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21. 폭풍 (5)
“서울동부지검 손기택 차장검사라고 있습니다.”
- 갑자기 웬 검사야?
안 고문이 궁금하단 듯 물어 왔으나, 당장 하나하나 설명해 줄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풀어 놓기에는 너무 중요한 정보이기도 했고.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그 사람 평판만 좀 알아 봐 주세요. 깊게 파실 필요는 없구요, 겉핥기면 됩니다.”
- 또 무슨 일을 하려고, 흐흐흐흐.
“때 봐서 말씀드릴게요.”
- 알겠네, 이왕 전화 한 김에 다른 건 없나?
“아, 하나 여쭐 게 있긴 합니다.”
- 뭔데?
“저희 형은 어떻습니까?”
- 회사 잘 다니지. 그건 왜? 자네 귀에 무슨 얘기 들어갔어?
“그냥 감이 좀 그래서요, 한 번 제대로 좀 확인해 주세요.”
안 고문에게서, 부모님에게서 형의 소식을 종종 듣긴 했었다.
그래도 그게 전부였다.
내가 사람을 맘대로 조종할 순 없었으니.
보좌진이나 대화투자자문 회사 직원들에게 하듯 언질만 줄 뿐.
확인만 하고, 놔두기만 했었다.
단지 별로 친하지 않은 형이라 간섭없이 풀어 둔 것이었고.
안 고문이 금세 대답해 왔다.
- 그래, 내가 확인하고 연락 주겠네.
“고맙습니다.”
- 고맙기는, 최고위원 되실 분인데. 흐흐흐흐.
안 고문의 웃음소리에 나도 모르게 픽하고 웃고 말았다.
그의 정치욕과 일에 대한 집념.
그 모든 게 그의 웃음소리에서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안 고문의 기대를 살짝 부추겨 줄까?
어차피 그의 기대를 실현하는 날이 얼마 안 남기도 했으니까.
“조만간 중앙 정계에 복귀하실 겁니다.”
- 듣기만 해도 설레는 구만.
“원하시는 자리 생각해 두고 계세요, 비슷한 걸로 맞춰드리겠습니다.”
- 노골적이니 더 좋네, 하하하하, 기대하고 있겠네.
“준비해 두세요.”
월요회라는 대어가 곧 내 손아귀에 들어올 것이었다.
들어오지 않는다 해도 최고위원 자리를 갖게 될 예정이었고.
* * *
의원회관 지하1층.
석재로 마감된 복도를 걷던 중, 신경배가 고개를 들었다.
‘국회의원전용 건강관리실’
금색의 철제 팻말에 음각된 글자를 확인하고, 그가 큼직한 유리문을 밀었다.
어색한 듯 헛기침을 한 신경배가 주섬주섬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이른 시간.
사람은 별로 없었다.
목욕탕과 사우나, 헬스장, 수면실 따위가 몰린 일종의 종합시설이어서 규모가 상당히 큰 탓이었다.
그중 신경배는 벌게 벗고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습하고 미적지근한 공기에 신경배가 안경을 잠깐 벗었고, 다시금 천천히 쓰면서 온탕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안경을 고쳐 쓴 그가 온탕을 쳐다봤다.
사람 한 명의 머리가 떠 있었다.
“조 의원.”
“……어, 신경배 의원님.”
턱밑까지 몸을 담그고 있던 조성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탕의 물이 넘실거렸고, 신경배가 손을 저으며 엷게 웃었다.
“앉아, 앉아. 나도 들어갈 거야.”
신경배가 그러면서 조성현의 근처에 앉았다.
“……목욕탕에서는 처음 뵙는 것 같습니다.”
“맞어, 개관할 때 구경하고 오늘 처음이지.”
“아, 그럼 오늘은…….”
조성현이 자세를 바로 앉으며 신경배를 쳐다봤다.
신경배가 자신을 부를 때부터 낌새를 직감한 것이었다.
이 넓은 목욕탕, 그리고 이른 시각.
거기다 오지도 않다가 처음 온 신경배.
전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 따로 할 얘기가 있어서 왔네.”
“의원실로 부르지 그러십니까?”
“요새 자네 끌어내리네, 마네, 난리들 피는데 어떻게 불러? 내가 만나러 갈 수도 없잖아?”
“그렇군요.”
조성현이 나직하게 대꾸했다.
당내가 이미 개판오분전이었다.
정확히는 구경꾼과 일부의 난동꾼으로 시끄러운 판국.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생각 외로 많은 의원들이 일단 간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역성을 들 만한 의원들이 공식 성명뿐만 아니라, SNS를 통해 개인적인 비난까지 일삼고 있는 것에 비하면 상당히 괜찮은 상황이었다.
그사이 신경배가 입을 열었다.
“자네 약속은 기억나나?”
“당 내 구조 개혁, 쇄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거.”
“재작년 전부터 준비했었습니다, 어떻게 그걸 모르겠습니까?”
“그럼 해.”
“네?”
“장세룡이는 제 사람들도 난리에 섞여 들어갔으니까 반대 하겠지만, 난 아니잖아?”
“…….”
조성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장세룡이나 신경배나 매 한가지였다.
계파 싸움의 한복판에 있는 이들이었고, 효율적인 정치보다는 세력 유지와 확장에 신경 쓰는 사람들이었다.
원래라면 만나지도 않았고, 은밀한 약속 같은 것도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개혁의 첫 단추를 꿸 수 있는 비대위원장 자리를 약속했고, 그게 싫다고 해도 신경배는 선수(選數) 우대를 해 줘야 했다.
그래서 기본은 지키며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사이, 신경배가 말을 이었다.
“계속해, 공세 멈추지도 말고. 내 사람들은 내가 다독일 거야. 자네 비대위원장 자리도 유지하게 도와주지.”
“그럼 당헌당규도 손볼 수 있게 도와주실 겁니까?”
“그것까진 모르지. 노력은 해 보겠지만, 의결정족수 과반이 찬성해야 손보는 일이야.”
“당무위는……?”
“당무위도 같은 사정 아닌가? 위원장 말 듣긴 해야 하지만, 거기도 입장이 저마다 다르니.”
신경배가 굳은 표정의 조성현을 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마치 기회라도 주는 듯.
“말이라도 해 봐, 내가 도와줄만한 건 도와줄게. 자네가 위원장자리 잃는 일은 없을 거야.”
계속해서 비대위원장의 권한을 준다는 뜻.
이는 전당대회 방식이나 최고위원회 구성 등을 손볼 수도 있다는 말기도 했다.
이에 조성현이 입을 열었다.
“그럼 당대표 선거와 최고위원 선거 먼저 분리할 겁니다.”
기존의 전당대회를 단순히 두 개로 나눈다는 뜻이 아니었다.
1등이 당대표, 2등부터 5등이 최고위원이 되는 기존의 선거 방식을 싹 바꾸겠다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당대표 선거에서 1등만 살아남는다는 의미.
그리고 최고위원은 따로 선거를 치러서 선출하겠다는 말이었다.
신경배는 조성현의 의도를 단번에 이해했다.
“최고위원들 힘 빼겠다는 소리지?”
당대표 다음으로 힘이 센 최고위원들의 계파를 무력화시키겠다는 말이었다.
“네, 지금 전당대회는 권력 갈라먹는 꼴입니다.”
“그래, 최고위원을 따로 뽑는 건 괜찮은 소리 같네. 당무위도 그런 건 통과시킬거야, 당 쇄신 작업이잖아?”
긍정적인 대답에 조성현이 잠깐의 생각 끝에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최고위원회 인원도 늘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
“정조위원장들, 아니면 시도당위원장들이 있어야 합니다. 중진 위주의 계파가 해체되기 쉬울 겁니다.”
“고작 재선들한테?”
신경배의 말대로 정책조정위원장과 시도당위원장은 대부분이 재선이었다.
간혹 3선이나 초선이 있긴 했으나, 주는 재선이었다.
그 중에는 운이 좋거나 실력이 좋거나, 연줄이 뒤따른 케이스들이 있었고.
한마디로 신경배가 보기에는 아직 미숙한 존재들.
“그 안에서도 계파가 만들어 질텐데?”
“동등한 발언권을 주면 됩니다.”
“그런다고 동등한 것처럼 느낄 것 같아? 사람 속내가 그렇지 않을 텐데.”
“해 보지 않고는 모릅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근데 당무위는 나랑 생각이 같을 텐데. 통과가 될는지 모르겠네.”
“……그래도 강행하겠습니다.”
“위원장이면 그럴 거 같았어, 그래도 더 도와주긴 힘들어.”
“괜찮습니다.”
조성현이 대답한 뒤, 시선을 들던 신경배가 슬쩍 입을 열었다.
“아휴, 나는 이제 가봐야겠어.”
동시에 신경배의 시선이 목욕탕 유리문 쪽으로 향했다.
사람 몇이 들어오고 있었다.
“위원장, 힘내. 이 정도 예상하고 일 벌였을 거 아니야?”
“네, 들어가십시오.”
조성현이 예의 있게 인사하자, 신경배가 히죽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기가 떨어지고.
그의 늙고 처진 몸이 욕탕을 넘어 유리문으로 향했다.
조성현은 그의 팔자 걸음걸이를 보면서 눈을 좁혔다.
‘저 사람도 끝내 쳐 내야 한다. 그게 어렵다면 파벌이라도…….’
* * *
2013년 1월 초.
조 의원의 비대위원장 사퇴를 연기하거나 막기 위해 준비 중이었는데, 그럴 필요가 사라졌다.
사퇴 표결이 부결되었기 때문이었다.
신 의원이 움직인 모양이었다.
부결을 만들어 낸 비대위원들을 보니 감이 왔다.
중도나 타 계파가 꽂은 비대위원들이 오락가락하긴 했지만, 그 와중에 장 의원 쪽은 전부 사퇴에 찬성했었다.
그렇게 보자면 결론은 하나.
신 의원과 장 의원의 합의가 깨졌다는 것.
둘이 반목하는 게 분명했다.
내부 사정이나 이유까지 알긴 힘들겠으나, 결과가 그랬다.
그 와중에 조 의원의 입에서 나왔다는 회의기록문은 헛웃음이 나오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당 대표와 최고위원 선거를 분리해야 합니다.]
[정조위원장들이나 시도당 위원장들을 최고위원회에 참석시켜야 합니다.]
[중앙당사와 당협위원회도 최고위원회에 정기적으로 업무 보고를 해야 합니다.]
정기 업무 보고 정도는 충분해 보였다.
그러나 나머지는 쉽지 않았다.
이중에 통과할 만한 게 있을까?
일단 신 의원 같은 당대표 급이라면 몰라도, 최고위원들이 선거 분리를 원할 것 같진 않았다.
당대표 선출 선거에서 밀려 최고위원이 됐다는 면피용 구실이 날아가는 셈이니까.
그리고 당대표 선거라는 공통의 분모.
차기 대권후보, 혹은 당의 주인을 노리는 당내의 경쟁.
거기서 선출되는 게 당대표였고, 최고위원은 그 선거에서 밀려난 사람들이었다.
그런 면에서 1등에서 5등까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했다.
하지만 선거가 나뉘게 된다면.
최고위원은 그저 당의 지도부로만 남을 것이었다.
대권 후보라는 타이틀에서 멀어지고, 당대표만이 이름값을 하게 될 확률이 컸다.
이게 바뀌긴 힘들어 보였다.
내가 죽기 전에도 시행된 적이 없던 것이었다.
야당은 했었지만, 어쨌든 새한국당의 당헌 당규는 그저 주요 당직을 손보는 정도로만 그쳤었다.
그 외에는 없었다.
그렇게 회의기록문을 내려놓는데, 기다렸던 전화가 걸려왔다.
[안순익 고문]
스마트폰 화면을 확인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어, 윤 의원. 통화 가능한가?
“말씀하세요.”
- 동부지검 손기택 말이야.
“아, 예.”
- 그 사람 라인이 영 꼬였던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 학벌도 서울대가 아니야. 임관한 뒤에는 여태 지방 전전하다가 간신히 동부지검으로 들어왔더만. 요 전에는 제주지검에도 있었고.
“소문 같은 건 없습니까?”
- 실력은 좋대, 눈치도 빠르고.
그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직접 만나서 느낀 내 감과 비슷했다. 손 차장은 최소한 보통 이상이었다.
월요회라는 자리에 들어갈 정도면 널리고 널린 공무원하곤 다르겠지.
안 고문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 하여튼 대단하더만, 차장까지 달았으니. 평검사든 부장이든, 오래 못 가고 떨어지는 게 검찰이잖은가? 라인 없으면 차장 이상은 꿈도 못 꾸고.
“거기도 계파 싸움이 심하긴 하죠.”
구체적인 사정은 몰라도 어깨너머로 들은 얘기가 있긴 했다.
그리고 손 차장도 검찰 라인이라는 단어를 스스로 꺼내지 않았던가?
- 그래, 이게 대충 듣기만 한 건데. 더 궁금한가?
“아닙니다.”
여기서 더 깊게 팔 필요는 없었다.
상대가 차장 검사였다.
들켜서 괜히 호박씨 깐다는 의심을 심어 줄 필요는 없었다.
- 참, 윤 의원.
“예.”
- 윤재혁이 그 친구. 조금 애매하던데, 윤 의원이 직접 만나 보지그래?
“애매하다니요?”
- 버는 돈보다 씀씀이가 더 커. 국세청이나 세무서가 움직이지 않은 거 보니까, 아직 심한 것 같진 않은데…… 윤 의원이 단도리는 쳐 놔야 할 것 같네.
“……예상하시는 게 있습니까?”
- 예상? 흠…… 윤 의원이 돈 받는 걸 도와줬을 린 없을 거 아냐?
“예.”
- 그럼 윤 의원한테 갈 돈을 꿀꺽 했다던가, 아니면 이름 팔아서 받았겠지. 그것도 아니면…… 윤재혁이한테 다이렉트로 줬겠지.
“알겠습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 그래, 그리고…… 자리 있잖아?
“예.”
- 이왕이면 문화 쪽으로 챙겨줘, 장관도 문화부 몇 개월 했고, 내가 책도 썼잖은가?
피식 웃음이 났다.
이 와중에 책 쓴 얘기랑 문화랑 엮다니.
단순 후원금 모금을 목적으로 책을 쓴 게 아니라, 진심을 다 해서 쓴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 그래, 고맙네. 그럼 계속 수고해 주게.
“예, 고문님도요.”
전화를 끊은 뒤.
바로 형에게 문자를 보냈다.
[형 얼굴 좀 보자]