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22. 결국에 (2)
강남 대형 룸살롱.
장세룡이 새한국당의 중진들과 마주 앉았다.
“분당하고 합당하는 거, 이 바닥에서 흔한 일입니다. 그리고 당장 탈당 하겠다는 게 아니라, 무기로 쓰겠다는 겁니다.”
“그건 좌파들이나…….”
“의원님, 지금 우리당 돌아가는 모습이 어떻습니까? 아직까지도 수사 한다 떠들고, 루머나 슬슬 뿌려 대고…… 이거 다 표적 삼은 겁니다. 진짜 보수를 흔드는 겁니다.”
장세룡이 설명을 늘어놨다.
조금이라도 더 설득하고 속을 흔들어야만 했다.
이미 신경배하고는 쌍욕을 주고받을 정도로 틀어졌고, 얼굴도 마주치지 않는 상황이었다.
단순하게 계파 갈등으로 끝날 리가 없었다.
당권, 당직, 공천…….
모든 것을 두고 아귀다툼을 벌여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탈당은 협박용 카드로 쓰기에는 이미 현실적인 단어가 되어 있었다. 더구나 현실에선 숱하게 많은 정치인들이 갈등과 반목으로 등을 돌렸으며 적이 되곤 했었다.
그사이, 흰 머리의 다선 의원이 대꾸했다.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조성현이도 그렇고, 중도 흉내 낸다는 놈들까지 생겼으니.”
그러나 남은 이들은 쉽게 대답하질 못했다.
아직 줄을 선 게 아니었다.
더구나 막지 못한 언론사에서는 의혹 기사 한 줄, 한 줄을 흘려 보내서 도덕적 흠결을 만들고 있었다.
우성효는 시작에 불과했다.
장세룡계와 친김계 할 것 없이, 리스트에 올랐던 23명의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었다.
그것도 하나하나가 공분을 살만한 내용.
하지만 이 자리에 있던 의원 중에 그 내용을 입에 올리는 이는 없었다.
장세룡 때문이었다.
사학재단과 재벌가문의 뒷배경을 가진 권력자이자, TK의 강력한 지지를 등에 업은 사람.
그랬기에 중진이라도 장세룡은 각별히 신경 써야 했다.
괜히 대립해서 좋을 게 없었다.
“전화 한 통만 하면 창당 작업 들어갈 겁니다. 여기 계신 선배 동료 의원님들은 오셔서 테이프 캇팅만 하시면 됩니다.”
장세룡의 시선을 받은 의원들이 머뭇대다 입을 열었다.
“그래도 탈당이라는 게…….”
“그래요, 쉽게 결정하긴 힘들지요.”
“고 의원 말이 맞아, 아직 김정환 의원님도 암말 없으시지 않나?”
장세룡의 눈이 반짝였다.
바로 김정환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친일 논란 이후 당 활동도, 외부 활동도 거의 안 하고 숨만 쉬는 듯 사는 전 대권 후보.
그의 이름에 빌붙은 친김계라는 파벌 이름이 아직 남아 있었고, 소수였지만 열성적인 지지자들까지 있었다.
중진들이 고려해야 했다.
이에 장세룡이 입을 열었다.
“김정환 의원님이 오신다면 어떻습니까?”
태연한 말.
마치 합의라도 됐거나, 데려올 수 있다는 자신감이 담긴 어조였다.
자리한 이들이 주춤했다.
그중 한 명은 눈치를 살피다가 뒤늦게 대꾸했다.
“괜찮지, 그럼. 김정환 의원님까지 오시면 우리 당도 재기할 수 있지 않겠어?”
“맞아, 그게 정답이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처음 동조했던 다선 의원도 긍정의 대답을 내놨다.
그사이, 중진들은 저마다 계산기를 두드렸다.
바짝 굳은 안색이었다.
내심 속으로 한두 번 생각해 봤던 것이었으나, 지금은 그런 때하고는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눈앞에 닥친 현실이었다.
지역구의 반응을 예상해야 했고, 파벌 싸움과 당내 위치, 당직, 자금 따위를 고려해야 했다.
무엇 하나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끙, 거리는 불편한 소리가 곳곳에서 났다.
앉은 자리에서 정리할 만한 사안이 아닌 문제였다.
의원들의 면면을 보던 장세룡이 슬쩍 입을 열었다. 이미 대강의 성과를 낸 얼굴이었다.
“다들 바쁘시니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아, 2차는 말 해놨으니, 룸 옮기시면 될 겁니다.”
“흠, 고마워요. 장 의원.”
“아닙니다, 여기 마담이 잘 해 주니까 푹 쉬었다 가십시오.”
장세룡이 만족한 얼굴로 일어났다.
머리 굴리던 중진 의원들에게는 가까운 동료 의원들을 붙여 놓을 계획이었다.
친분이 돈독한 이의 말 한 마디에 혹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리고 김정환.
그 이름은 머릿속에서 금방 지워 냈다.
이름값이 남아 있다지만, 지금의 김정환은 대선 후보 사퇴 이후 칩거 생활만 하는 노인네와 다르지 않았다.
그랬기에 접근할 생각조차 없었다.
선거를 코앞에 두고 사퇴한 사람이었고, 일평생 정치하며 만든 모든 것이 무너진 이었다.
한마디로 다 포기한 사람.
일부러 다가가는 수고를 더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친김계 의원 대부분도 손아귀에 쥐고 있으니 크게 필요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김정환이라는 이름은 오늘처럼 중진 의원들을 흔드는 단어로만 쓰면 될 일이었다.
이에 장세룡이 룸살롱을 나올 무렵.
그의 폴더폰이 진동했다.
‘……?’
장세룡이 멈칫했다.
폴더폰 화면에 나온 이름 때문이었다.
[김정환]
방금 전까지 입에 올렸던 바로 그 사람이 아닌가?
장세룡은 당황스런 감정을 빠르게 수습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김정환 의원님, 어쩐 일이십니까?”
- 분당 준비 중이라며?
“아직 그 정도는 아닙니다, 내부 갈등이 워낙 심해서 공포용으로…….”
장세룡이 둘러 댈 때.
- 장 의원.
묘하게 바뀐 어조가 말을 끊었다.
달라진 분위기에 장세룡이 대꾸하지 않자, 김정환이 말을 이었다.
- 가칭은 정했나?
“아직 거기까진…….”
- 보수신당, 어떤가?
태연하다 못해 흥미까지 보이는 어감이었다.
‘이 인간이 왜?’
장세룡이 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입가를 비죽였다.
호재였다.
비록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김정환이 온다면, 중진 의원들 한두 명을 완전히 흔들어 놓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김정환이나 중진을 따르는 의원 몇 명도 끌고 들어오는 게 가능했다.
장세룡은 그런 생각을 감추며 기쁜 척 대답했다.
“가칭으로 차고 넘칩니다.”
- 맘에 든다니 다행이네. 의원들은 어떤가?
예리한 말투.
장세룡은 처음 대꾸했듯 돌려 말하려다가, 얘기를 털어 놨다.
“……교섭단체 성립까지는 가능한데, 그 이상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 내가 손을 보태면 어떤가?
“큰 도움이 될 겁니다.”
- 준비되면 전화 주게, 나도 낙마 꼬리 떼버려야지.
그 말에 장세룡의 미간이 구겨졌다.
정치 은퇴하려던 노인이 맞나?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분당 상태까지 내다보더니, 낙마 꼬리를 떼어 낸다는 말까지 꺼냈다.
뭐가 이 노인을 움직였을까?
장세룡이 대답 대신에 나직하게 물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 있었지, 자네는 몰랐나?
장세룡이 대꾸를 못한 사이.
- 이상한 놈이 하나 있잖아? 그놈 생각이 나는데 당최 쉴 수가 있어야지. 하는 짓 보니까 엉덩이가 가만있질 못해서 장 의원한테 전화한 거야.
이상한 놈?
장세룡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다가 멈췄다.
‘윤수혁.’
이상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건 윤수혁 뿐이었다.
‘김정환이가 왜 윤수혁을……?’
생각이 이어지는 무렵, 폴더폰 너머에서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 내 정치 인생 다 끝난 줄 알았는데 그게 또 아닌 것 같으이.
도대체 윤수혁이 뭘 했다는 걸까?
계파 추스르고 창당 준비와 협상 작업으로 바빴지만, 장세룡도 대강 알긴 했다.
붙여 둔 사람 하나가 동향을 간략하게나마 보고해 왔기 때문이었다.
비록 사적인 내용까지 확인하진 못했지만, 당내 의원과의 접촉이나 공식적인 행보는 어느 정도 아는 것이었다.
‘평상시 하던 짓이나 그대로 하고 있는 놈인데.…… ‘
그러나 잠깐의 생각 끝에 장세룡은 다른 말을 꺼냈다.
“그럼 가까운 시일에 한 번 모시겠습니다.”
차마 왜 윤수혁이냐고 묻진 못했다.
전략통이자 한 계파의 수장으로서 모자란 모습을 보여 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분당하게 되면 당대표로 나설 예정이었다.
굳이 흠이나 약점을 보여 줄 필요는 없었다.
- 그래, 잊지 말고 전화 주게.
“네, 들어가십시오.”
전화를 끊고.
장세룡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윤수혁…… 손을 한 번 보긴 봐야 하는데.’
***
2월 중순.
비대위원회의 결정 사항에 대한 당무위 토의가 끝났다.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급하게 나온 속보 때문이었다.
[새정치당, 신민주당과 합당 가능성 있어]
[새정치당과 신민주당의 합당, 의원들 친정 찾아가나?]
[신민주당 대변인, “아직 금시초문, 확인해야 하는 것들 많아.”]
언론사들이 일제히 보도했다.
여론은 썩 좋지 못했다.
이민수가 표방한 새정치가 다시 구태로 회귀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국민의 새정치 열망.
그게 없었다면 이민수는 당선도 불가능했을 터였다.
아무래도 합당 기사는 새정치당에서 간을 보기위해 흘린 것처럼 보였다.
반응이 나쁜지 보고 부인하면 끝이니까.
어차피 이뤄질 일도 아니었다.
과거에도 창당한 다음부터 합당 없이 밀고 나갔던 이가 이민수였고, 새정치당이었다.
그리고 새정치당에 있는 의원들이 어디 보통인가?
계파 싸움에 도가 튼 이들이었다. 순순히 꼬랑지 말고 신민주당에 복귀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새한국당은…….
국민 여론과 별개로 혼자서 바짝 쫀 모양새가 됐다.
여소야대 형국에서 여(如)가 소(小)가 아닌 중(中)이 될 것을 염려했는지, 당무위에서 예상외의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었다.
[당무위 공지 : 제1~5 정책조정위원장 및 시도당위원장 최고위원회에 의견 권고할 수 있게 권한 확대]
[당협위원회 월별 업무 보고 시행 - 안내사항 공문 참조]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공지사항이 의원들 단체 카톡과 문자로 전달되었다.
비대위의 결과를 일부 수용한 것이었다.
그래도 전당대회 언급은 없었다.
재원 마련과 전당대회 방안 구성을 핑계로 일단 보류라는 딱지를 붙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류는 듣기 좋은 말이었고, 실상 폐기된 제안이었다.
그렇게 흘러갈 줄 알았는데.
며칠 만에 기사가 또 터졌다.
[새한국당 의원 18명 무더기 기소]
[검찰 차기 정권 눈치, 새한국당 죽이기 나서나?]
[조성현, “죄 지으면 벌 받는 것은 당연, 나도 죄 짓는다면 자발적으로 검찰에 출두할 것.”]
무더기 기소 사태.
어차피 임시회 회기 중이니 구속얘기는 나오지 않았지만, 여론의 질타를 피할 순 없었다.
한숨과 함께 헛웃음이 나왔다.
중구난방이었다.
일련의 사태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원체 정가(政街)가 복잡하고 어지럽긴 했지만, 그 한가운데 있자니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새정치당의 합당 간보기.
새한국당 당무위의 쉐도우 복싱.
마지막으로 무더기 기소까지.
플러스 알파로 개인적인 일이 더해지면 완벽한 ‘노답‘이었다.
나야 형 문제가 주 변호사를 통해 얼추 해결되긴 했지만, 가족 문제나 개인 고충을 껴안은 다른 의원들은 혼란하기 그지없을 것이었다.
우스웠다.
이래서 판 컨트롤이나 할 수 있을까?
유망한 정치가들이 이 바닥에서 코 깨지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정세가 시시각각 변하는 데다가 온갖 일이 다 터지니, 실수해서 엇박으로 나자빠지는 것이었다.
이 판이 보통 개판이어야지.
그렇게 복잡한 나날이 새정부 구성과 함께 대강 흘러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새로운 폭탄이 떨어졌다.
대통령의 취임식 이후.
새정부 인선과 정책에 관한 이슈를 전부 집어 삼킬 만한 사이즈의 일이 생겼다.
나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일이 생각보다 빨랐다.
그리고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