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24. 될놈될 (2)
나를 뭐라고 생각할까?
돈지랄하는 부자, 인기에 미친놈, 아니면 그냥 또라이.
셋 다 적절했다.
별 관계도 없는 국방부 장관 후보자를 떨어트리자고 수억 원을 사용했다.
재단과 단체, 기관을 몇 개 거쳐서 이순도 중령에게 가긴 했지만.
결국 내 돈이었다.
그렇다고 사재를 털어서 증인이나 증거를 얻어 내는 경우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중대한 정치적인 사안이 있거나, 사적인 인연이 있는 경우 등등.
그러나 나하고는 상황이 달랐다.
그런 점에서 박 수석이 나를 찾아온 이유를 알 법했다.
사고 칠 놈이 아닌가?
알아볼 겸, 회유할 겸 온 것일 터였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협박이 될 수도 있었고.
그는 그럴만한 직급을 가진 권력자였다.
박 수석이 불쾌하지 않게, 늦지 않게 대답했다.
“이런 제안은 처음이라서…… 생각 좀 해 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래서 바로 말씀드렸던 겁니다. 식사하시고 잔도 나누고, 그러다보면 좋은 그림 나오지 않겠습니까?”
박 수석이 유들유들하게 말했다.
정무수석이면 좀 뻗대도 될 법 한데, 그런 게 없었다.
원래 박 수석 캐릭터가 이랬나?
잘 기억나진 않았다.
17년도에도 이민수의 캠프 비대위원장을 역임했던 사람이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출신은 새한국당에 재선은 무소속, 안착한 곳은 제3당.
전형적인 철새 정치인.
그 외에는 별로 알지 못했다.
애초에 나하고는 마주칠 일도 없었고, 별로 특이할 게 없는 사람이었다.
범죄 이력도 드러난 게 없었으니, 더 모를 수밖에.
“제가 음식은 미리 주문했습니다.”
그의 말과 동시에 종업원들이 음식을 서빙했다.
작은 소형 화로와 소고기 특수 부위, 갖가지 궁중 요리가 상 위에 올라왔다.
대충 봐도 1인분에 수십만 원씩 하는 진수성찬.
“일단 드십시다. 이 집 음식 맛이 일품입니다.”
박 수석이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했다.
가식이 섞이지 않은 편한 미소.
저게 감정을 드러낸 것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아니었다.
여유였다.
정무수석이라는 직책이 주는 권한, 대통령의 최측근이라는 권력에서 나온 것이었다.
진심으로 우위에 있다고 믿고 있으리라.
실제로 가진 힘도 그럴 테고.
당연히 대범해지겠지.
그렇게 식사를 시작했고, 몇 젓가락 먹던 박 수석이 목소리를 냈다.
“의원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예, 말씀하시죠.”
“정치 입문하신지 얼마나 되셨죠?”
“저 초선입니다.”
“배지 달기 전에도 정치 생활 하시지 않았어요? 초선치고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던데요.”
칭찬하는 건지, 궁금해 하는 건지.
나는 화로에 소고기 한 점을 얹으며 대답해 줬다.
“국회 비서 생활도 했고, 당직자도 했었습니다. 그것도 2010년부터고, 길진 않습니다.”
“그 전에는? 더 없습니까?”
“더 있기가 힘들죠. 군대 전역한 게 09년도입니다.”
“대단하네요, 그 나이에 그렇게 한다는 게…….”
그의 여유 넘치는 말투가 이어졌다.
“요새는 윤 의원이 정계를 장악한다는 소문까지 돌아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정무수석이니 국회 돌아가는 상황을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더구나 새한국당 출신이니 내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대강 가늠하고 있을 테고.
그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이어지는 말을 듣자니 그게 아니었다.
“그래요, 칭찬 맞습니다. 국회 바깥에도 윤 의원님 힘이 쫘악 퍼져 있던데요.”
국회 바깥.
공신력 있는 시민사회단체와 수많은 지역 유지, 복지단체들.
그들이 내 손아귀에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의 영향 안에 있기는 했다.
아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2010년 11월 회사를 설립할 즈음부터 꾸준히 돈을 먹였기 때문이었다. 일시적인 후원이 아닌, 매월 들어가는 월급처럼.
가장 중요한 건 돈으로 처바른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내가 지난 10년 동안 정치권 밑바닥을 비롯해서 전국을 돌고, 실무자들과 직접 안면을 트면서 몸으로 익힌 게 있었다.
돈은 만능이긴 했으나, 전능한 것은 아니었다.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졌다.
후원을 해야 하는지.
사적으로 챙겨줘야 하는지.
아니면 그 형태가 접대나 다른 물질, 다른 방식의 후원이 되어야 하는지.
나는 그걸 알았다.
그래서 죽기 전에도 자신했었다.
금뱃지를 한 번 달기 시작하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또 달 수 있다고.
이 바닥 돌아가는 걸 알고, 실무자들을 꿰고 있었으니까.
자그마치 10년이었다.
아랫사람의 조언으로 들은 게 아니라 일찍이 몸으로 깨달은 경험.
그걸로 국회 바깥과 국회 안쪽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건 크게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사이, 박수석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국회 입성 전부터 따져도 얼마 안 되고…… 국회 입성한 후는 고작 몇 개월 아닙니까?”
입성 전만 따져도 10년입니다, 하는 말이 입안을 맴돌다가 사라졌다.
“그렇죠.”
“그런데 원내 영향력도 상당하십니다, 저는 무슨 다선 의원보는 줄 알았어요. 3선 의원들은 눈치 보고, 웬만한 초재선들은 껌뻑 죽고…… 하하.”
“과분한 말씀입니다.”
“알고 드리는 말씀인데요? 너무 겸손할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술까지 한 순배 돌고 난 뒤.
박 수석의 입이 또 열렸다.
상급자라는 인식 덕분인지, 그가 연신 목청을 돋웠다.
“그리고 생각보다 깨끗해도 너무 깨끗하시더라고.”
이제는 칭찬이 아니었다.
“어떻게 사람이 실수 한 번 한 게 없어요? 한창 팔팔 할 땐데, 여자관계도 없고 말이에요.”
다 안다는 뜻이었다.
이미 내 조사까지 마쳤다는 의미.
이건 압박이었다.
회유를 했으니 그다음 단계를 밟는 것이었다.
상대를 손에 틀어쥐는 전형적인 방법.
말을 잘 들으면 떡고물을 주겠다는 뜻이고, 아니면 죽빵을 갈기겠다는 점잖은 표현 방식이었다.
그래, 정무수석이 지고 들어올 때부터 알아봤었다.
이제 끼어들어야 했다.
내가 원하는 건 압박이 아니라 회유였으니까.
어차피 생각해 둔 것도 있었다.
“아까 말씀하신 것 있잖습니까? 원하는 선물 말입니다.”
“그래요, 그거. 말씀해 보세요.”
“어차피 MB 지워 내기도 하셔야 할 테고…… 혁신정부 슬로건에 맞는 정책도 추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좋은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연예인들로 이슈화 시키면 어떨까 싶어서 말씀인데, 문화부 블랙리스트 건은 어떻습니까?”
블랙리스트는 군사정권을 포함해 매 정부마다 있어 왔던 것이었다.
일종의 ‘주의요망’ 대상자 관리.
그 정도가 지나치면 직간접적인 제재로 확대되기도 했었다.
그것 때문에 2017년도에는 전 정권의 고위공직자 여러 명이 검찰에 몇 번이고 불려 갔었다.
그런 만큼 많은 결과물이 예상되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나를 보는 박 수석의 얼굴에는 쓴웃음이 맺혀 있었다.
“하하하, 이거 참…… 부담되는 말씀인데요.”
그것도 그럴 만했다.
전 정부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 아닌가?
이득이 있긴 해도, 실도 있는 법이었다.
친MB계가 있는 새한국당의 반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었고, 알게 모르게 MB 정권에게 도움을 받았을지도 몰랐다.
“외주를 쓰시면 부담이 덜 하시지 않겠습니까?”
“정부가 한 발 물러서 있는데 할 만한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자원할 인간들은 좌파들인데, 그 사람들은 안 되는 거 아시죠?”
권한만 있으면 정부를 파헤칠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잘 압니다.”
“혹시 사람이 있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정부에서 나서기가 좀 그래요.”
내심 하고 싶긴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출범한 ‘혁신정부’ 슬로건에 맞는 행사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정책 같은 것보다는 언론플레이가 쉬운, 이슈 될 만한 것들이 필요했다.
그래봤자 적정한 수준에 불과하겠지만.
“압니다, 괜찮은 자리만 마련해 주시면 제가 적임자를 데려다 놓을 겁니다.”
아주 잘 할 사람이 하나 있었다.
내 보좌역만 하다가 한두 해씩 늙어가고 있는 사람.
잠깐을 고민하던 박 수석은 전통주로 입가심을 하고는 나를 쳐다봤다.
“그거면 되겠어요?”
“더 챙겨 주시면 마다하진 않겠습니다.”
그러자 박 수석의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하, 우리 윤 의원님 마음에 드네. 청와대 들어오시면 내가 섭섭지 않게 챙겨드릴게, 어때요?”
“흐흐흐,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만족스런 웃음이 방 안을 채웠다.
이 정도면 좋은 마무리였다.
애초에 원하는 게 적당한 덕분이었다.
정도가 지나쳤다면, 은근히 꺼낸 압박이 협박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언제나 사람들은 예상 안의 것들을 좋아했다.
너무 지나친 건 대부분 좋지 못했다.
그렇게 늦은 저녁을 마친 뒤.
나는 정무수석의 명함을 새로 받았다.
또 보자는 말과 함께.
* * *
[김인태 녹취록 의혹에 책임…… 국방부 장관 후보 사퇴]
[청와대, “김인태 후보자 사퇴에 유감, 후보자 내정 더욱 투명하게 만들 것.”]
[국가 안보에 여전한 구멍…… 새 국방부 장관 후보자 발표는 언제?]
장관 후보자 낙마 기사가 터졌다.
비대위원장 조성현이 윤수혁을 위원장실로 호출했다.
“이번에 정말 큰일 했습니다, 윤 의원.”
“국회의원으로서, 상임위 위원으로서 할 도리를 했을 뿐입니다.”
“아니에요, 안 그래도 해양수산부 장관하고 국토부 장관은 의견서 무시하고 임명하지 않았습니까? 본때를 보여 줄 만했어요.”
“감사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번 전당대회에 출마할 생각 없어요?”
“제가요?”
“지금은 윤 의원 같은 사람이 필요한 시깁니다. 혜안과 그걸 받쳐줄 실천력까지 있는 사람 말입니다.”
“칭찬은 감사합니다만…….”
윤수혁이 말끝을 흐렸다.
갑작스러워서 당황한 것이 아니라, 이미 지명직 최고위원을 약속 받은 상태여서 차마 대답을 못한 것이었다.
속내를 모르는 조성현이 말을 이었다.
“나도 압니다. 처음에 윤 의원을 마냥 좋게만 보진 않았어요. 돈 자랑하는 것 같기도 했고…… 젊어서 치기를 부린다고 생각하기도 했었습니다.”
조성현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윤수혁이 놀랐으리라 여기고, 다독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실용적인 면에서 보고 있자니, 윤 의원 행보가 결국 무른 땅을 다져놓는 결과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압박과 로비도 많았을 텐데 말입니다.”
“위원장님.”
윤수혁이 슬쩍 말을 꺼냈으나, 조성현이 고개를 저었다.
설득을 이어 가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윤수혁이 누군가?
얼굴 마담도 가능한 데다가 돈과 실력까지 있었다.
당에 있는 쓸 만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부류였다.
조금 과장하자면 당을 되살릴 인재.
조성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직입니다, 더 들어 보세요. 지금, 그리고 오는 전당대회가 우리 당을 뒤바꿀 기회입니다. 마침 계파 싸움 하던 핵심 의원들이 탈당했어요. 여기서 다른 다선 의원이 당권을 쥐게 둘 순 없습니다. 견제할 세력이 필요해요.”
“위원장님께서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나는 비대위원장입니다. 당내 반발과 여론의 비난을…….”
반사적으로 나오는 대답.
듣고 있던 윤수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위원장님. 이번에 오는 전당대회가 당을 뒤바꿀 기회라고 말씀하셨잖습니까? 그 정도 비난은 감수하셔야 합니다.”
“이건 도의적인 문젭니다.”
“그 말씀은 실제로 걸고넘어질 게 없다는 뜻이죠. 당헌당규상 비대위원장도 전당대회에 출마가 가능합니다. 친김계가 수정해놓은 거 아닙니까?”
“그렇다 해도…… 전당대회를 진행하고 마무리 할 책임이 있습니다.”
윤수혁이 그 말에 엷게 웃었다.
‘칼잡이가 조용히 쉬시겠다?’
생각을 입안으로 삼키고, 윤수혁이 입을 열었다.
“위원장님, 아무리 말씀하셔도 저는 나갈 생각이 없습니다. 어차피 초선이고, 지역구도 없는 비례대표입니다.”
“……윤 의원.”
“그러니까 위원장님께서 출마하십시오. 위원장님께서 칭찬해 주신 실천력으로 최선을 다해서 보조하겠습니다.”
윤수혁의 단단한 대답.
젊은 의원의 혈기 때문일까? 아니면 생각지도 않았던 제안 때문일까?
조성현은 선뜻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생각은 해 보겠습니다만, 윤 의원도 내 제안 진지하게 생각하세요.”
“물론입니다. 의원님.”
윤수혁이 엷게 미소 지었다.
그건 긍정보다는 기분 좋은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