈습니다.”

“……진작 말하지 그랬나.”

“BH도 부담을 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 정권을 탈탈 털어도 공개되는 건 일부분일 겁니다.”

그제야 안순익이 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보여 주자, 이 말이지?”

“예, 맞습니다.”

그 말에 안순익이 입꼬리를 주욱 당기면서 말을 이었다.

“근데 조사는 코피 터지게 하라는 거고?”

“예, 그것도 맞습니다.”

“무섭게 왜 이러나? 그건 또 어쩌려고?”

“걱정하지 마세요.”

“허…… 윤 의원. 나 여기까지 데려와 놓고 관짝으로 밀어 넣을 생각 아니지?”

“하하하하, 아닙니다.”

“웃기는, 이 사람이. 나도 무서운 건 아는 사람이야.”

“흐흐, 걱정 마십시오.”

윤수혁의 말에도 안순익이 쉽게 웃지 못하는 사이.

말이 이어졌다.

“제가 엎어진 거 본 적 있으십니까?”

자신만만하고도 담담한 어투.

결국 안순익이 슬쩍 웃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것도 진작 말하지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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